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밟아온 것 (16)
놈이 쌓은 수도의 근원.
금단(金丹).
일반적인 신체야, 놈이 익힌 그 특유의 마공으로 재생한다고 쳐도.
수행의 근원인 금단만큼은, 쪼개지면 대량의 생명력을 머금은 피 구름을 먹여야 재생이 된다.
그리고, 내 무형검은 원립의 방어막을 투과해,
놈의 몸을 통과해, 그대로 놈의 금단을 내리찍었다.
“아….”
처음.
놈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놈이, 무슨 일이 일어난지 이해한 표정.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녀석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무형검을 휘둘렀다.
촤락!
무형검은 이번에는 금단마저 투과하고 지나가, 그대로 놈의 원영을 베어 낸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악!”
놈이, 세상에 없을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피식, 피시식….
아무리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법보든 뭐든.
아예 원영이 훼손되고, 금단이 쪼개진 수도자.
축기기 대원만 수준으로 영락한 놈의 경지를 올려 봤자, 결단 초기 수준이었다.
촤악!
내가 다시 놈의 경맥을 베자, 녀석의 경맥에서 법력이 질질 새기 시작했다.
금단이 깨지니, 마공 역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의 재생력이 약해졌다.
놈의 경지가 다시 한번 추락했다.
쉬이이이….
결단 초기도 아닌, 축기기 수준.
“아, 아아, 아아아악!”
놈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른다.
“후우….”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호흡을 조절했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우공이산의 영향으로 진즉 죽었어야 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월도답천의 경지에 이르며.
육신과 하나 된 무형검이, 죽었어야 하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상황.
이미 전신의 경맥이 다 끊기고, 금단이 박살이 날 듯 덜덜 떨리고 있다.
경맥에 흐르는 무형검을 다시 회수해서 의식으로 되돌리는 순간.
내 육신은 무너져 내릴 터였다.
나는 원립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녀석을 잡았다.
놈은 이제, 개처럼 바닥에서 기며, 봉명인을 부여잡고 울먹거리는 중이었다.
“왜, 왜… 천운이 나를 따르고 있는데, 왜…!”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놈에게 다가갔다.
“이럴 리 없다, 봉명인이 잘못되었을 리 없어…!”
녀석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내게서 멀어지려 비척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은 문득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축기기까지 떨어진 수행이었다.
다 무너진 놈의 법보인 흑색의 성이 작동을 하기에 그 수준이지.
놈이 이곳을 나가 도망치면, 녀석의 수행은 더더욱 처참히 떨어질 것이 뻔한 상황.
원립이, 나를 바라보았다.
“서, 성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겠다. 잠깐 멈춰라…!”
나는 놈에게 다가갔다.
“잠깐, 오지 마라! 서, 성에 대한 비밀이 싫다면, 혈마진해광은 어떠냐? 혈쇄수림결이나, 혈목귀시의 제련법도 알려 주겠다!”
저벅, 저벅….
“그, 그래! 아직 성의 지하에 영석과 영단들이 잔뜩 남아 있다! 전부 주겠다!”
저벅….
“전부, 원하는 걸 전부 말해라. 모두 들어주마. 나, 나와 손을 잡고 천인기들이 비승한 세상을 누려 보자!”
내가 한 발 나아갈 때마다, 놈이 한 발 뒷걸음질을 쳤다.
“봉명인! 봉명인에 숨겨진 이야기도 털어놓겠다! 진정, 진정해라! 원하는 걸 말해라. 원하는 걸….”
그리고, 나는 마침내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의 다리를 그대로 걷어찼다.
푸콱!
“…! 크아아아아악!”
무형검이 깃든 내 발차기에, 놈의 양다리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놈은 그대로 벌러덩 넘어져,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악! 나, 날 고문할 생각이냐?”
녀석은 억지로 웃음을 가장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촤륵, 촤르륵….
저 바퀴벌레 같은 재생력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놈의 다리를 천천히 재생시키고 있었다.
“크, 크흐. 소, 소용 없다. 봐서 알겠지만, 몸이 폭사하는 정도로는 죽지도 않아…! 말했지 않으냐! 서휼의 삼 초를 맞고도 살았다고! 그 정도 고통은 혈마진해광에 수록된 감각 차단만 사용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부웅!
