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92화 (92/185)

생화(4)

콰아아앙!

봉명성의 외벽이 터져나간다.

봉명성의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건조한 사막의 공기와 모래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오히려 봉명성 안쪽의 피비린내에 비하면 향긋하게 느껴졌다.

촤아아아아!

내가 뚫고 나온 봉명성의 외벽 금제 구멍으로, 시뻘건 피안개가 새어나왔다

피안개의 중심.

그곳에서 원립이 걸어나온다.

"당돌하군. 감히 네가 내 앞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파아아앗!

핏빛이 원립을 뒤덮는다. 그가 비둔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무형검을 잡고 의식을 가속시켰다.

축기 중기에 이르러 기반이 되는 의식의 크기가 더더욱 커진만큼, 가속되는 의식 역시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파바바밧!

나는 허공을 박차며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일반적인 결단기 수도자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

그러나, 핏빛에 뒤덮힌 원립은 느릿하게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괴물 같은 원영기 수도자!'

나는 이를 악물며 전신의 기력을 짜내어 더욱 더 빨리 허공을 질주했다.

* * *

원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영 중기경의 이 내가, 아무리 전력이 아니라지만 비둔술로 단박에 놈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저 애송이의 수행은 기껏해야 축기 중기, 2수 정도였다.

물론 실제 실력은 결단기, 그것도 일반적인 결단기 수도자와는 굉장히 판이한 신통을 익히고 있었지만.

아무리 잘 쳐줘야 결단기였다.

'그런데 어찌 결단기 놈이 나와 이 정도로 추격을 벌여?'

거기다가 특별한 비둔술을 쓰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공기를 박차면서 달리고 있었다.

'비둔술은 못 쓰는 것이, 정상적으로 금단을 맺어 결단기에 도달한 놈은 아니다. 한데, 저 놈이 금단까지 맺어 결단기에 오른다면...'

원립이 가면 안쪽의 미간을 찌푸렸다.

'성가신 놈이 되겠어. 거기다가 혈주번을 두 개나 박았는데 내 통제에서 벗어나는 저 의지력... 오행혈주번(五行血呪幡) 중 네 개 정도는 박아둬야 통제할 수 있겠군.'

"큭큭... 무릎꿇린 수도가문과 부족장, 군주란 놈들도 오행혈주번 한 개 정도만 머리에 박혀도 살려달라며 울부짖었건만, 두 개가 박히고도 저리 팔팔하다니. 저 혼백을 제련하면 뭘 만들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나. 반드시 내 제자로 삼아주마..!"

원립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법결을 맺었다.

* * *

쿠구구구!

뒤쪽에서 소름끼치는 영기의 파동이 울렸다.

피안개가 뒤쪽의 사막을 뒤덮었다.

마치, 핏빛의 모래폭풍이 사막을 뒤덮는 듯 했다.

'피해야, 아니, 숨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월수궁무록조차 통하지 않았다.

'월수궁무록이, '왜' 통하지 않았지?'

난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월수궁무록은 의식영역을 자르고 그 틈새에 숨어 달아나는 무학이었다.

그런데도 발각당했다.

'잠깐, 애초에 저 원영기 수도자는 '의식영역에 걸리지 않는' 법술로 나를 노렸다.'

그리고 그 법술은 요족의 지각과 의념의 색상으로야 겨우겨우 눈치챌 수 있었었다.

'원영기가 되면, 의식영역을 벗어나는 뭔가를 손에 넣는단 건가? 하지만, 의식영역은 벗어났을지언정 요족의 지각과 의념의 색상은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월수궁무록으로 '다른'것까지 베어내 보자.'

나는 무형검을 쥐고 의식을 집중했다.

보인다.

원립의 의식영역이.

그리고 천지영기에 흐르는 음양의 흐름이.

의념의 색상들이.

후우우-

의식영역말은 가르던 검.

그 검의 영역을 넓힌다.

천지영기를 가르고, 의념의 색마저 가른다.

그리고.

그 틈새로 숨는다!

파아아앗!

월수궁무록의 극한을 초월해낸다!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쳐낸, 월수궁무록을 넘어선 무학.

그리고, 그 틈새로 숨어들었을 때였다.

멈칫!

원립이,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됐다!'

아까와 같이 바로 나를 알아차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통한다!'

천지영기와 의념의 색상마저 모조리 잘라버리면, 과연 원영기 수도자의 눈마저 속일 수 있는 듯 했다.

"오호, 이건 또 뭐냐. 부릴 수 있는 재주가 많군.'

그러나, 나는 내 운명의 앞날에 흉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쿠구구구구!

원립의 뒤쪽에서 피어나던, 사막을 뒤덮던 피안개가 사방으로 깔린다.

월수궁무록은 상대의 빈틈을 잘라내고 사각을 만들어 그 안에 숨는 것이지, 공간을 이동하는 무학이 아니었기에.

나는 썩은 표정으로 원립이 피안개의 중심에서 법결을 맺는 것을 쳐다보았다.

"몸을 숨긴 모양이다만. 그럼, 어디 이 폭발에서 도망쳐 봐라."

파아아앗!

피안개가 핏빛을 발하며 부풀어 오른다.

* * *

혈목자 원립은 법술의 위력이 잦아들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경 3리가 그대로 날아갔고, 사막 한 가운데에 거대한 구덩이가 패였다.

그리고, 서은현은 보이지 않았다.

원립은 반투명한 가면 안쪽으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더욱 더 가지고 싶어졌군. 이걸 피해서 도망쳤다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반투명한 공간 균열이 나 있었다.

* * *

"그아아아...!"

내가, 뭘 어떻게 했더라.

상단전이 불탄다.

강기가 전신에 흐르는 것과 별개로, 상단전을 강제로 옥죄 불태워 재능을 격발시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진씨세가가 왜 재능을 향상시키는 그 좋은 비술을 자기들한테 안 사용하고 범인들한테나 썼겠는가.

상단전을 건드리는 건, 어찌되었든 극악한 위험을 동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단전이 불타는 것을 느끼며,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었다.

쐐애애액!

파앗!

뭔가를 몸이 관통한다.

전신이 더더욱 만신창이가 되는 것 같았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잡히면 죽음이나 다름없다.

'내가, 뭘 어떻게 했더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음을 각오하고서, 나는 '뭔가'를 했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그래.'

영훈 형님이 나를 도와주었다.

피안개가 폭발하는 순간.

영훈 형님이 나타나며 내 옆에서 검무를 추었고, 내 앞에는 그가 남긴 발자국들이 보였었다.

나는 그 발자국들을 따라밟으며, 김영훈을 따라 검을 휘둘렀고, 잠시 이상한 공간에 진입했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어, 어어?'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미친듯이 머리를 굴렸다.

