괴군의 손길 (1)
휘이이이이―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괴군과 함께 원립의 성 앞에 도달해 있었다.
‘…뭔가 너무 허탈하군.’
송진의 힘을 떠올려 보면.
송진을 살해한 괴군이 이대로 손을 후려치기만 해도, 원립은 저 성 채로 으스러져 박살이 날 터였다.
[저 안에, 저놈이 있다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 성 밑에 막대한 원혼이 깔려 있군. 네 말이 헛되지 않아.]
괴군은 웅얼거리며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마구 잘근거리더니, 저물법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괴군이 저물법기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돌 인형이었다.
돌하르방 같은, 작은 석상이었다.
그리고, 괴군이 그 석상을 흑색의 성에 집어 던졌을 때였다.
우우우웅!
석상이, 점차 거대해졌다.
점차 부풀어 오르며, 크기를 키우던 석상은.
어느덧 산맥만 하게 거대해졌고, 산맥 크기의 석상이, 조그마한 흑색의 성에게 떨어졌다.
쩌어어어엉!
천지가 울리는 듯하다.
흑색의 성의 방어결계가 작동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고, 석상은 그대로 계속 떨어져, 흑색의 성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성의 가장 윗부분부터가 석상의 밑동에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한 피 구름이 새어나오며 석상을 막아선다.
[선배님! 어떤 분이신지 모르나, 어찌 이 상서로운 시기에 비승에 참여도 못 한 후배를 괴롭히시나이까!]
그리고, 괴군이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세계에 받아들여 훌륭한 새사람으로 재탄생시켜 주마. 너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 될 것이야.]
그 말에, 원립이 질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괴군! 이 미치광이가…!]
[나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나는 예술가다. [그녀]가 내게 그랬어. 나는 예술가이니라.]
괴군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손가락을 잘근거리며 말했고, 원립은 상대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는지, 안간힘을 다해 피 구름을 불러 괴군의 석상을 막아 내려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음?]
쿠구구구구구!
저 멀리서, 시퍼런 빛무리가 미친 듯이 이곳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하늘을 굽이치는 강줄기 같아 보이는, 신령스러운 모습을 한 존재.
해룡왕 서휼이었다.
“괴군 노야, 갑자기 이런 상서로운 시기에 어린 후배를 핍박하십니까?”
파아아앗!
나와 괴군의 앞에서 인간형으로 변한 서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그의 손에 푸른빛이 감돌았고, 괴군이 꺼낸 석상이, 허공으로 천천히 들어 올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립이 밑쪽에서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괴군 노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시면, 이 상서로운 시기에 이러지 마시고….”
그리고, 괴군은 서휼의 말을 무시하고는 나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지렁이 같은 놈은 내가 뱀탕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너는 그동안 네 [그녀]의 원수를 갚아라.]
“…예, 감사합니다.”
서휼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이런, 도우는… 특이한 공법을 익힌 것 같은데. 싸움이 아니라 대화로 해결을 하는 것이….”
그리고, 괴군이 눈을 번들거리며 품속에서 자신의 몸만 한 상자를 꺼내 들고, 상자의 뚜껑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가리 닥쳐라, 이 파란 지렁이 놈아. 오늘 네놈으로 뱀술을 담가 그녀와 마시겠다.]
“이런…!”
서휼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피했고, 괴군의 상자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나는 괴군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바로 밑으로 쏘아져 내려갔다.
쿠웅!
‘지난번에 박살 내자마자 다시 오는 것 같군….’
기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흑색의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원립.
[자네는 누군가? 혹시 괴군의 지인… 인 건가? 그렇다면 저 분을 조금….]
“흠….”
나는 흑색의 성 안쪽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피 냄새가 진했다.
쿠구구구구!
위쪽에서는 천인기 수도자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듯,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사실, 넌 내 원수는 아니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이 녀석은 대학살을 일으키기 전이었다.
그러니, 아직 녀석은 내 원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원립을 노려보았다.
곳곳에서 풍겨오는 피 냄새.
그리고 흑색의 성 아래쪽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원혼들.
