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63화 (6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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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2)

나는 등선향에서 내려와 며칠에 걸쳐 또 다시 벽라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연기기 14성에 도달한 채로 충분한 법력을 가지고 빠르게 법술을 쓴 탓인지.

아니면 등선향에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가지고 온 탓인지.

그도 아니면 지난번처럼 쓸데없이 금신천뢰문의 흔적을 좇지 않은 탓인지.

어찌되었든 나는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물이 없는 상황에 놓여 곤경에 처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물이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핥으며 벽라국 천색성에 들어와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지월입도결도 익히고, 수월입도결도 연기기 3, 4성 수준까지 한번 수련해 봐야겠어.'

어차피 오영근인지라 다른 속성도 전부 익힐 수 있으니.

기왕이면 사막을 건널 때 도움이 되는 수월입도결도 초반부 정도는 익혀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천색성에서 적당히 생필품과 옷가지를 구매하고 막 벽라국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잠시 멈추시게. 그대는 어느 세가의 자재이지?"

쿠구극..

은은한 영기의 압박이 느껴진다.

동시에 나보다 약간 큰 의식을 지닌 존재가 내 의식영역을 뒤덮었다.

스르르-

허공이 일렁이는 듯 하더니, 손목에 유리팔찌를 잔뜩 찬 장년인이 걸어나왔다.

백의의 장년인은 전신 곳곳에 유리 장신구를 차고 있었고, 장신구에선 전부 은은한 법력이 풍겨왔다.

'하나하나가 법기... 돈도 많나보군. 전신을 법기로 떡칠하다니.'

나는 조금 긴장을 하며 상대를 관찰했다.

법기를 전신에 둘렀단 말은, 재력이 풍부하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저 많은 법기를 전부 가동시킬 법력을 소유했다는 말도 됐다.

'축기기 수도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나는 공손하게 상대의 말에 대답했다.

"소인은 산수(散修) 서은현이라 합니다. 선배께선 어인 일이신지요?"

"산수? 소속된 가문이 없다고?"

"예, 없습니다."

우웅-

북중호의 목에 걸린 반지 모양 유리 법기가 맑은 청색으로 변했다.

"약령환(約聆環)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니 참이군. 다른 가문에서 공묘세가의 영역을 정탐하러 온 간자는 아닌건가.."

'법기로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건가?'

저 반지 안쪽에서 휘몰아치는 영기의 소용돌이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아팠다.

일반적인 법기와는 뭔가 격이 다른 법기인 듯 했다.

"나이가 젊은 듯 한데, 몇 살이지?"

내 육체의 나이는 29살에 이 세상에 떨어졌고, 약 10년이 지났으니 약 40대인 셈이었다.

"불혹(不惑:40대를 이르는 말)에 이르렀습니다."

"흠, 굉장히 동안이군."

아무래도 환골탈태와 내단의 영향으로 노화가 느리다보니 나는 아직도 20대 초반의 외모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40대에 연기기 14성이면 쓸만한 자질을 지녔단 의미인데.. 무슨 영근이지?"

"...소인은 오영근자입니다."

"오영근...? 40대에 오영근으로 연기기 14성이라고?"

백의의 축기기 수도자는 굉장히 놀란 듯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도 오성이 뛰어난 젊은이였군. 욕심이 나는걸... 본인은 공묘세가의 객경 장로 북중호(北中虎)라고 하네.

나 역시 본디 산수였었으나, 이전 공묘세가의 장로 중 한 분이 내 자질을 알아보고 나를 공묘세가의 외부 구성원으로 추천하셨지.

본 공묘세가는 재능있는 이라면 가리지 않네. 산수라면 공묘세가에 들어오는 게 어떻겠나?"

"아..."

아무래도 간자 판별 외에도 인재 영입을 목적으로 내게 접근한 듯 했다.

나는 일단 기본적인 경계심만을 남겨놓은 후 과도한 긴장을 풀었다.

"제안은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어떤 세가에 소속되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는지라, 안타깝게도 거절해야할 것 같습니다."

"흐음... 그것 참 안타깝구만. 잘 생각해보게. 연기기 극성인 듯 한데, 자네 실력에 공묘세가에 들어오면 축기를 위한 수행 자원을 지원받을 수 있고.

또한 축기에 오르면 나처럼 객경 장로가 될 수도 있어. 자네가 공묘세가의 데릴사위가 되는 걸 택하면 객경이 아니라 내부 장로가 되는 것도 가능하고.

또 공묘세가가 법기 제련으로 유명한 건 알지 않나? 공묘세가에 들어오면 양질의 법기를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도 있다네."

"끄음...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정말로 가문에 소속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허... 뭐 정 그렇다면야..."

북중호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정 그렇다면 추후에 가문에 들어오고 싶을 때엔 공묘세가로 꼭 오게나.

외부 장로인 내가 이렇게 공묘세가를 위해 진심인 것은 그만큼 공묘세가의 생활이 훌륭하다는 게 아니겠나?

청문세가는 실력이 증명이 안 되면 끊임없이 싸워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투전판이고, 벽씨세가는 벽창호처럼 답답하고 멍청한 놈들일 뿐이네.

꼭! 추후에 산수 생활이 마음에 안 들면 공묘세가를 찾아주게나!"

"...예, 뭐 그러겠습니다."

'왜 저렇게 영입에 열중하는 거지.'

