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2)
우르릉...
나는 하늘에서 흩어지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수명이 다하지 않아도, 내가 새로운 수명을 내려받으려 하면 먹구름이 나타나는 건가...'
일반적인 수도자가 축기에 이를 때 저런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 역시 천거현상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무래도 새로운 수명을 내려받는다는 점에서, 뭔가 하늘이 나를 방해하고자 했던 모양.
하지만, 나는 무형검을 회수하며 피식 웃었다.
"몇 번이고 막아봐라."
번개를 전부 쪼개고 구름도 흩어, 하늘을 박살내 줄 테니.
쿠구구구-
체내에서 흐르기 시작한 정순지력을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게 그 축기기의 수도자...라는 거냐?"
옆에서 호법을 서주던 김영훈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등선향에 떨어진지 반년.
김영훈은 내 지도에 의해, 어느덧 삼화취정에 완숙한 무인이 되었다.
아마 내 지도를 따라 2, 3년만 더 있으면 오기조원에 진입할 터였다.
"그렇습니다. 이제, 앞으로 약 350년은 더 살 수 있겠지요."
"어마어마하군..."
그는 혀를 내두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직장 동료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하나같이 엄청난 재능을 지녔나 보구나. "
"별 말씀을요. 우연히 구한 요괴의 요단이 아니었다면, 축기기까지 오르는 데에 몇십 년은 썼을 겁니다."
나는 영기를 다 잃고 빛이 바랜 결단기 여우의 요단을 들어올렸다.
여우의 요단은 분명 결단 중기경의 것이었지만, 축기 중기경의 깨달음밖에 없는 나는 여우의 요단에 담긴 기운을 전부 흡수할 수 없었다.
'애초에 혼잡스러운 요기를 정제하고 남은 정순한 기력만 골라 흡수하느라 흡수율이 낮은 것도 있고 말이지...'
어쨌든, 여우의 요단 덕에 오월입도경을 대성하고 축기기에 오를 수 있었다.
'앞으로 축기 2수까지는 지난 삶에 얻었던 천린수해성과 음혼귀주문의 깨달음으로 막힘없이 가면 된다.'
거기에 축기 3수, 규루위묘필자참은 아예 칠성제의 때에 축복을 받아놓아서 빠르게 진도가 나갈 테니, 이번 삶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축기 후기까지는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잘하면 축기 대원만까지도 노려볼 수 있겠어.'
물론, 그 전에 해야할 일들이 있었지만.
"그럼 김 형. 이만 등선향을 나가볼까요?"
"오, 드디어 나가는 게냐? 좋구나. 제발 사람 얼굴 좀 보자꾸나!"
내 말에 김영훈은 희희낙락하며 신나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김영훈과 함께 등선향을 나설 준비를 했다.
* * *
휘이이이-
나는 등선향에서 나와, 답천사막에 떨어져, 법술을 사용해 사막 위를 질주했다.
김영훈은 드넓은 사막의 풍광을 보며 절로 감탄하였고, 나 역시 축기기에 올라 얻은 무진장의 정순지력을 써 빠르게 벽라국 방향으로 향하였다.
'그나저나, 원립이 있는 성으로 가 보는 게 좋으려나.'
생각해보면, 천인기들이 비승한지 얼마 안된 지금 시점의 그라면, 결단기 수준일수도 있었다.
'결단기 수준이라면, 축기기에 올라 정순지력을 얻은 지금의 내가 어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직도 상단전 안쪽의 의식세계.
그곳에 박혀있는 오행혈주번이 느껴진다.
'오행혈주번은 어찌됐든 원립의 신통술. 지금 바로 찾아갔다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다.'
찾아가도 이 오행혈주번을 처리한 다음에 찾아가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행혈주번은 역시...'
나는 남쪽, 흑풍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인기 잔혼. 흑색귀골곡의 송진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영훈과 함께 일단 벽라국으로 향하였다.
* * *
휘이이이-
"콜록, 콜록..."
"이런 제길, 은현아. 아직 멀었냐!"
"거의, 다 왔습니다!"
나는 눈쌀을 찌푸렸다.
모래폭풍을 만나고, 며칠의 시간을 거쳤다.
모래폭풍은 잦아들고 있었으나, 그 동안 상당히 법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 덕분에 법력으로 일정 주기마다 물을 생성했던 것을 할 수 없어져, 나와 김영훈은 지금 이틀째 물을 못 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옷도 넝마가 되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더는 없군. 젠장할...'
그래도 이제 거의 벽라국에 도착했다.
얼마 후면 천색성이 보일 것이다.
휘이이이!
얼마나 모래바람을 뚫고 법술을 사용하며 나아갔을까.