'이 실마리만 잡으면...'

그래, 분명 이 실마리만 잡으면 어쩌면.

내가 강기로 상단전을 태우며 '그것'을 떠올리려 할 때였다.

"...어?"

눈 앞에.

봉명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분명, 줄곧 봉명성의 반대방향으로 도망쳤는데.'

의문을 가라앉히기도 전.

핏빛 혈광이 내 뒤쪽에서 번뜩였다.

"뭣..."

꽈앙!

혈조가 나를 후려친다.

나는 무형검으로 방어를 했으나, 그대로 혈조에 맞은 채 다시 봉명성.

정확히 내가 뚫고 나왔던 구멍으로 들어갔다.

"커억! 거헉!"

내가 피를 토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였다.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원립이, 반투명한 핏빛 깃발을 들어올렸다.

콰아악!

"끄아아악!"

혈주번이 내 상단전을 파고들어가며, 상단전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을 강제로 억누른다.

강기로 불타던 상단전의 작용이 다시 정상화된다.

"크헉, 거어억!"

그러나 나는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놀랍군. 방금 전엔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어찌 결단경 따위가 원영기 수도자의 전이술을 흉내낸 거지?"

뭔가, 뭔가 닿을 것 같았는데...!

나는 이를 악물며 무형검을 더욱 거세게 쥐었다.

그리고, 무형검의 색상이 황금빛으로 화하며, 능광도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영훈 형님이 사용하던, 그가 추구하던 길을...'

그리고.

푸콱!

"크아아악!"

또 하나의 깃발이 상단전에 틀어박혔다.

고통이 깨달음을 흩어버린다.

무형검이 흩어진다.

원립은 어쩐지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행혈주번은 본디 천인기 수도자의 의식을 제약하고 도망치기 위해 고안된 법술이며, 천인기 수도자조차도 직접 틀어박히면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건만. 고작 축기기 따위가 천인기 수도자의 의지력을 뛰어넘었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악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네 개의 법술이 내 혼백에 박혀 영혼을 압박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법술보다는 다른 것이 더욱 더 괴로웠다.

'깨달음을, 놓쳤어!'

또 다시!

비록 외압에 의해서라지만, 너무나도 그것이 분하고 안타까웠다.

"왜... 나는 다시 봉명성에 돌아온 거지?"

"흠, 네가 무작위 전이를 하지 않았느냐?"

"...?"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공간 균열을 열고 생각없이 뛰어드는 멍청한 짓... 천인기 수도자 급이 대강이라도 좌표를 잡아주지 않는다면, 본래는 공간 기류에 휘말려 몸이 갈려버리는 미친 짓. 그게 네가 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확률로만 다시 이 세계에 돌아올 수 있는 행위. 하지만, 너는 봉명인을 가진 내 앞에서 도박을 저질렀다."

"...?"

원립이 히죽 웃으며, 품에서 푸른 빛의 옥으로 된 봉명성의 모형을 꺼내들었다.

"운명에는 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느냐? 운명은 존재를 끌어당기지.

그리고 봉명인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중 첫번째가 소지자에게 천운을 부여하는 것이다. 봉명인의 소지자는 강력한 운명을 얻고, 소지자가 원하는 것은 운명의 인력에 의해 소지자의 주변으로 끌려들지.

그것이 네가 내게 도망칠 수 없던 이유이다."

"..허, 허허."

저건 또 무슨 미친 기물이란 말인가?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물건이오..?"

"존재 '해야만'하는 기물이다. 사실 봉명인의 첫 번째 기능은, 제작자가 두 번째 기능을 만들다가 겸사겸사 넣어진 기능이라 하더군."

원립이 탐스러운 눈빛으로 봉명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봉명인은, 본디 축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물이다. 먼 옛적, 금신자 양수진이 승천문을 만들기 전에는 수도자들이 어떻게 비승했다고 생각하느냐?"

우웅!

그가 봉명인을 쓰다듬자, 봉명인이 오색의 빛을 뿜어냈다.

"승천문이 없던 예전에는 그냥 전해져 내려오는 상계의 좌표를 외워서, 천인기 후기들이 자살하듯이 공간균열에 몸을 던지는 식으로 비승을 했다 하지.

이 봉명인은 그런 이들에게 축복을 주어, 수도자들에게 상계와 연결된 운명의 인력을 부여하여 '상계와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했다."

"....!?"

"상계의 운명의 인력을 부여하는 축복을 내리는 와중, 소지자의 운명의 인력을 강화시켜 천운을 부여하는 부가기능이 생긴 엄청난 선보. 그것이 이 봉명인이다."

나는 그 말도 안되는 설명에 잠시 입을 벌렸다.

'고작 물건에, 운명을 부여하는 기능이 들어있다고?'

문득, 양수진의 잔영이 생겨났다.

그는 종명자들을 끌어들이는 운명의 인력을 쇄천봉에 부여했다고 했다.

그것도 고작 잔영 주제에!

그 말대로라면, 어쩌면 일정 경지에 이른 존재들은 운명의 인력을 조정하는 신적 존재로 승화하는지도 몰랐다.

오싹!

'수도의 끝에 도달하여 진선이 되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는 거지?'

그러나 잡념이 생기기도 전.

봉명인에서 뿜어지던 오색의 빛이 나와 원립에게 흘러들어갔다.

"흐흐, 축복이 흘러 넘치는군. 이번 천인기 수도자들은 봉명인의 축복을 안 받고 비승한 탓인가..!?"

그가 흡족한 듯이 봉명인을 바라보았다.

"...?"

상계와의 거리를 좁히는 축복을, 이번 천인기 수도자들은 안 받았다고?

내가 의아해 할 때였다.

그가 내 뒷덜미를 잡고 수목원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자, 그럼 수명을 늘리러 가 볼까..."

나는 비참하게 그에게 끌려가며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삶은 곧 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화(生花)는 본디 산 채로 꺾인 꽃.

누군가에게 꺾이기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꺾이기만 할 지라도...'

우득, 우드득...

'할 수 있는 한...'

몸을, 움직인다.

'뿌리를 딛고, 하늘을 쳐다볼 것이다...!'

모든 나무와 꽃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형해 솟듯이.

나 역시, 내가 뿌리내린 역사가 존재하는 한.

결코 쉬이 이 마음을 꺾지 못하게 하리라..!

우드득!

"뭣..."

콰과광!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법결을 맺었다.

"음혼귀주!"

수 개의 저주문이 뻗어나오며 원립을 향한다.

"쯧, 귀찮은 놈!"

파앙!

