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89화 (89/185)

생화(1)

강환은 사실 하나.

무(武)와 나는 일체(一體).

그것이, 김영훈이 남긴 글귀의 첫 마디.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해석하려 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문장을 받아들였다.

우리 같은 경지의 무인들에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함축된 의미를 망가뜨릴 뿐이었다.

‘강환은 사실 하나···.’

나는 아홉 개의 강환을 주변으로 띄워 보였다.

아홉 개처럼 보이는 이 강환이 사실 서로 하나라는 의미일까.

하기야, 생각해 보면 전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나라는 틀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웅―

강환들에 변화가 일어나며, 허공에 녹고 무형검으로 화하였다.

‘그러나, 강환들이 나 자신의 속에서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론, 그냥 무형검의 깨달음과 다를 게 없다. 뭔가 다른 갈래의 깨달음이 더 필요한가.’

무와 나는 일체라.

“흐음···.”

나는 무형검을 잡았다.

무와 나는 일체라는 말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미 나와 무형검은 사실상 동일한 존재였다.

사실상의 분신(分身)!

이미 하나가 될 것도 없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하나가 되어야 할까.

나는 고민을 이어 가며 무형검을 쥐었다.

“···모르겠군.”

천천히 알아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나는 김영훈이 남긴 글귀를 계속 읽어 갔다.

첫 마디가 무공에 대한 글귀였다면, 그 이후는 그냥 내게 보내는 안부 편지였다.

잘 먹고 잘 지내라.

쉬엄쉬엄 쉬기도 하면서 지내고, 너무 인생 팍팍하게 살지 말고 소저 친구라도 꼬셔 봐라.

조금 더 재밌게 살아 봐라.

등등···.

―이 재미없는 놈아.

김영훈이 직접 눈앞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더 헷갈리라고 무공 구결은 저따위로 적어 놨다. 그래야 멍청한 네놈 머리로 파고들려 안 하고 쉬엄쉬엄 쉬면서 살지 않겠느냐.

―삶의 방식은 너와 같이 매 순간을 갈아 넣는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것만이 어찌 삶이겠느냐. 삶은 곧 기쁨이니, 네가 기뻐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그렇게 살아 보려무나.

“···잔소리하시기는.”

―그리고 네가 끓여 준 죽, 더럽게 맛없더구나. 요리 연습 좀 해라. 무딘 놈아. 난 이만 간다.

“하하하···.”

―잘 먹고, 잘 ‘살아라’.

글귀의 마지막.

그것이 끝이었다.

난 간다느니, 잘 있으라느니.

그런 작별 인사는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듯이, 내게 희망을 주듯이.

“···버텨 내겠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길든.

당신이 준 화두를 가지고.

나는 공간 균열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준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 역시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김영훈이 남긴 발자국들의 위치와 형태를 머릿속에 새긴 후.

나는 그대로 승천문의 인근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날부터.

등선향에 눌러앉아 침식을 잊고 수련을 시작했다.

음혼귀주문과 천린수해성.

천린수해성은 목(木) 속성의 수도공법이었다.

그리고, 음혼귀주문은 오행속성을 팔괘의 괘상에 대입한 공법으로, 토(土) 속성을 팔괘의 곤(☷)에 대입한 공법이었다.

곤(坤)은 곧 음(陰)으로 해석되니, 토 속성을 기반으로 음(陰) 속성의 법력을 쌓는 공법인 것이었다.

‘그리고 목(木)과 토(土)는 목극토(木剋土). 서로 상극의 관계이다. 하지만···.’

상생상극의 효과가 반드시 생(生)과 극(剋)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지의 아래를 나무의 뿌리가 파고들어 지반을 헤집지만.

동시에 나무의 뿌리가 지반을 잡아 주어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불에 물을 뿌리면 불이 꺼지지만, 불이 더욱더 거세게 타오르기도 한다.

금속은 불을 만나면 녹아 버리지만, 금속을 더욱더 단단하고 세밀하게 제련하기 위해서는 불을 써야 한다.

요컨대, 극(剋)의 관계는 제어(制御)를 뜻하기도 했다.

흙은 물을,

물은 불을,

불은 금속을,

금속은 나무를,

나무는 흙을.

상극은 서로가 기운을 강하게 해 주지는 못할지언정, 하나의 기운으로 다른 하나를 세밀하게 조작하고 제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후우우···.

음혼귀주문의 음기로 법력을 생성한다.

시커먼 저주문(詛呪文)이 주변으로 떠오르더니, 내 코와 입속으로 들어오며 법력으로 화해 영기의 별에 흡수된다.

각(角)의 영기의 별 옆으로, 저주문의 법력으로 형성된 항(亢)의 별이 점차 새로이 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태동을 관조하며, 음혼귀주문의 수련을 멈추고, 천린수해성의 수련을 이어 갔다.