저 멀리, 천색성이 보였다.
"김 형, 저기 성입니다!"
"오, 오오..! 어서, 어서 가서 물 좀 먹자꾸나..!"
'답천사막은 여러 번 건너왔어도 늘 건너기 힘들군...'
견딜만할 때도 있었지만, 모래폭풍을 자주 만나면 늘 이렇게 초죽음이 되어서 도착하기가 일수였다.
촤아아악!
나와 김영훈은 천색성의 앞에 멈춰섰고, 천색성의 경비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지! 누구시오!"
나는 군말없이 다가가 손 위로 법술 몇 개를 띄워 보여주었다.
"어, 엇... 수도자!?"
천색성은 법기로 유명한 성인 탓인지, 법기를 구매하려는 수도자들이 자주 찾았고, 그 덕에 일반인들도 수도자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이들이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사막을 건너고 온 사막 부족 수도자요. 들어가게 해 주시오."
"어, 어떤 부족이신지..."
"주립 부족이외다."
"아, 가장 큰 부족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여기 통행증입니다."
몇 번의 삶동안 천색성을 드나들며 생긴 요령이었다.
물론 주립 부족엔 나 같은 수도자는 있지도 않았으나, 이들이 그걸 확인할 때쯤이면 나는 아마 이곳에 없을 것이다.
"사, 사람이구나..."
김영훈은 반년만에 보는 사람들이 반가운지, 벽라국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이곳저곳을 두리번 거리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삼화취정의 경지에서 보는, 사람들이 흘리는 무수한 의념의 색들을 관찰하였다.
'아마 오기조원도 금방 도달하겠군.'
열정적으로 감정의 색을 관찰하는 걸 보면 금세 의식영역에 도달할 터였다.
'그나저나...'
나는 사막과 붙어있어, 뜨거운 천색성의 공기를 들이마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을 마실 만한 곳이... 어디 없으려나."
천색성에 온 것도 사실상 거의 200년 만인지라, 우물이 어디 있었는지 조금 가물가물했다.
내가 타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릴 때였다.
"물을 찾으시는 건가요?"
한 백의의 여인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물론이고 옆의 김영훈 역시 고개를 열정적으로 흔들었다.
"따라오세요, 저희 가게에서 물을 좀 드릴게요."
"아, 감사드립니다, 소저!"
우리는 그녀를 따라갔다.
천색성의 작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그녀의 가게는 '백색법련(白色法蓮)'이라는 이름의 법기 상점이었다.
촤악!
그녀는 법기상점의 한 구석에 놓인 나무통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 나에게 건냈다.
"물을 드시고, 그쪽 분은 다른 바가지를 가져올 테니..."
그러나 김영훈은 그녀가 새 바가지를 가져오기도 전에, 허공섭물을 써 물을 끌어와 자기 입으로 가져가 미친 듯이 퍼마시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 동료가 목이 많이 탔는지라..."
"괜찮아요. 사막에서 저런 분들이 한두 분은 아닌걸요."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준 바가지를 들고 물을 마셨다.
'살 거 같군.'
내가 내 법력으로 만들어낸 물들은, 마셔도 기본적인 갈증만 해결될 뿐, 물을 마셨을 때의 충족감이 없었다.
내 몸에서 빼낸 걸 다시 내 몸으로 집어넣는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역시 외부의 물을 먹으니, 그제야 정신이 들 것 같았다.
"하아... 정말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소저. 이틀째 물을 못 먹었는데..."
"아니에요, 어차피 조금만 지나가면 천색성의 우물이 있는 곳이 나왔는걸요. 그나저나 의식을 보아하니 수도자이신 것 같은데, 맞나요?"
"아...!"
나는 그제야 그녀 역시 수도자임을 알아보았다.
법력의 파동으로 보아, 약 연기기 11성 정도의 실력으로 보였다.
그리고, 문득 그녀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 당신은..."
그랬다.
먼 옛날.
내가 처음으로 등선향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와, 답천사막을 건넜을 때에 물을 주었던 그 수도자!
"절 아시는 건가요?"
그녀의 눈빛에 살짝 경계심이 어렸다.
'음 뭔가 오해를 하는 건가.'
"오해는 마십시오, 소저. 아주 예전에도 천색성에서 소저에게 물을 얻어마신 적이 있어서, 그 은혜를 기억한 것일 뿐입니다."
"아, 그런 거였군요."
그제야 다시 그녀의 경계심이 풀렸다.
"공묘세가나 벽씨, 청문세가의 자제들이 가끔 저를 찾아와 귀찮게 하는 바람에 조금 놀랐었네요. 다행히 일전에 도움을 드린 분일 뿐이었다니 저도 마음이 놓이는군요."
