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17)
여느 사막의 날씨가 그렇듯.
그날 역시 하늘은 창명했다.
“은현아, 그만 좀 돌아다녀라.”
나는 김영훈의 핀잔에, 내가 천색성 앞쪽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다만··· 조금 많이 떨려서.”
“뭐가 떨리냐? 이 웃기지도 않는 놈 같으니. 쯧쯧···.”
나는 한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맞을까.’
과연 한 사람에게 연심을 건네는 것이 맞을까?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죠? 세상에 쓰레기는 없다고, 그저 운명과 인연이 닿지 못한 것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 말은, 제대로 된 운명이 닿기만 한다면, 어떤 것도 아름다운 공예품이 될 수 있단 거죠. 안 그런가요?
나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의 곁에 있으면, 너무 편안합니다.’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해서, 가끔 꿈 같을 때도 있었다.
지금껏 운명에 버림받기만 해 온 나였다.
그녀의 말에, 나는 지금까지 닿지 못했던 제대로 된 운명이, 그 인연이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시간에 휩쓸려, 언젠가 사라질 인연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그 마음이 닿았다면, 서로 만나야지만 아름다운 무언가로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녀와 함께해서, 언젠가 다시 회귀하고,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그녀의 존재는, 지금껏 내게 있었던 모든 아픔과 상처를 봉합해 주는 듯했다.
사람은 상처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여태껏 700여 년 동안 인연을 잃어만 왔다.
또 잃을 것이다.
하지만.
―벽라국 사람들은 유리를 좋아해요. 사막에서 모래로 쉽게 만들 수 있기도 하고, 어두울 때는 진가가 드러나지 않지만 빛을 받으면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나는 먼지였고, 모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명백하게 내 빛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생애, 한 순간만 빛날 수 있을지라도.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다음 생의 당신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은 이미 너무 커져 버렸으니, 이번 생애에 불살라 빛을 내겠습니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마음은 정했나 보구나.”
김영훈이 옆에서 그런 나를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예.”
휘이잉!
청문령과 북중호가 저마다 비행법기를 타고, 천색성 성문 앞에 서 있는 내게 날아왔다.
“서 도우, 드디어 두 사람이 천년해로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 그동안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오늘 드디어 이어지는 건가?”
“자네 멱살을 잡고 딸과 가약을 맺게 하고 싶은 걸 그동안 꾹 참아 왔는데, 이제야 조금 진전이 있군.”
북중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예 이번 기회에 혼인도 해 버리게나. 아, 그렇지. 내가 혼례식 준비도 다 해놓겠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니, 자네 지금 감히 장인의 말에 토를 다는 건가?”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청문 수사, 여기 서 수사가 내 딸애한테 고백을 하면 둘을 연이의 묘소 앞으로 데려와 주시구려. 연이의 묘 앞에서 두 사람이 천년가약을 맺을 수 있게 아예 혼인식 준비를 해 놓지.”
“아, 아니···.”
“좋소. 얼른 가시구려.”
내가 그를 말리려 했으나, 청문령과 김영훈이 나를 붙잡았고, 북중호는 신난 표정으로 비행 법기를 타고 저 멀리, 그의 아내의 묘소로 날아갔다.
“하하, 이놈아. 순순히 잡혀 결혼이나 하거라.”
“아니··· 혼인이란 걸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당황해서 두 사람을 쳐다보자, 청문령과 김영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서 도우, 지금 자네와 북 선자를 10년 전에 봤는데, 그때부터 둘이 서로를 좋아했던 게 빤히 보였구만. 오히려 이제야 정식으로 정인이 되는 게 너무 늦단 생각은 안 하는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냐! 이미 천색성에선 너와 북 소저 다 부부라고 알고 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것 빨리 진짜 부부가 되는 게 낫겠지.”
나는 두 사람에게 붙잡혀 덕담 아닌 덕담을 잔뜩 듣고 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내가 두 사람에게 붙들려 있을 때였다.
부우우웅!
문득, 저 멀리 북향화의 공방에서 벌 괴뢰가 날아올라 다른 먼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벌 괴뢰의 손에는 공간 좌표로 쓰이는 진법 원반과, 작은 목함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뭐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저벅, 저벅.
저 멀리서, 북향화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험험, 그러면 난 이만 가 보마.”
“나도 가 보겠네. 서 도우, 그럼 잘 해 보시게나.”
