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밟아온 것 (14)
[으…아아아아아!]
놈이, 파초선을 휘둘렀다.
하지만.
“흩어져라.”
놈이 끌어오려는 혈풍은, 전부 서란의 명에 의해 흩어질 뿐.
[이… 빌어먹을 놈…!]
원립은 전신에 핏대를 세우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원립이 핏빛 광채를 발하였다.
번쩍!
“…!”
위험했다.
늙은 몸의 원립이 사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흉험하다.
나는 서란의 옆으로 가 무색유리검과 무형검을 겹쳐 잡고, 그대로 핏빛 광채를 향해 단악의 초식을 사용했다.
번뜩!
쿠과과과과광!
찌릿, 찌릿….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잠시 본 후, 원립을 노려보았다.
서란에게 목줄을 잡히며, 상당히 약해졌으나.
그래도 놈은 원영기 수도자였다.
그것도 동급 수도자보다 훨씬 강한!
‘원영 후기에 못 오른 게 아니었다.’
내가 저주인형들에게 힘을 분산시켜 뒀던 것처럼.
놈도 자신의 수행보다, 혈체라는 것의 수행에 더욱더 신경을 쏟았기에, 원영 후기까지 못 이른 것이었다.
오히려 혈체를 얻고, 천 년에 달하는 수명을 추가로 얻은 모양이니, 놈으로서는 손해될 게 없는 모양.
정말, 패를 까 볼수록 음험하고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젠 정말 놈의 모든 패가 다 드러났다.’
더 이상 신경 쓸 것은 없었다.
벽씨세가 가주가 말했던, 놈이 숨겨 두었다는 힘 역시 저 혈체를 말했던 것.
결국, 이제는 정말로 저 몸만 쓰러뜨리면.
‘끝난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원립을 향해 쇄도했다.
서란 역시 옆에서 결인을 맺었다.
“사막치고, 왜 이렇게 시원하나 했더니… 이 땅 밑에 이렇게 많은 음기(陰氣)가 잠들어 있군요.”
녀석의 결인에, 원립의 흑색의 성 밑동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끼야아아아아―
끼아아아―
끄에에에엑!
어마어마한 음기와 함께, 원립의 흑색의 성 밑에서 가공할 수량의 원혼과 귀신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릉, 쿠릉, 쿠르릉….
그들의 등장에, 티 없이 맑던 사막의 하늘에 음기가 충천하여 먹장구름이 다시 낀다.
“도대체, 몇천, 몇만, 몇십만 명을 학살해 잡아먹은 겁니까, 원립 선배. 가축 사육장을 관리하시던 원로님들도 고개를 흔들 정도군요.”
서란이 혀를 차며 다시 결인을 맺는다.
원립은 혈광을 눈에서 폭사하며 서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나와, 다른 살아남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원립을 막아섰다.
―원망한다!
―혈목자!
―혈목자 원립!
―원립!
수많은 귀곡성은, 모두 원립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서란도 기가 질린 모습이었고, 흑색의 성 밑에서 기어 나온 귀신들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원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런 미친… 왜 해룡족이라는 놈이 흑색귀골곡의 공법을 익히고 있는 거냐…!]
“말했지 않습니까. 대청색귀골곡의 문하라고.”
서란이 미소를 지으며, 수결을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녀석의 법술이 완성되었다.
[귀제(鬼祭)를 지내는 서란이 뭇 영령들께 말씀 올리노니. 그 원한의 사유를 들려주소사!]
―원립!
―원립을 죽인다!
―혈목자에게 살해당했다!
[그 말씀 들어, 흑색귀골곡의 제자 서란이, 당신들에게 현신(現身)의 기회를 드리어 복수를 돕고자 하노니. 부디 당신들의 힘을 빌려주소사!]
―복수!
―복수할 수 있다!
―놈에게 복수할 수 있다!
―원립!
끼야아아아아!
기천의 귀신들이 원립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떼거지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서란의 주변으로 귀무와 함께 어마어마한 귀력이 뿜어지고 있었다.
절대 서란 개인이 뿜을 수 있는 수준의 귀력은 아니었다.
[흑색귀골곡의 제자, 서란이 제를 지내며 섭명함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당신들에게 현신의 기회를 드려, 복수를 돕겠나이다. 단, 당신들 역시 이놈에게 힘을 빌려주시기를 맹세하시오!]
