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17화 (117/185)

네가 밟아온 것 (5)

‘이건 분명….’

내 눈앞에 있는 해룡궁의 전체적인 구조와,

봉명성 최상층의 숨겨진 밀실에서 보았던 해룡족의 주술진.

그 구조가, 어째선지 겹쳐 보였다.

한참 동안 해룡궁을 눈에 담던 나는, 다시 내려와 서란에게 물었다.

“서 도우, 혹, 해룡궁의 구조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

“아, 해룡궁의 구조에 대해서 말이십니까?”

서란은 허공을 손으로 쓸며, 주변에서 흐르는 영력을 어루만졌다.

“선배님께서도 현재 느끼고 계시듯이, 이 해룡궁에는 늘 서기(瑞氣)와 편안한 영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군.”

확실히, 해룡궁이 있는 이곳은 늘 기이한 서기가 맴돌았으며, 은은한 성스러움마저 어느 정도 느껴지고 있었다.

동시에 해룡궁의 영력을 흡입하면 어쩐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해룡궁 자체가 일종의 주술을 이루고 있으며, 용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주술은 해룡궁에 거하는 해룡족들이 늘 정갈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할 수 있도록 정신을 맑게 각성시키는 용도의 진이라 하셨습니다.”

‘정신 각성의 진…?’

나는 봉명성 숨겨진 방에 있는 진을 떠올렸다.

‘구조가 거의 비슷하니, 효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분명 봉명성의 진 역시 정신과 관련된 진일 터….’

나는 의문에 빠졌다.

‘왜… 봉명성에 정신과 관련된 진이 남아 있는 것이지?’

도대체 해룡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추후에 송진에게 이 진을 아느냐고 물어보긴 해야겠어.’

“그나저나, 어서 해룡궁을 뒤져 보지요.”

서란은 주변을 둘러보며 앞장섰다.

“이곳은 외궁이라 여러 복잡한 진법이 펼쳐져 있지만, 내궁으로 들어가면 진들은 거의 없으니 내궁에서 법보나 영약 등을 찾아보면 될 듯합니다.”

“알겠네.”

나는 서란의 뒤를 따라, 외궁의 진법을 돌파하고 내궁으로 들어섰다.

해룡궁은 중심부로 갈수록 더욱 더 상서로운 기운과 성스러운 힘이 강해지는 듯했다.

‘정신이 또렷해지는군….’

점차 의식이 맑아진다.

도대체 이곳에는 뭐가 있을까.

서란과 나는 중간에서 갈라져서 해룡궁 곳곳을 뒤져 보기로 했다.

‘곳곳에 금제가 걸려 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미궁에 빠지는 진법 등은 전부 외궁에 있었으나, 내궁의 전각을 지키는 금제들은 곳곳에 펼쳐져 아직도 작동 중이었다.

‘하나같이 만만한 금제는 아니군. 무형검으로 두, 세 번은 쳐야 풀릴 만한 것들이고….’

하지만 금제가 있다는 말은, 안에 쓸 만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어디부터 찾아볼까….’

내가 내궁 안쪽을 돌아다닐 때였다.

‘음?’

나는 문득, 금제가 쳐진 수많은 내궁의 전각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금제가 펼쳐지지 않은 전각 하나를 발견했다.

그 전각은 다른 전각들보다 큰 축에 속했으며, 금제는 없었지만 전각 전체에 어떠한 주술문들이 새겨져 영기를 뿜고 있었다.

분명 심상치 않은 곳이었지만, 이상하게 이곳만 금제가 없다.

나는 기이함을 느끼며, 전각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움찔!

문을 열어 들어간 나는, 전각 안쪽에서 확 풍겨 오는 피비린내에 몸을 떨었다.

‘여기는….’

전각의 안쪽은 넓었다.

전각의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책장이 있었고, 가운데 부분에는 넓은 천체도(天體圖)가 그려져 있었다.

천체도에는 28수에 해당하는 별자리,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에 해당하는 자리.

그리고 해와 달이 수놓아진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천체도의 위쪽에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르는 피가 흩뿌려진 채 말라붙어 있어 자못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도대체….’

