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19)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전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어…?”
살아 있는 것은, 수도자들 뿐.
천색성 전체가 무너져 있었고, 모든 민간인들은 백골(白骨)만을 남긴 채, 그들의 생명력은 하늘로 올라가 허공에 뭉쳐져 있었다.
주변은 그들의 피로 가득했다.
그나마 수도자들은 멀쩡한 것 같았으나, 연기기 수도자들 중 약한 이들부터 피를 토하더니, 그들의 단전이 펑펑 터져 나가, 단전에서 법력과 생명력이 뽑혀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만… 둬라…!”
쿨럭, 쿨럭!
나는 피를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이 욱신거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김영훈은 나보다 더욱더 피를 많이 뿜어내면서, 겨우겨우 일어서고 있었다.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고함을 지르며 무형검을 휘둘렀으나, 정순지력도 내단의 강기들도, 거의 다 써 버려서인지 무형검은 허공에서 흩어져 버릴 뿐이었다.
원립은 더 이상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혈제의 진을 발동시키며, 수많은 인간들의 생명력, 수도자들의 법력과 생명력 등을 모아, 자신의 혈영이라는 것에 흡수시키고 있었다.
“커헉, 컥…!”
나는 피를 왈칵 토했다.
‘다, 다른… 사람들은…?’
수행이 낮은 이들부터 진의 영향을 받는 것인지, 저 멀리 북중호와 북향화, 청문령 역시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방금 원립이 흩뿌린 일격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들 역시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자리에 모였다.
“이제… 끝인가 봅니다.”
“원영기 수도자… 하하, 그런 걸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소.”
북중호와 청문령이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의 원립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제가, 목숨을 걸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단악검법 최후절초.
우공이산이라면…!
최소한 저 원영기 괴물에게 상처는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나도 목숨을 걸지.”
김영훈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의 배에는 구멍이 몇 개가 뚫려 있었다.
축기기 수도자도 아닌 그가, 그 정도 상처를 입고 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미 죽은 목숨, 저 빌어먹을 놈에게 한 방은 먹이고 죽겠다. 나와 은현이가 목숨을 걸면, 분명….”
그때였다.
문득, 김영훈은 북향화와 눈을 마주쳤다.
북향화가 뭔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인 듯 싶었다.
그녀의 전음을 들은 김영훈은 흠칫 놀라는 듯했다.
‘뭐라고 한 거지?’
독순술로 입술을 읽어 내려 했지만,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눈 앞을 가려 제대로 읽지 못했다.
김영훈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북향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화를….’
그때였다.
북향화가 결인을 맺었다.
부우웅!
벌 괴뢰가 잔해들 사이에서 이쪽으로 날아왔다.
덜걱, 덜거걱!
벌 괴뢰는 아까의 충격에 어딘가 망가졌는지, 덜걱거리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웅!
그녀가 다시 결인을 맺자, 우리 주변으로 보호법진이 펼쳐졌다.
방음법술도 걸려져 있는 것을 보아, 우리의 대화를 원립이 엿듣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는 듯했다.
원립은 잠시 우리를 내려다보았으나, 별 신경 쓰지 않고 혈제진을 계속 발동시켰다.
벌레들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듯.
“청문 선배님께서 진을 약화시켜 주신 덕분에, 이 괴뢰로 한 번은 공간 전송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햐, 향화 선자! 정말 다행입니다! 어서, 어서 그걸 타고 나가십시오!”
그래, 분명 이웃 성인 연도성에 벌 괴뢰의 공간 좌표를 놔두었다 했었다.
이웃 성까지 오면 원립이 쫓아오기 힘들 것이다.
연도성은 나름 벽라국 안쪽의 성으로, 공묘세가의 영지와도 붙어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향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촤아악, 촤아악!
이제 혈제진의 힘이 강해져, 민간인은 물론이고, 중저계 연기기 수도자들의 단전이 터지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고, 연기기 극성인 수도자들 역시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저희밖에 없는 것 같군요. 하지만 방금 영훈 님과 얘기를 나눴을 때, 영훈 님은 죽음이 확정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면 저희 중 아버님, 저, 청문 선배님, 그리고 당신밖에 벌 괴뢰로 탈출할 수 없단 것이겠죠. 하지만 지금 괴뢰의 상태로 보아, 한 번 공간 전송을 하면 망가질 겁니다.”