원립이 콧김을 뿜자 스러졌지만, 나는 미소를 쥐며 다시금 무형검을 잡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 * *

원립은 눈 앞에서 발광을 하는 서은현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오행혈주번 중 벌써 네 개를 박아넣었다.

다섯개를 박아넣어 오행혈주의 주법을 완성시킨다면, 저 기묘한 녀석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수십 배가 될 터.

하지만, 오행혈주번의 신통은 다섯 개를 박아 오행혈주를 상대의 혼백에 박는다면, 상대가 오행혈주의 금제를 연화시킬 시 오행혈주의 신통이 그대로 상대에게 넘어간다는 단점이 있었다

애당초 오행혈주번의 신통은, 전수자가 혈주번 다섯 개를 100분의 1로 약화시킨 상태에서 피전수자에게 박아넣음으로서 전수된다.

피전수자가 100분의 1로 약화된 혈주번 5개를 받아들이고, 연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에 성공하면 오행혈주번의 전수가 완료된 것이었다.

'저 놈이, 오행혈주번을 5개나 꽂았는데도 통제가 되지 않고 그 고통을 이겨내면 어찌하지...?'

문득, 원립은 스스로가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괜한 생각이다. 사주번까지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오주번은 살아있는 인간의 정신으로 버틸 수 없다.'

그저, 저 특이한 녀석의 정신이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생긴 기우일 뿐이다.

원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섯번째 혈주번을 들고 서은현에게 다가갔다.

'오주번까지 꽂아넣고, 이 놈이 부리는 신통이 뭔지, 이 놈의 정신구조는 어떻게 되먹은 건지 뇌를 한번 열어봐야겠어.'

푸콱!

서은현의 무형검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간 원립이, 다섯 번째 오행혈주번을 박아넣었다.

파아아앗!

서은현의 혼백 안쪽, 다섯 개의 핏빛 깃발이 오행의 이치에 따라 상부상조하며, 정신을 금제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작용을 수십 배 이상 증폭시켰다.

"아아아아-..!"

결국 머리를 부여잡던 서은현은 거품을 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흐음... 역시, 인간이라면, 아니 생명체라면 이 고통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지."

원립은 눈 앞의 기이한 결단경 애송이의 혼백이 그의 통제에 들어왔음을 인식하며 미소지었다.

"자아, 일단 이 놈은 추후에 성으로 돌아가 뜯어보도록 하고, 장생과나..."

그리고, 원립이 뒤를 돌았을 때였다.

오싹!

'뭣...'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반투명한 흑색 가면 뒤로, 경악의 눈길이 서렸다.

비틀, 비틀..

서은현은, 입에서 침을 흘리면서, 눈이 반쯤 풀린 상태에서, 그렇게 그의 통제에 저항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무언가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원립이 평정을 잃었다.

'그걸 버틴다고? 천인기 수도자한테도 직접 꽂으면 어느 정도 통하는 법술이다! 해룡왕한테도 시험해보고 그의 인정까지 받았단 말이다..!'

"이, 이 놈..!"

그는 더 이상 눈앞의 애송이를 통제해서 데리고 다닐 생각을 접었다.

오행혈주번은 그가 아는 최고의 정신금제 법술이었다.

이게 안 통한다면, 더는 어떤 금제도 통하지 않는다!

"안 되겠군. 안타깝지만 능력을 연구하는 건 포기해야겠어. 그냥 시신만 내 혈체에 합성해서 반응을 보는 게 낫겠구나..!"

위험했다.

오행혈주를 정신에 남겼으니, 저걸 살려두면 언제고 오행혈주번을 연화해서 자신의 법술로 만들고, 그에게 덤벼올 터였다.

"죽어라!"

그리고, 서은현이 맺던 법결이 완성되었다.

"음(陰), 혼(魂), 귀(鬼), 주(呪)."

촤아악!

서은현은 폭발했다.

혈목자 원립의 본명신통, 혈목(血木)이 그에게 직격했고, 서은현은 폭발하면서 그의 피륙이 한 그루의 혈목이 되어 뿌리내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시뻘건 나무가 자리했다.

나무에는 서은현의 법력과 생명력이 맺힌 한 송이의 생화(生花)가 피어났다.

"...괴물같은 놈."

원립은 그의 가면을 쓸어내리며, 서은현의 가공할 정신력에 혀를 내둘렀다.

"저런 놈이 더 오래 살아남아 성장하기 전에 삭초제근해서 다행이군. 이제 신경쓸 필요 없겠지. 장생과나.."

그리고, 그가 장생과 나무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뭣..."

그는 이를 악물었다.

수원목에 맺힌 장생과들.

그가 수많은 이들의 생명력을 갈아넣어 피워올린, 수많은 과실들이, 새카만 저주문에 뒤덮혀 모두 썩어있었다.

'마지막에 그 법술... 이 놈!'

그는 시뻘개진 얼굴로 뒤를 돌았다.

'혼백은 고이 황천에 보내주려 했더니만... 감히 이따위 짓을 해..!!'

그리고, 원립의 안색이 변했다.

"어...?"

그가,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분명히, 아, 아니지. 당신은 누구십.."

푸콱!

다음 순간.

원립은 그대로 터져나가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한 송이 생화가 피어났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 번째 회귀(回歸)였다.

10회차의 첫날

깜빡!

나는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숲내음이었다.

'...죽었군.'

뭐 어차피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진 않았지만, 제대로 된 타격은 하나도 입히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나마 마지막에 저주로 장생과를 못 먹게 한 게 최후의 발악이었나...'

나는 혀를 찼다.

'그게 원영기 수도자의 힘인가...'

나는 원립이 법술을 쓰자, 피안개가 모래폭풍마냥 사막 전체를 뒤덮건 것을 떠올렸다.

'결단기가 자연재해라고? 웃기고 있군.'

재해란, '그런 것'이 진짜 재해일 터였다.

결단기는 그저 재해를 흉내낼 뿐인 경지였다.

동료들이 주변에서 차츰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의식을 열어 수면술을 써서 동료들을 전부 재웠다.

그리고, 난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왜... 상단전이 안 아프지..?'

무형검으로 의식을 분리해서 의식의 크기를 조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상단전은 멀쩡했다.

부풀어오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슨..끄으으윽!'

"끄허어억...!"

난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기었다.

"꺼억, 꺼허억..!"

혼백이 마치 찢어지는 듯 했다!

아프다!

너무 아파!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의식영역의 중앙.

내 혼백이 있는 곳.

그곳에, 다섯 개의 핏빛 깃발이 박혀 있었다.

"끄으아아아아악..!"

원립이 남긴 오행혈주번.