서란의 영언이 천지사방에 울렸고, 원립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무슨 법술을 쓰려는지 알겠군. 그건 천인기급의 법술인데, 네깟 놈이 그걸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서란은 원립의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결인을 맺어 나간다.
그리고.
―끼야아아아아!
―끄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서란을 둘러싼 귀무.
저 멀리 어딘가, 섭명함과 연결되었을 그 귀무에서, 장대한 힘이 뿜어져 나오며 원립에게 학살당한 귀신 떼에게 흘러 들어갔다.
작전대로라면, 송진이 섭명함을 심해 깊은 곳에 정박해 두고.
심해의 음기와 귀기를 섭명함을 통해 끌어모은 다음, 섭명함에 담긴 전송술법으로 서란에게 전송하는 것일 터였다.
쿠구구구구!
수만 마리의 귀신 떼가 힘을 얻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서란이 결인을 맺자 수만 마리의 귀신이 서란의 몸 안쪽으로 모두 쇄도하였다.
서란의 기세가,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수만 마리의 귀신 떼의 힘이, 서란에게 밀집된다.
원립은 긴장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멍청한 놈! 받아들이지 못해 폭사할 거다! 그대로 터져 죽어라, 멍청한 해룡족….]
그리고.
[스승님, 오십시오!]
서란이, 귀무를 보며 외쳤다.
싸아아아아―
오싹, 오싹!
나는 절로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서란의 상단전에, 서란이 아닌 다른 이의 혼(魂)이 씐다.
부신대법(附神大法).
자신의 원신(原神) 일부를 지정해 놓은 상대에게 붙여 기생시켜, 멀리서도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대법이라고 하였다.
“커, 커헉!”
나는 숨을 쉬기 힘들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뿐이 아니었다.
원립을 막아서던, 청문중진을 비롯한 무수한 결단기 수도자들이, 일시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그리고, 기세등등하던 원립조차 전신을 벌벌 떨고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
흑색귀골곡(黑色鬼骨谷), 원로(元老), 천인기(天人期) 수도자 송진이.
원립이 학살해 온 수만 마리의 귀신 떼를 모아, 지금 이 순간.
전성기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운 정경이군.]
서란의 눈에서, 푸른 빛의 귀화(鬼火)가 타올랐다.
그의 입에서, 서란의 것이 아닌 영언이 울렸다.
송진이었다.
그는, 우리와는 무언가 다른 세계를 인지하는 것인지, 허공을 잠시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원립은 입에서 거품이 나올 것만 같은, 공포의 의념을 줄기줄기 뿜고 있었다.
[왜, 왜… 천인기 수도자가…!]
[그래, 향수에 빠지는 건 뒤로 미루도록 하지. 생전이라면 몰라도, 내 잔혼밖에 안 남은 이 혼백으로 부신대법을 펼치는 건 내 혼에도, 란이의 혼에도 상당히 무리가 가니, 빨리 죽여 주마.]
끼야아아아아!
수만 마리의 귀신 떼가 귀곡성을 지른다.
그리고, 서란의 몸을 차지한 송진의 손에, 귀조(鬼爪)가 돋아났다.
[흐아아아아아! 왜 남아 있는 거냐! 왜 천인기 수도자가 남아 있는 거냐!]
원립은 완전히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둔광을 펼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천지원기(天地原氣)가, 송진의 의지에 감응하며 천지간이 귀기와 음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죽어라.]
그리고.
쿠과과과광!
그 일격에, 봉명성의 외벽이 그대로 뜯겨 나갔고, 일격의 여파로 원립이 살던 흑색의 성.
그곳에 펼쳐진 결계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한참 모여 두들겨도 아무 반응이 없던 결계였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한 천인기 수도자의 일격에, 그 고대 결계는 없느니만 못한 것 같았다.
쿠과과과광!
사막에 계곡이 생겨났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만들어 낸 어설픈 계곡이 아니었다.
사막이, 반으로 갈라졌다.
문자 그대로였다.
다른 말로 형언할 필요도, 묘사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사막이 두 쪽이 되었다.
이 한 마디면 충분했다.
그리고.
원립은, 아니, 원립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깃덩이는, 송진의 일격을 맞고 봉명성의 구석에 떨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휼의 삼 초를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게, 헛소리만은 아닌 듯.
