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14)
'이건 무슨...!'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김영훈은 내게 도신을 뻗어왔다.
부웅!
콰아앙!
황금빛 도광이 내 몸을 후려쳤다.
축기기에 이른 몸인지라, 늘 호신강기를 펼치는 것과 다름없는 몸이었기에 피륙의 상처는 없었고, 그저 내 몸이 성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천색성 바깥의 답천사막.
주변에서 보는 눈이 없어지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무형검을 꺼냈다.
무형검의 기세를 느낀 김영훈의 안색이 달라졌으나, 그는 웃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부웅!
콰아앙!
황금빛 도가 내 무형검과 맞부딪혔다.
빠르다.
그리고 강력하다.
그리고.
"김 형."
"음?"
그것뿐이었다.
"아직... 월도입천에 이르지 못하셨군요."
콰아앙!
나는 능광도를 그대로 떨쳐버린 후, 김영훈을 향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그는 황금빛 도신으로 맞받아치려는 듯 했으나, 일순간 무형검이 더욱 빠르게 가속하며 그의 속도를 넘어버렸다.
쩌어엉!
김영훈은 가까스로 찰나의 틈을 타 내 무형검을 막아섰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이상의 뭔가를 내게 보여주진 못했다.
'능광도의 속도가 무형검에 따라잡힌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능광도는 극속(極速)의 화신(化身)이었다.
말 그대로 시간의 찰나를 지배하는 무공.
그것이 능광도였다.
궤적의 자유를 지배하는 무형검에게 속도로 따라잡힐 정도로 한심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김영훈의 경지를 어림짐작했다.
'등봉조극의 극한. 극한을 조금 벗어났나?'
그 정도가 다인 듯했다.
김영훈은 허탈하게 웃으며 황금빛 도광을 없애버렸다.
'역시...'
황금빛의 도신이 그의 의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저건 그냥, 황금빛의 도강(刀罡)일 뿐이었다.
"맞다. 월도입천에는 이르지 못했다."
"등봉조극의 극한이로군요."
솔직히 저 정도만 해도 정신 나간 속도였다.
'내가 회귀햇수로 지금 7년이 조금 덜 됐나?'
7년만에, 저 인간은 지금 등봉조극을 뚫고 그 극한에서 일부 벗어나기까지 한 것이었다.
'예전에는 오기조원에 도달하는 데에만 10년을 썼던 사람이...'
월도입천을 넘어, 그 이상의 경지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 무리(武理)를 알고 있으니만큼, 그를 목표로 더욱 더 미친듯이 수련해 경지에 이르는 기간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만 되셔도 정신 나간 수준의 성장속도입니다. 대단하시군요."
지난 생의 김영훈만 해도 당장 월도입천에 오르기까지 몇십 년을 소모했다.
오히려 등봉조극 수준의 무공으로 월도입천의 경지를 미리 '흉내'라도 내는 김영훈의 재능이 정신 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굴 놀리는 거냐? 반년도 안 돼서 월도입천이니 축기기니 전부 도달한 놈이..."
"......"
"그리고 너도 봤겠지만, 방금 보여준 황금빛 강기는 그냥, 네가 보여준 월도입천의 경지를 흉내내본 거였다."
그는 불만스러운 듯 황금빛 강기를 일으켰다.
우우웅!
황금빛 강기 안쪽으로, 강환(罡丸) 아홉 개분의 힘이 느껴졌다.
강환을 의식에 녹여 자연스럽게 합일시킨 것이 아닌, 억지로 강환을 으깨서 합일시킨 후 하나의 강기 속에서 제어하며 휘두르는 방식.
압도적으로 비효율적이고 유지시간도 짧다.
거기에 강환을 쪼갤 때 티끌만큼의 실수라도 있다면 즉시 전신 경맥에 충격이 와서 폐인이 될 위험이 동반된 무공.
"위험한 무공입니다. 그건 계속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보이는군요."
"문제없다. 미세한 흐름 하나하나 전부 세세하게 알아채고 조절할 능력이 있다면, 절대 폐인이 될 일이 없으니까."
나는 침묵하며 그의 황금빛 강기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은 그 미세한 흐름을 전부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만...'
말 그대로 김영훈의 압도적인 재능을 앞세워야만 사용이 가능한, 그만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순간적으로 월도입천의 경지를 따라잡게 해 준다 할지라도, 너무 비효율적일 뿐더러 진짜 강자 앞에서는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방식입니다.