그것이, 혼백에 남아 회귀를 따라온 것이었다.

"어억, 어억...!"

그러나 다행히도, 얼마간 미쳐 날뛰며 내 혼백을 마구 헤집던 오행혈주번은 점차 진동이 멎으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후우, 후우..."

오행혈주번의 발작이 완전히 멎었고,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나는 문득 등골로 섬칫함이 기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회귀는 무적이 아니었다.

내 의식영역과 정신이 회귀할때마다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에서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 의식과 혼백에 연결된 금제는, 내 의식과 함께 회귀한다!

'지금까지 너무 안일했던가...'

고계 수도자가 작정하고 나를 세뇌하거나 의식에 금제를 씌우면, 그 금제는 회귀 이후까지 이어진다.

이 말은즉슨, 한번 고계 수도자에게 잘못 걸리면 나는 영원토록 회귀 내내 그 수도자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단 소리였다.

'일단, 이 오행혈주번은 어떻게 하지..?'

만약 나와 같이 회귀한 오행혈주번이 원립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지금쯤 답천사막에 위치한 원립이 알아차렸을 터였다.

'일단, 며칠 정도는 안전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원립은 원영기 수도자일지언정,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하기를 기다려 숨여있다가 늦게서야 나타나는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이 세상에 천인기 수도자들이 바글거릴 이 시점에서는 궁금한 게 있더라도 얼굴도 못 내밀 터였다.

'그렇다면, 등선향을 찾아올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한번 봐달라고 할까..?'

창호자에게 한번 봐달라고 하면, 그의 인품으로 봐서 한 번쯤 확인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나는 희망을 가지며, 우선 주변에 있는 황주삼을 찾아 환골탈태를 했다.

우득, 우드득...

상중하단전에 조화력이 서리며, 육신이 큰 의식도 무리없이 담을 수 있게 진화하였다.

'이제 그나마 조금 지끈거리던 것도 사라졌군.'

나는 의식과 상단전을 다시한번 관조했다.

'그나저나, 이 오행혈주번. 원립의 정신금제만 아니라면 회귀 초기에 상당히 유용할 것 같은데.'

오행혈주번이 의식을 억압해 잡아두며, 상단전이 부풀지 않게 억누른다.

그 덕에 회귀 초반에 굳이 의식을 분리하지 않아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무형검과 오행혈주번만 있다면 의식으로 인한 상단전의 과부하가 완전히 해결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

나는 우선 동료들을 들쳐업고 동굴에다가 데려다주었다.

그런 후 수면술을 더욱 강하게 펼친 후, 의식을 관조했다.

의식 깊숙한 곳.

혼백 안쪽.

그곳에 꽂힌 다섯 개의 핏빛 깃발.

나는 요족의 지각과 의념의 색상을 보았다.

다섯 개의 깃발에서 흐르는 음양의 영기는, 서로가 상부상조하며 내 의식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양의 영기가 다른 먼 곳과 연결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의념이 흐르고는 있었으나, 그 타인의 의념은 점차 흩어지고 있었고 딱히 외부와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일단, 현재 확인했을 때는 원립과 연결되어있진 않다.'

거기다가 미약하게 남은 그의 의념 역시 흩어지는 중이었고, 그의 의념이 흩어진 자리로 내 의념이 대신 흐르고 있었다.

"이거 그런데, 원립의 의념이 전부 흩어지면 사라지긴 하려나."

흩어지는 속도로 보아 얼마 후면 전부 흩어질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나는 혈주번의 금제에, '내 의념이' 흐르는 것을 보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내 의념인데, 내 말을 안 듣는다.'

금제의 위를 지나는 의념들은 내 의지에 따르지 않고, 금제의 순리대로 움직이며 내 의념이 스스로의 의식을 억누르는 데에 일조하였다.

우우웅!

내가 의식을 움직여 이기어검을 조종해 보려 하자, 오행혈주번이 떨리며 의식을 압박했다.

"크윽.."

여기서 더 의식을 움직이면 다시금 혼백이 찢기는 그 고통이 엄습할 것 같았다.

'의식을 크게 움직이면 혈주번이 제약을 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삶의 마지막.

원립의 앞에 있을 때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제약을 받았으나, 지금은 원립의 의념이 흩어진 탓인지 의식을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 고통은 없었다.

'일단 금제를 완화라도 시켜야 한다.'

금제의 흐름을 관찰하며, 원립의 의념이 전부 흩어지기를 기다렸다.

그의 흔적이 전부 사라진 후에야 나는 금제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이건..'

나는 금제를 뜯어보며, 얼마 후에야 금제를 이루는 근간이치를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의식을 오행(五行)으로 해석한 금제군.'

삼화취정에서 의념의 색을 분석해 오기조원에 이르고, 오행 기초공법을 전부 대성한 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금제의 근간을 알아내지 못했을 터였다.

"허, 재밌군."

물론 영기와 의식, 혼백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기에 오행공법을 대성해서, 오행영력의 이치를 어느 정도 꿴 나라고 해도 금제를 단숨에 해체할 순 없었다.

'그래도, 오행을 인간의 의식에 대응시키는 그 방식만 이해하면...'

그렇게 오행혈주번의 부호들을 해석해 가던 중이었다.

'엇, 잠깐 이건.'

나는 문득, 이 부호들이 굉장히 내게 익숙한 부호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 오행혈주번의 근간을 다시 깨달았다.

"저주신통..."

남의 고통을 극대화시키고 상대를 제압하는 신통술.

이 부호들은 음혼귀주문의 저주부호들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그렇군.'

인간의 정신을 오행으로 해석하고, 오행이 각각 인간의 정신에 가할 수 있는 고통을 찾아낸 신통술.

그것이 오행혈주(五行血呪)의 신통이었다.

촤라라락!

오행혈주번의 근간에 대해 이해하자, 나는 내가 의식으로 내 혼백에 꽂힌 오행혈주번에 간섭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의 정신은 오행. 내가 강환을 깨달을 때에 얻었던, 나는 나 자신으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과, 오행이 서로서로로 이뤄져 있듯 그 정신도 각각의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는 깨달음은 맞닿는 부붐이 있구나...'

우우웅!

내 의념이 조금씩 움직이며, 오행혈주번을 움직였다.

혼백 깊숙히 박혀있던 오행혈주번이 움직이며, 점차 혼백 위로 조금씩 부상하기 시작했다.

'밀어낸다...!'

파아아앗!

의식이 점차 돌아온다.

예전 의식의 크기가 점차 돌아오며, 다시금 의식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아아.."

나는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던 몸이 기지개를 펴듯, 불편하게 오행혈주번에 압박당하던 의식을 일으켰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덜걱!