놈은 송진의 일격을 맞고도, 고깃덩어리가 되어서라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쿨럭!
서란의 몸을 차지한 송진이, 시커먼 피를 토했다.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너, 저주공법을 익혔다 했지? 저주로 내 제자의 몸에 가해진 부담을, 부신대법의 시전자인 내게 다 떠넘겨라.]
“…괜찮겠소?”
[어차피 죽은 몸인데 뭐 어떻겠느냐. 잔말 말고 부담을 빨리 다 떠넘겨라.]
나는 송진의 부탁대로, 음혼귀주문을 이용해, 서란의 몸과 혼에 가해진 부담을 송진에게 저주로 전부 떠넘겼다.
송진이 스스로 허락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흐흐, 이걸로 제자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100년은 줄었군. 빌어먹을… 원립 놈이 제자에게 위협이 되는 놈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 짓은 안 했을 게다. 설마 놈을 고깃덩이로 만들어 줬는데도 못 잡지는 않겠지? 이만 난 가마.]
그 말을 끝으로, 송진은 부신대법을 풀고 서란의 몸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게… 천인기의 힘인가.’
나는 송진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인기 수도자의 일격을, 눈앞에서 직접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쫘악 갈라진 사막의 정경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자, 이제 저놈이 완전히 무력화되었소! 모두 공격하시오!”
나는 무색유리검을 붙잡고, 고깃덩이가 된 원립에게 날아갔다.
송진의 기세에서 벗어난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도 눈을 빛내며 고깃덩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쿠르르릉!
흑색의 성에서, 다시금 진홍빛 강이 흘러나온다.
“아직도냐!”
청문중진이 질린다는 듯 외쳤다.
“모두 저게 원립에게 못 가게, 막으시오!”
나는 저주문을 쏟아 내, 저주문의 강을 만들었다.
시커먼 저주문의 강이, 원립을 휘감았다.
‘장원진력이고 뭐고, 전부 썩혀 버리겠다…!’
그리고.
번뜩!
원립이 불러낸 장원진력은.
원립이 아닌, 원립이 봉명성 천장에 꽂아 놓은 진법 깃발들에게로 향하였다.
“뭣…!”
나는 이를 악물고 무색유리검을 들었다.
“모두 저걸 막으시오!”
놈이, 봉명인을 불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오오오오오…!!!]
원립이었던 고깃덩이가, 어마어마한 핏빛 광채를 내뿜으며 내 저주문을 떨쳐 버리고 허공으로 쇄도하였다.
[나도, 목숨을 걸겠다!]
쿠구구구구!
찌릿, 찌릿!
나는 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놈은 자신의 원영을 불태우고 있었다.
잘못하면 그대로 원영이 타 버려 죽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수행이 한 단계는 떨어지는 도박!
하지만, 도박수가 성공하면.
‘놈이 봉명인을 얻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신의 기력을 폭발시키며 놈에게 다가갔다.
촤르르륵!
고깃덩이가 된 놈의 몸에서 수많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오며, 핏빛의 숲이 되어 나를 가로막았다.
남아있는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두 달려들어 함께 숲을 뚫었다.
파아앗!
나는 순식간에 원립의 앞에 도달하였다.
“네놈이 바라는 대로 될 것 같으냐!”
[비켜라!!!]
촤르륵!
원립의 몸에서, 원영이 튀어나왔다.
수많은 손과 눈, 입이 달린 아기.
그리고, 그 아기가 영체에 달린 손 중 하나를 그대로 잘라 내어 내게 던졌다.
[수행이 떨어지더라도, 내 계획이 싹 다 파탄 날지라도!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없다!]
콰과과광!
놈이 자신의 원영을 희생해서 던진 원영의 팔은,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키며 나를 뒤덮었다.
단악검법, 단악!
쿠과과과과!
나는 폭발을 뚫고 원립을 쫓아갔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폭발을 뚫는 것에만 집중하였기에, 내 전신의 피부가 벗겨져 버렸다.
하지만 결단기 수도자의 생명력과, 재생력을 높이는 선주의 효과로 빠르게 피부가 재생된다.
번쩍!
놈의 진법이 작동했다.
봉명성의 마지막 층이 붕괴했고, 마침내.
파아아아앗!
