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밟아온 것 (13)
수많은 빛깔이 한데 모여 원립을 찔러 들어갔다.
촤라락!
원립의 양팔이 일순간 핏빛 귀수로 변한다.
핏빛의 귀수가, 내 무색유리검을 잡고 막았다.
콰드드득!
“끝이다.”
쿠구구구구!
원립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져 아래쪽.
봉명성의 바닥에 처박혔다.
놈의 뒤쪽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쩌적거리며 일어났다.
“죽어라!”
나는 그렇게, 무색유리검과 무형검의 힘을 총동원하여 녀석을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그렇게, 놈의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쿠극, 쿠그그극!
‘이건….’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축기기 수준으로 막혀 있던 전신의 힘이, 결단기 수준으로 돌아온다.
주변에 갇혀 있던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제힘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말은.
‘봉명성의 진법이…!’
쿠그그그극!
원립이, 다시금 원영기 노괴의 힘을 뿜어내며, 무색유리검을 잡은 손으로, 내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어째서…!? 아직 시간이 안 되었을 텐데…!?’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리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째서?
콰아앙!
그리고.
결국, 기어코 무색유리검은 튕겨 나가 버렸다.
원립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쿠구구구!
[후우….]
놈이 숨을 몰아쉬었다.
[인정하지. 몇백 년 만에, 생사를 오고 가는 전투를 해 보았다. 방금 것은 정말 아찔한 손해를 입을 뻔했구나.]
그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뭔가 결인을 맺는 벽씨세가의 가주, 벽천기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조, 조씨세가의 유적에서 발견한 비술을 사용해, 아슬아슬하게 진법을 더 빨리 해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네 공이 크다. 하지만… 네 가문의 아이가 지은 죄 또한 크지.]
“부, 부디 자비를….”
따악!
그리고, 원립이 손가락을 튕기자.
벽씨세가 가주를 비롯한 다른 배신자들이 모두 자리에 주저앉아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으아아악!”
[주인이 위기에 빠져도 벽가 놈 말고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놈들뿐이라니…. 하나같이 쓸모가 없군. 벽가 녀석조차도 제 똥을 제가 치운 것이니 사실 거기서 거기지.]
기이이잉!
나는 배신자들의 상단전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에 눈을 찌푸렸다.
오행혈주번의 기운이었다.
‘200년 전부터 박아 놓았어서, 저항할 수 없었던 건가.’
따악!
원립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비명은 잦아들었다.
[됐다. 어쨌든 논공행상은 말했듯이 추후에 할 것이고. 지금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지.]
녀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놈들…. 이 녀석들부터 처리를 해 볼까.]
나는 녀석을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웃기는군. 네 몸 상태부터 보고 말하는 게 어떠한가?”
원립은 분명 원영기의 힘을 회복했다지만, 그 기세는 아까와 같지 않았다.
나와 싸우며, 상당히 힘을 소모한 모양새.
원영 중기의 힘을 제대로 보여 주었던 아까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었다.
녀석의 방어 법보는 천뢰에.
동급 경지의 괴이의 요혼과 혈운 귀왕들은 봉명성에서.
남은 것은 녀석의 본명 법보일 열일곱 개의 단검, 핏빛 파초선, 핏빛 창, 붉은 수정 해골 지팡이.
놈의 전력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쿠그그그극!
또한, 아까까지 축기급으로 수행이 떨어졌던지라, 진루세가의 법보에 속박당했던 다른 수도자들 역시 검은 쇠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배신자의 세력은 많았지만, 우리 쪽이 수로만 따진다면 훨씬 많았다.
거기다가, 아직까지 저주의 여파와 천뢰의 여파를 극복하지도 못한 게 눈에 보인다.
“네가 진정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서슬퍼런 질문에, 원립은 잠시 듣고만 있다 웃기 시작했다.
