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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2)
쿠구구구구!
어둠이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수천 개의 검은 손들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향해 뻗쳐온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피하며, 최적의 경로로 아슬아슬하게 모든 손들을 비껴나갔다.
산군월악비가 극성으로 발휘되며, 나는 귀수(鬼手)들에 털끝조차 닿지 않고 검은 손들에게서 탈출하였다.
그러나 서란의 경우, 그 거체를 가지고 있는 탓인지 조금 탈출은 힘겨웠다.
서란은 구마와 파사의 힘을 가진 황금방울의 힘을 빌려, 그에게 달라붙은 몇몇 손들을 태워버리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귀수들에게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우리가 박살내며 내려왔던 꼭두각시들이, 허공으로 부웅 떠오르더니 우리에게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부웅, 붕, 붕!
"서 형. 멈추지 말고 앞만 보십시오."
나는 양손에서 검강을 뿜어내며 사방으로 휘둘렀다.
콰과광!
콰광, 콰아앙!
이기어검의 묘리에 따라, 내 검강은 허공에서 마구 궤도가 꺾이며 우리에게 날아드는 꼭두각시 부속품들을 전부 사방으로 쳐내버렸다.
촤아아아!
그러나 저 앞 전방.
마치 해일과도 같은, 우리가 망가뜨린 부속품들의 파도가 우리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파도 속에서는 강렬한 귀기가 뿜어지며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강력한 일격을 준비해라."
"예."
나는 장심으로 강환을 뿜어냈고, 서 형은 입가에 영력을 모았다.
"뚫는다!"
퍼엉!
콰아아아!
내 손에서 세 개의 강환이 날아가 빛의 폭풍이 되어 파도를 멈춰세웠고.
서란의 입에서 푸른 빛의 폭류가 쏟아져나와 파도를 향해 직격했다.
콰과과과광!
서란의 숨결이 파도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우리는 놓칠세라 구멍을 향해 돌진하여 파도를 벗어났다.
우리는 서둘러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시꺼멓고 질척질척한 어둠들이 우리를 잡으려 쇄도하였다.
나와 서란은 계속해서 입에서 숨결을 뿜고, 장심에서 강환을 뿜거나 하는 등 나아가며 결단기급 귀혼의 추적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우리가 들어온 입구가 보였다.
화아아악!
그렇게, 섭명함에서 빠져나왔을 때였다.
콰아아아아!
섭명함 자체에서 수많은 검은 손들이 빠져나온다.
나는 검은 손들을 전부 피했으나, 서란은 그 거체를 전부 움직여 피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선체에서 귀수들이 튀어나온 이유 역시 있었다.
웅- 웅-
동시에, 선체가 웅웅 울리는 듯 하더니 귀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잘도 도망치는구나. 감히 버러지들 주제에.. 네놈들도 섭명함에 온 이유는 그것이겠지? 괴군 그 쓰레기같은 놈처럼 본곡의 물건을 약탈하려고...!
내가 있는 한은 안 된다... 이 배는 망가져 폐기되었을지언정 한때 청색귀골곡(靑色鬼骨谷)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본곡의 신물이다..!
누구도 본곡의 물건을 탐할 수는 없어...!!!]
'청색귀골곡?'
의문을 가질 틈새도 없이, 또 다시 거대한 귀수가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나는 장심에서 강환을 날려 귀수를 폭발시켜버리고, 서란에게 다가갔다.
"서 형. 풀어드리겠.."
"됐다. 힘을 모았다, 내가 풀 수 있다!"
쿠구구구!
서란의 몸에서 급격하게 요력이 방출된다.
동시에, 황금빛 기운이 그의 몸에서 일어나 비늘 사이사이로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황금빛 호신강기로 스스로를 덮은 듯 하였다.
'아까 그 법보의 힘을 몸에 두른 것인가?'
퍼벙, 펑, 퍼엉!
그를 잡은 귀수들이 터져나가며, 서란의 몸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섭명함에서는 다시 수천개의 귀수들이 뿜어져나와 그를 잡으려 하였다.
동시에 귀혼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네 이놈! 그것은 본곡의 법보가 아니더냐! 썩 놓고 가지 못할까!]