당장 저만 해도 그걸 사용하는 김 형을, 축기기의 정순지력과 의식의 출력을 사용치 않고 순수한 무형검만으로도 10초 내에 제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속도의 화신이 된 능광도라면 몰라도, 지금 궤적의 화신인 무형검의 앞에서조차 속도로 제압당하는 저 강기공은 그저 쓸모없는 비효율의 극치일 뿐이었다.
그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나였기에 감히 말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건...'
애당초 김영훈이 등봉조극의 극한에서 무수히 반복했던 시행착오 중 하나였었다.
이번 삶의 김영훈에겐 삼류에서 월도입천에 이르는 무수한 무학에서, 지금까지의 김영훈이 거쳐왔던 시행착오를 알려주지 않았었다.
'파 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는 길이다.'
나는 살짝 시무룩해져 있는 김영훈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이 먼 벽라국 동쪽 끝자락까지 찾아오셨다는 건..."
"그래. 네 말마따나 지금 이상한 길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너와 대련하며 등봉조극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널 찾아왔다."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도입천에 이른지도 어느덧 200년이 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 길을 설명해 주는 것은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점차 빨라지고 있다.
생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목표가 제시될때마다.
김영훈의 재능은 무한한 샘에서 솟아나기라도 하는듯, 그 목표에 맞춰 더욱 더 치솟았다.
동시에 그의 성장속도 역시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만약, 만에 하나 이번 생애에 장생과를 생장시키지 못할지라도...'
어쩌면, 남은 50여년 안에 월도입천 너머의 경지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좋구나...'
이번 생 안에, 새로운 경지가 개척될 것이다!
"자 그럼 김 형."
"음?"
"저한테 먼저 대련을 거신 건, 방금 보여준 강기공들 말고도 뭔가 다른 것들 역시 자신이 있으셨단 뜻이겠지요?"
"어... 아니, 방금 보여준 것도 오랜 시간 고심해서 만든 회심의 한 수였는데..."
나는 당황하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럼 당장 새로운 걸 짜내셔야 할 겁니다."
쿠구구구!
오랜만에 김영훈을 봤는데, 고작 이걸로 끝나서야 되겠는가?
무(武)를 제대로 겨루지 못해, 솔직히 말하자면 손이 근질근질 거리던 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정순지력도 안 쓰고, 의식도 김 형과 똑같이 맞춰드리겠습니다. 원한다면 무형검도 안 꺼내지요. 뭐 솔직히 꺼내나 안 꺼내나 궤적의 변화를 이미 장악했기 때문에 차이도 없겠지만..."
"어, 어..."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수 년만에 나타난, 무를 겨룰 수 있을 눈앞의 상대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예전, 내가 오기조원, 등봉조극 초입일 때도 신나서 나를 두들겨 패던 김영훈의 심정이 이해될 것 같았다.
정상에 올라 한참을 외로이 지낸 이에겐, 정상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관계없이 놀아보고 싶은 것이었다.
상대가 나보다 경지가 얼마나 낮은지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그 상대 외에는 정상은 커녕 산의 입구조차 못 찾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 말이었다.
나는 그와 수준을 맞춰, 아홉 개의 강환을 띄우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 * *
"이 분은 제 붕우(朋友)로서, 김영훈이라고 합니다, 북 선자. 김 형, 이 분은 북 선자로, 최근 저와 함께 어떤 진법을 제작하신 북향화 선자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반갑습니다... 그보다..."
북향화는 김영훈의 위아래를 쳐다보며 작게 안쓰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비적(匪賊)을 만나신 건가요? 벽라국 동부는 성과 성 사이가 조금 거리가 있어 그 사이에서 도적떼를 흔히 만나곤 한답니다."
"......"
"잠시 기다리세요, 옷이라도 가져다드릴게요."
그녀는 거지꼴이 된 김영훈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법기점 안쪽으로 옷을 가지러 갔다.
"...저번에 그 소저로군."
"네."
"...날 이 꼴로 만들어놓고 소개하니 기분 좋더냐?"
그는 내게 얻어맞아 살짝 부어오른 턱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흠흠, 치료도 해 드렸잖습니까."
"회사에서 쌓인 게 많았냐?"
"...그렇다고 해 두지요."