나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내 손 안쪽으로, 반투명한 붉은 깃발이 들렸다.
오행혈주번.
상대에게 금제를 박아 넣거나, 고문을 할 때에 사용되는, 고통의 깃발.
오행혈주번을 본 원립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혈주번의 술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나도, 나도 오행혈주번을 익혔다. 오행혈주번으로 나를 고문하거나 금제를 걸 생각이라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나는 혈주번에 영향을 받지 않아. 우리, 이렇게 비효율적인 대화는 그만하고 다른 얘기를 해 보는 게….”
즈우웅!
내 손에 들린 오행혈주번에, 음혼귀주문이 깃들기 시작했다.
깨알 같은 저주문이, 오행혈주번을 오염시켰다.
얼마 후, 오행혈주번은 핏빛 깃발이 아닌, 시커먼 어둠의 깃발로 변해 버렸다.
음혼귀주문의 고통을 관장하는 저주문에 겹쳐, 오행혈주번의 고통을 관장하는 부분의 법술을 엮어, 완전히 새로운 법술을 창조해 낸 것이었다.
음혼귀주문으로, 고통에 대한 이해가 극한까지 숙련된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흑색귀주번(黑色鬼呪幡).”
나는, 새로 만든 깃발의 이름을 정했다.
그리고, 당황하는 원립을 내려다보며, 막 재생된 원립의 다리에.
그대로 흑색귀주번을 내리꽂았다.
“…!!!”
원립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놈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고통을 차단시킬 수 있네 뭐네 했던 말은, 저주문 같은 법술의 고통은 통용되지 않는 모양.
나는 다시금 흑색귀주번을 소환했다.
“오행혈주번은 안 통한다만… 이건 썩 괜찮은가?”
“…! …! …!”
“만족스럽나 보군.”
푸콱!
나는 놈의 다른 쪽 다리에, 그대로 다시 한번 흑색귀주번을 박아넣었다.
놈의 두 다리는 흑색귀주번에 꽂혀, 그대로 고정되었다.
원립은 피거품을 물며 그 자리에 쓰러져 꿈틀대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몇 개만 더 박고 끝내 주마.”
꿈틀!
원립은, 눈을 까뒤집고 피거품을 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퍼벙!
녀석은 결인을 맺어, 그대로 제 다리를 폭발시키고는, 그 폭발력으로 멀리 떨어져 나가 버렸다.
하지만, 정말 멀리 가지 못했다.
기껏해야 몇 보?
웃긴 일이었지만, 딱히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흑색귀주번 몇 개만 박아넣고, 심한 고문은 별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에 검은 깃발을 들고 녀석에게 걸어갔다.
두 다리가 잘린 녀석은, 양손으로 비척비척 기어가며 내게서 벗어나려 갖은 애를 썼다.
정순지력도 거의 바닥난 모양인지, 놈의 재생은 아까보다도 더뎠다.
“그냥, 네 남은 금단을 으스러뜨리고. 사지를 뽑아 동서남북에 던져놓은 후. 남은 몸을 발기발기 찢어발긴 후.”
철퍽, 철퍽!
놈은 내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며, 그렇게 기어 나갔다.
“머리통을 남겨 놓고, 네 남은 원영 조각도 전부 흩어놓을 뿐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말한 것 이상의 고문은 하지 않고 보내 주마.”
철퍽, 철퍽….
나는, 양손으로 기어서 도망치는 녀석을 향해, 흑색귀주번을 치켜들었다.
푸콱!
“…!”
놈의 허벅지에 흑색귀주번을 박았다.
이어, 나는 녀석의 하반신 곳곳에 흑색의 깃발을 꽂아 넣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금단 조각이… 어디쯤에 있으려나….”
나는 흑색귀주번으로 놈의 금단이 있을 법한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이 외쳤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혈노, 혈노의 법술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저를 노예로 부리셔도 됩니다. 혈마진해광, 혈쇄수림결, 이 성과 관련된 모든 것. 봉명인에 대한 것. 전부 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문, 고문을 하실지언정 제발 살려 주십시오…!”
“….”