더군다나 가장자리에 있는 책장들은 멀쩡했지만, 책장 안에는 책이 없었고 시커멓게 탄 숯덩어리들만 잔뜩 올려져 있었다.

책장들은 잔뜩 그을려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가 이곳에 살던 이를 죽이고, 전각 주인의 책을 전부 불태워 버린 건가?’

제일 유력한 후보는 아무래도 서휼이었다.

그 자의 비틀린 심상으로 볼 때, 충분히 이런 짓을 하고도 남았으니까.

‘금제가 없는 이유는, 이곳에는 아무도 없어 굳이 금제를 걸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나 보군.’

누군가의 범죄 현장을 목격한 것 외엔, 딱히 소득이 없다.

내가 다시 전각을 나가려 할 때였다.

싸아아―

음혼귀주문을 수련한 나의 감각에, 뭔가가 잡혔다.

저주를 수련하는 음혼귀주문을 대성해 버린 나만이 알 수 있는 감각.

이것은….

‘저주?’

누군가가, 이곳에 진득한 저주를 남겨 놓고 갔다.

그때였다.

기이잉!

내 내단이 갑자기 진동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깃들어 있던 진득한 저주가 내게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나는 당황하며 음혼귀주문의 저주문으로 저주를 상쇄하려 했으나, 저주는 이미 내게 들러붙은 후였다.

그리고.

―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곳에… 찾아올… 반요(半妖)는….

지독한 원념이 담긴 목소리.

―서란…밖에… 없으니….

고통에 가득 찬 그 목소리가 말한다.

―믿고… 맡기도록… 하마…. 란아, 천체도의 밑을… 들어 보아라….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목소리는 끊겨 버렸다.

피시식―

내게 들러붙은 저주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약간의 두통만을 내게 남긴 후 소멸해 버렸다.

‘천체도의 밑을 들어 보라고?’

천체도가 그려진 바닥은 옥석으로 이뤄진 석장판이었다.

나는 정순지력을 양 팔에 잔뜩 불어넣은 후, 그대로 옥판 사이에 손가락을 욱여넣은 후 힘을 주었다.

우극, 우그그그극!

점차, 옥판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옥판의 밑에는 다 썩어 가는 가죽 서책이 하나 남아 있었다.

아무런 영기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그냥 평범한 물건이었으며 순수하게 목소리 주인의 일기였던 모양이었다.

‘의식 영역에도 안 잡혔던 물건인데….’

아무래도 이 옥판이 뭔가 의식이나 영기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았다.

나는 어검술로 서책을 내 앞으로 끌고 온 후, 다시 옥판을 내렸다.

쿠구구!

옥판은 상당한 무게였기에, 나는 땀을 훔쳤다.

서책에는 요족어로 평범하게 ‘일기장’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이 자가 서란에게 자신의 일기장을 전달하려 한 거지?’

나는 일기장에 특별한 법술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 법술도 요술도 걸리지 않은, 정말로 그냥 일기장이었다.

사락, 사락.

일기장의 주인은, 전횡(奠澋)이라는 해룡족의 원영기 장로 중 한명으로, 해룡족의 천문관(天文官) 직을 맡은 자였다.

일기장의 내용은 보통 전횡이 천문관 업무를 보며 특이한 천문 현상을 발견한 것, 혹은 그날 뭘 먹었는지,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등에 대한 일상 기록이 대다수였다.

―천원기 원로님과 오늘 담소를 나누었다. 세계의 끝을 계속 관측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지 않으냐고, 두통에 좋은 ‘단(丹)’을 섭취하라고 충고해 주셨다.

그는 해룡족의 원로를 만날 때, 천인기를 보통 ‘천원기(天圓期)’라고 표기하였다.

요족들은 천인기 대신 천원기라는 표현도 줄곧 쓰고는 했는데, 보통 천인(天人)이라는 표현을 싫어하는 이들은 요족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인족을 잡아먹고는 하는 이들이었다.

실제로 전횡은 인간 단약도 자주 먹고는 했던 이였다.

―호풍응단변을 익힌 가축들이 만들어 낸 단을 뽑아 섭취했다. 역시 효용성이 뛰어나다. 머리가 아픈 것이 사라졌다.