의식은 몸을 일으키던 중 다시금 오행혈주번의 금제에 걸려버렸고, 의식의 7할 정도만이 움직임을 되찾은 상태에서, 나는 눈을 떴다.

"완전히 금제를 풀려면 뭔가 더 해야 하는건가."

7할 이상 의식을 찾았기에 불편함은 거의 없었고, 남은 3할 역시 고통을 감수하면 움직일 수야 있었기에 걱정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오행혈주번을 더 밀어내려 해봐도 뭐가 부족한 건지, 오행혈주번은 사라지지 않았다.

'젠장, 혈목자. 귀찮은 걸 남겼군.'

나는 이 즈음에서 금제를 연구하는 것을 멈추고, 나머지는 창호자 등에게 조금 맡기기로 했다.

'창호자도 안 되면, 섭명함에 남아있는 송진의 유언을 들어준 후 그에게 부탁해봐야겠어.'

어쨌든 그도 천인기 수도자의 잔혼이었기에 아는 것은 많으니 분명히 해법을 알고 있을 터였다.

우우웅!

나는 의식을 가라앉히고 눈을 떴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곤히 자는 동료들을 바라본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命)이란 건, 뭐지..?"

쇄천봉에서 얻은 양수진의 잔영이 말한 명.

김영훈이 깨쳤다고 한 명.

원립이 봉명인을 얻은 후 설명한 명.

괴군은, 운명이란 것이 실제한다고 하였다.

또한 수선의 극한에 이르면 운명에 어느 정도 간섭하기 시작하는 게 가능한 듯 했다.

'그리고, 종명자란 건...'

양수진의 잔영을 봤던 것이 바로 지난 삶이었다.

'수선을 해서, 운명에 간섭이 가능한 존재가 된 양수진조차 그 꼴로 만들어버린 뭔가가, 삼천세계 전체를 주시하고 있단 건가? 종명자란 걸 찾기 위해...?'

종명자는 또 뭐고, 이 세계는 뭐란 말인가.

나는 문득, 노을이 지고 별들이 떠오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저 별들이 이 지상을 관찰하는 눈 같다는 느낌을 받아 흠칫했다.

'젠장, 과한 생각이다.'

별들 하나하나가 눈이라니, 그만큼 소름끼치는 상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삶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축기기에 오르고, 월도입천을 깨닫고, 서란과 함께 송진을 잡은 후 그의 임종을 지켜주고, 섭명함 조종법을 알게 되고, 봉명성의 존재에 대해 알고.

김영훈이 월도입천 너머를 보고 죽고.

봉명성 안쪽에서 몇백년을 지내다가, 원영기 수도자 원립에게 살해당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살면서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정신이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자고 있는 김영훈을 돌아보았다.

지난 삶의 그가 떠올랐다.

'조금 사람답게 살라고 하셨지요.'

그래, 어쩌면 이번 삶에는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

'봉명성이니 운명이니 종명자니, 다 때려치우고 조금 안정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무래도 지난 삶의 마지막.

원립에게 의식을 고문당했던 것 때문에 더더욱 휴식에 대한 생각이 간절한 듯 했다.

'이번 삶에는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오행혈주번에 대한 해법을 듣고, 조금 쉬엄쉬엄 지내면서 정신을 회복시켜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밤공기와 함께 천천히, 느릿느릿 내공을 운용했다.

우우웅!

점차 단전에는 내단이 형성되었다.

전신이 찌릿거리며, 기분 좋은 용트림을 뱉는다.

그리고.

쿠웅, 쿵!

내단을 형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숲 너머에서 새하얀 거체가 다가왔다.

나는 사색의 시간을 방해한 그것을 보며 살짝 눈을 찌푸렸다.

쿵, 쿵, 쿵!

[이 놈... 네놈은 어떤 요족인데 감히 내 숲에 들어와 있느냐?]

"...숲의 주인이시여."

등선향에 사는 결단경 여우 요족.

나는 녀석을 보며, 일단은 예를 갖춰 말을 올렸다.

"저는 공간 균열에 휘말려 우연찮게 이곳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녀석은 어찌되었든, 지금껏 신사적(?)으로 늘 팔을 하나씩만 먹고 예의만 차리면 그 정도에서 물러가 주었다.

"부디 자비를 베푸셔서 이 숲에 며칠만 머무르게 햐 주시지요."

그러니 나도 끝까지 예의를 차려줄 것이다.

[이 놈, 헛소리 하지 말아라. 내 숲에 머물고 싶다면 사지를 뜯어 바쳐야 할 것이다.]

"...숲의 주인이여, 간청드리나이다. 머물게 해 주시지요."

[감히 같은 요족 주제에 상대의 영역에 멋대로 들어오고 자비를 바라느냐?]

"숲의 주인이여,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간청하니, 부디..."

[시끄럽다! 요단을 내놓아라 침입자 놈!]

콰아앙!

여우가, 앞발을 들어 나를 내리쳤다.

파앙!

[뭣...]

그리고, 나는 무형검을 들어 앞발을 쳐냈다.

"후우... 세 번이나 간청했다. 참을 인도 세 번이나 하면 충분하지 않나?"

사실 조금 걱정도 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예상외로 신사적으로 물러나면 왠지 조금 억울할 것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크게 다를 건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복날이다, 이 똥개 놈아."

나는 여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새하얗게 웃었다.

내 무형검의 기세를 느낀 듯, 여우가 움찔거린다.

어쩌면, 나는 줄곧 이 날만을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여우사냥을 시작해 볼까..."

쿠구구구!

나는 동료들을 수면술로 더욱 곤히 재우며, 여우를 향해 한 발을 디뎠다.

오늘 밤은 길 것이다.

여우 사냥

휘이이이-

나뭇잎 한장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진다.

그리고, 내가 먼저 움직였다.

단악검법, 기산심천!

무형검이 일순간 커지며 여우의 머리 위로 내리꽂힌다.

찰나간 나와 놈의 눈빛이 오고갔다.

붉은 의념이 사방팔방에서 나를 노린다.

새하얀 발톱들이 의념에 잇따라 나를 향해 쇄도했다.

하나라도 직격당하면, 축기기에서 일반인 수준까지 떨어져 내린 지금의 육체로선 몸이 그대로 갈려버리는 일격들.

그러나.

부웅, 붕, 붕!

무형검을 쥔 채로, 형태없는 궤적과 함께 보법을 밟는다.

산군월악비!

꽈과과광

내 무형검이 여우에게 내리꽂히고, 여우의 공격들이 주변으로 흩뿌려진다.

먼지구름이 일어났고, 그 중앙에서 뜨거운 바람이 밀려나오며 먼지구름을 흩어버렸다.

