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臨終)(1)
무형검의 기세만으로도, 김영훈이 창조한 대다수의 무공들이 박살난다.
하지만 새로운 무공을 제물삼아, 김영훈의 도가 찰나를 꿰뚫고 서은현의 인지를 베어가르며 그의 목을 노린다.
반대로 서은현의 무형검은 흉맹하긴 했으나 아직도 내려오려면 반의 반호흡씩이나 필요했다.
'내가 이긴다!'
김영훈이 입이 찢어져라 웃을 때였다.
서은현의 왼손 위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칠십이지살진언 중, 지형(地刑) 진언의 법술이 오행영력으로 구현된다.
'법결을 외지 않고, 무영창으로 법력의 흐름을 조작해서 만든 건가?'
빠르게 생겨나는 걸 보니 아까부터 준비하던 법술이 지금 막 완성된 듯싶었다.
법력이 허공에서 굳으며, 단단하게 응결되었다.
아마 영력을 응결시켜 폭발시키는 법술의 일종!
'상관 없다, 어차피 못 맞춰.'
서은현이 법술을 완성시키고, 다시 법술을 김영훈에게 날리는 데까지의 시간은 눈을 한 번씩이나 깜빡일 시간.
그 정도의 시간이면 이미 김영훈의 도는 서은현의 목에 닿는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콰악!
서은현은, 왼손의 법력을 분사해 법술을 발사하지 않았다.
대신, 정순지력을 머금은 그 손으로 법술을 움켜쥔 다음, 김영훈을 쳐다보았다.
서은현의 의념과 함께 절학명이 울려퍼진다.
투괴암기술, 직사(直蛇)
분명 김영훈에게 내리꽂힐 듯 했던 무형검은 어느새 형태를 바꾸어 서은현의 왼손에 깃들어 있었다.
법술이 무형검에 덧씌워져 김영훈에게 쏘아져 왔다.
이대로라면 맞찌르기가 된다.
'그리고 맞찌르기라면, 혈관에 강기가 흐르게 된 이 괴물딱지 같은 놈이 이기겠지.'
정순지력이 몸을 돌며 생명력을 곳곳에 퍼뜨리기에, 목을 반쯤 잘라도 척수가 끊어지지 않으면 아마 안 죽을 거다.
김영훈의 판정패였다.
'아니.'
쿠구구구구!
김영훈은 전신의 기운을 짜냈다.
'서은현처럼, 죽을 각오를 다진다!'
마치 상단전이 폭발해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김영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그의 재능을, 그가 이 세계에 오고 눈을 뜬 그 감각을 불살랐다.
무(武)를 수련하는 기쁨.
그것 외에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잊는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김영훈은 무공을 창조했다.
새로운 무공은 단순히 몸재간을 놀리거나, 참격을 쏟아붓는 무공이 아니었다.
정지된 세계.
그 안쪽에서, 김영훈의 전신 곳곳에서 황금빛의 실들이 뿜어졌다.
실들은 빛과 같은 속도로 정지된 세상을 움직이며, 김영훈의 팔 주변으로 몰리고, 그의 손아귀로, 그가 쥔 능광도로 이어지며, 능광도를 완전히 감싸안았다.
능광도의 위로, 무(武)의 위쪽으로 얇은 실선들이 깔리며 혈관(血管)이, 경락(經絡)이 깔린다.
그는 무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궁구했다.
내공도 초식도 의지도.
모두가 무공의 일부.
그리고, 내단(內丹)은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이으며 무공이 평형을 이루게 해 주는 것이었다.
문득, 김영훈은 그것을 떠올리며, 내단의 존재에 대해 궁리하였다.
'내단은 뭐지?'
내단이란 기본적으로 강환이 단전에 안착하여, 단전의 힘과 섞이며 새로운 형태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단전이란 무엇일까.
왜 바깥으로 뿜어 쓰는 강환은 기운을 다하면 소모되지만, 단전은 힘을 회복할까.
김영훈의 감각은, 그가 의문을 갖자 그를 바로 해답으로 이끌었다.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단전은 전신의 혈맥과 경락과 이어져 있다.
진짜 생명과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생명력에 힘입어 계속해서 대기중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활력을 가지고 내공을 품는 것이다.