―왕께서 더욱더 뛰어난 가축공법도 만드셨다는 소문이 들린다.

―해룡족의 진혈을 가축에게 주입해 가축의 수행을 갈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가축을 해룡족이 전쟁에서 사망했을 시 놈의 육신을 그릇으로 한 번에 한하여 부활할 수 있게 하는 뛰어난 공법이라고 한다.

‘쯧….’

아무리 다른 종족이라지만, 타 종족을 가축화시켜서 저 정도로 착취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

나는 해룡족의 일화에 혀를 차며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사락.

그리고 그렇게 일기장을 넘기던 중, 나는 어느 부분에서 멈칫했다.

―오늘은 용왕과 나를 비롯한 천문관들, 그리고 해룡족의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왕께서는 우리가 제출한 천문 기록들을 원로들에게 설명하며, 그분이 생각하고 있던 어떠한 추측을 말씀하시었다.

―그것은 정말 소름 돋는 추측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의 생령은 결국 비승을 해서 세계를 벗어나야만 존엄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천원기 원로 한 분이 왕의 말에 반대하시었다. 너무 허황된 추측이라는 말이었다. 나 역시 소름은 돋았지만, 왕의 말이 조금 허황되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 것이 많은 회의였다. 세상의 끝을 더욱더 자주 들러 천문을 자주 관측해 보아야겠다.

그날의 일기는 그것이 끝이었다.

‘추측? 무슨 추측을 말하는 거지?’

서휼은 도대체 천문 기록을 보고 뭘 생각한 것일까.

나는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이후 몇 장은 전횡의 일상 기록이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일기장의 한 부분에서 멈췄다.

―용왕께서 따로 관측하신 것이 또 있으신 모양이었다.

―왕께서 원로분들과 우리 천문관들을 불러모아, 그분이 말씀하신 추측에 대한 가설을 내놓으셨다.

―재미있는 가설이었다.

―이 세계에는 낮과 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천지영력이 음과 양으로 나뉘어 순환하듯.

―거시적 차원에서 장대한 영력의 기류가 음양으로 나뉘어 이 세계를 회전하기에,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착각이 될 뿐, 우리의 세상에는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께는 불경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리 천문관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해와 달이 세계를 공전하는데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니!

―우리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원로분들께서 대노하시었다. 결국 우리는 원로원주님의 노갈성을 들으며 꾸중을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형을 받을 수도 있는 무례였으나, 왕께서는 역시나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용서하시었다.

―왕께서는 조금 허황된 상상을 하시는 것 같지만, 그 드넓은 자비와 마음만큼은 정말 존경스럽다. 왕께 죄송스러울 뿐이다.

‘해와 달이 세계를 공전한다… 라.’

아무래도 이 세상은 평평한 형태로 된 만큼.

거대한 태양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지동설이 아닌, 세계를 중심으로 해와 달이 움직이는 천동설이 정설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서휼의 발언이 신경 쓰였다.

‘낮과 밤이 실재치 않는다면, 천동설도 지동설도 아닌 세계란 건가?’

나는 의문과 함께 책장을 넘겼다.

―최근 서란이라는 반인반룡 꼬맹이가 해룡궁을 헤집는다.

―왕의 혈통만 아니었다면 바로 내쫓아 버리는 건데, 늘 내게 달라붙어 짜증 나게 한다.

―왕께서도 늘 웃는 얼굴로 서란을 대하지만, 눈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분께서도 늘 녀석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얄궂게도, 그 짜증 나는 꼬맹이는 왕을 가장 잘 따르지만, 녀석은 알고 있을까.

―오히려 왕께서 그놈을 따돌리는 상황을 가장 많이 조장하고 계신다는 것을?

―빨리 놈이 제 스스로 그걸 깨닫고 해룡궁에서 나가 버렸으면 좋겠다.

“….”

사락.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우리 천문관들은 세계의 끝으로 가 제대로 각을 잡고 해와 달의 공전을 관측해서, 왕의 추측을 깨 버릴 계획이었다.