“주, 죽이지 않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이, 이건 어떻습니까?”
녀석이, 자신의 얼굴에 반쯤 남아 있는, 검은 가면을 마구 주물렀다.
그리고, 녀석의 체형이 약간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놈이 제 얼굴에서 손을 떼자.
녀석은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원립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변하였다.
“이, 이 혈체는 남녀가 뒤섞인 몸인지라. 어느 쪽도 가능합니다. 원하신다면 봉사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
“어떤 아름다움이든 전부 구현이 가능합니다. 성숙한 걸 좋아하십니까? 조금 어린 쪽을 좋아하십니까? 제발, 제발 봉사하게 해 주십시오…! 사, 살고 싶습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놈의 앞으로 다가가,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말했다.
“사람을 갈아서 얻은 아름다움 따위, 관심 없다.”
“제, 제발… 이, 이건 어떠십니까.”
꿈틀.
녀석이, 익숙한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같이 있었던 여자를 잊지 못하신다면… 그 얼굴로도 봉사를….”
나는, 놈의 머리카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놈이 완전히 그녀의 얼굴로 변하기 전.
그대로 놈의 상반신을 걷어찼다.
푸콱!
놈의 상반신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촤륵, 촤르륵….
녀석은 마지막 재생력을 쥐어짜 내, 상반신을 느릿하게 재생해 갔다.
나는 얼굴을 재생해 가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입을 닥쳐라. 한 번만 더 그 구역질 나는 입을 열면, 턱을 뽑아 버리겠다.”
“으, 읍….”
꿈틀, 꿈틀….
녀석은 내가 대로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굴을 바꿨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완전한 무면(無面).
그것이 원립이란 녀석의, 진짜 얼굴이었다.
남자도, 여자도, 사람도 아닌.
그저 더러운 마두인, 그 녀석의 본질 그 자체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말했듯이, 너를 고문하지 않겠다. 나는….”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얼굴이 없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게, 지금 축복을 주려고 하는 거다.”
푸콱, 푸콱!
녀석의 양팔 역시 흑색귀주번을 박아 고정시키며,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삶을 완결지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는 지금 네게, 그런 과분한 축복을 주려 하는 것이다.”
“으, 으으….”
놈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내가 입을 열면 턱을 뽑아 버린다고 엄포를 놓은 탓인지.
얼굴을 꿈틀거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너도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겠지. 다 잊어버리게 해 주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거다….”
푸콱!
내가, 마지막 흑색귀주번을 녀석의 단전 조각이 있는 곳에 완전히 박아 넣었을 때였다.
쩌어억!
무면인 녀석의 얼굴에, 입만이 돋아났다.
원립은, 입만이 생겨난 얼굴로,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그게! 뭐가 축복이란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나는 살고 싶다! 주, 죽기 싫어! 죽기 싫단 말이야!”
나는 말없이, 놈의 사지를 차례대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은 사지가 뜯기면서도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제발, 차라리 고문을 해 다오! 아니, 고문을 해 주십시오! 사, 살려 줘! 고문을 하고 날 범할지언정 제발 살려만, 살려만 달란 말이다! 왜, 왜 죽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물론 나도 너를 고문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 한시라도 빨리, 네 죽음을 바라는 원혼들이… 몇 명이나 될지…. 네게 원통하게 죽은 수많은 이들이, 황천에서 네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이상 시간을 끌 순 없다.
놈의 양팔을 뜯어, 남쪽과 북쪽에 던졌다.
“죽기 싫다! 흐아아! 죽으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그냥 끝이라고! 죽음이 축복이라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도 많은 이들에게 축복을 내린 거 아니냐! 말을 해 봐라, 이 미치광이야! 죽음이 축복이라면, 삶은 무슨 저주란 말이냐?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 네가 말하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뭐냐!”
놈의 다리를 뜯어, 동쪽과 서쪽에 던졌다.
“축복과 저주의 차이가 뭐냔 말이다! 네 말대로라면 나는 축복을 내렸을 뿐이야! 왜 내가 저주를 흩뿌리고 다닌 악인인 것처럼 나를 벌한답시고 이러느냐! 웃기지 마라! 너는 그냥 나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야!”