강환은 의식이 들어가있을지언정, 진정 생명력이 이어져 있지는 않았기에 계속해서 소모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짧은 찰나 김영훈의 재능은 그를 새로운 발상으로 이끌었다.
체외로 기운을 뿜어 인위적으로 경락과 혈맥을 만들고, 강환에 생명력을 이으면, 그 강환은 체외(體外)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내단이 되는 게 아닌가?
기가 잘 소모되지 않는 걸 너머, 생명력이 이어져 있기에 스스로 힘을 꾸준히 회복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새로운 힘의 원천(源泉)이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김영훈의 능광도는 아홉 개나 되는 강환과 그의 의식영역의 합일(合一)이었다.
'간다.'
능광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몸 바깥에 새로운 단전을 만든다.
능광도가 더욱 더 찬란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지된 그 찰나의 순간, 능광도는 완전히 정지한 세계에서, 모든 인지와 인식을 넘어 서은현이 쏘아낸 법술을 잘라낸 후 서은현의 목으로 쏘아졌다.
서은현의 법술에 깃들어 있던 무형검이 일순간 다시 급하게 변화하며 김영훈을 노렸지만, 급하게 변화하는 탓인지 어깻죽지로 향할 뿐이었다.
촤악!
콰아아아앙!
뒤늦게 파공성과 함께 소리가 터져나가며 주변으로 피어올랐던 흙먼지들이 원형으로 밀려나갔다.
김영훈의 능광도는 서은현의 목에 닿아있었고, 서은현의 무형검은 김영훈의 어깻죽지에 닿아있었다.
"내가..."
김영훈의 승리였다.
"이겼다!"
주륵, 왈칵!
김영훈의 눈과 코,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급격히 재능을 활성화시키느라 상단전을 무리시켰다.
또한 김영훈의 내단은 텅텅 비어있었고, 능광도의 빛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그러나, 서은현은 한숨을 쉬었다.
"...실전이었으면 죽었겠지요. 예, 제 패배입니다."
"흐, 흐하, 흐하하하하...!"
김영훈은 피칠갑을 한 채 웃었다.
기어이 그를 넘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파츠츠...
김영훈의 도에 깃든 황금빛이 회수되며 김영훈의 의식영역으로 돌아갔고, 서은현의 무형검 역시 다시 돌아갔다.
"그나저나, 그건 뭐였습니까? 마지막에 그거 말입니다."
"강환을 내단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하고, 단전과 같이 체외로 경락과 혈맥을 이어 강환으로 만든 능광도에 이었다.
체외에 힘의 원천을 하나 더 만들고, 그걸 이용해서 능광도를 한계치 이상으로 순간 강화했지."
"허어..."
서은현은 뜨악한 표정으로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런 무공을... 방금 전투 속에서 만든 겁니까?"
"발상만 된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무학이다. 아마 너도, 아니 너는 더욱 더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넌 기를 체외로 배출해서 법술을 부리는..."
문득, 김영훈은 서은현과 말을 하며 주변을 흘끗 쳐다보았다.
제대로 신경쓸 겨를이 없어 몰랐었다.
"수도자이기도 하니... 무리없이..."
사방이 망가지고, 지형이 패였다고만 생각했지.
원래의 지형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배울 수 있을 거다."
서은현이 무형검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바꾼 지형은, 진도(陣圖)를 그리고 있었다.
진도에는 주술문자가 검흔(劍痕)으로 새겨져 있었고, 서은현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진도가 겹쳐져 있는 상태였다.
그가 법력을 불어넣기만 했다면 오행(五行)의 진도가 발동되며 이 인근 전체가 서은현의 영역이 되었을 터였다.
"......"
오싹, 오싹!
김영훈은 문득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전투가 장기전으로 가서, 서은현이 법진을 발동시키기 시작했으면...'
김영훈의 필패(必敗)였을 터.
'수도자와는, 장기전이 거의 불가능한 건가.'
단기전에 끝내기를 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영훈은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나저나, 음...!"
그리고, 김영훈은 문득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 탈진(脫盡)했군.'
의식이 어느덧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은현아. 나 좀 부탁.."