―원로 분들 중에서도 몇몇 분은 은근히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셨다. 왕의 허황된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시는 듯했다.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니, 그건 수많은 업적을 세운 왕께는 죄송스럽지만, 아무래도 왕께서 천문에 대해 잘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리라.

―오늘부터 몇달 동안은 일기를 쓰지 못할 것이다. 쭉 세계의 끝에 틀어박혀 관측을 반복해야 하니까.

―가축들의 단을 많이 챙겨가야겠다. 세계의 끝을 계속 마주하면 두통이 심해지니.

사락, 사락, 사락.

다음 장부터는 백지였다.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던 나는, 문득 다시 일기가 쓰인 부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

이 부분의 필체는 굉장히 어지러웠다.

그리고 전횡이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일기를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 손으로, 해와 달의 관측에 성공했다.

―이럴 수가. 너무나 기이한 결과였다.

―해도 달도! 둘 다 세계를 공전하지 않는다!

―두 천체는 하늘의 한 자리에 붙박이듯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동쪽과 서쪽에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조차 착시 현상이었다!!!

―해와 달의 실재 위치는 남쪽, 우리 해룡족의 본거지와 가장 가깝다.

―왕께서 내놓은 가설이 맞았다!!!

―해도 달도 공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낮과 밤이 없고, 우리가 낮과 밤이라 생각하던 것은 그저 천지영기의 음양의 흐름이 거시적으로 순환하는 결과일 뿐이었다!

전횡은 손을 덜덜 떨면서 글을 쓴 것인지, 글씨체가 굉장히 난잡했다.

나는 전횡의 글에서, 전횡이 굉장히 공포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왕의 가설이 증명되었다면, 이 세계는 뭐란 말인가?

―이 세계의 형상이란, 너무나도 흉측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런 불길한 곳에서 숨을 쉬고 수련을 하며 살아갔다는 것인가?

―우리가 구더기와 대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는 왕의 추측을 부정하려 관측을 시작했지만, 결국 나와 다른 천문관들의 천문 관측은 왕의 가설을 훌륭히 증명했을 뿐이었다.

―원로회에서 나를 부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천문관들도 전부 모일 것이다. 두렵다. 나는 괜히 이런 흉측한 사실을 증명해 버린 것이 아닌가?

사락, 사락.

다음 장, 그 장의 필체는 이전 장보다 조금 안정되어 있었다.

―참수형(斬首刑)이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확실히 우리가 살 곳이 아니다.

―나와 천문관, 원로원 전원이 왕의 말에 따라, 모든 종족이 한 번에 비승해야 한다는 왕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왕께서는 과연 자애로우시다.

―다른 종족들 역시 존엄을 챙길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

“참수형…?”

도대체 무슨 뜻인가.

뭔가 전횡이 저만 아는 사실을 일기장에 써 놓은 것 같았다.

‘뭔가의 은어인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게 없다.

사락.

나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천문관의 결단기 막내. 아직 둔갑술도 펼칠 줄 모르는 어린 녀석이, 대륙으로 잠시 나갔다가 인족 마도 수도자에게 잡혀 죽었다 한다.

―왕께서 그 수도자를 쫓아가 훈계하고 주검을 받아 오셨다. 역시 인족들은 하나같이 음험하고 믿을 수 없는 쓰레기들이다.

―이놈들은 가축으로 쓰는 게 제일 좋은 것들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이놈들로 만든 단약이 제일 효험이 좋지 않은가!

―그리고 세계의 끝을 관측하면 머리가 아픈 것 역시, 가축들의 단이 제일 효과가 좋다. 물론 이제는 두통용으로 쓰일 일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끝을 오래 직시하면 두통이 왔던 이유, 그것은 대경계급의 진선(眞仙)과 나도 모르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임이 밝혀졌으니.

―꼭 진선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세계의 끝을 관측한다는 것은 진선의 의지를 계속해서 목도하는 것이니, 상단전이 알게 모르게 부하를 받는 것이다.

―이제 우리 천문관들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천문 관측을 멈추었다. 그러니 더 이상 단약도 필요 없을 것이고, 단약들은 비상용 약재로 쓰일 터이다.

“진선…?”

문득, 이전의 마을에서 아이에게 읽어 주었던 설화집이 떠올랐다.