[후후, 훌륭한 전의군. 꺾어도 꺾어도 꺾이지 않아…. 거기다가 결단기에 오를 때 천겁을 겪고, 봉명성 진법 안에서도 결단기급 전력을 내는 놈….]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너, 내 혈노가 되지 않겠느냐? 말이 혈노지, 제자처럼 대해 주겠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자세를 잡았다.
[쯧, 어리석군.]
그가 양팔을 벌렸다.
나는 검을 잡고 기운을 끌어모았다.
파아앙!
말은 필요 없다.
놈에게 돌진해, 그대로 무형검을 때려 박았다.
하지만 어느새 녀석의 손에는 핏빛 파초선이 들려 있었다.
[울어라, 호풍혈파(呼風血芭).]
콰아아아아!
혈풍이 불어닥치며 나를 밀쳐 내었다.
저 혈풍에 닿자마자,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콰아아앙!
결국 나는 그에 견디지 못하고, 뒤쪽으로 밀려나 날아가 버렸다.
이렇든 저렇든.
놈은 원영기의 힘을 찾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절망하지 않았다.
‘이길 수, 있다!’
놈의 힘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확연히 약해져 있었다.
고작 저 정도의 힘이라면, 어떻게든 떨칠 수 있다!
“모두! 저 노괴는 분명 처음보다 확연히 약해졌소! 함을 합치면 분명 이길 수 있소!!”
콰창, 콰장창!
청문중진을 비롯해서, 결단기의 수행이 전부 되돌아온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 오라버니…!”
“진루연천!!!!! 네가 감히!!!”
“아, 안 돼요!”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벽천기는 원립을 구하기 위해 봉명성의 진법을 풀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다시금 우리 편의 연합군이 힘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전음부를 꺼내 들어 대기하고 있는 송진과 서란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제 거의 다 되었소. 오시면 될 게요.”
위이이잉!
전투가 시작 전, 몇 년 전에 송진이 봉명성에 들러 내게 붙여 준 귀신 한 마리가 내 품 안쪽에서 깨어나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조그만 귀신은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며, 전장을 두 명에게 전송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에게도 연락을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놈을 밀어붙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될 뿐!
그때였다.
[힘을 모아라, 호풍혈파.]
기이이잉!
원립이, 자신의 핏빛 파초선을 허공으로 띄웠다.
놈의 본명법보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 안 돼요! 오라버니, 잠시 놓아주세요! 제발!”
진루연천을 비롯해, 배신자들 몇몇이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원립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하였다.
[처음 제안대로, 너희가 완벽하게 놈들을 제압하지 아니했으니. 약속대로 녀석들을 살려 두지 않아도 되겠지…?]
진루연천을 비롯해, 몇몇 배신자들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혈목자시여! 제발 자비를 바랍니다! 부디 청문세가를 학살하지 말아 주십시오!”
“혈목자시여!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디 이들 부족은 부디…!”
[본래 약조가 이렇지 않았더냐. 너희가 사전에 제대로 제압을 잘 했다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늦었다.]
그리고.
파아아앗!
녀석의 흑색의 성 방향에서, 뭔가 붉은 것이 날아왔다.
오싹, 오싹!
분명 이성은 지금 당장 원립에게 달려가, 놈의 목을 날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직감이 그것을 말리고 있었다.
죽는다.
지금 나서면, 개죽음당할 것이다.
콰아앙!
흑색의 성에서 날아온 그것은, 원립의 바로 옆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원립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리는 미인이었다.
그인지 그녀인지 헷갈리는 그것은, 흑단처럼 새카만 검은 머리칼에, 시체처럼 창백한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체형을 보며 흠칫 떨었다.
‘저건….’
지난 생의 막바지.
그때의 원립은, 지금의 원립처럼 백발이지도, 쪼글쪼글한 피부와 작은 체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분명, 그때의 원립은.
[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너희는 잘 싸웠다. 꼭꼭 숨겨두었던 혈체(血體)를 꺼내게 만들다니.]
쿠구구구구!
놈이 말한, ‘혈체’라는 젊은 원립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찌릿, 찌릿….
‘미친….’