파아앗!

녹빛의 영력이 모이며 저주문으로 형성된 법력과 섞였다.

천린수해성의 법력이 상생상극의 효과에 따라 음혼귀주문의 법력을 억누르며, 음혼귀주의 법력이 가진 음기(陰氣)가 함부로 번져 나가지 못하게 제어한다.

나는 음혼귀주와 천린수해를 번갈아 수행하며 눈을 반개했다.

‘이게, 음혼귀주문···. 확실히.’

나와 굉장히 잘 맞는 공법인 듯했다.

고통에 대해 관조하는 공법이라 했던가?

내 고통을 기반으로 저주문을 만들어 내는 공법?

웅얼웅얼···.

법결을 외자, 음혼귀주문의 법력이 모이며 저주문을 형성해 냈다.

스아아아―

저주문 한 개만을 형성했을 뿐이건만,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며 전신이 찌릿거렸다.

하지만 이 전신이 찌릿거리는 기분 자체는 내게 꽤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평소에 자주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절망과 고통, 이 세계에 대한 분노와 처절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음혼귀주는, 상대에게 나와 같은 고통 속에서 싸우도록 강제하는 공법이었다.

‘하, 누가 더 고통에 익숙하느냐로 승부가 갈리겠군.’

마공의 보조 공법으로 주로 쓰인다고 했지만, 이래서야 익히는 자가 얼마나 될지 모를 것 같았다.

‘저주문을 사용할 때마다 사용자도 고통을 느껴야 한다니.’

물론 음혼귀주의 후반부까지 전부 익히면, 저주를 통해 미리 지정해 놓은 대상에게 자신의 고통을 9할 이상 전송시킬 수 있다지만.

거기까지 익히려면 고통에 익숙해져야 하고, 또 거기까지 익혀서 고통을 전송시킬 수 있다고 해도 1할의 고통은 어쨌든 느껴야 했다.

‘웃기지도 않는 공법이로군.’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저주문을 법력으로 치환시켜 다시 흡수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 안 익힐 최악의 공법이었으나, 오히려 나에게는 최고의 공법이었다.

쿠우우우―

‘법력이 이 속도로 쌓이는 게 맞나?’

원래도 은식술로 사영근에 버금가는 속도로 법력을 쌓았었다.

그런데 음혼귀주문으로 법력을 쌓으니, 말 그대로 삼영근자의 수행 속도에 준할 정도로 법력이 빠르게 쌓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음혼귀주로 길을 뚫고, 그 뒤로 천린수해성의 법력으로 뿌리를 다지며 음기를 제어한다.

‘이 속도라면···.’

어쩌면 이번 생 안에 축기기 1수(宿)는 완공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껏 쌓아 올린 고통으로 대지를 다지고.

나를 믿어 준 스승님의 공법으로 씨를 뿌리며 싹을 틔운다.

마음의 밭에, 점차 숲이 자라나고 있었다.

***

“···몇 년째지.”

나는 등선향에서 음혼귀주와 천린수해, 그리고 무형검을 수련하고 또 수련하며 흠칫 놀랐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던가.

[선배님, 들리십니까, 들리십니까?]

예전, 서란이 내게 주었던 전음부가 울리고 있었다.

[선배님께서 어디에 계신 건지 모르겠군요. 일단 봉명성의 외부 금제 중, 가장 약한 부분의 금제의 파훼법을 알아내었다는 것을 알려 드리려 연락드렸습니다.]

어느덧 서란이 금제를 파훼하겠다 장담한 시간이 다가왔다.

[선배님께서 오시기만 한다면, 봉명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오셔서 섭명함으로 공간 외곽에 같이 진입해 주시기만 한다면, 봉명성에 들어가 장생과 등을 따올 수 있습니다. 선배님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장생과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런 건, 이제 필요도 없는데 말이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분명 지금은 필요 없겠지만, 어쨌든 금제의 파훼법과 장생과의 위치 정도는 파악해 놔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전부 후일을 위한 기반이 될 테니까.

나는 등선향에서 나가, 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촤아아아!

무형검을 흩뿌리자, 그동안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섭명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구구구!

그동안 음혼귀주문과 천린수해성을 수련한 결과, 현재 내 단전에는 세 개의 영기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각(角), 항(亢), 저(氐)의 기운을 머금은 영기의 별들이 반짝이며, 정순지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형검의 출력과 사용 기간은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 있었다.

촤아아악!

모래가 완전히 파헤쳐진다.

나는 빠르게 무형검으로 사방을 휘갈겼으나,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

아무리 강한 힘을 휘두른들 무엇을 할까.

같이 합을 나눌 상대가 없는데.