봉명성의 허공에, 봉명인이 나타났다.
타앗!
나는 저물대에서 선주들을 되는 대로 집어 마셨다.
법보와의 연계가 강화되는 백홍주.
법보의 속도가 증가하는 모련섬.
힘이 강해지는 홍월루….
그리고.
콰아아앙!
나는 전신의 힘을 짜내, 무색유리검을 봉명인을 향해 던졌고.
원립은 아기 형태의 원영에 달린, 모든 손과 눈을 전부 터트렸다.
번쩍!
일순간 원영을 훼손해서 어마어마한 힘을 얻어 낸 원립.
수많은 선주들을 마시고, 그 힘을 일점으로 모아 무색유리검을 던진 나.
내 검과, 원립의 손이, 봉명인에 동시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멈춰라!”
서란의 목소리가 원립에게 닿았고.
원립의 육신이 우뚝 멈춰섰다.
내 무색유리검이, 봉명인을 튕겨 내어 멀리 던져 버렸다.
“이제 끝이다.”
나는, 원립을 향해 쇄도하며 단악검법 오의, 단악을 펼쳤다.
파아아앗!
그때, 혈광이 주변을 뒤덮었다.
파라라락!
“…!”
원립이 장원진력을 집어넣었던 그의 진법 깃발들.
봉명성의 전 층을 파괴하는 데 쓰고, 허공에 떠 있던 깃발들이 움직이며, 저 멀리 튕겨 나간 봉명인을 감싸 안는다.
그와 동시에.
촤라라락!
진법 깃발들이, 원립에게 봉명인을 가져왔다.
콰악!
고깃덩어리의 한 쪽에서, 촉수 같은 것이 돋아나, 봉명인을 움켜쥐었다.
[내가, 봉명인의 주인이다…!]
쿠구구구구!
[천운이, 내게 기울었다…!!!!!]
놈의 바퀴벌레 같은 집념이, 마침내 봉명인에 닿는 데에 성공하였다.
촤르르륵!
놈이 육신을 재생하였다.
뚝, 뚝….
원립은 여전히 시커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가면의 밑으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절대 멀쩡하지 못한 상태.
하지만.
놈은 웃고 있었다.
[숨겨 두던 혈체도, 아끼던 장원진력도 모조리 다 썼다. 내 원영까지 훼손하여, 원영 초기로 수행이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해서 천운을 손에 넣었는데도 네놈들을 못 이기면, 나를 개돼지라고 불러라!]
‘놈이 봉명인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서 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천운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는, 놈이 힘을 회복하지 못한다!’
놈은 지금 초죽음에 가까워져 있었고, 힘을 회복하지도 못했다.
‘놈을 죽이고, 봉명인을 뺏는다!’
그때였다.
쿠르르릉….
봉명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송진의 공격을 맞고, 핵심인 봉명인까지 원립에게 뺏긴 탓인지.
봉명성의 외벽 곳곳이, 느릿하게 무너졌다.
그리고, 그 파편들은 정확하게 내가 있는 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붕, 부웅!
나는 외벽들의 조각을 베어 냈다.
하지만 이상하게 원립이 있는 쪽으로는 잔해들이 떨어지지 않았고, 원립은 유유히 나를 지나쳐 날아갔다.
나는 무형검을 녀석에게 날렸지만, 나와 녀석의 사이로 정확히 봉명성의 잔해가 떨어지며, 내 무형검은 놈을 맞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나는 당황스러워,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리석은 놈. 하늘이 내 편을 들어준단 말이다.]
서란이 놈을 향해 명을 내린다.
“꿇어라!”
하지만, 원립은 조금 움찔거릴 뿐 봉명인을 들고 킬킬 거렸다.
[이런, 우연히도 천인기 수도자의 공격을 맞으며, 몸에 남아 있던 해룡왕의 진혈이 전부 증발된 것 같군그래? 정말 우연한 일이야.]
“뭣…!”
콰아아앙!
원립이 혈광을 뿜어내었다.
서란은 그대로 혈광에 휩쓸려 흑색의 성으로 날아가 버렸다.
원립은 서란을 따라 봉명성을 그대로 나가 버렸고, 기이하게 무너지던 봉명성이, 원립이 나가자마자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멈췄다.
뿌드득….
나는 그제야 잔해더미의 폭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뭔가?
