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99화 (99/185)

연(7)

치이이이-

"핫!"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정신을 차렸고 합쳐지고 있던 두 가지 문양은 그대로 다시 피부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뭐지, 그건?'

"소저, 괜찮소?"

"아, 괜찮아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녀는 싱긋 웃더니, 내게서 다시 법기들을 받아들었다.

"이번 것도 마음에 안 드신다면, 이번의 실패를 경험 삼아 다음 걸 만들어 보죠."

그녀는 법기들을 다시 들고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포기를 모르는군...'

나는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법기는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고집이 센 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건지.

나는 그 고집에서, 나와의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얕게 웃었다.

* * *

서란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사흘 후였다.

"섭명함을 쓰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영석을 달라...라."

나는 바로 청문령에게 사실을 말했다.

"서, 섭명함...?"

청문령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청문세가 가주에게 다시 전음부로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쿠웅!

천색성으로, 청문세가 가주, 청문중진이 직접 영석 팔만 개를 가지고 방문하였다.

"소문이 자자한 섭명함이라니, 영석만 내면 섭명함에 타볼 기회가 있는 건가?"

그는 영석이 담긴 저물법기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나와 청문령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아시는 선배님께서 단 한 번에 한하여 섭명함에 탑승하게 해 주신다 하셨습니다. 단, 알아두셔야 할 것이 이번에 탑승하실 섭명함은 괴군과의 일전에서 다 망가진 폐함으로..."

"알고 있다. 괴군이 단신으로 흑색귀골곡과 맞선 일화는 수도계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지. 그나저나 어서 빨리 섭명함을 타 보고 싶군.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 대해를 휩쓸었던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이라니... 다 망가진 것이라도 한 번 타 볼수만 있다면 굉장한 영광이지."

청문중진은 진중한 그의 원래 성정답지 않게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섭명함을 탄다는 말에, 청문중진은 물론이고 청문령, 그리고 북향화의 안색 역시 기대에 가득찼다.

"그, 그 전설의 장인이 만든 배의 모조품... 그 섭명함을 볼 수 있다니..."

나는 약간 어색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서란과 함께 들어가 보고, 지난 삶에서는 내가 조작도 몇 번이나 해 본 섭명함이었기에 실감이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섭명함의 가치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컸던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북향화, 청문령, 청문중진을 데리고 흑풍해로 날아갔다.

북중호도 딸과 함께 가고 싶어했으나, 그는 천색성을 관리하는 관찰수도자의 위가 있었기에 함부로 천색성을 나갈 수 없었고, 청문령과 내게 북향화의 안위를 부탁할 뿐이었다.

"저 방향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다."

우리는 청문중진의 배 형태 비행법기에 함께 올라타, 내가 길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섭명함을 향해 나아갔다.

"그나저나 북 소저는, 천색성을 안 떠난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북향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몇 달씩이나 떨어져 있는 중요한 일은 맡지 않는 거에요. 봉명성을 들르는 데에는 며칠이면 된다고 하니 이번 원행에 따라나선거고요."

"그렇군요. 소저의 아버님께 듣기로, 소저가 천색성에서 오래 떨어지지 않으려던 이유는 어머님의 유언 때문이라 하던데..."

"네 맞아요."

그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옥색의 노리개를 들어 만지작거렸다.

"어머님도 법기장인이셨어요. 그리고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의 벗과 약조를 맺어 서로 아들과 아들이 태어나면 의형제를, 딸과 딸이 태어나면 의자매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조하셨다지요."

그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옥색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이건 어머님이 만드신 법기에요. 한 쌍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나머지 하나는 제 운명의 상대에게 있을 것이라 하셨어요.

어머님의 유언에 따라, 천색성에서 계속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그 때문에 성에서 안 떨어지려 하는 거에요."

"그렇습니까..."

나는 그녀를 보며 웃어주었다.

"언젠가 소저의 상대가, 소저의 앞에 나타나시길 빌겠습니다."

"고마워요."

북향화는 노리개를 잡고 배시시 웃어주었다.

쿠릉, 쿠르응...

어느새 청문중진의 비행법기는 섭명함이 있는 해역에 진입했다.

"저 앞에 결계가 있을 겁니다. 뚫고 가시면 됩니다."

"알겠다."