"이..노오옴!"

등짝에 검흔(劍痕)이 남은 여우가, 티끌조차 스치지 않은 나를 향해 노기를 드러냈다.

궤적이 전부 눈에 보이는데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여우의 분노에 대답하는 대신 무형검을 거두어들이고 단맥도의 기수식을 잡았다.

수도자가 주변의 공간을 법술로 장악하여, 주변 환경을 '자신을 위한 환경'으로 치환시켜 싸운다면.

무인(武人)은 주변의 공간을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환경에 맞춰 변화시킨다.

주변의 나무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들.

자고 있는 동료들의 숨소리들.

심장 박동 소리들.

여우에게서 느껴지는 영력, 힘, 심장소리, 근육 사이사이에서 들리는 기음들.

'더 집중한다.'

땅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들.

나와 여우의 첫 격돌에 떨어지는 새벽 이슬방울들.

녀석의 경계심이 깃든 숨소리, 내 심장 박동 소리.

그 모든 정보들을 파악하고, 그 사이에서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어, 내 무형검을 최적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단맥도, 산바람!

무형검은 일순간 바람이 되어, 여우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반응이 불가능한 극속의 공격!

파아앗!

나와 여우의 경로 사이사이에서 떨어지던 나뭇잎들이 전부 베여나간다.

나뭇잎들을 베어낸 무형의 검은 그대로 여우의 가슴에 닿았다.

찰나, 여우의 의식형태가 여우와 똑같은 형태로 압축되며 녀석의 전신이 백색의 빛살에 휩싸였다.

쿠과과광!

'못 뚫었나.'

무형검은 여우를 뚫지 못했다. 결단경 요수의 거죽은 과연 상당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요수 특유의 기이한 요술이 발동되니 방어력은 더욱 더 상승되었다.

하지만 여우는 무형검 자체의 힘은 이기지 못했는지, 그대로 무형검에 밀려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파앙!

나는 허공을 박차고 여우의 앞으로 올라가 무형검을 치켜들었다.

아우우우우!

여우가 울부짖는다.

녀석의 주변으로 수천 개의 여우불이 나타나더니, 백색의 여우와 똑같은 분신으로 변하였다.

수백수천마리의 삼미호가 나를 둘러싸고, 일제히 달려든다.

"쓸데없긴."

나는 괜히 힘을 낭비하지 않고, 의념의 흐름과 요족의 지각을 사용해서 본체를 찾아낸 다음 본체를 향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산명곡응, 구산팔해

무형검이 뻗어나가며 수천 개의 가시처럼 뻗어나가 여우의 본체를 휘감았고, 파장의 형태로 변화하며 여우의 전실을 때리고, 그 다음 바로 사방팔방을 베어낸다.

여우의 분신들이 달려들었으나, 나는 수많은 흐름 속에서 최적의 경로를 읽어내며 분신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분신들은 서로서로 나를 노리다가 결국 힘이 다하여 사라졌고, 내 무형검에 두들겨 맞던 여우가 다음 요술을 사용한다.

키잉!

어느 순간 섬광이 번뜩이는 듯 하더니, 눈 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새하얀 빛무리 속, 사방에서 교성과 달뜬 숨소리가 들려왔고, 내 육체에 열락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환술인가."

그러나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허공을 바르쥐었다.

"잡스럽군."

콰악!

무형검의 본질에 접속한다.

내 심상이 느껴졌다.

그 심상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고통.

전신이 투명한 칼에 파묻히는 듯한 그 아릿함.

그 고통이 정신을 각성시켰고, 환술은 제대로 펼쳐지기도 전에 박살나 버렸다.

그러나 그 틈새에 요술로 몸을 숨긴듯, 여우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단악검법, 산수화

촤아아아!

사방팔방으로 무형검이 뻗어나가며 주변을 헤집는다.

그리고 되도않게 은신술을 펼치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여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드러내며 다시금 요술을 펼치려 한다.

단악검법, 유릉!

꾸광!

나는 득달처럼 달려들어 여우를 부드럽게 찔러들어갔다.

파아앗!

여우의 입에서 새하얀 광채가 터져나오며 내게 맞선다.

나는 즉시 자세를 바꿨다.

무형검 역시 초식이 펼쳐지던 도중 궤적이 변화하였다.

단악검법, 등맥

콰아앙!

무형검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여우의 턱을 후려친다.

콰아아앙!

새하얀 광선은 여우의 입 안에서 폭발해 버렸고, 녀석의 머리통이 섬광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러고도 큰 타격을 입은 건 아닌지, 여우가 세 개의 꼬리에 빛을 두르고 나를 향해 휘둘렀다.

단악검법, 공곡전성!

나는 무형검의 흐름을 주변으로 두르며 여우의 공격을 잡아채, 그 힘을 여우에게로 되쳐버렸다.

꽈아앙!

다시금 폭음이 울리며 여우가 나가떨어졌다.

크아아아아!

녀석이 분노에 찬 듯, 나가 떨어지며 마구 울부짖었다.

백색의 섬광이 사방으로 난무하며, 주변 지형을 붕괴시킨다.

그리고 녀석의 의식형태가 더더욱 자신과 똑같이 압축되었다.

"이제 조금 열받았나 보군."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볼까?"

수백 수천의 자유로운 궤적을 주변에 두른 채, 나는 여우를 노려보았고, 여우도 나를 노려보았다.

여우가 새하얀 빛에 둘러싸이며 내게 돌진한다.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 급의 속도!

아니, 요수인 여우 본연의 속도가 합쳐져, 어지간한 결단기 수도자보다 훨씬 빠르고 흉맹한 속도였다.

단악검법, 요산요악

수천개의 종횡하는 무형의 궤적이 여우를 막아선다.

여우가 울부짖자 수천개의 여우불이 주변을 다시금 메운다.

이번에는 방금과는 다르다는 듯, 여우불의 궤적은 아까보다 훨씬 빠르고 복잡하게 내게 쇄도하였다.

단악검법, 괴암

무형검이 나를 둘러싸며 공방일체로 주변을 갈아버린다.

단악검법, 유릉

나는 무형검을 쥔 채 수많은 의념의 간격을 넘어 여우에게 다가가 검을 찔렀다.

녀석이 분노에 찬 듯, 나를 잡으려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녀석의 앞발에 앞쪽의 산 하나가 그대로 함몰되었고, 녀석의 꼬리에서 뿜어진 백색의 기운에 뒤쪽의 강이 증발한다.

단악검법, 능곡지변

무형검을 땅 아래로 쏘아보내 주변 지형을 일그러뜨린다. 지형이 내 의지에 의해 변화하며, 여우를 깊은 구덩이에 떨어뜨려 버렸다.