기막힌 우연 정도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이 놈의 편에 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품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송진의 귀신이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처먹을!!! 저 바퀴벌레 같은 놈! 그걸 처맞고도 살아서 봉명인을 손에 넣어!]
송진의 목소리였다.
그는 다급한 소리로 내게 말했다.
[너! 주변을 둘러봐라! 주변에 남은 귀신이 얼마나 있느냐!]
송진의 목소리에, 나는 영감을 넓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방금 송진의 일격에 다 소모된 것인지, 남은 귀신이나 원혼은 거의 없었다.
“거의… 없소.”
[젠장! 그만한 귀신이 더 있으면 봉명인이고 뭐고 다시 뺏어 줄 수 있는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송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연락을 끊었고, 나는 빠르게 서란과 원립을 쫓아 흑색의 성으로 날아가려 하였다.
그때였다.
“서… 수사.”
“…!?”
봉명성의 잔해 밑에서, 벽문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벽… 수사?”
그는, 잔해에 반신이 깔려 있었다.
아니, 반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는 북향화처럼 하반신이 어딘가로 사라진 상태였다.
몸의 4분지 1만 남은 상태인 것이었다.
그는 그럼에도 결단기 수도자의 질긴 생명력으로, 아직도 살아남은 것이었다.
하지만.
‘금단이, 깨졌군.’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죽을 듯싶었다.
벽문성은 입을 뻐끔거리며, 내게 말했다.
“…급할…테니, 오래 붙잡지, 않…겠소. 이걸….”
그는, 품에서 작은 유리 조각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건….”
저주인형의 속으로, 지네 굴에서 조각했던 유리 공예품.
그 조각의 일부였다.
“나도, 그녀를 사랑했지만. 내 마음은, 당신에 비해, 그리 깊지 않을지도 모르오. 오히려… 당신에게 그녀를 뺏겼다는 분함이 없었다면, 몇 년 가지 않아 시들해져서, 그녀를 쫓아다니는 걸 그만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내 첫사랑이었소. 부디….”
그가, 내게 이를 악물며 유리 조각을 건넸다.
“그녀의, 복수를. 부탁드리오.”
나는 이를 악물고, 그가 건넨 유리 조각을 넘겨받았다.
“알겠소. 쉬고 계시오.”
그렇게, 벽문성은 눈을 감았다.
나는 벽문성을 뒤로하고, 살아남은 결단기 수도자들과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휘이이이이!
흑색의 성 안쪽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나는 인기척이 나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성의 중앙.
그곳에 있는 대전.
피 냄새가 가장 진득한 그곳으로, 몇몇 생존자들이 전부 모였다.
원립은 그곳에서, 핏물로 서란을 휘감아 조이고 있었다.
쿠구구구….
나는 이를 악물었다.
원립은 느긋하게 봉명인을 쥐고 있었다.
밖에서는 원영 초기, 그것도 잔뜩 약해진 원영 초기 수준이었건만.
성 안쪽에서의 그는, 원영 중기 수준으로 다시 올라와 있었다.
[내 성에 들어와, 봉명인을 가진 나를 상대하겠다고…? 용기가 가상하군. 하지만, 내 원영까지 훼손한 네놈들은 모조리 한 줌 장원진력이 될 것이다.]
그가 악에 받친 미소를 지었다.
[천인기 수도자가 나타나 잠시 당황했지만, 그래. 귀골곡의 원로 중 한 명의 소문을 들은 적 있지. 괴군에게 목이 따여, 폐함이 된 섭명함에 지박령처럼 박혀 명계에 끌려갈 날을 기다리는 잔혼! 그 자일 테지? 하하하, 잔혼 수준으로 천인기급의 일격을 펼쳤으니, 이제 명계에 끌려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구나.]
놈이 요사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이제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겠구나. 남은 건 네놈들을 다 죽여 내 상처를 치유하는 것뿐.]
쿠구구구구!
놈의 주변으로 혈광이 번뜩인다.
[호풍진혈변이 서휼이 남긴 함정이었을 줄은 몰랐다만, 알았으니 이제 몸에서 호풍진혈변의 수행을 적출하기만 하면 된다. 네놈들은 혈마진해광과 혈령수림결로만 상대해 주마!]
이길 수, 있을까?
절망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 괴물을 이길 수 있는가.