놈이 수백 년 동안 암약하며 모아 왔다는 장원진력들.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렇지만… 원수가 아니더라도, 네놈은 죽어야 할 놈 같군.”
[뭐…?]
나는 무색유리검을 뽑아들었다.
“죽어라.”
쩌어엉!
놈이 반응할 틈도 없이, 내가 놈에게 달려들었다.
[크학!]
단순한 몸통박치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녀석의 배에 바로 구멍이 뚫렸다.
[이, 이놈…!]
원립이 보탑 법보를 꺼내고, 다른 법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을 향해 무형검을 늘어뜨려 휘둘렀다.
푸콱!
모든 법보와 방어법술을 무시하고, 무형검이 녀석의 몸을 그대로 갈랐다.
“어…?”
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설명해 주지 않고.
그대로 놈의 몸을 향해 수십 번의 참격을 휘둘렀다.
촤라라락!
놈이 삽시간에 전신이 찢겨 나가며 피 안개가 되었다.
“죽어라.”
푸콰과곽!
여우가 내 팔을 뜯어먹었던 것은, 내 안에 단단한 분노로 자리 잡았었다.
때문에 여우를 상대했던 지난 삶에서는, 녀석을 상대하며 분노하고, 크게 날뛰었다.
하지만, 그녀를 죽인 원립에 대한 내 감정은, 증오였다. 분노보다 더욱 더 농축되고, 끈적한 악의.
오히려 더욱 더 밀집되었기에, 내 악의는 여우 때처럼 흥분해서 쉽게 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형검을 휘두르며, 시종일관 원립의 방어를 뚫고 놈을 회쳤고, 놈의 공격들을 피했다.
아니, 피할 필요조차 없었다.
촤락!
그저, 법술의 연결 고리가 되는 최중요 부위만 제외하고, 다른 부위는 전부 투과시켜 버린 후 베어 내면 그대로 놈의 법술이 해체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네놈은 뭐냐!]
원립이 당황하며 나를 더더욱 몰아붙였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놈의 법술들을 피했다.
이전과는, 가속할 수 있는 속도의 범위가 달라졌다.
파츠츳!
나는 녀석의 법술들을 피한 후.
그대로 놈에게 접근해, 무형검을 내리그었다.
무형검은 쓸데없는 것들을 베지 않고 투과한 후.
원립의 금단만을 그대로 베어 내 버렸다.
[…!]
놈이 고통에 떨었다.
우우웅!
녀석이 수결을 맺자, 피 구름이 흘러오며 놈의 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베어 낸 금단을 다시 재생하기 시작했다.
하나.
“계속 재생해라.”
촤악, 촤라락!
나는 금단이 다시 재생되자, 다시금 무형검을 휘둘러 녀석의 금단을 잘라 냈다.
“몇 번이고 베어 내 주마.”
촤락, 촤라락!
“답천사막 인근에 뿌려 둔 혈영들을 찾으러 갈 틈도 없을 거다.”
내 말에, 놈은 흠칫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왜 네가 내 혈영들을 알고 있는 거지?]
“알 것 없다.”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놈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놈…. 그래, 일단 같은 원영기 수도자라 상정하고 대응해 주마…!]
우우웅!
놈이 녀석의 법보와 귀왕들을 불러내었다.
삽시간에 4 대 1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어째….’
왜, 하나도 부담되지 않지?
힘이나 체급의 문제가 아니었다.
적의 의념이, 더더욱 생생히.
더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의식 영역으로 공간이 뒤덮였다고 해도 마찬가지.
그 안쪽에서, 원립의 의도가 훤히 읽히는 것 같다.
부웅, 붕, 붕, 붕!
혈운의 귀왕이 내게 낫을 휘둘렀다.
천, 지, 사방.
여섯 군데에서 귀왕들의 참격이 쇄도한다.
하지만, 나는 잠시 무의 흐름에 몸을 맡긴 후, 그대로 한 점을 향해 돌진했다.
파앙!
전신에 무형검이 깃든 채로, 나는 그렇게 가장 약한 부분의 참격을 박살 내고 뚫고 나왔다.