촤락, 촤락, 촤락!
녀석의 몸을, 조금씩 찢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는 게 자비인 것처럼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제발, 제발 나를 살려 줘! 아니, 죄송합니다.”
몸이 점차 없어지자, 공포가 극대화되는 것인지.
원립은 더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 그러지 마십시오. 그만, 그만해! 그만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촤락!
놈의 육신이 전부 찢겨 나갔고.
[살 거야! 살 거….]
육신에 숨어 있던, 이제는 거의 조각이 나, 흩어지기 직전의 놈의 원영이 나타나.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촤악!
손에서 뻗어 나간 무형검이, 그대로 원립의 원영에 적중했다.
파츠스스….
녀석의 원영은, 그대로 흩어졌다.
나는 원립의 수급을 들었다.
얼굴이 없이, 비명을 지르던 입만이 돋아난.
흉측하고 기이한 수급.
나는, 원립이 입던 붉은 혈포를 끌어와 놈의 머리를 싸맸다.
저벅, 저벅….
나는 천천히.
잔해들을 헤치고 나갔다.
“서, 수사….”
잔해들의 너머에는, 부상을 수습하고 있는 결단기 수도자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원립의 수급이 담긴 혈포를 들어 보였다.
그들의 눈에, 희색이 돌았다.
“드디어… 그 노괴를…!”
청문중진의 안색에, 복잡한 표정이 감돌았다.
안도감, 성취감, 복수심, 아쉬움….
무어라, 내가 형언할 수 있는 감정들은 아니었다.
결단기 수도자들 중, 몸이 성한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전부 몸이 잘리거나, 축난 상황.
“일단… 서 수사. 우리는 바로 가문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이곳에서 몇 주간 기력을 회복해야 할 것 같네.”
청문중진이 내게 말했다.
청문중진은 물론이었고, 배신자 세력들.
막리황천을 비롯해, 살아남은 벽천기, 북방, 동방의 수도자들.
그들은 현재, 서란이 불러모은 귀혼들에 의해 제압당해 포박당한 상태였다.
몸 상태로만 따지면, 현재 그의 상태가 가장 좋았다.
물론….
뚝, 뚝….
감정 상태는, 그가 가장 힘든 듯했지만.
서란은, 섭명함의 잔해.
송진이 마지막까지 잡고 있었던 조타륜을 꼭 잡고, 혼이 나간 표정으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이에게, 나는 함부로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 옆에 서서.
한참을 그와 함께 송진을 묵념해 주었다.
뚝… 뚝….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서란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생전에도… 아니, 생전에도란 말이 웃기긴 하지만… 아직 남아 계실 때에… 스승님은 줄곧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고….”
“….”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너무, 갑작스럽군요.”
“….”
“…그래도, 스승님께서 제 이런 모습을 보시면… 대로하시며 당장 일어나라고 하시겠지요.”
서란은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들겠지만. 앞으로 계속, 스승님이 전수해 주신 공법을 수련해 나갈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비승해서… 용왕께 물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나보다 강한 녀석이었다.
녀석의 눈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의 뒤편에 있는 슬픔을 볼 수 있었다.
“제 몸 상태가 가장 멀쩡하니,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지금….”
“서 도우.”
나는 서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오. 송진을… 추모해 주시오.”
“….”
잠시 말이 없던 서란은,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말씀대로… 이곳에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시오.”
나는 서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런 후, 나는 아직도 하늘에 떠 있는 봉명성을 바라보았다.
타앗!
나는, 있는 힘 없는 힘을 짜내, 땅을 박차 봉명성으로 올라갔다.
봉명성은 도대체 무슨 힘으로 구동되는 건지, 아직도 허공에 떠 있었으며.
심지어, 아주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복원되고 있기까지 했다.
나는 잠시 이 기이한 성을 쳐다보고는, 봉명성의 잔해를 뒤졌다.
얼마 후, 나는 벽문성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땅으로 데리고 내려왔다.
나는 청문중진에게 벽문성의 유해를 건넸다.
“부디, 잘 수습해 주시오.”
“…알겠소.”
청문중진과 남은 결단기 수도자들은, 남은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중이었다.