만약 이번 생에 장생과를 얻는 방법을 알아내고, 다음 생의 김영훈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는 사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번 생에서 나와 함께 수련을 하고, 내가 무형검을 얻는 것을 지켜보고, 내게 깨달음을 주고.

내가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먼저 깨달음을 얻고 저 너머로 훌쩍 떠나 버린 김영훈과.

다음 생애의 김영훈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아니, 사실상 모든 존재들이 그랬다.

김영훈은 가족을 그리워한다고 그랬던가?

나는, 없어지지 않을 삶이 그립고 그리웠다.

외롭다.

나는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섭명함을 일으키며, 서란이 보내 준 좌표를 향해 조타륜을 돌렸다.

이젠 섭명함에 남은 기력도 거의 없었다.

이제 한두 번 출항하면 그대로 부서질 터였다.

쿠구구구!

섭명함이 움직인다.

‘하지만, 외로울지언정, 멈출 수는 없지.’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이 모든 운명의 인력에서 벗어난다면, 정말로 허무하지 않을 삶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이번 생에 찾을 장생과는 무의미하겠지만, 다음 삶부터는 유의미할 테니까.

무의미한 것은 없다.

나는 그렇게 되뇌며, 서란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

“선배님, 기뻐해 주십시오. 이제 장생과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서란은 흥분된 표정으로 한 손에는 기이한 주술 문양이 새겨진 족자를 들었다.

“제 벗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인족 진법가까지 초빙해서 겨우겨우 완성했습니다. 금제진법의 해제진입니다!”

“그렇소?”

“이제 장생과를 찾으면···.”

신나듯 떠들던 서란은, 문득 내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읽었는지 목소리를 줄였다.

“···선배님.”

“무엇이오?”

“선배님의 벗이셨던, 그 다른 선배님은···.”

나는 서란을 보며 웃어 주었다.

김영훈은 어찌되었을까.

“···등선(登仙)했소.”

그래, 분명 그리되었을 것이다.

신선이 되어, 저 먼 하늘에서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서란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제가 더 빨리 금제를 파훼했어야 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오. 서 도우가 신경 쓸 것 없소. 그는 분명··· 정말로 등선했을 테니까.”

“···.”

우리는 잠시 가만히 묵념했다.

“···어쨌든, 봉명성에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건 있을 테니, 한번 가 보도록 하겠소.”

“···!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는 섭명함에 올라타 서란이 보여 준 좌표를 향해 조타륜을 잡았다.

이제, 봉명성이라는 곳에 들어가 볼 때였다.

***

쿠구구구!

섭명함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시커먼 어둠 속.

우리는 공간의 외곽에 도착하여, 그곳을 부유하고 있는 봉명성에 도착하였다.

여전히 봉명성은 이전과 같은 자태로 공간의 외곽을 부유하고 있었다.

“선배님, 금제를 파훼하겠습니다.”

서란은 봉명성의 옥빛 대문 옆, 그 바로 옆으로 날아가, 가지고 온 족자를 꺼내 들었다.

파아아앗!

기묘한 빛이 족자에서 뿜어지며, 봉명성의 금제에 맞닿았다.

파지지직!

금제 위로 수많은 주술문이 흘러나오며 족자의 빛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족자의 빛들이 엮이며 금제와 똑같은 주술문을 주없이 쏟아 내었다.

파치지직!

금제의 주술문이 족자의 주술문에 상쇄되며, 금제의 한켠에 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금제의 틈이 드러났습니다. 선배님! 선배님의 법술로 저곳을 돌파해 주십시오!”

나는 무형검을 세우고, 그대로 봉명성의 외벽을 돌파했다.

콰과과광!

서란은 나를 따라 들어왔고, 나는 외벽 안쪽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것도 밖보다 안이 압도적으로 크군.’

이 안쪽에 공간을 어마어마하게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수많은 복도와 건물들이 안쪽에 좌르륵 늘어서 있었다.

“후우, 엄청나군요.”

서란이 따라 들어와 주변을 보며 말했다.

우드드득···.

문득 뒤를 돌아보자, 내가 돌파한 외벽으로 토 속성의 영기가 몰리더니 자동으로 수복되기 시작했다.

역시 자동 수복 기능도 있는 듯했다.

“다시 나가는 것도 문제가 없겠지?”

“예, 금제의 해주진은 하나 더 가져왔습니다.”

서란이 족자를 꺼내며 말했다.

“흠···.”

나는 족자를 보며, 족자에 새겨진 진법과 주술문을 머릿속에 잘 담아 두었다.

다음 생에 유용하게 쓰일 터였다.

“이전에 봉명성에 다녀오신 해룡족의 어른께서 주셨던 정보를 토대로, 장생과가 있다는 수목원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란이 품속에서 낡은 지도를 꺼내며 말했다.