괴이의 요혼이 내게 달려든다.
녀석이 꼬리 같은 부분으로 나를 휩쓸어 왔다.
분명 맞으면 한 줌 육편이 될 일격.
하나….
‘맞을 것 같지가 않군.’
나는 요혼의 공격을 피하고, 다시금 양 옆에서 나를 공격하는 귀왕들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 후.
부웅!
멀리서 법술을 날리는 원립에게 무형검을 날렸다.
원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하는 듯했으나.
촤라락!
무형검은 다시금 궤적을 변화시키며 원립의 몸을 꿰뚫었다.
[…!]
녀석이 다시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방금의 공격으로 쪼개진 금단에 자신이 모아 온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금단을 회복시켰다.
[그렇군. 네놈, 계위를 넘나드는 공격을 하는구나. 단순히 원하는 것만 베는 게 아니라 계위의 높낮이를 조정하는 것이라면…. 원영기 수도자들에게는 그보다 흉악한 공격이 있을 수 없겠어.]
원립은 씹어뱉듯이 뭐라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요혼과 귀왕들의 공격을 피하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정말.
아직 대학살을 벌여, 혈영을 회수하기 이전의 녀석은, 정말로 약했다.
200년 후의 그 녀석과 비교하면, 같은 대상이라고 하는 게 미안할 지경.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나를 막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부웅, 부웅!
놈이 내게 은밀한 법술을 날려 보냈다.
월수궁무록도 아닐진데, 상당히 인지하기가 힘든 일격.
하지만, 나는 답천경에 이른 기묘한 감각으로 녀석의 법술을 그대로 잘라 내고, 놈에게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리고, 원립이 움찔거렸다.
[너… 지금, 계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알고 자른 게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자른 거냐?]
놈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놈은 뭐냐. 뭐냔 말이다! 제길, 저리 가라!]
콰앙, 콰앙, 콰앙!
나는 놈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아직도 순수한 체급으로는 내가 놈보다 약했다.
하지만, 답천경의 공능으로 얻은 무형검의 진정한 힘.
원하는 것을 베는 이 힘 앞에, 녀석의 법술들은 너무나도 쉽게 쪼개졌다.
단단한 부위는 투과하고, 연약하나 주요한 부위들만 파악해 베어 내면 되니까.
아무리 방어를 해도 소용 없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소용 없다.
부웅!
콰강!
내 무형검이 다시금 놈의 금단을 베어 내며 후려쳤고, 놈이 피를 토하며 뒤쪽으로 날아갔다.
[너…! 계위가 뭔지 감도 못 잡는다면 원영기 수도자가 아닐 터! 그런데, 도대체 계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건 뭐냐!]
“한 가지 묻지.”
나는 놈의 앞에 다가가며 물었다.
“삶이란, 축복인가. 저주인가.”
[뭐…?]
놈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스르릉―
나는 무형검을 놈에게 겨눴다.
“너와 싸우면서, 점차 감을 잡고 있다. 아까부터 금단만을 공격하고 있지만, 감각을 집중하면….”
모든 물리적 방어를 뚫고, 그대로 가장 중요한 부분.
혼(魂)을 베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얼마나 재생하든 상관 없이, 널 죽일 수 있다.”
[…!]
200년 후의 원립과.
아니, 대학살 이후의 원립과 비교하면, 너무나.
너무나도 허약하다.
흑색의 성이 성 안쪽에서 결단 대원만이 원영 초기에 해당하는 힘을 가지게 해 준다 할지언정.
‘법술의 위력만을 증폭시킬 뿐, 원영을 만들어 주진 않는 것 같군.’
원영을 품었을 때와, 지금의 녀석은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났다.
물론, 어쨌든 본래 원영기 수도자였다는 것이 허언은 아닌 듯.
놈은 내가 무형검에 집중한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계위를 극한으로 올렸군. 하하, 말 그대로 영혼도 베어 낼 수 있겠어.]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라.”
나는 무표정하게 원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삶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흐, 당연한 걸 묻느냐?]