그리고, 문득 정신을 잃기 직전.
김영훈은 서은현이 너무 멀쩡하단 걸 느꼈다.
전신 곳곳이 찢어지고 옷이 피칠갑이 되었으며, 내상을 입고 기운이 모조리 빠져 탈진을 한 그였다.
무형검의 기세에 스쳐서 다친 곳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은현은, 조금 호흡이 빨라진 걸 제외하면 아무 상처도, 먼지가 묻은 곳조차 없었다.
김영훈이 마지막에 도를 가져다 대서 살짝 자국이 난 목 부근을 제외하면, 어떤 곳도 다치지 않았다.
분명 실전이었다면 김영훈의 도는 서은현의 목을 잘라버리고, 서은현의 무형검은 김영훈의 한쪽 팔만을 가져갔을 터.
엄밀히 말하면 김영훈의 승리가 맞았고, 양쪽 다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김영훈은 정신을 잃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거, 이긴 게 맞긴 한가.'
이긴 쪽은 죽을려 하고 있는데, 진 쪽은 멀쩡하다.
김영훈은 헛웃음을 삼키며 그렇게 기절하였다.
'이런 젠장...'
* * *
"후우..."
나는 쓰러진 김영훈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솔직히 싸우는 도중에, 그것도 1초조차도 되지 않는 그 찰나 찰나에 무공을 계속 찍어내듯이 만들며 내게 덤비는 그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만들었던 그 무공.
'체외에 단전을 만들어 무공의 출력을 올린다고?'
획기적인 동시에 천재인 그이기에 만들 수 있는 무학이었다.
김영훈의 재능이 이 정도로 말도 안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순수한 무(武)의 영역에서는 당연히 내 패배였고, 실전이었으면 이번 삶을 끝낼 뻔했으니 전투력 면에서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몇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진도를 발동시키고 주변 영역을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김영훈은 1초보다도 훨씬 찰나의 세계에서 움직였다.
무형검을 움직여 반응을 한 것조차 나로서도 간신히 간신히 반응한 것이었다.
'시간을 주지 않고 쫓아와 버렸군.'
나는 피칠갑이 된 채 기절한 김영훈을 바라보며 김영훈을 들쳐업었다.
"대단도 하십니다."
김영훈의 수명이 얼마 남았는지는 몰랐다.
또한, 그가 심장마비를 극복하고, 천뢰를 극복하면 수명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남은 시간 안에 또 얼마나 성장할까.
나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도 이번 삶에는, 당신의 성장을 전부 볼 수 있겠군요."
오래, 아주 오래.
새로운 수명을 부여받은 만큼.
만약 그가 수명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을만큼.
아주 오래.
나는 김영훈을 데리고 쇄천봉을 떠났다.
원하던 것도 전부 얻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을 찾아가 볼 때였다.
* * *
나는 성제국에서 나와 다시 연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연국의 바닷가 성 중 하나에, 작은 저택을 얻고 김영훈을 치료했다.
김영훈이 새로 창조했다는 그 체외 내단 형성의 무공은 정기(精氣)를 상하게 하는 무공이었다. 아무래도 즉석으로 만든 무공이었기에 미완성인 것일 터였다.
또한, 김영훈은 나와 몇 번을 무식하게 부딪히며 한껏 기혈이 뒤틀렸기에 오랜 시간 치료가 필요했다.
난 김영훈을 치료하며, 월도입천의 깨달음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앞으로 축기기의 일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했다.
'일단 지금까지 연기기 시절 익혔던 건 기초공법이다.'
수선의 시작은 사실상 축기기부터다.
본격적으로 수명이 늘어나는 경지도, 본격적으로 탈인간이 되어가는 경지도 축기기부터.
그러므로 연기기 1성부터 14성까지의 모든 공법은 사실상 기초나 다름없었다.
체내에 영맥이라는 공장을 깔고, 정순지력이라는 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이제는 제품을 만들었으니 그 제품을 판매해 주변에 영향력을 미칠 준비를 해야한다.
제대로 된 수도공법을 익혀, 축기기에서의 경지도 높여가야 한다.
'축기공법(築氣功法)을 찾아야 한다.'
어디서 공법서를 얻을까.