김영훈과 청문령은 각자 나와 북향화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고, 북향화는 내 앞으로 왔다.
“서 도우, 하실 말씀이··· 어떤 건지 여쭤도 될까요?”
“그것이···.”
나는 머뭇거렸다.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오라버니, 더우신가요? 얼굴이 붉으시네요. 저도 서 도우한테 배워서 진맥 정도는 할 수 있는데, 해 드릴까요?”
“흠흠···.”
그녀는 나를 흉내 내며 내 얼굴을 보곤 밝게 웃었다.
‘이런 기분이었나···.’
그동안 이를 악물고 모른 체했던 그녀의 감정.
그리고, 이제는 내 감정이 그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뭔가 놀림 받는 것 같았지만, 썩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향화 선자도 더우신가 봅니다. 얼굴이 붉으시군요.”
“앗···.”
그녀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피식 웃었다.
우리는 서로 피식피식 웃었다.
“일단, 잠시 걸을까요, 향화 선자?”
“네, 은현 오라버니.”
우리는 천색성을 돌아다녔다.
천색성 곳곳의 가게의 일반인들, 수도자들이 우리를 보며 인사를 건냈다.
나는 그녀와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사 먹고, 천색성의 가게들을 구경했다.
북향화의 아버지인 북중호가 천색성을 관할하는 관찰수사였기에, 성벽에 올라가서 사막을 구경하기도 했다.
“사막은 정말 덥더군요. 공기가 건조해서 수계법술로 물을 만들려고 해도 쉬이 물이 모이지 않는 것이··· 정말 예전에 건널 때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예, 향화 선자가 물을 안 주셨더라면 필히 목이 바싹 타서 죽었을 겁니다.”
나는 북향화에게 처음 물을 마셨던 때를 기억했다.
물론 처음 물을 얻어마신 북향화는 지금의 북향화가 아니다.
‘아니지.’
사실 생각해 보면, 두 번째로 만나서 물을 마셨던 북향화 역시, ‘지금의’ 북향화는 아니었다.
나의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의 그녀였다.
‘어쩌면···.’
나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인연을 맺는 것을 두려워했고, 연심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은 사실 매 순간, 매 초 변한다.
그렇기에 1초 전과 1초 후의 인간도 사실은 다른 존재였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껏 매 회귀 때마다 다시 만나는 이들을, 이전 회귀에서의 인물들과 별개의 사람들로 구분했던 것이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텐데. 나는 지금껏··· 너무 두려워만 했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는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일 터.
하지만 나는 헤어지는 순간의 고통이 너무나도 두려워, 지금의 마음을 보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래, 언젠가 다시 회귀한다고 해도···.’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와 함께하기로 한 순간부터, 그때부터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은 이미, 내 가슴 속에 있다. 어차피 마음 속에서 나와 하나가 될 테니···.’
이 마음을, 고백하자.
“···.”
“···.”
물론, 마음을 먹었더라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상하게 더웠다.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북향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도자들은 늘 보호법술로 피부를 한 겹 덮고 있기에 태양빛의 따가움과 더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축기기 수도자들은 정순지력이 자연스레 호신강기를 형성하기에 더욱더 일반 수도자보다 튼튼했고.
하지만, 어떤 법술을 써도 자체적으로 나는 이 더움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듯했다.
“저···.”
“오라버니···.”
우리는 동시에 말을 하려다 다시 서로 피식 웃었다.
“먼저 말하시죠.”
“네, 사실··· 은현 오라버니한테 드리려고, 준비한 게 있거든요.”
부우웅!
어느새 벌 괴뢰가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부우웅!
벌 괴뢰의 날갯짓에, 시원한 바람이 우리 둘 사이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벌 괴뢰의 앞발에는 부채 두 개가 들려져 있었다.
북향화는 부채 두 개를 잡아, 하나를 내게 건냈다.
“쌍선무, 그때 췄던 춤 기억 나시나요?”
“기억 납니다.”
“며칠 후에, 저 멀리 연도성에서 작은 축제가 열리는데, 그곳에 가서 다시 추시지 않으실래요?”
“아, 그때 췄던 춤이 인상깊으셨나 보군요.”
“네. 꼭 은현 오라버니와 다시 추고 싶었거든요.”
“하하, 저도 말을 들으니 다시 한번 향화 선자와 추고 싶군요. 다만···.”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왕 쌍선무를 출 거면, 다시 성제국에 가서 추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청문 도우와 함께 다시 봉명성에 진을 설치하고, 성제국으로 가 보지요. 우리가 함께 지켰던 마을도 다시 가 보고요.”