설화집에는, 해와 달이 눈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최근 계속 기분이 나쁘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사실을 내 손으로 관측했기 때문일까.

―그 사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사실 나도 모르는 거대한 존재와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두렵다.

―그 존재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근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정신이 좀먹히는 것 같다.

―나뿐이 아닌, 대다수의 천문관들의 성격이 조금씩 폭급해지는 것이 보인다. 그들 역시 늘 안색에 공포가 서려 있다.

사락.

―이런 미친!

―괴군, 그 이상 성욕자 늙탱이가 사육장을 습격했다! 사육장을 관리하던 왕족은 물론이고, 사육장에 놀러 갔던 천문관 동지들도 전부 그 괴물에게 잡혀가 생체괴뢰로 개조당했다고 한다!

―사육장이 붕괴하고, 가축들이 전부 탈출했다고 한다.

―왕께서 달려나가시어 괴군을 추적하려 했지만 달아난 후라고 했다.

―너무나 속 쓰리고 원통한 일이다. 비상 약재들이 전부 도망치다니!

―최근엔 천문을 관측하지 않아 두통은 없다지만, 너무나 뼈가 아픈 손실이다.

사락, 사락.

―…최근 분위기가 이상했다.

―흑색귀골곡과 사이가 안 좋아져, 그들과 다투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난히 천문관 동지들이 자주 습격당하거나, 실종이 잦다.

―지난번 결단기 천문관 막내를 시작으로, 괴군의 습격부터 시작해, 유난히 천문관 동지들이 많이 습격당하는 것 같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실종된 천문관 동지도 적지 않다.

―아무래도 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우리의 천문 관측을 응원하시며 왕의 허황된 추측을 반대하셨던 원로분들.

―그분들이 우리를 위험한 곳으로 내모는 곳일 확률이 높다. 천문관 동지들은 이 사실을 토의하며, 왕께 이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내가 대표로 왕을 찾아가 이 사실을 말했다. 왕께서는 믿음직한 얼굴로 잘 말해 주었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분께서 우리를 비호하겠다고 하셨다.

―특히 나는 해와 달을 직접 관측한 뛰어난 천문관이니, 단단히 비호할 것이라 일러 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관측한 사실로 인해 천문관은 물론이고, 천원기 원로분들조차 최근 인상이 변했다.

―그런 공포스러운 진실에는 원영기나 천원기에 구분이 없을 텐데도, 왕께서는 늘 자애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

―역시 우리의 왕이다.

사락, 사락….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다음 장부터 전횡의 필체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천문관 동지 중, 이제 남은 것은 나밖에 없다.

―전부 흑색귀골곡과의 전투 중에, 혹은 괴군에게, 혹은 또 다른 기타 등의 재난으로 인해 소리소문없이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분명 왕께서 비호하겠다 하셨거늘, 어찌 이리된 것이란 말인가?

―나는, 불경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너무나도 무서운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왕과 반대하셨던 원로 분이 아닌, 왕께서, 직접 진실을 아는 천문관 동지들의 실종을 주관한다는 추측.

―그럴 리가 없다. 그분은 자애로운 분이시다. 걱정하지 말자. 괜한 걱정일 뿐이다.

사락.

그리고 바로 다음 장.

그곳의 필체는 완전히 어그러져 있었으며, 필체 자체에서 분노가 새어나왔다.

―왕이시여!

―왕께서 진실을 알고 있는 천문관 동지들을 죽음으로 밀어넣고 있다!

―나도 곧 죽을 것이다!

―나를 단단히 비호하겠다는 건, 내가 써먹을 곳이 많으니 마지막까지 뽑아 먹다가 마지막에 죽이겠다는 의미였을 뿐.

―나는 죽을 것이다. 비승에 참여치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도대체 왜 당신은 우리를 이리 내치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해룡족에 해가 되는 것인가?

―그럴 수 있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워, 천원기 원로분들조차 간혹 괴로워하시니까. 원영기에 이른 우리조차 다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니까.

―그래, 해룡족을 위한 것이라면….

―종족을 위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자.