청문중진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결계가 있는 곳을 향해 정확히 법기를 몰고 날아갔다.

꾸우웅!

법기가 허공에 부딪히는 듯 하더니, 우리는 결계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큰 귀신이다...]

[큰 귀신이 나타났다...]

또 다시 귀무 속의 귀신들은 나를 보며 큰 귀신이라고 하며 날뛸 듯이 굴었으나, 청문중진의 기세에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얼마나 귀무를 뚫고 갔을까, 우리는 마지막 결계를 뚫고 섭명함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촤아아악!

"오오, 저게 섭명함...?"

"호오, 저것이 그 흑색귀골곡의..."

"전설의 장인이 만든 명함의 모조품..."

그리고, 섭명함의 위쪽에는 한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송진?'

그것은 결단경의 기세를 내뿜으며, 우리를 맞이하는 송진이었다.

"으음..."

청문중진은 송진의 기세를 느꼈는지 신나던 기색에서 진중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송진은 청문중진을 넘어서는 결단 후기경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송진 원로. 서란 도우는 어디 있습니까?"

[심해의 음기와 귀기를 모아오라고 시켰다. 지금쯤 내 본명공법을 수련하며 심해 속에서 음기를 흡수하고 있겠지.]

"그렇군요."

송진은 내게 대답을 해준 후, 청문중진이 들고 있는 영석 상자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한 번 섭명함을 띄우는 데에 영석 만 개. 섭명함으로 한 번 공간이동을 하는 데에 영석 만개. 도합 이만 개의 영석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도 역시 이만 개의 영석을 주어야 하고,

청색귀골곡의 섭명함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영광비용으로 영석 이만 개를 내놓아라.]

총 영석 육만 개!

어마어마한 비용이었다.

"이 무슨..."

"알겠습니다."

내가 따지려 했으나, 청문중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온 상자에서 육만 개의 영석을 꺼내어 송진에게 건냈다.

"대청색귀골곡의 어른께 후학이 영석을 바칩니다."

[오냐, 태도가 바른 놈이군. 난데없이 섭명함을 내놓으라던 어디 강도 놈과는 인성 수준이 달라.]

"......"

청문중진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고, 나는 송진의 시선을 피했다.

[청문세가 녀석인가. 그 창호자의 후인들이면 그럴만 하지. 그래, 본인 역시 창호자에게 빚을 진 게 좀 있으니 영석 이천 개 정도는 깎아주도록 하마.]

송진은 청문중진의 옷에 있는 청문세가의 문양을 보며, 육만 개의 영석에서 이천개의 영석을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좋다, 그럼 어디를 가고 싶다고 했지?]

"봉명성에 진입해보고자 합니다."

[봉명성에? 지금은 봉명성이 열리는 시기가 아니라 원영 후기가 아니면 봉명성의 외벽 금제는 못 깰 텐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게 수단이 있습니다."

나는 준비해온 금제 파훼 족자를 꺼냈고, 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본인이 되었다면 된 거겠지. 그럼 가 볼까...]

송진은 영석들을 가지고 섭명함의 조타륜 근처로 올라갔다.

쿠구구구!

송진이 조타륜을 잡자, 오만팔천개의 영석에 담긴 영기들이 빠져나왔다.

파아아앗!

영기들은 이내 섭명함으로 빨려들어가더니, 그대로 귀기가 되어 섭명함의 귀기를 채워주었다.

섭명함이 덜걱거리며, 주변으로 음풍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 음풍에, 거대한 폐함이 점차 허공으로 떠오른다.

청문중진과 청문령은 신기한 눈으로 뱃머리에서 섭명함이 떠오르는 장면을 눈에 담았고, 북향화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섭명함의 이곳 저곳을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간다.]

파아아앗!

그리고, 섭명함이 순간 귀무에 휩싸이며 공간의 외곽, 허공간으로 진입하였다.

파츠츳!

그리고 허공간에서 얼마 후, 다시 현실로 강림했고, 성제국의 서쪽 대산맥 위쪽으로 전송되었다.

허공간을 이용한 공간 전송!

[어디보자, 봉명성의 좌표가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송진은 섭명함의 키를 잡은 채 주변을 둘러본 후, 다시금 섭명함을 허공간으로 진입시켰다.

파아아앗!

다시금 공간의 외곽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간의 외곽 허공간.