저 녀석 역시, 원영 초기 최고봉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우우웅!
원립의 본체.
본체의 백회에서, 자그마한 아기가 빠져나왔다.
지난번 보았던, 수많은 손과 눈, 입이 전신에 돋아난 기괴한 아기.
원영(元靈)의 본체!
그 아기는 사이한 웃음소리를 지으며,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원립의 혈체라는 것의 백회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아아아아―
원립의 혈체에, 원립의 본체와 같은 새카만 어둠.
반투명한 가면, 시커먼 안개 같은 것이 그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그제야 원립은 내가 지난 생에 봤던 원립과 똑같은 형태로 돌아왔다.
[후우, 좋군.]
콰득!
새 육신을 얻은 놈이, 이전의 늙은 육신이었던 자신의 머리통을 잡았다.
그리고.
촤르르르륵!
놈은 자신의 옛 육신.
늙은 육신을 그대로 빨아먹었다.
놈의 늙은 육신은 그대로 한 줌 피 안개가 되어 놈의 손으로 빨려들어 갔다.
쿠구구구구!
원영 초기 최고봉이었던 그의 수행이, 다시금 원영 중기 최고봉으로 치솟았다.
[놀랐느냐? 내 혈체라는 것으로. 천인기 선배분들이 비승한 후, 천 년은 더 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육신이다. 200년 동안 순수한 장원진력으로 수명을 늘려 놓은 것은 물론이며… 혈마진해광은 물론이고, 혈쇄수림결 등 내 본명공법까지 전부 극성으로 익히게 해 놓았지. 더불어….]
그가 입이 찢어질 듯 웃으며, 허공에 띄워놓은 법보에 손을 뻗었다.
[해룡왕에게서 훔쳐 낸 공법까지 200년 동안 새로이 익히게 해 놓았노라. 200년 새에 새로 제련한 법보와, 해룡왕의 공법이 어떤 힘을 끌어내는지 똑똑히 보아라…!!]
쿠구구구구!
원립을 중심으로, 피바람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가 힘을 모으던 파초선을 잡고, 그대로 휘둘렀다.
쿠과과과과!
원립의 영언이 봉명성 전체를 울렸다.
[호풍진혈변(呼風眞血變)의 힘을 보여 주마!]
쿠구구구!
핏빛의 용오름이 봉명성 1층을 뒤덮었다.
나는 갑작스레 날아온 피바람에, 이를 악물며 무형검으로 바람결을 자르며 버텼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쉽사리 버티지 못했는지,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바람에 쓸려 나갔다.
쿠과과과과!
봉명성 1층의 전역에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원립의 일격에, 핏빛 용오름이 사방을 휩쓸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격을 버텨 냈고, 얼마나 지났을까.
휘오오오오―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장내에 남은 것은, 가주급들, 혹은 결단기 원로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이들 몇몇뿐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문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원립의 피바람이 몰아닥친 곳에는, 피 구름이 일어 오르기 시작했다.
피 구름은 원립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역시, 최고군. 호풍진혈변과 혈마진해광의 상성은….]
우득, 우드득!
원립의 이마에는, 핏빛의 사슴뿔 같은 것이, 작게 돋아나 있었다.
뿌드득….
어딘가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문중진이, 반으로 갈라져 죽은 진루연천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었다.
“왜… 같은 편까지 다 이리 잔혹하게 죽인 거냐…?”
[진심으로 내게 충절을 지키는 녀석과, 다른 목적이 있어 나를 섬긴 놈들을 구별한 것뿐이다.]
그가 말했다.
[감히 무례하게, 패배자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는 놈들만 골라 죽였을 뿐이노라. 패배자를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주군인 나의 선택일진대, 건방진 것들 같으니.]
녀석이 우리를 보며 비웃었다.
[그래, 여자 뒤에 숨어서 지킴 받으니 기분이 좋았나 보구나.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기는.
이 세상에, 같은 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키이이잉!
녀석의 품에서, 익숙한 진법 깃발들이 보였다.