일단 축기기에 이른 지금이라면 어떤 세가를 가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을 터였다.
'뭐 공법을 얻는 건 추후에 생각해 보고...'
사실상 지금 나는 결단기급 전력이니, 공법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물론 '마음에 드는' 공법을 찾는 거야 다른 일이겠지만.
나는 공법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쇄천봉에서 보았던 환영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운명을 누설하지 말라고? 종명자? 선물?'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
물론, 양수진이 천거 현상을 일으켰다는 기록,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수상한 기록들.
그리고 그가 나를 '후대 종명자'라는 것으로 부른 것을 보아.
'그는 어쩌면... 우리처럼 이 세상에 떨어진 사람일지도.'
그렇다면 종명자는 무엇인가.
알 수 없었다. 왜 종명자라고 불리는지 추측은 할 수 있어도 사실인지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경고한 것은 분명 나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에 대한 것일 터였다.
'내 회귀 능력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건가?'
일단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이를 말한 적은 없었다.
일단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도 같았고.
설령 믿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뭘 할 수 있는가. 괜히 서로만 괴로울 뿐이라고 생각하여 입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또 왠지 본능적으로 꺼려진 것도 있긴 했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누설하는 걸 본능적으로 꺼려한다. 특히나 종명자는 더더욱.
그 그림자가, 스스로를 양수진이라 칭한 존재가 한 말이었다.
'발설하면, '뭔가'가 알아차린다고 했다. 삼천세계 어디에 있든. 그 말은, 무언가...'
나는 하늘, 저 멀리를 내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굉장히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가, 그저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 삼천세계라는, 거대한 개념 전체를 조사할 수 있는 존재가... 지금도 우리, 종명자란 존재들을 찾고 있다는 건가?'
오늘의 하늘은 맑았다.
티없이 푸르렀고, 하늘이 높아 보이며 그 너머가 아득하게 보였다.
오싹!
나는 어쩐지 소름끼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는 게 낫겠지... 그건 그렇고. 운명에 대해 누설하지 말라는 건...'
나는 앞서 천인들에게 잡혀간 동료들.
천인들에 의해 바로 재능을 까발려진 동료들을 떠올렸다.
'타인에게 까발려진 이들은 어떻게 한다는 거지? 이미 그가 말한 뭔가에 들킨 건가?'
나는 눈을 작게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됐다. 나중에 생각해 보지. 지금은 고민해봤자 어차피 정보가 부족해서 알 수 있는 게 없다.'
슬슬, 김영훈의 치료도 끝나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김영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도를 휘둘렀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축기기 수도자씩이나 되었으니, 어디 가문에 장로로 바로 들어갈 수 있겠구나."
"장로라... 그 역시 좋긴 하겠지만."
나는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만나야 할 친구가 있어서 말이지요."
"만나야 할 친구? 그건 또 누구냐?"
"아, 그 외 오 대리 잡아간 용 같은 놈 있잖습니까. 그 놈이 저한테 일을 시키지 뭡니까."
나는 서란에 대해 적당히 설명해 주고, 그에게 말했다.
"자기 후손 도와서 결단기급 귀신 한 마리 좀 때려잡아달라는 것 같은데, 한번 해 주려고 말입니다."
"음, 결단기급 귀신이라."
김영훈은 내가 요약한 상황을 전달받고는, 씨익 웃었다.
"재밌겠구나. 나도 한번 같이 좀 때려잡아 보자꾸나."
"좋지요, 그럼 우선 그 용가리 놈의 후손 좀 만나러 가 볼까요?"
나와 김영훈은 흑풍해를 건너, 서란의 거처로 향했다.
* * *
토옹, 토옹!
나와 김영훈은 허공을 박차며 서란의 거처에 도착했다.
이전과 같이 호풍응룡변을 썼다면 날아올 수도 있었지만, 서휼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은 익혀서는 안 되는 선택지가 되어있었다.
"이 아래냐?"
"그렇습니다."
"그럼 헤엄이나 쳐 볼까..."
김영훈이 숨을 참으려 할 때였다.
나는 김영훈을 말리며, 무형검을 꺼내들었다.