“그, 그럼….”
향화는 청문령을 바라보았다.
“청문 선배님께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청문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다. 나는 이미 살 만큼 산 늙은이고, 수명도 거의 남지 않았는데, 남은 수명 동안 내 벗들을 버려두고 온 악몽에 사로잡혀 지내라는 게냐. 가문에서 할 일도 전부 완성했으니, 이 늙은이 귀찮게 하지 말고 나보다 젊은 놈 중에 아무나 하나가 가거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북향화가 펼친 보호법진을 바로 나가 버렸다.
쿠구구구!
그리고, 그는 최후까지 저항하겠다는 듯, 천린수해성의 공법을 끌어올리며 원립을 노려보았다.
청문령의 주변으로 녹빛의 영기가 피어오르며, 진도(陣圖)를 그리고 있었다.
“이 늙은이는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쿠구구구구!
청문령의 진도가 수변으로 녹빛의 나무 형상을 피워올렸다.
나무들은 자라나며 서로 얽히더니, 한 그루의 거목이 되어 원립으로부터 우리를 가렸다.
김영훈은 씨익 웃으며 다 부러진 도를 잡고 그 역시 보호법진 바깥으로 나갔다.
“어차피 죽은 목숨. 더 이상 뭘 얘기해야 하겠느냐! 난 가 보련다!”
타닷!
그는 전신의 기운을 격발시키며, 능광도와 함께 청문령이 만들어 낸 거목 위로 올라갔다.
거목 위로 한 마리 황금빛 새가 내려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김영훈을 따라 바로 보호법진을 나가려 했다.
그리고.
터억!
북중호와 북향화가 동시에 나를 붙잡았다.
“뭘 하십니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씨익 웃고는 나를 잡아당겼다.
“어딜 가는가, 사위.”
“당신이 사는 게 역시 좋을 것 같아요.”
“헛소리 하지 마십시오. 저와 영훈 형님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원립에게 상처라도….”
“방금 영훈 님과 전음을 나누며 들었는데.”
북향화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분이 말하시기를, 당신과 영훈 님 자신이 목숨을 걸더라도, 저 노괴에게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힐 확률은 희박하다고 하시더군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죽은 천색성 사람들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말일세, 사위.”
북중호는 진중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자네보다 더욱 더 오래토록 천색성에 산 우리가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이 성은 아버지에게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곳이고, 제게는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이 담긴 성입니다. 오늘 죽더라도 이곳은 떠나지 않을 거예요.”
“북 어르신! 향화 선자를 막아 주십시오!”
“시끄럽네. 힘도 다 빠진 것 같은데, 자네가 가게. 나도 내 아내와 함께한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이 없고… 딸애는….”
잠시 북향화를 쳐다보다 나를 쳐다본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까 나와 말이 끝났네. 자네를 살리기로!”
콰아악!
북중호의 법술이 내 몸을 잡았다.
나는 무형검으로 그의 법술을 뜯어 버리려 했으나, 힘이 다 닳아 버린 무형검으로는 그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부우웅!
“얌전히 살게나!”
벌 괴뢰가 내 몸통을 잡았고, 나는 피를 토하며 두 사람을 보았다.
“아, 안 돼! 이러지 마십시오! 햐, 향화 선자! 나는 사실….”
꼬옥!
북향화는 내게 다가와 나를 꼬옥 안아 준 후, 자신의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옥색 노리개를 내 품에 넣어 주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리고, 도착지에 제가 선물을 준비해 놨답니다.”
“으… 아아아아!”
투둑, 투두둑!
나는 북중호의 속박법술을 온 힘을 다해 뜯어 내고, 나와 북향화의 자리를 바꾸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죽어도 됩니다!! 나는 죽어도 시가….”
그리고, 북향화가 결인을 맺었다.
“안녕히 가세요. 당신.”
파아아아앗!
보호법진이 풀렸고, 벌 괴뢰가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멀리서 원립이 흠칫 놀라며 결인을 맺는 것이 보였다.
청문령의 거목과, 김영훈의 능광도가 핏빛 해일에 집어삼켜진다.
북중호가 백색의 범 형태의 법술을 사용했고, 북향화 역시 저물법기에서 수많은 법기들을 꺼내 대항하기 시작한다.