붉은 진법 깃발들이, 봉명성 전역으로 날아가 진을 펼친다.
번쩍!
그리고.
봉명성 1층이 무너지고, 2층과 1층이 통합되었다.
그가 말을 잇는다.
[오직 잔혹하고 비정해져야만 살아남는 것이 수도자의 세계가 아니겠느냐? 해룡왕이 동족을 죽인 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삼 초를 받으면 살려 주겠다 했을 때. 나는 그를 속으로 비웃었다. 어리석은 이 같으니, 적에게도 그리 자비를 베푸는 게 무슨 물러터진 마음가짐이란 말인가!]
쿠구구구!
놈의 진법은, 이전과 같이 허공으로 계속 뻗어 나가며, 봉명성의 층층들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놈에게 접근하려 해 보았지만, 놈이 두른 강대한 혈풍이, 너무 뚫기 힘들었다.
원립의 주변에서, 다시금 더더욱 강한 혈풍이 몰아닥쳤다.
[나는 놈의 삼 초를 받아내고, 해룡왕에게 실낱같은 상처를 입혀, 그의 진원진혈 한 방울을 훔쳐 냈을 뿐이 아니라, 그가 가진 해룡족의 공법서인 호풍진혈변까지 훔쳐 내는 데에 성공했다! 해룡왕의 자비를 이용하고, 강한 자의 동정을 이용하고, 약자들의 경외와 공포를 이용하고, 어리석은 이들의 피와 생명을 이용해 여기까지 올라왔다!]
쿠그그그극!
원립의 의식 영역이 압축되며, 마치 해룡족 같은 형상을 띄었다.
동시에 그에게서, 더더욱 해룡족 같은 기운이 풍겨왔다.
콰과광!
어느덧, 봉명성의 층은 거의 다 무너져 내려, 이젠 7층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용하고 훔치고 빼앗은 것들로 이 혈체를 제련하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빼앗고 빼앗고 빼앗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가 아니냐! 같은 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더 많이 빼앗아 복종시키는 자와, 덜 빼앗아서 복종되는 자밖에 없다!]
놈이 광소를 지으며, 다시금 파초선을 치켜들었다.
촤자자작!
놈의 진법 깃발들이, 봉명성 마지막 층.
7층의 천장에 꽂혔다.
저것만 무너지면, 봉명인이 나타날 터.
[죽어라, 어리석은 것들!]
그리고.
기이이잉!
봉명성 바깥.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귀무(鬼霧)가 서리기 시작한다.
전음부를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군. 섭명함의 전송 기능을 준비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란이와 얘기해 본 바, 내가 가는 것보다 녀석을 보내기로 했다.]
쿠구구구구!
귀무의 안쪽에서, 창백한 손이 뻗어 나왔다.
음산한 귀기가 허공에서 흘러나온다.
[녀석이 전황을 보더니, 자기가 정리할 수 있겠다고 하더군. 란이를 잘 지켜다오.]
그 말을 끝으로 송진은 전음부를 껐다.
푸확!
직후.
귀무에서, 익숙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반인반룡.
이제는 해룡족의 푸른 장포가 아닌, 흑색귀골곡 특유의 흑색 마의를 입은 모습.
그리고, 200년 새에 결단 중기에 오른 서란이, 이쪽을 쳐다보며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오랜만입니다, 서 선배님. 그리고 고명은 자자하게 들어왔습니다, 원립 선배님.”
원립이 파초선을 내리치려다 말고, 서란을 보며 두 눈에서 혈광을 뿜었다.
[호오… 너는…!]
“해룡족의 혼혈이자, 대청색귀골곡의 문하제자, 서란이라 하옵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원립이 광소를 터트린다.
[호풍진혈변으로 제련한 해룡왕의 피가 말하는구나. 네놈, 왕손(王孫)이 아니더냐?]
“부끄럽지만, 왕의 후손이긴 하지요.”
[그래, 좋구나. 너 말이다. 혹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원립이, 입맛을 다시며 서란을 쳐다보았다.