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막대한 축복이지! 이 육신을 얻어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느냐? 삶이 축복이고,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다!]
“…그런가.”
지난 생의 원립에게도 제대로 묻고 싶었으나, 분노에 눈이 돌아갔던 상황인지라 제대로 묻지 못하였다.
[왜 그딴 걸 묻는 거지? 너는 거꾸로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냐?]
“…한때 그랬다.”
[뭐?]
놈은 나를 미치광이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알았다. 둘 다 아니야.”
[…?]
그리고, 원립은 내가 아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삶도 죽음도 축복과 저주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너를 보며 확신했다. 너는 최소한,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진 않군.”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개소리라니.”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헛소리를 계속 하게 해서라도, 촌각이라도 더 살고 싶은 게 네 본심이 아니었나?”
[….]
녀석의 가면 뒤쪽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럼 잘 가라. 다시 보고 싶진 않을 거다.”
[잠깐! 이, 이 봐. 진정해라. 우선 왜 나를 죽이는지 그것부터 설명해 주지 않겠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네놈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 죽인다는 것부터 조금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만….]
“이해라….”
나는 흑색의 성 곳곳에서 나는 비릿한 혈향.
그것의 근원들을 가리켰다.
“너는, 네가 죽여 온 이들의 이해를 바라고 죽여 왔나? 비참하게 남을 짓밟을 생각을 했으면, 자기도 그리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하지 않겠나?”
[잠깐, 잠깐! 이봐. 그래.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나?]
“저들도 너와 아무 사이 아니었겠지.”
[그, 그러지 마라! 아, 안 돼! 살려 줘! 죽기 싫다! 제발!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지 아느냐? 제발, 제발 날 죽이지 말아라!]
“그걸 아는 놈이 타인의 삶을 도둑질해 왔나?”
나는, 그대로 무형검을 내리쳤다.
[안돼! 안돼! 안돼에에에!]
슈칵!
내 무형검은, 그대로 원립의 머리를 투과해서, 놈의 혼백을 쪼개어 버렸다.
녀석은, 그렇게 혈영조차 회수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파스스스….
원립이 죽자, 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가면 역시 부스러졌다.
원립의 얼굴은, 아무것도 없는 무면이었다.
놈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나.
사람들을 잡아먹고, 육신을 합성해 대며, 제 얼굴조차 잃어버린 이 괴물이, 그 누구와 마음을 이어 보았겠는가.
마음이 없는 일생을 보낸 이자에게, 삶은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이렇게 간절하게 갈구해야 했던 것일까.
‘딱히 알고 싶지는 않군.’
난 원립의 수급을 잘라, 흑색의 성 바깥으로 나갔다.
성 바깥에선, 괴군과 서휼.
그리고 서휼 주변으로 이전 생에 보았던 면면들이 포진하고 괴군을 포위하고 있는 중이었다.
“괴군 노야, 진정하시고 말씀을 들어 보시지요.”
[닥쳐라, 이 사갈 같은 놈. 나를 막아서지 마라.]
“노야께서….”
그리고, 서휼의 시선이 문득 나를 향했다.
나는 서휼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고는 원립의 수급을 들어 올렸다.
“….”
싸아아아아―
갑자기, 춥다.
서휼은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마치 심해 속에 알몸으로 던져진 것 같은 추위가 나를 덮쳐 왔다.
‘어떤가, 서휼.’
서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놈의 의념과 심상을 읽으며, 그 어떤 때보다 더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괴군 역시, 서휼의 시시각각 변하는 의념을 읽은 것인지 미친 듯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저 놈이 한 짓이 썩 거슬렸나 보구나? 그렇지? 이 사갈 놈아, 또 무슨 흉계를 꾸민 게야? 응?]
잠시 나를 보며 말없이 웃던 서휼은, 괴군을 보며 말했다.
“…별 일은 아닙니다. 그냥, 인족 중에도 좋은 싹수가 보이는 후배가 있으니, 종족을 떠나 수도계의 선배로서 흡족할 따름이지요.”
“…?”