츠아아아!

여우가 기운을 늘어뜨린다. 수십 개의 백색의 창이 여우의 주변에 늘어서더니, 구덩이 안쪽에서 위쪽을 향해 쏘아졌다.

단악검법, 백팔광일출봉, 첩첩산중

무형검이 백팔 갈래로 쪼개지며, 첩첩산중의 초식이 겹쳐져, 구덩이 안쪽으로 백팔개의 무색의 가시덤불이 나타나 여우의 요술을 모조리 찢어버린다.

단악검법, 산중호걸

무색의 가시덤불을 만들었던 무형검들이 다시 일순간 일점집중되며 여우에게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구덩이 아래에서 폭음이 울렸다.

그러나 먼지구름 사이로, 새하얀 백광이 터져나오며 여우가 발악하였다.

크오오오!

백색의 빛이 뭉치며, 수십 장 크기의 여우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산만큼 거대한 여우가 구덩이 아래에서 고개를 들며 나를 향해 입을 벌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것이 여우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술임을 짐작했다.

"이게 끝이냐."

그리고, 나는 싸늘한 얼굴로 여우를 보며 냉소했다.

"원영기 노괴물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군."

파아아앗!

여우의 형상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그 안쪽의 기운이 끓어오른다. 저게 폭발하면 직격당하든 피하든 어지간한 결단기 수도자조차 뼈도 못 추릴 터였다.

하지만 나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기수식을 잡고 백광을 마주했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

쿠구구구!

단악검법의 오의가 발하며 무형검을 통해 1초부터 20초까지의 초식이 순식간에 터져나온다.

그리고 21초 천지에 의해 힘이 모이며 20초까지 모아온 초식의 힘이 모조리 여우의 요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백광과 무광이 폭발한다.

그리고, 빛이 잦아들었다.

쉬이이이-

그리고, 저 너머에서 여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다시 자세를 잡고 월악의 태세로 돌아갔다.

단악검법 23초, 산외산부진.

소모되었던 기력이 돌아오며, 다시금 절초를 펼칠 수 있게 기력이 회복된다.

여우는 내 기세를 알아차렸는지, 그 눈에 당황이 서려있었다.

"크, 크윽...!"

여우가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백색의 섬광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며 나를 향해 쏘아져 왔으나, 그 수와 위력은 이전보다 한참은 부족한 것이었다.

단악검법

월악, 입산, 등맥, 유릉...

공곡전성, 구산팔해, 천지...

단악(斷岳)!

다시 한번 단악검법의 오의가 무형검을 통해 펼쳐졌고, 여우는 기겁하며 단악의 초식에 모인 힘 덩어리를 피했다.

"네, 네놈. 어떻게 그만한 기술을 연속해서..."

나는 말없이 산외산부진을 유지하며 다시 힘을 끌어모았다.

총 서른여덟 번.

그것이 내가 산외산부진을 통해 단악검법 오의를 펼칠 수 있는 숫자였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몸이 무리를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물론 산외산부진을 펼친 이상 하루이틀 앓아눕는 건 이미 확정이지만.

그것을 감안하면, 나는 지금 결단경 요수가 전력을 다해 펼친 필살의 일격을 38번은 연속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콰과과과광!

단악(斷岳)!

산이 쪼개진다.

여우가 나가떨어진다.

무형검을 통해 펼쳐지는 단악검법은, 어느새 그 이름에 딱 알맞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말 그대로, 산을 끊고 쪼개는 검법이었다.

"이, 이 놈. 떨어져라!"

세 번의 단악을 받아낸 여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발을 빼며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파아앗!

다시금 수많은 여우불이 허공에 떠올랐고, 나는 무형검으로 여우불들을 모조리 쳐내며 여우에게 달려갔다.

백색과 무색의 궤적들이 폭발하는 와중, 나는 무수한 흐름과 폭광을 넘어, 여우에게 다시금 단악을 펼쳤다.

꽈아아앙!

섬광이 비산하며, 여우의 뒤쪽에 있는 구릉 하나가 그대로 두 쪽이 나 갈라진다.

단악을 간신히 피한 여우가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지난 삶의 김영훈으로부터 배운 무공기법을 응용해, 내 팔에 무형검을 그대로 동화시켰다.

그리고 그 상태로 여우를 쫓아가, 녀석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형검과 동화된 팔로, 꼬리를 잡은 채 그대로 휘둘렀다.

쿠우우우!

집채만한 여우의 거체가 떠오른다.

콰아아앙!!!

나는 그대로 여우를 잡아 저 멀리 있는 산에 패대기쳤다.

산봉우리 세 개를 그대로 관통하며, 여우가 비명을 질렀다.

"케에에엑!"

콰앙!

퍼억!

나는 다시금 무형검과 일순간 동화하여 날아가, 여우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그 충격파에 여우가 눈을 까뒤집었고, 녀석의 뒤쪽에 있던 산봉우리에 거미줄 같은 금이 쳐졌다.

"쉬잇..."

나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조용히 해라."

"케, 케켁..."

"숲의 주인 앞에서, 무슨 추태를 보이는 게냐."

나는 여우의 머리를 움켜쥔 채 말했다.

녀석이 공포에 떨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대로 그 머리통을 무형검의 힘과 함께 땅에 쳐박아 버렸다.

"이제 내가 숲의 주인이다. 입을 닫고 예를 취하라."

쿠광, 쿠과과광!

몇 번을 여우의 머리를 잡고 땅에 처박는다.

그때마다 지축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일어섰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 결단경 요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과연 엄청난 생명력이었다.

"뱃속에 있는 걸 다 토해내게 해 주지."

여우의 뒷덜미를 잡고, 다시 한번 여우를 들어올려, 내가 산을 쪼개버려 생겨난 계곡에 던져버렸다.

콰과과광!

계곡 사이에 여우를 던지고, 다시금 따라가 무형검으로 녀석을 후려쳐 계곡에 아예 박아버렸다.

"크에에에엑!"

"조용히 하래도."

콰악!

다시금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자, 그럼..."

"케, 켁...사, 살려..."

"어디 여우구슬이란 게 정말 있나 볼까."

우우웅!

무형검을 쥔 채,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여우는 기겁을 하며 울부짖었다.

"이, 이익... 주, 죽을까보냐!"

화르르륵!

그리고, 여우의 꼬리가 밝은 빛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원을 끌어쓰는 비술인 듯, 녀석의 기세가 다시 올라간다.

하지만 나는 들어올렸던 무형검을 덤덤하게 다시 내리쳤다.

꾸콰과과광!!