"뭣하러 헤엄을 칩니까. 집주인한테는 미안하지만, 집주인더러 나오라고 하지요."
"음?"
쿠구구구구!
서란에게는 미안했지만, 난동 좀 부려야 할 것 같았다.
무형검!
콰아아아아!
일격에 바다가 갈라진다.
서란의 거처 바로 위까지의 해수면이 무형검에 의해 그대로 파헤쳐졌고, 우리의 앞으로 그의 처소까지 물길이 나타났다.
"집주인 계시오?"
나는 요족어를 써서 영기를 진동시켜 소리쳤고, 얼마 후.
서란이 그의 거처에서 용형을 한 상태로 기어나왔다.
"...선배님들께선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나와 김영훈을 잔뜩 경계한채 쳐다보았다.
촤아아아!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합쳐졌고, 서란이 물 위로 빠져나와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서란에게 서휼에게 받은 호풍응룡변을 보여주며 말했다.
"해룡왕 서휼께서 날 더러, 후손인 당신을 도와 흑색귀골곡의 결계를 돌파할 수 있게 도우라 하셨소. 그 호풍응룡변 공법서는 그 증표요.
어떠시오, 도움을 받으시겠소?"
잠시 나와 공법서를 쳐다보던 서란의 안색이 환해졌다.
"서, 선배님들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선배님들께선 인족이실텐데 요족이신 저를 믿을 수 있으..신 겁니까?"
"...해룡왕께 미리 다 들었소. 당신의 출신에 대해서도."
나는 서란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서란은 고개를 숙이며 옅게 한숨을 쉬더니 빛을 뿜었다.
그가 비늘과 꼬리가 돋아난 반요의 형태로 변하였다.
"...처음부터 본모습으로 맞이하지 않아 송구합니다. 그 사실까지 알고 계시다니, 정말 왕께 부탁받은 것이 맞군요."
서란은 옅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선배님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결계를 돌파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전의 벗이 나를 선배라 부르는 이 기분은 뭔가가 좀 묘하다.
이번 생에는, 어쩌면 벗이 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죽게 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도록 하지. 결계로 안내하시오."
서란은 나와 김영훈과 함께,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이 숨어있는 해역으로 향하였다.
* * *
촤아아아!
"허어, 장엄하구만."
흑색귀골곡이 쳐놓은 환상결계와 귀무결계를 돌파한 후, 거대한 물의 장벽 안쪽 중심에 놓인 섭명함을 보며.
김영훈은 그 광경에 압도되어 탄성을 내뱉었다.
"저 결계입니다."
서란은 나와 김영훈에게, 섭명함을 둘러싼 결계를 가리켰다.
결계 안쪽에 있는 진법깃발 여덟 개를 뽑으면 풀리게 되는 결계.
하지만 정작 순수한 인간의 혈통을 지닌 자는 쉽게 받아들여 문제가 없는 결계였다.
나와 김영훈은 결계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전 삶처럼 그냥 들어가서 결계를 뽑으면 될 것이다.
"이 결계를 돌파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알겠소, 그럼..."
그리고, 그 때였다.
콰아아아앙!
결계의 일면으로, 황금빛 도광이 번뜩였다.
김영훈이 능광도로 섭명함을 둘러싼 결계를 후려친 것이었다.
결계가 마구 흔들리며 일렁였다.
"아, 아니 선배님. 그 결계는 굳이 그런 식으로 때려부술 필요가 없습니다..!"
서란이 당황한듯 김영훈에게 말했다.
그러나 김영훈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 뭐 나는 술법이니 뭐니는 잘 몰라서 말이오. 그래서 한 번 후려쳐 봤다만... 그런데 이거."
김영훈의 능광도가 황금빛을 뿜기 시작했다.
"때려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귀찮게 해체해야 하는 거요?"
콰아아앙!
그가 다시금 능광도를 휘둘렀고, 결계가 다시금 출렁였다.
"아, 아니.."
서란은 예상외의 일에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김영훈이 한다면, 나도 질 수는 없다.
꽈아아아앙!
나는 무형검을 꺼내들어, 김영훈처럼 결계를 두들겼다.
결계가 미친듯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파츠츠츳!
내 일격에, 결계가 출렁이며 미약한 실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