“그것도 좋긴 하지만, 사실 연도성 쪽에 오라버니한테 드릴 선물을 준비해 놨거든요.”
“선물이라···.”
나는 문득, 내가 준비해 놓은 선물이 조금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도 향화 선자한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만.”
“어머, 뭔가요?”
나는 목 속성 영석을 꺼냈다.
북향화에게 받은 짤막한 가르침들을 모아서 만든, 내 최초의 법기였다.
“이건··· 불가사리인가요?”
그녀가 내 법기의 형태를 보며 장난스레 물었고, 나는 법기에 법력을 불어넣으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렇게 생긴 불가사리, 보셨습니까?”
한순간에 꽃과 똑같은 법기를 제작할 정도로 내 손이 좋은 손은 아니었다.
하지만, 법기에 회로를 새겨, 원하는 법술을 불어넣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법술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있었다.
파아아앗!
목 속성 영기가 빛을 뿜었다.
천린수해성의 영기가 밝게 빛난다.
동시에 영력이 맺히더니, 꽃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백목련이었다.
“당신에게 어제 모과꽃을 받았으니, 저는 백목련을 드리겠습니다.”
“와아···.”
수많은 법술이 맺혀 취한 백목련 형상.
북향화는 백목련을 잠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법기··· 못 만드셨네요.”
“그냥 칭찬해 주시면 어디 덧나십니까?”
“오라버니도 제가 비검술하는 거 볼 때마다 훈수 두시잖아요? 늘 매번 ‘비검 그렇게 다루는 거 아닙니다’ 하시면서요.”
“그게··· 휴.”
내가 쩔쩔매고 있을 때, 북향화는 내가 만든 법기를 받아 소중히 품 안에 넣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법기 회로들도 간결하게 잘 만들어졌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향화 선자는, 회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간결하게 잘 만들었단 건 욕이 아닌가?
“아, 그건 말이죠. 그냥 제 형식이에요.”
그녀는 성벽에서 천색성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외조부이신 공묘천색 장로님께선, 제 어머니를 비롯해 수많은 사생아를 낳으셨더랬죠. 그 중에서 수도자질을 가진 사람은 공묘씨를 주지만, 자질이 없는, 저희 어머님 같은 분은 성도 주지 않고 천덕꾸러기처럼 키우다가 가문에서 내보내시곤 하셨어요.”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분은 법기를 만드실 때, 회로를 간결히 만드시곤 해요. 그러면 범용성도 넓고 사용자도 굉장히 편하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회로를 복잡하게 만든 건, 어쩌면 외조부님에 대한 반발 심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문득, 그녀는 벌 괴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은현 오라버니. 오라버니에게서 말씀을 전해듣고, 이번에 벌 괴뢰의 중심 회로를 완전히 수리하는 데에 성공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복잡할 거라고 생각했던 중심 회로는, 은근히 간결하더라고요. 그 간결한 회로들에서 변화가 일어나며 무수한 회로들로 퍼져 나가 이 괴뢰를 작동시키는 거예요.”
어쩐지 그 작동 원리는 인간의 감정과 비슷한 듯 싶었다.
나 역시 삼화취정에서, 7개의 칠정들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를 목도했으니까.
“오라버니 덕에, 저도 성장했고, 덕분에··· 외증조부에 대한 묘한 반발심 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은현 오라버니.”
“···나 역시.”
나는 그 미소에 미소로 답하며 말했다.
“향화 선자에게 너무도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신 덕에, 삶을 살아오며 생겼던 수많은 상처들이, 봉합되고, 당신을 만날 때마다 생의 고통들이 잊히는 듯했습니다.”
어느새 나는 북향화의 손을 잡았다.
이 순간에,
모든 일이 잘 해결되는,
장생과를 얻을 날이 코앞인,
경지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은 이 회차의,
지금 이 순간에 이 연심이 이뤄질 수 있는 이 상황에,
나는 너무나 깊은 감사를 올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당신은 내게 있어···.”
나는, 천천히, 천천히 그녀에게로 얼굴을 옮겼다.
“···.”
“···.”
“···오라버니?”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향화 선자.”
“네, 오라버니!”
그녀는 기대가 가득 찬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전신에 긴장을 곤두세운 채, 그녀에게서 얼굴을 띄우며, 말했다.
“···어디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