김영훈이 우공이산의 초식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남은 축기기 수도자들이 생명을 불태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북향화가 나를 잠시 돌아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벌 괴뢰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파아아아아앗!
* * *
피이이잇!
“크아아악!”
콰과광!
나는 벽라국 연도성의 앞에 떨어졌다.
벌 괴뢰는 공간을 넘는 도중, 더욱 더 몸이 망가진 것인지 그대로 산산조각 나 허공에서 박살이 나 버렸다.
“커헉! 컥….”
나는 피를 흘리며 몸을 지혈하고, 우선 바로 운기요상을 하며 내단에 내공을 욱여넣었다.
쿠구구구!
내단이 주변의 기운을 흡입했고, 빠른 속도로 내단 안쪽으로 공력이 차올랐다.
나는 손을 벌벌 떨며, 예전 북향화가 만들어 줬던 내 저물대에 손을 넣어 영석 몇 개를 꺼냈다.
우우웅!
나는 영석의 영기를 바로 흡수하며 내공을 더욱더 빠르게 흡수하였다.
얼마 후, 내공이 얼마간 차올랐다.
나는 강환 몇 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공력이 회복된 걸 깨닫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 했다.
천색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
내가 움직이자, 주변의 모래가 치솟아 오르며, 숨겨져 있던 진법들이 드러났다.
‘이건….’
진법의 가운데에서, 뭔가가 빛나며 솟아오른다.
그것은, 작은 목함이었다.
나는 북향화가 말했던 ‘선물’을 기억하며, 빨리 그 목함을 품에 넣고, 바로 허공을 박차며 천색성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제발, 제발…!’
빠르게 연도성이 다시 뒤로 멀어졌고, 주변의 풍광이 쉭쉭 뒤로 지나간다.
나는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로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갔다.
‘제발…!’
얼마나 달렸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피 냄새가 맡아졌고, 저 앞에, 천색성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천색성의 주변을 뒤덮었던 혈제의 진은, 사라져 있었다.
“제발…!”
나는, 천색성으로 달려갔다.
* * *
철퍽, 철퍽….
천색성은 피바다였다.
발 곳곳에 시신들이 채였고, 나는 양손을 덜덜 떨며 성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무너진 건물의 잔해 너머, 내가 찾던 이들을 발견했다.
“아, 아아….”
김영훈은, 여덟 조각으로 몸이 분해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청문령은, 혈목자의 성명법술인 혈목(血木)이 전신에 돋아나 죽어 있었다.
북중호는 목이 사라진 채, 단전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 있었다.
그리고, 북향화는….
“아, 아아… 아아아….”
살아, 있었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잔해를 헤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그녀의 단전이 있던 부분부터 시작해, 그 아래쪽의 몸은 완전히 없어져 있었다.
“햐, 향화… 향화….”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가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조, 조금만 기다, 기다려…. 내, 내가 하반신을, 찾아오겠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며,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경맥에 남은 정순지력이 조금이나마 남아 겨우겨우 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혈을 짚어, 고통이 느껴지지 않게 하고는 내 몸에서 강기를 짜내어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사, 살 수 있습니다. 하, 하반신을, 찾으면….”
그리고,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단전이 통째로 뜯겨 나갔는데, 어찌 산단 말입니까.”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서 수사.”
“향화…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을 살려….”
“서 수사.”
그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죽습니다.”
어쩐지 그녀는 죽을 때가 된 탓인지, 그 어떤 때보다 이성적으로 보였다.
“제 유언을 들어 주시지요.”
“아닙니다, 유언이라니. 당신은 죽지….”
“서 수사, 당신은… 정말 못난 사람이군요.”
“예…?”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서 수사의 위세를 이용해서, 제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어머니를 그리 대한 공묘천색 장로에게 복수도 하려 계획했습니다만.”
“….”
“그동안 저와 좋은 감정이 있었다고 착각하셨나 보군요. 제 아버님도 당신을 부추기니, 정말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전부 제 아버님과 사전에 얘기하여 서 수사를 제게 넘어오게 함이었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 털어놓으니, 시원하군요.”
“….”