다시금 계곡이 흔들리며, 여우가 땅 아래로 쳐박힌다.

그러나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우에게서 빛이 터져나오며, 여우가 있던 자리에 흰색의 여우털 한 가닥만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요술을 써 몸을 순간 바꿔쳤다.'

기이한 요술이었다.

그러나 멀리 도망치진 못한 듯, 저 멀리 백색의 빛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형검을 잡고, 꼬리를 태우며 달아나는 여우를 쫓아갔다.

'빠르게, 더 빠르게!'

나는 가속을 더욱 더 높이며 여우를 추격했다.

점차 녀석과 내 거리가 가까워진다.

여우가 나를 돌아보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소리쳤다.

"히, 히엑, 쪼, 쫓아오지 마라! 저리가라, 이 괴물!"

"누굴 더러 괴물이란 거냐."

콰아아앙!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고, 여우는 사색이 된 채로 가까스로 다시 무형검을 피해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이 괴물 여우가."

"저리 가라! 저리 가!"

쿠구구구!

여우가 피한 자리에 작은 계곡이 생겨났다.

여우는 이를 악물며 더욱 더 빠르게 내게서 달아났고, 나는 여우를 뒤쫓았다.

지난 삶과는 반대의 결과였다.

저번에는 여우가 나를 쫓았다면, 이번에는 내가 여우를 쫓아가며 여우를 사냥하고 있었다.

쿠궁, 쿠궁, 쿠구구궁!

내가 무형검을 날리자 몇 개의 구릉이 날아갔고, 여우는 미친 듯이 무형검들을 피하며 발을 놀렸다.

수많은 산과 강이 우리를 스쳐지나갔고, 우리는 추격전을 벌이며 등선향의 사분지 일을 주파했다.

몇 번 내게 잡히기도 했으나, 여우는 꼬리를 태우는 그 기이한 요술을 사용해서 몇 번이나 위기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됐을까, 여우의 꼬리에서 불타던 백색의 빛도 옅어졌다.

어느 작은 호수의 위쪽.

그곳에서 여우는 그제서야 멈춰섰고, 숨을 몰아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형검을 쥐고 여우에게 다가갔다.

"그, 그만! 그만 해 주시오. 용서를 구하오!"

여우가 내게 사정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까지, 몇 번의 삶동안 저 놈에게 팔을 뜯겼더라.

욱씬!

내 팔이 문득 통증을 호소했다.

산외산부진의 영향도 있었지만, 여우로부터 얻은 안좋은 추억 덕분이기도 했다.

"...살려, 살려만 주신다면 숲의 주인으로 당신을 인정하고 복종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여우는 비굴하게 내게 머리를 박으며 목숨을 구걸했고,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배를 한 번 걷어찼다.

"케에엑!"

다시금 놈이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해내며 나가떨어졌다.

이제 놈은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반면, 나는 피칠갑은 커녕 옷 한 올 베이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덧 나는 여우를 사냥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선 것이었다.

"사, 살려..."

"......"

나는 무덤덤하게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하는 여우를 내려다 보았다.

여우는 지금껏 내게 숲에서 머물고 싶다면 사지를 잘라 바치라고 했다.

"...내 숲에 산 채로 머물고 싶느냐?"

"......"

"요단을 토해내라. 그리하면 살려주지."

"끄...으..."

여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무표정한 기색으로 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쨌든 이 녀석 때문에 늘상 고통을 겪었지만, 직접적으로 살해당한 적은 없었다.

이것은 그에 대한 자비였다.

한참을 고통스럽게 끙끙거리던 여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커억, 컥!

파아아앗!

여우가 몇 번 헛구역질을 했고, 곧이어 여우의 입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주먹만한 구슬이 뽑혀나왔다.

여우의 영성(靈性)과 영력이 한껏 모여있는 여우의 요핵.

녀석을 일반 짐승에서 요족으로 남아있게 해 줄 수 있던 물건.

나는 허공에 떠오른 여우의 요핵을 잡아챘다.

그러자 요핵에 영성이 집약된 여우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동시에 여우의 체구가 작아졌다.

결단경의 의식을 지녔던 여우의 의식이 작아지더니, 녀석의 두개골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우는 요핵을 토해내고 다시 일반적인 짐승인 여우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꼬리가 세 개인 건 신체가 아예 변형된 것인 탓인지 변화가 없었으나, 여우는 이제 일반적인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멍청한 눈으로 나를 보던 여우는 내 손에 들린 요단을 탐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깨갱 거리며 동네 개새끼처럼 몸을 움츠리고 저 멀리 도망쳐 버렸다.

이제 10번의 삶동안 내 팔을 뜯어갔던 괴물 여우는 없었다.

꼬리가 세 개인 특이한 변종의 작은 여우 한 마리만이 남아, 이지를 잃고 도망칠 뿐이었다.

나는 내게서 도망치는 조그마한 여우를 잠시 쳐다보다가, 여우의 요단을 쥐고 다시 동료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또 하나의 운명을 극복했다.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동료들을 향해 허공답보를 펼쳤다.

"하, 하하...하하하하...!"

열 번의 삶을 거쳐서, 드디어 생애 초반.

나를 위협하던 여우를 이길 수 있는 무력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아직도 내 수면술로 곤히 잠자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제 동료들을 데리고 등선향 바깥을 나갈 수 있을지도.'

천인기 수도자들한테 발각되지 않고, 나가기만 한다면 어쩌면...

'동료들과 어쩌면, 다 같이 이번 삶을 살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웃음을 지으며, 몸을 주물렀다.

산외산부진을 사용하느라 전신이 욱신거렸다.

'의식의 7할만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도 산외산부진을 사용하니, 여우 정도는 충분히 잡는군.'

오행혈주번을 다 해결하고, 언젠가 의식을 10할 전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산외산부진을 사용치 않고, 무리없이 여우 놈을 잡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축기기의 실력을 바로 회복할 수만 있다면, 출력을 더욱 더 높여서 단박에 여우를 잡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지...'

혈관에 강기가 흐르는 채로 이백여년을 지냈다.

이젠 혈관에 피밖에 흐르지 않는 이 육신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일단 몸을 회복하고, 경지를 천천히 회복해 보고, 여우의 요단에 담긴 힘을 어떻게 흡수할 수 없는지 알아봐야겠어...'

나는 우선 약초를 사용해서 산외산부진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몸을 달래주기로 생각하고, 동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약초를 찾으려 했을 때였다.

화아악!

거칠고 주름이 진 손이 내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해 죽겠군. 이건 도대체 뭐지?]

등이 굽은 곱사등이 노인이, 광기가 가득 찬 눈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내 머리통을 움켜쥔 채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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