솔직히 이제와선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은 기억도 안 났지만, 나는 김영훈의 시선을 피하며 대강 그렇게 넘겼다.
"후우, 그나저나 네가 소저 친구도 벌써 만들었을줄은 몰랐군. 연애는 잘 되가는 모양이구나."
김영훈은 나와 북향화 사이에 있었던 의념을 읽었는지, 예리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딱히 연애는 아닙니다만."
"연애가 아니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법기점 바깥을 가리켰다.
법기점 바깥에선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 걸어가고 있었다.
"저 둘의 의념은 보이지?"
"...보입니다만."
"그리고 네가 나보다 높은 경지인 이상, 뇌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네 자신과 그 소저의 의념도 봤을 테고."
"......"
"방금 지나간 연인들보다도 훨씬 풍부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둘이, 연애하는 중이 아니라고?"
'젠장...'
동급의 무인이란 건, 즐겁기도 한 사이였지만 서로에게 속내를 숨길 수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냥...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냐. 눈이 있으면 보이잖느냐. 너희가 서로한테 어떤 의념을 뿜고 있는지."
"......"
나는 김영훈의 시선을 피했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회사에서도 그러더니, 도대체 왜 그렇게 답답한거냐, 너는?"
"회사에서는 또 무슨 말입니까?"
거의 700년 전 일인데, 솔직히 기억도 안 났다.
의식의 크기가 커진만큼 기억력과 사고력도 높아는 졌지만, 그럼에도 700년은 가벼운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 회사에서는 진짜 몰랐겠지. 그때는 의념도 못 읽었을 테니까, 이 둔한 놈."
"예?"
"너 말고 우리 부서 사람들 다 알고 있었다, 멍청한 놈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차라리 무공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나는 김영훈이 하는 말을 따라갈 수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김영훈은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그저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
나는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아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얼마 후, 북향화가 김영훈이 입을 새 옷을 가지고 나왔을 때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김영훈이 천색성에 오고, 이틀이 지났다.
나는 북향화의 법기 재료 채집을 도와주며, 김영훈이 내게 했던 말들을 들려주었다.
"...해서, 갑자기 내 고향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지 뭡니까. 북 선자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푸흐흐..."
내 말을 듣자 북향화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서 도우.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제가 이상한 겁니까?"
"아뇨, 이상할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금 둔하시나 보네요."
"...예전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피식피식 웃더니 말했다.
"서 도우의 고향사람 중에서, 서 도우를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단 뜻이잖아요!"
"음?"
나는 상상외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
'우리 부서 사람 중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우리 부서는 별로 여자 사원이 없었다.
8명 정도가 여자 사원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셨고, 그 중 셋은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남자친구가 없는 사람 중에 날 좋아할 만한 사람이면...'
강민희 대리, 오혜서 대리, 김연 주임, 신 주임 정도였다.
'신 주임은 애초에 나랑 마주칠 일도 거의 없던 사람이니까 아닐테고... 같이 왔던 동료인가? 그럼 누구지?'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 그런 모습을 본 북향화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신경쓰이나 보네요, 서 도우?"
"흠...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신경쓰이진 않습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잡념들을 털어버렸다.
사실, 이제는 김영훈 말고는 나머지 동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났다.
700년이다.
무려 700년동안 제대로 말도 못 나눠봤다.
나를 좋아한 사람이 있었든, 내가 좋아한 사람이 있었든, 서로 싫어했던 사람이 있었든,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있었든, 데면데면한 사람이 있었든,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있었든.
'누가 누군지, 기억도 감정도 다 풍화돼서 잘 모르겠어.'
"지금 제 옆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별 감흥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제 곁에 있는 이들이 더욱 더 평소에 많이 떠오르고, 더욱 더 소중하지요."
"아..."
"음?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그녀의 손에서 법기 재료들을 받아 내가 들었다.
많이 더운 듯 싶었다.
우리는 어느새 백색법련의 공방에 도착했다.
"...그나저나 서 도우. 한 가지 보여드릴 게 있는데..."
북향화는 내게서 법기 재료들을 받아든 후, 공방 안쪽으로 들어가 정리하고는, 나를 공방 안쪽으로 불렀다.
"한번 와보세요. 아마 재밌으실 거에요."
"뭡니까?"
나는 그녀를 따라 공방에 들어갔다.