서란은 잠시 그의 시선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원 선배께서 착각하시는 게 크게 세 가지 있어.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호오, 읊어 보거라.]
“첫째, 저는 이미 스승이 있는 몸으로 선배의 제자가 될 수 없는 몸입니다.”
서란이 손가락을 하나씩 피며 설명을 이었다.
“둘째, 저는 당신처럼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서은현 선배를 도와 당신을 죽이러 온 것입니다.”
원립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 핏빛 파초선을 서란을 향해 들었다.
“셋째.”
그리고, 서란이 비웃음을 흘리며 세 번째 손가락을 올렸다.
“당신이 왕에게서 훔쳤다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공법의 진짜 이름은, 호풍진혈변이 아닙니다.”
까딱!
서란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세 개의 손가락을 동시에 굽혔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원립은 파초선을 들려던 자세에서, 그대로 서란을 향해 무릎을 꿇어 버렸다.
[…? 뭣…?]
“호풍혈단변(呼風血團變)이 그것의 진짜 이름이지요. 당신은 왕에게서 그것을 훔쳐 내고, 왕의 자비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서란이 귀기를 끌어올렸다.
원립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왕께서 일부러 그것을 당신에게 아닌 척 넘겼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군요. 제 스스로도 자신이 왕의 꼭두각시였다는 걸 모르다니, 딱할 지경입니다. 원립 선배님.”
[이, 이게… 무슨…?]
그랬다.
원립은 제 스스로가 서휼의 호의를 이용한 것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으나.
그는 저도 모르게 서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해룡 놈! 혈목자께 무슨 짓이냐!”
막리세가의 가주 막리황천과 막리세가의 일원들이 원립에게 달려 나갔다.
진루연천처럼, 원립의 갑작스러운 처형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하지만.
서란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입 닥쳐라, 이 가축 놈들. 네놈들이 감히 내게 말을 걸 격이 된다 믿느냐? 해룡족이 비승하지 않았으면 해룡족의 눈을 피하느라 땅 밑에서 시체나 파먹었을 것들이…. 입을 닥치고, 진정한 주인의 명에 따라 원립의 다른 노예들을 막아라.”
“으, 으읍…!”
서란의 명에, 막리황천과 막리세가인들은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된 상태로 다른 배신자들을 막아섰다.
서란의 눈길은, 어느새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동방의 군주와 그의 수하들에게도 닿았다.
“막리세가가 도망친 가축들이 전부 모인 곳인 줄 알았는데. 다른 놈들도 있었군. 네놈들은 어딜 가느냐? 썩 이곳에 와서 왕손 서란의 말을 받들라!”
“끄으으으읍!”
아까 전, 만리민랍에게서 섭명함의 주포를 빼앗아 원립에게 가져다준 흑색 붕대의 군주가, 서란의 말에 그대로 땅에 떨어져 기어 다녔다.
[으… 오오오오오오오!!!]
우득, 우드득… 우득!
그리고.
서란의 명에 억눌려 있던 원립이, 원영기의 수행을 뿜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원…영…기… 수사를…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녀석은, 서란의 명에 저항하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여전히 기운은 강대했으나, 그 강대한 기운의 절반 이상을 서란에게 저항하는 데에 쓰는 듯했다.
“놈이, 해룡족의 피가 깃든, 호풍혈단변을 익힌 저 육신으로 갈아타지 않았다면 저라고 해도 방법이 없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오히려 편해지는군요.”
서란이 나를 보며 웃었다.
“본질적인 수행의 차이가 있는지라 완전히 잡아 둘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의미 있게 방해는 가능합니다. 선배님, 잡으시지요.”
나는 서란의 미소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제야 서휼이 그토록 서란을 질기게 죽이려 했는지.
나는 이제야 이해했다.
원립은 언제고 서휼의 피를 이용하는 호풍진혈변의 공법을 익힐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하계에 남은 왕손 서란은 그 자체만으로도 원립의 존재에 약점이 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