그곳에 떠 있는 거대한 원통형의 성을 볼 수 있었다.

[봉명성에 도착했다!]

"벌써..."

"이게 섭명함인가..."

청문중진과 청문령은 섭명함의 속도에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더, 더 보고 싶은데..."

그리고 북향화는 섭명함의 구석구석을 더 들여다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그만 봉명성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후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잔뜩 시무룩한 표정이었다가도, 다시 봉명성을 보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본좌는 봉명성 옆에다가 나흘간 섭명함을 정박해 두겠다. 나흘 안에 나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갈 테니, 알아서들 하거라.]

"알겠습니다."

청문중진은 진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가져온 족자를 꺼내들었다.

파아아앗!

봉명성 외벽의 금제가 깨졌다.

청문중진은 그를 확인하자마자 주먹을 들어 봉명성의 외벽을 때렸다.

쿠우우웅!

녹빛이 번뜩이더니, 봉명성 외벽이 깨져나간다.

우리는 외벽에 뚫린 통로로 봉명성에 진입하였다.

* * *

"와아..."

봉명성에 진입하자마자, 북향화는 탄성을 내질렀다.

'뭐지?'

봉명성의 외벽 안쪽은 그냥 복도일 뿐이었다.

공간 압축이 걸려있어, 굉장히 방대한 크기이기는 했으나, 보기에는 그냥 밋밋한 복도.

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름...답네요."

치이이-

그녀는 홀린 듯한 눈빛으로 봉명성 곳곳의 장식, 그곳에 흐르는 금제들, 그리고 깨알같이 미세한 영력회로를 쓰다듬었다.

"이게 그... 전설의 장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그녀는 봉명성의 벽면을 쓸었다.

잠시 그녀를 보던 나와 청문령, 청문중진은 얘기를 나누었다.

"일단 그 장생과가 있다는 곳으로 안내해줄 수 있나?"

"알겠습니다."

나는 일행을 데리고, 봉명성 1층의 수목원으로 향했다.

휘이이이-

녹빛 영기가 가득한 수목원의 안쪽.

그곳의 중심부에는, 아직 어린 수원목이 한 그루 서 있었고, 그곳에는 장생과 한 덩이가 피어나기 직전의 상태로 있었다.

"오오, 이게 장생과..."

"가주님, 따시면 안 됩니다. 저 상태의 장생과는 100년은 커녕 1년도 채 수명을 늘려주지 못합니다."

"알고 있네, 청문령. 너무 탐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잠시 장생과를 홀린듯 바라보던 청문중진은, 장생과 나무에 달린 몇 개의 꽃을 본 후 말했다.

"말했던 진법이 완성만 된다면, 이 장생과는 물론이고 다른 꽃들도 피워올려 장생과를 맺게 할 수 있는거겠지?"

"완벽히 진법이 완성된다면 아마...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좋군. 그럼 나흘의 시간동안 청문령과 서 수사는 봉명성의 환경을 조사하며 진법 구조도를 짜고, 법기장인은 진법 법기를 구상해 놓으시게.

본인은 기왕 봉명성에 온 것, 봉명성 위층들을 탐색해 볼 테니."

그는 그 말을 한 후, 봉명성의 2층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흠, 난 장생과와 수원목을 중심으로, 이 인근의 영맥을 조사하며 구조도를 구상해 볼 테니, 서 도우는 수목원 바깥을 조사해서 진법 외부를 구상해 오시게."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돌아다니며 봉명성을 연구해 보죠."

청문령은 장생과 주변을 계측하며 진법의 구조도를 짜기 시작했고, 나는 봉명성 1층의 외곽을 돌며 청문령이 짜는 내부 진법을 보완할 외부 진법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향화는, 내 주변을 따라다니며 봉명성 곳곳을 관찰했다.

"아, 정말 황홀하네요. 고마워요. 이런 멋진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그녀는 저물법기에서 작은 도구 같은 것을 꺼내, 봉명성의 벽면을 뜯고, 그 안쪽의 영력회로들을 관찰하며 말했다.

짤그락, 짤그락..

순식간에 벽면이 해체되고, 그 안쪽의 영력회로들이 드러났다.

북향화는 알 수 없는 장비들을 수 개나 꺼내서 영력회로들을 뜯고, 해체하고, 관찰했다.