공방 안쪽 중심에는, 새하얀 천을 씌워놓은 뭔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윤곽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그건 설마..."
"네, 맞아요."
화악!
그녀가 천을 치우자, 그 안쪽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 괴뢰.
봉명성에서 가져온, 괴군의 괴뢰였다.
"괴군의 괴뢰를 복원해냈단 말입니까...?"
"회로의 중심부는 아직 복원을 못했어요. 너무 정교한 부분이었던지라. 하지만 나머지 회로는 전부 복원에 성공해서, 영력을 불어넣어서 직접 조종하면 움직일 수는 있죠. 중심회로가 망가진지라 전력은 못내지만, 6할 수준의 힘은 낼 수 있죠."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보실래요?"
"좋습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괴군의 괴뢰.
원본의 6할 전력을 내는 괴뢰라면, 어느 정도 수준일 터인가?
나와 그녀는 괴뢰를 가지고 사막 바깥으로 나갔다.
"그럼 갈게요!"
부우우웅!
그녀가 괴뢰의 몸에 난 홈에다가 영석을 끼워넣고, 의식을 불어넣자 벌 괴뢰는 날개를 휘저으며 날아올랐다.
'엄청나군...'
나는 괴뢰 안쪽에서 소용돌이치는 빼곡한 회로들을 보며 작게 경탄을 터트렸다.
저 정도라면, 그냥 살아있는 생물의 혈관보다도 더욱 더 빼곡한 게 아닌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그녀가 괴뢰에 의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파앙!
"....!"
나는 흠칫 놀라며 강환을 띄워 눈 앞에 띄웠다.
콰아앙!
괴뢰의 엉덩이에서 나온 정순지력이, 뾰족한 침 형태로 분사되며 눈 앞의 강환에 부딪히고 있었다.
'무슨 속도가...'
다음 순간 벌 괴뢰는 다시 움직이며 내 뒤쪽으로 날아와 엉덩이의 침을 내밀었다.
콰드드득!
나는 정순지력으로 손을 감싼 후 벌 괴뢰의 침을 움켜잡았다.
'이 속도는...'
강환 5개를 사용한 김영훈급의 속도였다.
거기에 괴뢰가 사용하는 정순지력을 이용한 침 형태의 이 공격.
'축기기급 공격이다...'
심지어 이게 6할 위력이란다.
그 말은 즉슨, 괴뢰의 힘이 10할 전부 발동된다면, 이 벌 괴뢰는 축기 후기급의 강함을 지닌 괴뢰라는 소리였다.
오싹!
나는 벌 괴뢰를 통해 괴군의 힘을 간접적으로 실감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봉명성에 쓰레기처럼 버려져있는, 이 벌 괴뢰와 같은 잔해들이 얼마나 많았었더라?
봉명성뿐이 아닌 섭명함의 안쪽에도 이와 같은 잔해들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괴뢰가 힘을 전부 발휘한다면, 그 속력은 등봉조극의 극한에서 9개의 강환을 사용하는 김영훈과 같아질 터...'
괴뢰 따위로 이런 속력을 내는 게 가능하단 건가?
파츳!
내가 상념에 잠겨있을 때, 벌 괴뢰는 침 형태의 정순지력을 잘라버리고 내게서 떨어져, 다시금 엉덩이로 침 형태의 정순지력을 분사했다.
피잇!
벌 괴뢰가 내게 다시 달려든다.
콰앙!
나는 벌 괴뢰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땅에 내다꽂았다.
"대단하군요. 괴군도, 괴군의 괴뢰를 복원해낸 북 선자도..."
"뭘요, 전투형 괴뢰도 아니고 망가진 부분도 없어서 크게 어렵진 않았는걸요."
"...예?"
등봉조극 경지의 속도로 움직이며, 찰나간에 상대에게 축기기급 일격을 박아넣을 수 있는 이 괴뢰가, 전투형이 아니라고?
"이게, 전투형이 아니라고요?"
"네. 침 외에는 특출난 공격기능도 없고, 속도만 빠르다 뿐이지 별 기이한 장치는 없잖아요? 괴뢰에 담긴 기능들만 봐도 알 수 있죠."
북향화는 내게 다가와 괴뢰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향한 부위에는 기이한 진법이 새겨져 있었는데, 진법에서는 진한 공간파동이 흘러나왔다.