나는 서휼의 의념을 읽으며, 그가 의외로 선선히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읽었다.
‘왜지?’
원립은 놈한테 중요한 게 아니었나?
내가 고민할 때였다.
파앗!
서휼이, 어느새 순식간에 내 눈앞에 도착해 서 있었다.
‘이 자, 방금 공간을 뛰어넘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순간 공간이 열린 것을 인지했다.
서휼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원립은, 한때 본 해룡족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을 살해한 마두로, 본왕이 훈계를 했던 자이기도 하네. 하지만 그 저열한 본성을 못 버리고 수많은 학살극을 저지른 모양이니, 자네가 진정 제대로 그를 교육해 주었군.”
“….”
이 자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이지?
서휼은 나를 싱긋 웃었다.
“본 왕은 그만 가겠네만. 아무래도 괴군 노야가 자네에게 흥미를 가진 듯하니 조심하게. 괴군 노야는 자신이 흥미를 가진 이를, 자신의 세계에 받아들인다며 생체 괴뢰로 개조하는 미치광이이니….”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준 서휼은 다시금 허공으로 날아올라, 푸른 둔광과 함께 등선향으로 떠났다.
괴군을 포위했던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 역시, 그를 노려보다가 등선향 쪽으로 향하였다.
지난번에는 등선향에서 힘을 썼던지라, 등선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연행이 되었던 그였으나.
이번에는 답천사막에서 힘을 쓴 탓인지 딱히 그를 나무라는 이가 없었다.
[흐하하, 그나저나 이 성은….]
괴군은 천인기 수도자들이 가자, 흑색의 성으로 내려와 성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선보(仙寶)의 일종이군. 운명의 인력이 담겨 있어. 어디 보자….]
그는 흑색의 성 이곳저곳을 뜯어보더니, 갑자기 흑색의 성의 한 곳을 무너뜨렸다.
[찾았군. 이게 인력의 근원인가?]
나는 슬쩍 괴군이 무너뜨린 곳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뭔가 빛나는 돌덩어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괴군이 그것을 흥미롭게 관찰할 때.
나는, 우선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서휼이 마음에 안 드는 자이긴 하지만, 그 말은 맞는 말이지.’
괴군은 정말로 미친 자였고, 괜히 그의 옆에 붙어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해부당하거나, 꼭두각시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괴군의 곁을 떠나, 무형검을 통해 답천사막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나는 회귀한 지 첫날도 채 되지 않아.
답천사막 대학살의 근원인 원립을 격살하고, 괴군에게서 벗어났다.
그렇게 이번 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어딜 그렇게 가느냐?]
오싹!
위이이이잉!
마치, 벌의 날개 같은 날개가 달린, 곱사등이 형태의 괴뢰가, 어느새 내 옆에 날갯짓을 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은근히 괴군을 닮은 그 괴뢰에선, 괴군의 목소리가 똑같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했구나. 네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동을 받아 그녀와 상의해 보았다. 네 복수를 도와주고, 너를 우리 세계에 받아들여 주자고 합의가 끝났다.]
위이이이잉!
[걱정 마라, 너를 더 우월한 존재로 진화시켜 주려는 것이다. 일단 잠시 가만히 있어 보려무나.]
‘이런 미친!’
나는 대뜸 손에서 톱날을 꺼내서 내게 휘두르는, 괴군의 괴뢰를 피했다.
[음? 왜 피하지? 왜 피하지? 왜 피하지?]
그리고, 괴군의 괴뢰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괴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 더우월한존재로진화시켜주겠다는데?네놈네놈네놈네놈….]
우우우웅!
괴뢰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 거부하면 어쩔 수 없다. 강제로 잡아가더라도, 너를 진화시켜 주도록 하마.]
쿠구구구!
괴뢰에게서, 원영 초기 수준의 기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내가 괴군에게서 도망쳤던 지평선.
그곳에서부터, 이 괴뢰와 똑같거나, 더욱더 강한 기운을 가진 괴뢰들 몇 기가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잡히면, 개조당한다!’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괴군의 손길을 피해 미친 듯이 답천사막을 주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