지금 내 목숨을 걸어, 우공이산을 펼쳐도.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이 목숨이 가치가 있을까?
그때였다.
꿈틀, 꿈틀….
송진이 내 품에 남겨 놓은 귀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쪽의 상황이 어떠냐?]
“음?”
송진의 목소리에, 원립이 몸을 흠칫 떨었다.
“서란은 잡혀 있고, 원립이 봉명인을 쥔 채 원영 중기의 수행을 뽐내고 있소.”
[그렇군. 조금 시끄러울 테니, 네가 서란을 잘 보호해라.]
“음?”
그때였다.
쿠과과과과광!
천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흑색의 성의 한쪽 벽면이 무너졌다.
거대한 충격파가 장내에 휘몰아쳤고, 나는 그 충격파를 견디며, 서란에게 향하는 잔해와 충격파를 베어 내었다.
그리고.
나는 충격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원립과 내가 동시에 그것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섭명함?]
“섭명함?”
그것은, 다 망가진 시커먼 폐함이었다.
송진이, 자신의 제자를 위해 섭명함을 원립의 성에 들이박은 것이었다.
[막(幕)!]
그리고, 섭명함의 잔해들이 날아와, 서란을 둘러싸고 어떠한 진법을 짰다.
원립은 방금 송진에게 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그의 목소리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살고 싶은 놈은 내가 짠 진법 속으로 알아서 들어가라! 저 원가 놈 빼고 다 들여보내 줄 테니.]
쿠구구구!
송진은 섭명함의 조타륜을 잡고, 귀화를 이글거리며 말했다.
[저놈 때려잡느라, 현계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도 잔뜩 줄어들었고 하니. 그냥 이참에 가 버리도록 하지.]
“스, 스승니…!”
서란이 다급한 목소리로 송진을 불렀다.
송진은, 서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제자야, 잘 기억해라. 귀골곡의 의지는, 이 섭명함이 아닌 그 사람들로 하여금 이어지는 것이다.]
스르륵….
송진이, 품속에서 묵빛 구슬을 꺼내 들었다.
파공주였다.
[봉명인이 무섭긴 하지만, 파훼할 수 있는 건 무려 세 가지나 있지. 첫째는 봉명인보다 강한 운명. 둘째는 압도적인 힘. 그리고 셋째는….]
“아, 안 됩니다! 파공주! 해룡왕의 후손으로 명한다, 스승님의 명에 반응치 말아라!”
쿠구구구구!
섭명함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역사(歷史). 기나긴 역사를 지닌 것이라면, 운명에 저항이 가능하다. 50만 년의 역사를 지닌, 섭명함 맛 좀 보거라…!]
부우우웅!
섭명함과, 파공주가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냐! 파공주! 내 말을 들어라!”
서란은 두 눈이 뒤집혀서, 섭명함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외쳤다.
“안돼! 스승님! 스승님!!!”
[파공주, 발동. 섭명함….]
송진은 마지막 순간.
서란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귀화가 흐르는 그의 눈두덩이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자폭(自爆).]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문중진과 다른 수도자들을 황급히 송진이 쳐 준 진법 안으로 끌어들였다.
원립은 미친 듯이 이 진법 안으로 들어오려 진법을 두들겼으나, 송진이 허락지 않은 탓인지.
원립은 봉명인을 쥐고서 멍청하게 진법을 두들겨야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묵빛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 * *
폭풍이 잦아들었다.
서란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립의 핏물에서 벗어나, 눈앞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아, 아아… 아아아….”
송진이 쳐 준 진법은 간당간당하게 방금의 폭풍에서 버텼다.
무시무시한 공간 폭풍에서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진법 자체가 단단하다기보단, 섭명함의 잔해로 만든 진법이, 같은 섭명함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인 듯했다.
힘의 크기가 아닌, 속성의 문제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법 바깥으로 나왔다.
철퍽, 철퍽….
“하….”
나는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정말, 지긋지긋하군.”
핏빛의 고깃덩이.
그 고깃덩이의 위쪽으로, 푸른 룡의 형상이 떠올라, 고깃덩이를 지키고 있었다.
“서휼, 서휼, 서휼! 또 네놈이냐! 그만 좀 나와라…!”
파사사삭….
해룡의 형상은, 방금 전의 공간 폭풍을 맞고 힘을 다한 듯 그대로 스러져 버렸으나.