"헛소리! 이건 내 법보다! 내 법보란 말이다!"
서란은 귀혼의 목소리에 고함을 내뱉으며 나에게 눈짓을 주었다.
콰아아아!
나는 호풍응룡변으로 바람을 일으켜 귀수들을 잘라버리고, 서란의 몸에 붙어, 그가 하늘을 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꽉 잡아라. 한 번에 결계를 빠르게 돌파할 것이다!"
"예!"
나는 양 옆에서 우리를 향해 날아드는 두 개의 귀수들에 각기 강환을 날려 터트려버리곤, 서란의 갈기를 움켜잡았다.
촤아아아악!
그의 비늘 사이사이에서 푸른 빛이 뿜어진다.
일순간, 서란의 거체가 폭발적인 힘을 내뿜더니 공간을 넘어들듯 배 근처에서 벗어나 물의 장벽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슬쩍 뒤를 보자, 뒤쪽에는 수백 수천개의 검은 손이 넘실거리는 섭명함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아아악!
나는 다시 전신이 물에 젖어버렸고, 해무지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해무가 검게 물들며 우리를 뒤쫓았다.
서란은 우리를 쫓는 해무를 전부 따돌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안개의 끝자락을 향해 몸을 던진다.
파아아앗!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엔 상당한 저항력이 있었지만.
안에서 바깥으로 나갈 때엔 아무런 저항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촤아아아!
결계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서란의 비늘 사이에서 빛나던 빛이 사라져 버렸고, 서란은 힘없이 바다로 떨어져버렸다.
'이런, 탈진한건가.'
서란의 상태는 딱 봐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눈을 뒤집고 있었으며, 숨을 헐떡이며 꿈틀대고 바다 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면 다른 바다 요수들에게 습격받을 수도 있으니... 일단 옮겨야겠어.'
나는 내공을 사용해 서란의 목을 잡아들고, 호풍응룡변을 발동했다.
나와 서란은 회오리에 휩싸여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크윽, 수 속성 공법을 익혔으면 그냥 바다에 띄워놓고 헤엄쳐 가도 됐을 것 같긴 한데..."
다음부터는 수월입도결도 꼭 익혀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무거운 그를 들고 얼마나 하늘을 날았을까.
화아악!
우리는 폭풍이 불어닥치는 해역 바깥으로 나오는 데에 성공하였다.
"허, 허억..!"
그리고 햇빛을 맞자, 서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서 형. 내려놓아도 되겠습니까?"
"끄음.. 그러거라. 나도 목이 아프구나."
풍덩!
촤아아악!
나는 서란을 바다 밑으로 떨어뜨렸고, 그는 바다로 떨어지더니 다시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부터 호풍응룡변을 사용하면서 내공을 끌어올려 서란을 드느라 내단 내의 공력이 빠르게 소진되었었다.
'아마 나도 계속 서 형을 들고 날아갔으면 탈진할 뻔했겠어.'
"...어쨌든, 수 번이나 내게 도움을 주고. 나를 데리고 저 해역 밖으로 나와 준 데에는 감사한다. 저 해역에는 음 계열의 신통을 수련하는 요족들이 많았는데...
내가 기절한채 바다를 떠다녔다면 분명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겠지."
"동지를 구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감사의 말은 넣어두시지요."
"하하, 동지를 구하는 게 당연하다라..."
얼핏 서란의 얼굴과 의식에, 서글픈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알겠다. 어쨌든 이번의 도전은 실패했구나."
"그렇다면 서 형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저 안에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그건, 내게 너무 필요한 물건이야."
그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저곳은... 결단기급의 천인기 분혼이 지키고 있잖습니까. 어디를 더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서란은, 입을 벌려 황금빛 방울을 꺼냈다.
"나도 저런 존재가 남아있을줄은 몰랐어서, 기본적인 귀혼들만을 퇴치하기 위해 3년동안 법보에 힘을 모았다. 하지만 저런 존재가 남아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그가 황금빛 방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3년 이상. 더욱 더 많은 시간을 이 법보에 투자해서, 저 악귀마저 접근할 수 없게 더더욱 힘을 모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나는 반드시 내게 필요했던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다!"