"이건 물건을 운송할 때에 쓰이는 운송용 괴뢰에요. 제가 마침 공방 안쪽에 공간좌표를 찍어놨으니... 보시죠."
그녀가 괴뢰의 등 부분을 만지작거리자, 괴뢰가 웅웅거리며 자세를 바꿨다.
나를 향해 침을 내밀던 자세에서, 얌전하게 편안한 자세를 하고 앞발들을 내민 자세였다.
북향화는 내민 앞발 위로 유리팔찌를 올렸고, 괴뢰는 그걸 받아들어 품에 안았다.
"몸에 새겨진 공간 법진과, 특유의 속력을 이용해서..."
파아앗!
그녀가 괴뢰의 등을 조작하며 뭔가 명령을 입력하자, 벌 괴뢰는 앞쪽으로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가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저런 식으로 설정된 좌표로 공간이동을 해, 물건을 운송하는 운송용 괴뢰더군요."
"......"
"지금 제 공방에 도착해서 팔찌를 내려놨네요. 그리고 다시..."
그녀는 품에서 작은 진법 원반을 꺼냈다.
진법 원반에는 무수한 회로가 새겨져, 작은 공간 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파아아앗!
다음 순간, 공간 법진이 빛나더니, 벌 괴뢰가 눈 앞에 나타났다.
벌 괴뢰의 앞발 위에는 그녀의 공방에 있던 망치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짐을 이송하던 괴뢰였던 듯 싶어요. 괴군 조연 선배의 괴뢰성채(傀儡城砦)에는 이런 괴뢰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더군요."
"......"
이게 전투용 괴뢰도 아니고, 고작해야 짐 나르는 괴뢰라니.
나는 간접적으로 괴군의 저력을 느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술법과 무공 둘 다 천인기에 이르더라도, 괴군에게 비할 수나 있을련지 모르겠군.'
나는 눈 앞의 괴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문득, 나는 괴뢰를 보며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이 괴뢰...'
"북 선자, 이 괴뢰의 중심회로는 복원을 못 했다고 하셨습니까?"
"네. 회로들이 뭘 뜻하는지 이해도 안 되더라고요."
"...혹시, 저도 한번 이 괴뢰를 조종해 보면 안 되겠습니까?"
"네? 서 도우가요? 서 도우는 비검 법기 외에 다른 법기들은 잘 못 다루시지 않나요?"
"왠지, 이 괴뢰는 제가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만."
"흠..."
잠시 못 미더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내 앞으로 괴뢰를 가져다 놓고, 조작 방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일단 이 회로에 의식을 불어넣으시고 움직여 보시죠."
"알겠습니다."
나는 벌 괴뢰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벌 괴뢰 안쪽에서 흐르는 무수한 회로들이 내 의식을 빨아들인다.
"일단 회로는 총 일곱가지 회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순차적으로 의식을 불어넣으셔야 할 회로가..."
옆에서 북향화가 뭐라뭐라 설명을 하는 듯 했지만, 나는 그 회로들에게서 나는 느낌에 집중했다.
'역시, 이건...'
내 예상이 맞았다.
우우웅!
나는 벌 괴뢰의 안쪽에서, 의식을 분리했다.
의식은 곧 의념의 집합.
그리고 의념은 무수한 색의 조합이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색상 중에는, 인간의 감정의 뼈대가 되는 칠정(七情)의 색상이 존재했다.
나는 괴뢰의 안쪽에 불어넣은 의식을 일곱 개의 색상으로 분리했다.
우우웅!
일곱 개의 거대한 회로로, 일곱 개의 색상이 분리되어 흡수되었다.
동시에, 나는 벌 괴뢰와 완전히 일체(一體)된 느낌을 받았고, 벌 괴뢰를 어찌 조작해야 하는지가 한 손에 잡히는 듯 했다.
"북 선자, 괴뢰를 장악했습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의식을 주입해주시면..예?"
"보시지요."
부우우웅!
내 의지에 따라, 벌 괴뢰는 자연스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라, 하늘을 빙글 돌았다.
북향화가 조종했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어, 어떻게..."
그녀가 조종하던 벌 괴뢰는 일직선으로 딱딱한 움직임밖에 내지 못했으나, 내가 조종하자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괴군도 월도입천의 시야를 가졌다면, 월도입천의 시야의 기반이 되는, 의념의 색을 보는 시야 역시 당연히 가지고 있었겠지...'