서휼의 형상이 지켜 준 덕인지, 원립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서휼…!”
나는 씹어뱉듯이 그 이름을 울부짖었다.
촤락, 촤라라락!
그리고, 고깃덩이가 재생하기 시작한다.
쿨럭, 쿨럭….
원립이 다시 몸을 드러냈다.
원립도 이제는 위태로워 보였다.
놈의 가면은 박살 나, 눈과 이마만을 가린 채, 입이 드러나 있었다.
놈의 수행은 이제, 결단 대원만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우우웅!
섭명함에 박살 난 흑색의 성의 잔해가, 그에게 힘을 보탠다.
우우웅!
놈의 수행이, 원영 초기까지 치솟는다.
“흐, 흐하… 흐하하….”
놈은 영언을 내뱉지도 못할 만치 약해진 건지,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봉명인이… 봉명인이… 나를 살려 줬다…! 거기다, 원영 초기라면, 아직… 네놈들 따위는….”
말을 잇던 녀석이, 왈칵 피를 토해 냈다.
“끄르럭… 꺽…!”
“쯧….”
나는 놈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놈이 손을 휘젓자, 역시나 원영 초기 급의 혈광이 터져 나오며 나를 가로막았다.
“네깟, 네깟 놈들이… 이 어린놈들이… 내가,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아느냐…? 900년 동안… 어떤 준비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 왔는지 아느냐? 죽지 않는다.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악을 쓰며, 원영 초기 급의 힘을 내뿜었다.
나는 놈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900년 정도는 살았다.”
“뭐…?”
“함부로 내 앞에서, 나이를 내세우지 마라…!”
콰아앙!
나는 놈에게 달려들어, 무형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놈은 칠공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나를 떨쳐 냈고, 나는 그 반탄력에 뒤쪽으로 떨어져 나가 버렸다.
“크윽…!”
“크, 크흐… 이 쓰레기 같은 놈들.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나를 이 꼴까지 몰아붙여…! 죽여, 죽여버릴 테다….”
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다.
그때였다.
“…?”
흑색의 성의 잔해 사이로, 옥색의 노리개가 떨어져 있었다.
노리개는, 원립의 발치 아래에 있었다.
나는 황급히 품을 뒤졌다.
“아….”
다행히도, 향화의 노리개는 내 품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월량의 고손자. 그의 것이군….’
그의 유품은, 원립에게 잡아먹힌 후에, 그의 성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던 것이리라.
내가 노리개를 쳐다볼 때였다.
원립이, 나의 시선을 알아채고, 이죽이며 말했다.
“아, 그래. 이 노리개. 200년 전의 네놈 옆에 있던 그 여자의 노리개였나?”
그는, 노리개로 다가갔다.
녀석은 굳이 나에게 북향화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나를 도발했다.
저열한 도발.
하지만, 녀석이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런 쓰레기 따위.”
뿌득, 뿌드드득….
놈은, 그대로 월량의 고손자의 노리개를, 짓밟아 버렸다.
뿌드드득….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지니고 다니는 쓰레기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네놈들이 아무리 발악해 봐야, 천운을 손에 넣은….”
“…아니다.”
“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정했다.
“…쓰레기가, 아니다.”
“…하하, 이게 쓰레기가 아니라고? 잘 봐라. 이 쓰레기야. 내 발밑에 있는 이건 말이다….”
놈의 목을, 그들의 영전에 바칠 때까지, 살아 있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지금.
송진이 목숨을 바치고, 이 기회를 만들어 준 지금.
나는 이 자리에서.
놈의 목을 영전에 바치지 못하더라도.
죽기로 마음을 다졌다.
나는, 이를 갈며 무색유리검을 들어 올렸다.
“네가 지금 밟아온 것만이… 아니야.”
지금 이 순간.
“네가 밟아온 것… 네가 지금까지 그 더러운 발로 짓밟아온 그 모든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나는.
“쓰레기가, 아니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간절하게.
“보여 주마!”
검(劍)을 들고, 다음 경지를 갈구하였다.
“네가 밟아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악검법(斷岳劍法).
“최종오의….”
제이십사초(第二十四招).
“우공이산(愚公移山)!”
단악검법의 끝.
가장 흉험한 자멸기(自滅技)가 내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