서란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은현아. 10년. 10년 후에, 나를 다시 도와줄 수는 없겠느냐. 나는 그것을 꼭 얻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내 삶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광기의 집착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내게 자신의 수행을 올릴 물건을 찾아야 한다고 했었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수행이 아닌, 뭔가 다른 의미를 가진 건가보군.'
얼마간 고민을 한 나는 서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서 형과, 또 해룡왕께서는 제게 은혜를 베푸신 분들이니까요."
단순히 서란에게 고마워서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서휼에게 역시 많은 은혜를 입었기에, 그를 도와주고자 함이었다.
내 말에 서란은 잠시 침묵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는 내게 감사인사를 한 후,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다시 만날 것인지를 약조한 후 헤어졌다.
"후..."
나는 바다 위에서 호풍응룡변으로 떠 있는 상태로 생각을 정리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주 큰 귀신이라...'
해무 속의 수많은 귀신들.
그리고 결단기 수준의 분혼은, 나를 아주 큰 귀신이라 불렀다.
동시에 천인기 수도자의 분혼은 내가 여러 죽음을 덧칠한 영혼을 가졌다 하였다.
'죽은 자의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는건가.'
아무래도 결단기 분혼보다도 훨씬 실력이 높아 보이는 흑색귀골곡의 원로원주, 백골귀마는 지금까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은 사람'이라는 영향력이 큰 듯했다.
'그리고 또 청색귀골곡이라. 딱히 성제국 황실 서고의 문헌에서도 그런 말은 본 적이 없는데. 청색귀골곡?'
뭔가 흑색귀골곡의 비사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본 후 머리를 휘저었다.
어차피 지금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추후에 더 정보를 얻어야 할 터.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은..'
나 역시 경지를 더욱 올려야 한다.
강환의 경지 역시 더더욱 올려 등봉조극의 극한에 이르고.
연기기 14성에서 축기기로 올라갈 방법 역시 찾아야 한다.
되든 안되든, 일단 최대한 시도해보자.
나는 우선 연국땅으로 올라가, 김영훈의 근처에서 무공경험치를 받으며 축기기로 올라갈 방도를 찾기로 했다.
* * *
나는 김영훈에게 하청산수를 통해 연락을 넣어, 내가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알려준 후.
연국 연산성 인근 산으로 가, 근처의 사파 산적들을 전부 때려잡고 자리를 잡았다.
"우선, 수월입도결도 4성 정도까지는 익혀 봐야겠어."
아무래도 10년뒤 다시 서란과 함께 흑풍해 깊은 곳에 들어가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을 뒤질 텐데.
그때까지 최소한 물 속성 법술을 최소한이라도 쓸 줄은 알아야 민폐가 되진 않을 터였다.
내가 산 수도공법서는 수도계에서 기초 중 기초라고 취급되는, 저잣거리 공법서인 '오월입도경'이었다.
다섯 개의 지월입도, 수월입도, 화월입도, 목월입도, 금월입도의 수도공법 구결이 적혀진 기본서로.
지금까지야 지월입도결만 익혔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다른 공법의 구결도 익힐 수가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지월입도결 하나도 익히기 버거워 지월입도결에만 집중했을 뿐.
어차피 서란을 도와 바다에서 활동하려면 최소한의 수 속성은 필요하니, 나도 최소한 정도로만 익힐 요량이었다.
나는 인근 계곡에서 수 속성 영력을 보충하며, 수월입도결 수련에 들어갔다.
수월입도결을 익히며 느낀것은.
예상외로 '쉽다'였다.
'지월입도결로 이미 영맥을 활성화시키고 전부 길을 뚫어놓아서인가.'
그냥 수 속성 법력만 길에 맞게 쌓으면 될뿐이었다.
거기에, 스승님께 배웠던 선각후통의 가르침은 단순히 토 속성 공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오행의 차이가 있어 어느 정도는 난항을 겪었으나, 나는 금세 수월입도결의 깨달음도 체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수월입도결 역시 잘 익힐 수 있었다.
촤아아악!