“당신의 힘을 본 순간부터 당신에게 미인계를 사용해 정략 결혼을 할 생각을 했습니다. 법기 다루는 힘이 뛰어난 축기기 수도자였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결단기 이상의 수도자였다니. 아버님에게 말하고, 바로 당신을….”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향화 선자. 왜 그리도 냉정하게 말씀하십니까.’
왜 그간의 일들을 거짓된 감정이라 말하십니까.
‘왜 그렇게 냉정한 듯 말을 하면서….’
당신의 의념은, 나를 향하고 있단 말입니까.
향화의 의념은, 죽는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공포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의념은 선명한 연분홍빛이었고, 그 의념은 나를, 오로지 나를 뒤덮고 있었다.
향화의 의념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들려왔다.
“축기기씩이나 되셨으면서, 너무 순진하시군요, 서 수사.”
―당신에게 앞으로 마음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왕 찾아오신 것, 어쨌든 제 유언이나 들어 주시지요.”
―그래서 부디 이리 말을 내뱉는 점을 용서해 주세요.
“우선 제 아버지는 어머님의 묘 옆에 묻어 주시고, 저는 제 공방 밑에 묻어 주십시오. 가능하다면 천색성 사람들의 유해도 수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제 가지만, 당신이 저를 잊고 새 삶을 사셨으면 합니다.
“제 법기점에 있는 기타 법기들은 어차피 죽을 몸이니 서 수사가 가지시지요. 유해를 수습하는 대가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신에게 더욱 많은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용해서 미안합니다. 별로 당신에 대한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당신은 날파리들을 막아 주는 썩 훌륭한 도구였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라도, 부디 저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셔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시지요?”
―울지 말아요.
“…당신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법기도 못 만들고….”
―당신과 하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은데….
“손도 둔하며, 머리도 나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한테는 가끔 오만해지기도 하고.”
―둔한 만큼 따스하고, 머리가 나쁠지언정 부드럽고, 오만해질지언정 아래를 살필 줄 알고.
“이상한 면에서 쓸데없이 감성적이기까지 하군요. 그만 질질 짜십시오. 저는 사내답지 못한 자가 너무 싫습니다.”
―먼저 가서 미안합니다. 울지 마세요.
“이제… 어머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님의 앞에서, 당신과… 가약을 맺고 싶었습니다.
연분홍빛 의념은, 한 송이 꽃이 되어 나를 뒤덮었다.
“그럼, 안녕히… 계시길. 서 수사.”
―당신과, 다시 함께하고 싶습니다. 서 가가(哥哥).
뚝, 뚝뚝….
눈앞이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보이는 것은 연분홍빛의 의념.
그리고, 점차 의념이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몸이 점차 식어 간다.
얼마 후, 향화의 의념은 전부 흩어졌고, 그녀의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눈물을 닦자, 향화의 영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내 손은 그를 허망하게 통과할 뿐이었다.
그녀의 영체는 허공으로 날아가는 듯하더니, 어느덧 흩어져 버렸다.
나는 허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아직도 연분홍빛 의념이 넘실거렸다.
향화의 의념이 아닌, 나의 의념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연분홍빛의 의념은 피처럼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천색성을 가득 채운 핏물과 같이, 내 의념은 주변의 핏빛과 같이 시뻘겋게 물들어, 주변을 메웠다.
나는 향화의 시신의 손을 잡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툭, 투툭….
어쩐지, 눈물의 색깔이 시꺼멨다.
아니, 눈물의 색깔이 아니었다.
눈에서,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칠공에서.
아니, 전신에 난 모든 숨구멍에서.
시꺼먼 저주문(詛呪文)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음혼귀주문의 창시자는 108개의 저주문을 동시에 다뤘다고 한다.
쉬이이이―
하지만, 내 전신에서 뿜어지는 저주문의 개수는, 108개를 벌써 훌쩍 넘은 상태였다.
후우우―
내가 숨을 들이쉬자, 저주문들은 그대로 부스러져 법력이 되어 내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삽시간에 단전에 법력이 다시 가득 차올랐다.
나는 법력을 공력으로 바꿔 내단 안으로 집어넣었다.
스아아아아―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퍼져 나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회복된 공력으로 무형검을 띄워 올려 잡았다.
“놈의… 심장을 뽑아 오겠습니다.”
나는, 저주문이 섞인 시커먼 눈물을 흘리며, 등을 돌려 천색성 위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