나는 벽문성의 품속에, 유리 조각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서… 수사?”
성제국 6가 중 하나.
준씨세가의 가주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서 수사가, 노괴를 사냥하셨지요?”
“맞소.”
“지금 우리가 돌아다니며 확인한 바, 노괴의 성의 지하에 엄청난 영약과 영석, 법보들과 재물들이 쌓여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노괴를 사냥하는 데에 공이 가장 큰 서 수사가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필요 없소.”
“아…!”
어느새 내 주변으로 몰린 결단기 수도자들의 얼굴에, 희색이 스쳤다.
“아, 그러면 혹시 말입니다.”
준씨세가 가주가, 은근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는, 원립의 발기발기 찢어진 사체 조각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저, 원영기 수도자의 남은 육신에도 흥미가 없으십니까? 저걸로 단약을 만들어 먹으면 굉장한 효과가 있을 것이고… 또 원영기 수도자의 육신을 연구만 해도, 원영기에 도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혹여 저것도….”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원립의 수급만 있으면 되오. 다른 건 다 필요 없소.”
“아, 알겠습니다. 수급쯤이야 서 수사의 공이니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되지요. 하하, 그러면… 노괴의 육신은 저희가 가져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들은 내 눈치를 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들개 무리처럼 원립의 시신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개 떼에게 원립의 시신을 던져 준 후.
그렇게 사막을 걸어, 천색성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뜨겁다.
덥다.
남은 법력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였고.
금단도, 경맥도.
언제든지 무형검을 풀면 그대로 무너질 상태였다.
저벅, 저벅….
나는 비척거리며, 사막을 걸었다.
타앗!
가끔 그러다가 기운이 나는 듯하면, 무형검의 힘에 힘입어, 몇백 장씩을 그대로 날아갔지만.
기력이 다하면 그대로 다시 땅으로 떨어져, 사막을 걷기를 반복했다.
서란에게 부탁했으면 빨리 천색성에 도착했겠지만.
소중한 이를 잃은 이의 추모 시간을 뺏을 수는 없었다.
나는 허리춤에는 무색유리검을, 한 손에는 원립의 수급을 들고.
그렇게, 천색성을 향했다.
멀다.
그리고 넓다.
“허억….”
나는 뜨거운 사막의 열기에, 그대로 비틀거렸다.
푸확!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흑색귀주번을 소환하여 땅에 박았다.
얄궂지만, 음혼귀주문의 힘은 상당히 많이 솟아나고 있었다.
다만 음혼귀주문의 특성상, 치유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고, 공력으로 돌려도 그 특유의 음습한 독기가 남아 있었기에, 내 몸 상태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지금껏 꺼내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더 살 생각도 없고.’
저주인형을 몇 개 더 만들어, 부상을 떠넘길 수준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죽음이 이미 찾아왔는데 월도답천의 경지로 억지로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을 써, 날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둔술은 금단의 힘을 빌리는 법술이었고, 내 금단에 조금의 충격이라도 더 가해지면, 무형검으로 억지로 붙들어 맸든 안 맸든 금단이 박살 날 것 같았으니까.
‘뭐, 지팡이로는 쓸 만하군.’
푸욱!
나는 흑색귀주번을 소환해 내, 땅에 박고, 힘겹게 다음 걸음을 디디며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자, 내가 지나온 길에는 수 개의 검은 깃발들이 사막에 꽂혀 펄럭이고 있었다.
본디 저주문도, 혈주번도.
가만히 놓아두면 저절로 사라지는 속성이 있는 법술들이었다.
혈주번의 경우에는 상단전에 꽂아넣을 경우 금제가 되어 반영구적으로 남지만.
저렇게 바깥에 꺼내 두면 그대로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내 진득한 고통이, 너무나 철철 넘쳐흐르는 이 고통이.
흑색귀주번들을 저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게 했다.
‘얼마나 지속되려나.’
어쩌면, 내가 죽은 후에야 사라질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검은 깃발들을 돌아보다, 다시 흑색귀주번을 소환해, 힘겹게 발을 디뎠다.
그러다가 조금 기력이 돋으면, 다시 무형검의 힘으로 날기를 반복하고.