"그럴 것 없으십니다. 다 소저의 복인 걸요. 그리고... 일전에 저와 제 동료에게 물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에, 그녀는 손을 멈칫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하네요. 제가 워낙 사막의 여행자 분들께 물을 많이 대접해드려서... 어떤 분이셨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는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덕분에 정말 살 뻔 했습니다. 원래 성정이 좋으셨던 거군요."

나는 봉명성 외곽의 영맥을 보며 진법을 구상했고, 북향화는 봉명성 이곳저곳을 뜯어보며 수첩 같은 것을 꺼내 뭔가를 계속 기록했다.

그녀가 뜯어낸 벽면들은 얼마 후면 다시 자가수복이 되었기에 다시 고쳐놓을 필요는 없었다.

북향화는 자신이 뜯어놓은 벽면들이 자가수복되는 과정들 역시 세세하게 수첩에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나와 북향화가 다른 구역에 들어섰을 때였다.

움찔!

북향화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가 시선이 닿은 곳에는, 괴군의 꼭두각시.

그 잔해들이 있었다.

"이, 이것들은 설마..."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며 괴군의 꼭두각시 잔해들에게 다가갔다.

다 망가진 폐품들이었으나, 그녀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

"괴, 괴군의 작품들...!"

그녀는 눈이 돌아가서 잔해들로 달려가 잔해들을 헤집고, 뜯어보고, 자신의 저물법기에 마구 쓸어담기 시작했다.

'엄청난 반응이군...'

하기사, 법기를 제련하는 연기사들에게 괴군은 따지고 보면 업계의 극한이나 다름없는 존재일 터였다.

'거기다가, 일문법재. 북향화보다도 몇 줄은 높은 재능을 지닌 이일테니...'

그녀가 침을 흘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괴군의 괴뢰들이 소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나 봅니다?"

"말이라고 하시나요? 당연하죠! 그 분의 작품들은 잔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귀중품들이라고요!"

"허어..."

북향화는 아까 벽면을 뜯어내던 장비들을 이용해, 괴군의 괴뢰들을 분해하고 해체해 보았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망가진 부분이 많아서 아쉽네요. 잔해들도 잔뜩 가져간다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멀쩡한 잔해가 있으면..."

"멀쩡한 잔해 말입니까?"

나는 문득, 이전 봉명성을 돌아다녔을 당시 발견한 괴뢰를 떠올렸다.

'맞아, 상당히 멀쩡한 괴뢰가 한 기 정도 있었어!'

"아, 따라와 보시지요, 소저. 멀쩡한 괴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앗, 정말인가요?"

그녀의 얼굴에 잔뜩 화색이 돌았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이전에 갔던 장소로 갔다.

그리고 이전과 다를 것이 없이, 그곳에는 그 괴뢰가 있었다.

사람 몸통 크기만한 크기의 벌 괴뢰.

그것이, 상당히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북향화의 손 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익히 그녀의 감정이 짐작이 된다.

"이, 이건..."

그녀는 이 벌 괴뢰는 바로 뜯어보지 않고, 우선 잡고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안쪽에... 회로들만 조금 망가진 것 같군요. 외관도 멀쩡하고, 안쪽의 부품들도 조금 상한 것 외에는 거의... 멀쩡하군요. 이건..."

그녀의 얼굴에 흥분한 기색이 떠올랐다.

"조금만 다 손보면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오호..."

북향화는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괴뢰를 조심스레 저물법기에 집어넣었다.

"정말, 이곳은 보물천지네요."

"보물천지라..."

정작 내가 왔을 때는 쓸모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었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이 1층에 피어있는 장생과 한 알 정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 이런 곳 역시 보물천지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소저 같은 분에게는 도움이 되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괴뢰 잔해들을 보고 그냥 잔해더미라고만 생각했는데..."

"아하하,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그녀는 벌 괴뢰 외에도 주변의 잔해들을 쓸어담으며 말했다.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부 쓰레기일 뿐이죠. 하지만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북향화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괴뢰의 잔해 중, 영력회로들이 무수히 새겨져 있는 작은 판 같은 것을 꺼내들어 바라보았다.

"평범한 잔해라도, 쓰레기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보물이 되는 게 아닐까요?"

"인연이 있는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라..."

"뭔가가 쓰레기일지 아닐지는, 운명과 인연에 따라 달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사실 이 세상에 쓰레기는 없다고 봐요.