분노로 시작되었던 그의 필체는, 일기를 쓰며 나름 마음을 정리한 탓인지 다시 안정되어 있었다.

….

사락.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편해졌다.

―언젠가 죽는다는 걸 받아들이고만 있자.

―죽음을 받아들이니, 오히려 삶이 새로워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이 소중한 삶, 해룡궁의 정경….

―그리고, 나는 어쩐지 나와 비슷하게 왕의 주도 하에 따돌림을 당하는 서란.

―그 아이와 최근 친해졌다. 동병상련일지도 몰랐다.

―그 아이는 영특한 아이였다. 이전까지는 종족과 혈통의 편견에 빠져 보이지 않았던 그 아이의 총명함이 보였다.

―귀여운 것 같으니. 이 녀석이 천문관에 들어왔다면 잘 대해 줬을 텐데….

―왕께서는 이 아이를 비승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대신 괴군과의 싸움에서 다 박살 난 흑색귀골곡의 폐함. 그곳에 아직도 갇혀 있을 해룡족 전사들의 혼을 해방시키는 임무를 맡기신다 하셨다.

―역시… 왕은 냉정하실지언정 해룡족을 생각하시는 분이다.

―서란, 이 아이 역시 안타깝지만… 종족을 위한 일이니, 희생해야 할 터이다.

―나 역시, 곧 종족을 위해 죽을 것이다. 왕이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미세하게 변하고 있다.

―아마 승천문이 열리기 전에 죽겠지….

이제 전횡의 일기는 거의 끝부분에 가까워져 있었다.

사락.

그리고, 다음 장을 넘겼을 때였다.

‘이건….’

피.

다음 장은, 말라붙은 피로 쓰여 있었다.

―서휼!!!

―네놈을 증오한다!

―우리 해룡족 전원이 그에게 속고 있다!

―그자는 왕(王)이 아니다, 그저 옹졸한 범부(凡夫)일 뿐.

―서란아, 네게 이 말을 남긴다. 너라면 언젠가 이 세계에 남아서도 해룡궁에 다시 돌아올 터이니, 내 일기를 읽고 서휼의 진면목을 알아야 한다.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그가 입에 담은 것들 중 어떤 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

―그자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괴군 이상의 미치광이이며, 마음이 망가진 괴물이다!

―해룡족조차….

―서란아, 지금 그가 나를 죽이러 오고 있다. 길게는 말을 남기지 못하겠다.

―추후에 이 일기를 꼭 보아 다오!

―지금껏 말벗이 되어 주어 고맙다.

사락….

그것이, 일기의 마지막 장이었다.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던 일기의 내용들.

나는 전횡의 일기장을 덮었다.

‘흉측한 세계의 형상?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 서휼의 진면목….’

여러 가지 진실들이 혼란스럽게 머리를 맴돈다.

‘원립조차도, 서휼의 영향을 받은 녀석이다.’

서휼, 그자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탁.

내가 일기장을 덮었을 때였다.

꿈틀.

“음…?”

꿈틀, 꿈틀….

일기장이,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뭣…!?”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고, 영기가 깃들어 있던 것 역시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리고.

푸확!

일기장의 틈 사이로, 푸른 손이 책장의 틈을 빠져나와 내 양팔을 으스러져라 잡았다.

쿠구구구구!

갑자기 전신이 무거워진다.

주변의 천지영기가 나를 압박하며, 이 자리에 고정한다.

“이게 무슨….”

그리고, 자애로움과 상냥함이 듬뿍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

서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일기장을 덮었다는 건, 서란 네가 파공주를 쓰지 않고 살아남아 어떻게든 해룡궁에 도달했다는 뜻이겠지. 전횡은 내 앞에서 일기장을 잘 숨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단다.]

“뭣…!”

[안타깝지만, 란아. 네 역할은 거기까지란다. 섭명함에 갇힌 해룡족 전사의 혼을 해방하는 것이 네 마지막 쓸모였고, 네가 이 이상 살아 있는 것은 방해만 될 뿐이니… 그만 잠들거라. 어미와 아비 곁으로 가거라.]

우득, 우드드득!

나는 안간힘을 다해 서휼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해룡궁 전체가, 갑작스레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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