"어, 어떻게 한 거죠, 서 도우?"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얼마간 벌 괴뢰를 자연스럽게 조종한 후, 북향화의 앞으로 다시 괴뢰를 끌어내린 후 내가 느낀 것을 설명해 주었다.
칠정(七情)에 대한 것.
그리고 무림인 중 삼화취정, 오기조원에 이른 이들이 볼 수 있는 의념의 색상.
북향화는 내 설명을 들으며 수첩을 꺼내 내가 말하는 것들을 받아적었다.
* * *
그날 밤.
북향화는 공방 안쪽에서 벌 괴뢰의 회로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칠정의 의식이라...'
생각도 못한 분야였다.
애초에, 딱딱한 법기에 인간의 감정을 적용시킬 생각이라니.
'괴군 선배님은 도대체 뭘 만드셨던 거지...'
심지어 이 벌 괴뢰는 그날 봉명성에 있었던 수없이 많은 잔해 중, 멀쩡한 한 개의 괴뢰였을 뿐이었다.
'평소에 그분의 처소엔 이런 괴뢰들이 어마무시하게 많다는 건데...'
찌릿, 찌릿!
서은현이 괴군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오한을 느꼈듯이, 북향화 역시 괴군의 천재성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되는 재능... 역시 일문법재...'
말 그대로 악마조차 뛰어넘은 재능이었다.
잘그락, 잘그락
그녀가 회로들을 분석할 때였다.
문득, 북향화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잠깐, 서 도우의 말대로라면, 이 괴뢰는... 단순히 감정이 들어있는 괴뢰가 아니야.'
우우웅!
그녀의 얼굴 위로 네 가지 색의 문양이 떠올랐고, 그녀의 눈동자가 괴뢰 안쪽으로 빨려들듯 집중력을 발휘했다.
'연결... 되어있다?'
북향화는 괴뢰의 회로들을 뜯어보며 분석했다.
'이 괴뢰는, 감정을 기반으로 괴군 조연의 다른 괴뢰들과 연동되어 있어.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거였어.
그리고, 이 괴뢰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흐름을 회로의 흐름으로 분석해보면...'
얼마간 회로들을 만지작거리던 북향화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툭!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장비 중 하나가 괴뢰의 몸 속으로 떨어졌다.
회로가 살짝 뭉개졌지만, 북향화는 창백한 안색으로 손을 파르르 떨 뿐이었다.
주르륵...
그녀의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치이이이!
그녀의 피부에 돋아나 있는 네 가지 색의 문양이 그 어느때보다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말도... 안돼."
북향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 괴뢰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괴군 조연... 당신은 도대체, 뭘 만들려고 했던 거죠?"
그녀의 숨소리가 가팔라졌다.
북향화는 충격을 받은 채로 괴뢰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악마조차 뛰어넘은 재능과 발상...
아니, 만약 내 망상(妄想)이 맞다면, 그 자가 범하려는 영역은 하늘에게나 허락된 영역...
필멸자에겐 금기(禁忌)의 영역일진데...'
있을 수도 없는 망상이자 공상.
그것이, 북향화가 발견한 괴군 조연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쳤으니 말 그대로 금기를 범해서 그것을 만들어내려는 것일까...?'
치이이이-
격외(格外)의 깨달음, 금기를 범한 광인의 망상을 엿본 덕에 한없이 활성화되었던 북향화의 자질이 서서히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얼마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북향화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공방 한쪽에 걸린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도화지에는 어떠한 법보(法寶)의 구상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가 서은현을 위해 짜고 있던 법보.
서은현이 말한 말도 안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서히 짜고 있던 구상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괴군의 계획을 엿봄으로써, 그 괴뢰 안에 담겨있던 무수한 감정들을 목도함으로써 지금껏 짜오던 구상도가 상당히 보완됨을 느꼈다.
북향화는 법보의 구상도로 다가갔다.
'괴군 조연의 미친 망상이 사실이라면, 내가 뭘 만들든 그의 작품을 따라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작업용 붓을 들고 법보의 구상도를 천천히 다시 그렸다.
'서 도우의 손에 들릴 때, 그 작품의 발뒷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을 작품을 만들 수는 있을 거야.'
사락, 사라락...
북향화는 진중한 눈빛으로 법보의 구상도를 다듬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