그저, 운명과 인연이 닿지 못한 물건들이 있고, 운명과 인연이 제대로 닿은 물건들이 있는 거죠."

"......"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운명에 대한 생각에 작게 감탄하였다.

나와는 다른 관점의 운명관이었다.

'그저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건만, 이런 관점도 있겠군.'

단순히 벗어나야 할 것이 아닌.

그 자체로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

'운명이라...'

내가 잠시 운명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어머, 이 부분은 왜 아직까지 수복이 안 된 거지?"

그녀가 한 괴뢰의 잔해를 저물법기에 집어넣고, 그 잔해 뒤쪽에 나 있는 외벽을 보고 있었다.

그 외벽에는 작은 상처가 난 채로 영력회로들이 잔뜩 드러나 있었고, 아직까지도 회로들이 자동수복되지 않고 있었다.

"봉명성에는 자동수복기능이 있을텐데... 이 부분은 왜 또..."

북향화는 장비들을 꺼내 그 부분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기기긱...

그녀의 뒤쪽, 작은 기둥 같은 곳이 열렸다.

동시에 그곳에서 작은 암기가 튀어나왔다.

'기관진식..!'

채앵!

나는 빠르게 달려가 암기를 쳐냈다.

"꺄악!"

"괜찮습니까, 소저?"

"저, 저는 괜찮은데..."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새하얘져 있었다.

"엇..."

내가 달려가서 그녀의 뒤쪽에서 암기를 쳐낼 때, 그 풍압에 그녀가 살짝 앞으로 쏠렸고, 그 덕에 그녀의 장비가 봉명성 외벽의 영력회로 중 한 곳을 깊숙히 푹 박아버린 상태가 되었다.

"저, 뭔가 잘못 건드린 거 같은데요."

"심각한...겁니까?"

"심각하다기 보다는, 봉명성의 숨겨진 기능 중에 하나가..."

쿠구구구!

"발동한 것 같네요."

"....!"

갑자기 봉명성 전체에 기이한 압박이 감돌았다.

그 압박은 주변을 맴돌며 내 전신 곳곳, 그 안쪽의 정순지력을 압박했다.

'이건...!'

내 법력이 제약당하며, 순식간에 축기기 극초기였던 내 수준이 연기기 극초기 수준까지 내려가 버렸다.

북향화를 보자, 그녀의 체내에 있던 법력은 거의 말라붙다시피 해,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수행 수준이, 총체적으로 한 단계씩 낮아진 건가...?'

거기다가 범위를 보니, 봉명성 전체가 잠시 이런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청문세가 가주인 청문중진은 결단기이니 축기기 수준으로 수행이 제약당했을 것이고, 청문령은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수행이 제약당했을 터였다.

"일시적으로 제가 봉명성 내부의 어떤 금제를 촉발시킨 모양이에요."

"죄송합니다, 소저. 괜히 소저를 밀치는 바람에..."

"아니에요, 괜히 장비로 봉명성을 쑤셔대던 제 잘못이죠. 제가 다시 원래대로 해 볼게요."

그녀는 다시 황급히 길쭉한 장비를 외벽에 넣어 회로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저건...?'

봉명성의 안쪽.

괴군의 잔해들, 혹은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의 흔적과 함께 사방팔방에 널브러져 있던, 봉명성의 수호석상들이, 덜그럭 거리기 시작했다.

절걱, 절거걱...

수호석상들이 점차 수복되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뭐지, 금제의 영향을 받는 건가?'

맞는 듯 싶었다.

이 압박감이 생긴 이후부터, 영기의 흐름이 다시 저 수호석상들에게 유입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저, 금제 자체를 다시 없애는 건 가능한 겁니까?"

"예, 가능해요. 회로들을 다시 원상복귀 시키면 된다만,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서고 있는 수호석상들의 기운을 감지했다.

'아직 회복중인 탓인지, 다들 대략 연기기 초반쯤의 수준이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망가진 본래 몸을 수복하며 더 강해지겠군.'

나는 내 몸을 관조했다.

우웅!

법력은 제약당해서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공은 잘 움직였다.

'으음...?'

강환을 띄워보니 여전히 잘 띄워졌다.

내 무공은 법력이 제약당해도 아무 제약이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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