내가 수결을 맺자, 계곡의 물이 허공으로 떠올라 내가 생각한 대로 형태를 취한다.
다시 수결을 맺자, 이번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내 법력이 맺히더니 주먹만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걸로 사막에 가서도 갈증은 문제 없겠군."
나는 씨익 웃으며 체내에 자리잡은 수월입도결의 법력을 느꼈다.
1년여간 용맹정진한 결과, 수월입도결은 어느덧 연기기 2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수 속성에 대응하는 칠십이지살진언 역시 전부 익혔고, 이제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 가능했다.
원래부터 칠십이지살지결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수도자들에 비해서 압도적이었기에 다른 오행속성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럼 슬슬, 다시 축기에 도전해 볼까."
수월입도결을 익히면서도 무공수련도 멈추지 않았기에, 내 강환은 어느덧 다시 개수가 늘어 4개가 되었다.
이제는 5배 이상의 사고 가속도 가능한 것이다.
우우웅-
나는 자리를 잡고, 무극영운의 단계에서, 다시 다음 단계를 향해 도약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단전에서 영기의 구름이 휘몰아치며, 영기의 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역시 이전과 같은 흔들림과 변화에, 영기의 별에 다시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꽈과과광!
"....!"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영기의 별은 다시 폭발해 버렸고, 내 수행은 다시 12성으로 떨어졌다.
"후우..."
또 다시 원점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법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지월입도결을 운용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기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회복속도가... 미악하게 빨라졌다...?'
법력의 회복속도가 이전보다 빨라져 있었다.
불가사의한 현상!
나는 잠시 고민하던 중.
이게 무슨일인지 알 수 있었다.
'수월입도결!'
그랬다.
지월입도결 말고, 최근 연기기 1성 완공까지 끌어올린 수월입도결의 수기(水氣)가 지월입도결의 지기(地氣)와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영력의 회복속도가 조금 빨라진 것이었다.
'아, 당초 공법서를 살 때에 들었던 설명이었지.'
수도공법서를 팔던 노인이 설명해준 것이었다.
'잘 됐군. 이렇게 되면 조금 더 다음 도전 시기가 빨라지겠어.'
법력의 회복이 빠르다는 것은, 곧 더욱 더 많이 축기기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경지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 * *
4년이 지났다.
나는 수월입도결 역시 4성까지 익히는 데에 성공했고.
강환 네 개 역시 상당히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즈음.
김영훈이 찾아왔다.
"아니, 김 형. 몇년 전에 서한을 보냈는데 이제야 찾아오시깁니까?"
나는 껄껄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김영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미안하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더구나. 몇년 전부터 성제국쪽의 수도가문들에서 막리세가가 협약을 어겼답시고 공격을 벌인 탓에, 최근에는 막리세가가 잘 나다니지도 않아서 막리세가쪽도 신경 끄고 무공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우우웅..
김영훈이 강환을 띄워올렸다.
강환이 회전하며 세 개로 쪼개지고, 세 개로 쪼개진 강환들이 다시 세 개로 쪼개져, 총 아홉 개의 강환이 김영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등봉조극의 극한에 도달하는데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다."
그의 안색은 이젠 숫제 숯처럼 시꺼매졌다.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하고 또 했다. 도대체 뭘 어찌해야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요수공법을 연구해서 다음 경지를 연구해도 역시 부족했다. 아직도 수많은 길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그 길 중 진짜는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해야하는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잡다한 잡기가 늘어나긴 했지만 그딴 잡기들이 많이 늘어봤자 경지는 올라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 너머에 어떻게 가야하는거냐. 도대체.."
잠시 감정을 토해내던 김영훈은, 심호흡을 잠시 하더니 조용해졌다.
"후... 미안하다. 너무나도 답답해서 잠시 토로해 봤다.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등봉조극까지는 누군가가 만들어둔 길을 따라온 느낌이라면, 이후부터는 경지가 없는데 그 없는 경지를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느낌이다.
의술도 연구하고, 수도공법도 진씨세가에 부탁해 연기기 3성까지 익혀봤다. 네가 말한 요수공법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하지만, 다음 경지를 어찌 만들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구나."