다시 기력이 떨어지면 비척거리며, 흑색귀주번을 사막에 꽂으며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 * *
얼마나, 왔더라.
지금이 한 달째인가.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원립과 싸울 때보다, 어째 지금이 더 힘들었다.
내리쬐는 햇볕.
버썩 마르는 입 안.
고통을 호소하는 전신.
무형검만 풀어 버리면 편해질 수 있다는 얄팍한 죽음에 대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외롭군.’
말 그대로, 사막에 홀로 떨어져 천천히 천색성을 찾아가는 나는,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에 빠져 있었다.
푸콱!
흑색귀주번을 다시 땅에 박아 넣었다.
최근, 귀주번에 다시금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깃발이 있는 부분이, 깃발이 아닌, 커다란 혹 덩이처럼 축 늘어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이전보다 더더욱 흉측한 모습이었고, 생김새만으로도 어떠한 악의가 풍기는 것이 보였다.
푸콱!
나는, 내가 고통스러워짐에 따라, 더더욱 흉측해지고, 더더욱 기이해지는, 이 혹 덩이가 달린 막대기를 사막에 꽂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갔다.
‘향화… 선자.’
맞습니다.
분명 이 삶은 덧없지 않고 의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의미도 있으나, 고통 역시 있지 않겠습니까.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과연 살아 있는 것이.
정말로 좋기만 한 것일까요.
‘고통…스럽습니다.’
지글지글 익는 이 사막이.
마치 지옥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옥에 고통의 이정표를 찍으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쯤… 도착할까.’
* * *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저벅….
저벅….
푸콱
내가 소환하는 흑색귀주번, 아니, 흑색귀주번이었던 막대기에는.
이제 혹을 넘어, 웬 머리통만 한 덩어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덩어리는 악의(惡意)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시꺼먼 저주를 온 사방에 퍼뜨릴 듯했다.
이제는, 이 진득한 악의의 덩어리가, 정말 내가 죽어도 사라질지도 의문이었다.
‘모르겠군….’
어차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
기묘한 악의의 덩어리가 몇 개쯤 더 생긴다 한들.
상관이 있을까?
푸콱!
나는 덩어리가 달린 막대기를 꽂으며, 쓰러지지 않게 몸을 지탱하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파앙!
조금 기력이 돌아왔다.
나는 무형검을 타고 다시 날아갔다.
한참을 날았을 때였다.
저 멀리, 익숙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철퍽!
나는 결국 다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저곳까지 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 편히 쉬고 싶다….
푸콱!
나는 막대기를 하나 더 소환해, 땅에 박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자….’
분명 그들의 영전에.
이 녀석의 머리를 바치겠다고, 그리 맹세했으니….
푸콱, 푸콱, 푸콱….
고통의 이정표를 몇 번이나 찍으며, 비척거리며 걸어갔을까.
어느덧 천색성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깜빡.
‘…?’
방금, 뭔가가 내 앞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기분 탓인가?
휘이이이….
모래바람이 불었다.
나는 모래바람 사이로, 내 앞에 있던, 누군가의 발자국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발자국…?’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휘이이이!
찬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저 멀리.
천색성의 방향에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것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은 주변으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사방 곳곳에 비를 뿌렸다.
쏴아아아아―
사막에, 비가 내렸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왜, 비가 내리는 거지…?’
비가 내릴 천기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여우비였다.
내가 비척거리며 걸어갈 때였다.
‘음…?’
분명.
폐허여야 할 천색성의 터에.
새하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어….”
탁, 탁, 탁탁탁탁!
나는, 사막을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천색성에 도달한 나는,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희뿌연 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립에게 학살당했던, 천색성에서 죽었던 모든 이들.
북중호와 청문령이, 빗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
나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원립의 머리를 내려놓았다.
덜, 덜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원립의 수급에 저주문으로 음화(陰火)를 붙였다.
시커먼 음화는 빗물 속에서도 원립의 머리를 지글지글 불태웠다.
드디어, 해냈다.
‘이제, 편해질 수… 있는… 건가?’
그때, 청문령이 한 곳을 가리켰다.
나는, 쓰러지려던 육신을 부여잡았다.
청문령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청문령이 가리킨 곳.
북향화의 공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