"하하, 이전에도 이런 선행을 많이 베푸셨나 보군요."
"사막을 헤메는 분들을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인심도 좋으시군요."
나는 말을 하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법기...'
솔직히 무형검이라는 압도적인 상위호환이 있기에, 지금껏 법기 같은 것은 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법기점의 법기들을 둘러보니, 법기를 쓴 적 없는 눈으로 보아도 썩 쓸만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법기들에서 풍기는 영력의 파동이 굉장히 안정적이군.'
요족의 지각으로 보아도 상당히 영기의 순환이 자연스러운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그나저나 이 법기들은 누가 만든 겁니까? 과연 천색성이 법기로 유명하다더니, 법기에 조예가 없는 제가 봐도 품질들이 뛰어나군요."
"아하..."
내 말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여인이 만든 건가?'
그녀에게서 일어나는 황금빛의 의념을 관찰할 때였다.
입꼬리를 씰룩이던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객들의 옷이 너무 헤진 것 같은데, 저희 집에서 안 쓰는 옷이라도 드려도 될까요?"
"아, 그러시다면 너무 감사한 일일진데..."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정말로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옷들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며, 거적떼기가 된 나와 김영훈을 다시 한번 본 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서 두 벌의 옷을 가지고 왔다.
조금 낡은 옷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입은 옷들 보다는 깨끗했다.
그녀가 입은 것과 같은 백의(白衣), 사막의 색과 같은 황의(黃衣).
두 벌의 도복이었다.
"집에서 아무도 안 입고 박혀있던 옷들인데, 도움이 될까 싶어 가지고 왔습니다. 기왕 물을 대접한 것, 옷가지도 대접해 드리지요."
"너무 감사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군요."
"허어..."
김영훈 역시 어느새 물을 다 마시고, 입을 닦으며 걸어왔다.
그는 벽라국어는 몰랐으나, 그녀가 옷을 주려 한다는 내 설명을 듣자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옷을 골랐다.
김영훈은 황의의 옷을, 나는 백의의 옷을 골라, 가게 구석의 가려진 곳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 훨씬 보기 좋으시군요."
"좋은 옷을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 그러시다면 축기기 선배님께 빚을 지워두는 셈 치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고, 나는 추후에 옷값을 갚으러 오겠다 한 후, 백색법련 법기점에서 나왔다.
* * *
나와 김영훈은 천색성에서 나와 벽라국의 여러 성들을 거쳐, 먼발치에서 청문령을 보고 인사를 올렸고.
다시 연국에 도착해, 진씨세가의 결계를 넘어 제자들을 잠시 보고 왔다.
그런 후, 연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흑풍해에 도착했다.
"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예,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래, 뭐. 무공 연습이나 하고 있으마."
나는 잠시 김영훈을 떼어놓은 후, 서휼이 준 파공주와 호풍응룡변을 잠시 꺼내 보았다.
'음, 어떻게 할까...'
지난 생에서는 파공주는 그냥 바다 깊숙한 곳에 버려버렸다.
하지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버리지 않기로 했다.
'자폭용 공간 속성의 법보라...'
나중에 동귀어진을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남겨놓는 것도 방법일 터였다.
'이번에 서란을 도와 송진의 잔혼을 처치하고, 봉명성의 좌표를 얻으면...'
어쩌면 이번에는 김영훈에게 줄 장생과를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난 생에, 원립이 펼친 법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명력을 쥐어짜내 장생과를 급속성장시킨 법술.
물론 그 법술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승님에게 탄탄히 배운 기초진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법술의 큰 틀은 분명히 이해했다.
'어쩌면, 이번 생 안에, 김영훈이 죽기 전에 그걸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게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수만 있다면...'
그의 수명을 늘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촤아아아!
나는 허공을 박차며 서란의 처소로 향했다.
* * *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됐다.
나는 서란에게 내 힘을 보여준 후, 호풍응룡변 공법서를 보여주어 그의 신임을 얻고 그와 함께 송진이 있는 섭명함으로 가, 진법을 얌전히 해체하고 섭명함의 최하층에 도착하였다.
여전히 송진은 시커먼 귀기에 휩싸인 해골의 형상이었다.
"이보시오, 흑색귀골곡의 원로 송진."
[...네놈은 뭐냐.]
그가 음산한 귀기를 흩뿌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섭명함을 내놓으시오."
쿠구구구!
내 말에 그의 귀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으나, 지난 삶의 마지막에 보았던 원립보다는 한참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무형검을 잡으며 그를 마주보았다.
왠지 이번에는 그를 상대하는 것이, 전만큼 크게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