그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등봉조극 역시, 가공의 경지였지.'
삼화취정의 경지도 희귀했고.
오기조원은 전설상의 경지였다.
그리고 등봉조극은 무림의 호사가들이 그냥 '상상'한 경지에 불과했다.
오기조원보다 강한 경지는 무엇일까.
만약 그런 경지가 있다면, 이름은 무엇으로 붙일까.
시답잖은 무림 호사가들의 설정놀음으로 탄생한 경지명.
등봉조극(登峰造極).
그리고, 지금 김영훈이 딛으려는 그 경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은 경지.
호사가들조차 등봉조극을 우스꽝스러운 경지놀음으로나 알진데.
그 너머의 경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등봉조극이야 상상의 경지이기에 이름이라도 있었으나, 그 너머는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이름조차 없었다.
김영훈은, 이름 없는 곳을 향해 발버둥치는 중인 셈이었다.
"미안하군요."
하지만, 나는 그의 발버둥에 동참할 수 없었다.
나는 느리다.
느릿하고 느릿해서, 아직도 고작 강환 4개. 등봉조극 중기의 실력일 뿐이었다.
이번 생에 강환 9개를 다룰 수 있을지조차 아직 확실치 않았다.
그런 내가 어찌 등봉조극 너머를 논할 수 있는가.
"저는 아직 그 경지를 논할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김영훈도 성격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런 말을 하면 보통은 분위기 환기를 위해,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실력이라고 띄워주곤 했다.
그러나 김영훈은 어두운 안색으로 내 말을 긍정할 뿐이었다.
그가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이후는 전인미답(前人未踏). 그저 장난으로 논해진적조차 없는 경지. 들어서기 위한 '기본'이 등봉조극의 극한이다. 내 재능조차도 이 경지를 위해 부서질 정도로 갈고닦지 않으면 안 되더구나..."
문득, 그 말을 하던 김영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큭, 크흐..흐하하하하하...!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차라리 내 재능이 일천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게 아닌, 있던 경지를 밟아가기에 급급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이미 있는 경지라면 얼마든지 열심히 수련할텐데. 뭘 해야할지 방향조차 모르니. 너무나도 괴롭구나. 그조차도, 오직 나만이 유일한 개척자이니, 나는 포기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조차 든다.."
나는 씁쓸하게 김영훈을 마주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김영훈이 등봉조극에 올라간지는 사실 몇 번의 삶이 지났다.
지난 삶에도.
지지난 삶에도.
지지지난 삶에도.
그는 몇 번이고 등봉조극에 올라, 아홉 개의 강환을 휘두르며 몇 번이고 등봉조극의 극한에 달했지만.
여태껏 단 한번도 그 너머의 경지가 있다는 언급도.
그 너머의 경지를 발견했다는 기쁨도 보여주지 않았다.
과연, 등봉조극 너머의 경지는 정말로 있긴 한걸까.
나는 감히 그의 절망을 위로할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은 나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에.
그저, 묵묵히 그 절망을 들어준 것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간 감정을 토해내던 김영훈은 조금 진정한 모습으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사실 원래는 감정을 토로하려 온 것이 아니다. 이번에 온 것은 경고를 위해서다."
"어떤 경고 말입니까?"
"네가 준 호풍응룡변을 연구하던 중.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인간이 익히면 구결을 발동하는 동안, 인간의 의식을 강제로 용의 형태로 바꾼다.
나는 그 구결을 연구하던 중. 이것은 인간이 익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확실히, 호풍응룡변은 강력했지만 신통을 펼칠 때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꽉 껴입은듯한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에 너무 큰 무리를 준다. 네가 수도공법을 익혀서 얼마나 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와는 별개로.
그 구결을 익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잠수복 없이 바다에 깊은 곳에 바로 내려가 용의 껍질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네 영혼이 받는 부담이 너무 강할 것이야.
인간이 요수의 공법을 익히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
나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어쩌면, 인간에겐 인간에게 딱 알맞는 의식의 형태가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최소한 그것이 해룡의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연히 느꼈다."
인간에게 딱 맞는 의식의 형태.
나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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