지도는 몇십 년은 된 물건인지, 바스러질 듯 낡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서란을 따라갔고, 봉명성의 복도 곳곳을 관람했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

난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이건···.’

뭐랄까, 마치 폐기된 섭명함의 내부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같았다.

조용하다.

그리고, 수많은 구조물들이 어째 다 부서져 있다.

“···서 도우.”

“예, 선배님.”

“뭔가 이상하지 않소?”

“흠,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거대한 참흔(斬痕)이 새겨져 무너져내린 전각 하나를 가리켰다.

“봉명성 안의 구조물들은, 지을 때부터 원래 다 저렇게 지어진 것이오?”

“아···.”

서란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도 말로만 들었지 들어와 보기는 처음인지라···.”

“흠···.”

나는 눈을 찌푸렸다.

어째,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느낌은 복도를 지나던 도중, 일단의 잔해(殘骸)를 본 후에 더욱더 커졌다.

‘괴군의··· 괴뢰들?’

일전 섭명함 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장식의 잔해들.

그리고 괴군의 잔해들뿐이 아닌, 다른 잔해들 역시 보였다.

봉명성의 기운과 정확히 같은 기운을 가진, 석상(石像)들이었다.

“이건···.”

서란도 이쯤 되자 위화감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눈을 찌푸렸다.

“서 도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여기까지 오지 않았소? 이 정도 규모의 유적이라면, 유적을 지키는 수호물 같은 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예. 전부··· 박살이 나 있군요.”

서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괴군의 흔적뿐이 아니오. 아까 보았던 참흔, 그리고 어떤 곳엔 귀기가 서려 있었고, 어떤 곳은 박살이 나 있고, 어떤 곳은 아예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지.”

나는 그를 보며, 현재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길한 추론을 말했다.

“봉명성이라는 게 어쨌든 공간 균열 안쪽을 떠돌다가, 몇백 년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낸다면. 승천문이 열리기 이전,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하기 전에 전부 쳐들어와서 봉명성 안쪽의 재물들을 싹 다 털어 갔을 가능성은 없소?”

“···.”

서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설마 그 잡귀 놈이 일부로 이딴 정보를 줬단 건가?

‘아니, 아닐 터다.’

마지막에 읽었던 송진의 심상은, 정말로 서란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었다.

‘어쩌면, 봉명성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송진이 죽은 이후일지도. 그가 죽은 이후에 봉명성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다음에 천인기 수도자들이 봉명성을 싹 다 털어 갔기에 아무것도 안 남았다는 걸 모른 채 서란에게 좌표를 줬던 건가···.’

“···이, 일단. 수목원까지는 가 보는 게 어떻습니까.”

서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수목원에 쓸 만한 영약이 하나쯤은··· 그래도 남아 있을 수도···.”

“···.”

나는 얼굴을 굳힌 채, 일단 서란을 따라 수목원으로 향하였다.

얼마 후, 봉명성의 수목원에 도착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망할 천인기 수도자 놈들.’

수목원은 곳곳이 잔뜩 파여 있었고, 곳곳에 남아 있는 나무 같은 것들은 과실들이 전부 따져 있어 가지가 휑했다.

서란은 아연한 표정으로 장생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생과가 열린다는 수원목(壽源木).

그 수원목에는, 아무 열매도 달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지째로 잘려 나간 부분조차 몇 군데 보였다.

천인기 수도자들은, 봉명성을 전부 알뜰하게 털어 간 것이었다.

“···빌어먹을.”

서란이 짓씹듯이 뇌까렸다.

나 역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음 생으로 가도, 김영훈의 수명은···.’

답이 없는 것인가···.

나는 답답한 마음에, 수목원의 천장을 쳐다보며 곳곳을 거닐었다.

황량하다.

수목원 자체에 흐르는 영맥은 상당했지만, 정작 그 영기를 흡수하고 자라난 영초와 영목들이 뽑히고 잘려져 있었다.

“···쯧.”

김영훈은 결국, 수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몇 번의 삶을 살아도, 그의 제약은···.

저벅, 저벅···.

그렇게, 수목원을 거닐던 중이었다.

“···음?”

나는 문득, 열매를 다 따이고 잘려 나간 영목들 사이.

특이한 영력을 뿜어내는 나무를 하나 발견하였다.

“저건···.”

그것은 아까 보았던 수원목과 같은 종의 나무였다.

다른 점은, 아까의 수원목보다 어린 종인지, 훨씬 크기가 작았다.

“···!”

그러나, 내 눈에 띈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잠깐, 잠깐··· 서 도우! 이리 와 보시오···!”

나는 헐레벌떡 어린 수원목으로 달려갔다.

어린 수원목에는, 몇 송이 꽃이 피어 있었고.

그중 하나의 꽃봉오리 밑이 부풀어 오르며, 열매와 같이 변하고 있었다.

“서 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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