뭔가 수상할 정도로 공묘세가의 홍보에 진심이었다.

나는 북중호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고 천색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청문세가의 영역으로 향해 지난번처럼 투도회에 참여해서 청문령을 만나려 했다.

어찌되었든 이번 생에도 어찌 지내는지 한 번은 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청문세가의 투도회 접수처에 들어갔을 때였다.

"오호라, 이게 뭐야 싱싱한 인재로구나!"

"....!"

접수처의 한 구석에서 갑자기 근육질의 거한이 튀어나왔다.

'축기기 수도자...!'

심지어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청문력신이라는 축기기 장로로, 지지난 삶 스승님의 밑에서 수학할 당시 간혹 인사를 했던 이였다.

'투선회 서열에서 스승님의 바로 밑에 있던 자...!'

내가 당황할 때, 내 바로 앞까지 뛰어온 청문력신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연기기 극성에 달한 놈이라니. 거기에 의식의 크기는 거의 축기기에 준하잖아! 엄청난 인재로다! 네놈, 청문세가에 들어오거라!

축기기에 도전할 수행자원은 얼마든지 지원해주마!"

"아, 아니 저는..."

"시끄럽다! 반항은 허락하지 않겠다! 네놈같은 인재가 흔한 줄 아느냐!"

'이런 젠장...!'

아무래도, 연기기 14성.

축기기 직전의 수도자라는 이름값은 내 생각보다 귀했던 모양이었다.

하기사, 생각해보면 저들 눈에는 조금만 지원해주면 당장 장로급 전력이 될 후기지수가 굴러다니는 꼴이다.

"크윽, 필요 없습니다!"

나는 황급히 접수처를 뛰쳐나왔다.

원래부터 스승님과 몇몇 사람 이외에는 전부 다 호전적인 이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콰과광!

접수처의 입구가 폭발하며, 청문력신이 미친 듯이 내게 달려들었다.

"이놈, 얌전히 와서 청문세가의 가원이 되지 못할까! 네놈을 본가의 데릴사위로 삼아야겠다!"

"잠깐, 잠깐! 나는 청문령님을 뵙고자 왔을 뿐입니다!"

"뭣? 령 형을 만나러 왔다고?"

움찔!

청문력신은 멈칫하며 허공에 멈춰섰다.

그러더니 턱을 쓰다듬어 보고는 호방하게 웃었다.

"하긴, 형님이 배울 게 많은 분이긴 하지! 오냐! 그렇다면 형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게로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옵고..."

"좋다! 그럼 형님의 제자가 되거나 본가의 데릴사위가 되겠단 게지!?"

나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원래 막무가내인 줄은 알고야 있었지만...'

예전에는 내가 청문령의 제자였기에 저런 탐욕은 보이지 않았으나.

연기기 극성의 산수인 나를 만나자 저런 면모를 보이는 듯 했다.

"뭐 좋다! 형님을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지. 대신 네놈은 다른 가문한테는 못 준다! 반드시 청문세가의 데릴사위나 형님의 제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야!"

"......"

아무래도,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 * *

청문력신에 대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청문령은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청문세가의 본가 인근 영지.

그곳에서  나와 청문령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졌다.

"쯧, 젊은 나이에 연기기 극성인 듯 한데. 그런 재능이 있으면 뭣하러 날 찾아온 게냐. 력신 녀석이 귀찮게 굴길래 만나 줬다만,

물어볼 게 있으면 빨리 묻고 나가거라."

여전히 변함이 없으시군요.

'아마 몇 번의 삶을 반복하더라도...'

사람은 변치 않을 것이다.

"...소인은, 오영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내 영질의 종류를 밝혔고, 청문령의 눈가에 놀라운 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오영질...? 오영질을 가진 놈이 그 나이에 연기기 극성...? 아니,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아라!"

나는 별다른 설명을 하는 대신, 칠십이지살지결에 대한 내 이해도를 읊었다.

이번에는 투도회의 우승자 권한으로 스승님과 만난 것이 아니었지만.

청문력신이라는 축기기 장로가 연기기 극성의 후기지수를 위해 만들어준 장이므로, 하룻밤 정도는 청문령과 이야기를 다시 나누어도 될 것이다.

내가 칠십이지살지결에 대한 깨달음과 경험을 읊자 청문령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렇군. 그 이해도라면... 선각후통의 방식으로 길을 만든 건가. 나 말고도 이런 녀석이 있었을 줄은..."

나는 그와 다시금 온종일 이야기꽃을 피웠다.

청문령 역시 나 정도로 선각후통의 방식을 이해하는 후기지수를 만나니 즐거운 듯,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 * *

다음 날이 밝았다.

"...연기기 7, 8성까지의 이해도와 깨달음이라면 나와 뒤지지 않는군. 훌륭하다. 너는 정말 다시없을 인재구나."

나는 청문령과 함께 연기기 1성부터 14성까지의 깨달음에 대해 논하였고, 그동안 몇 번이고 반복한 연기기 7, 8성까지의 깨달음은 청문령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연기기 9성부터 14성까지에 대한 깨달음과, 이전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도 열성적으로 질문했으며.

특히나 14성에서 축기기로 넘어가는 부분에 대한 원리와 방법에 대해서 주로 질문을 하였고.

이제 그 원리와 이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박식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러는 사이 아침이 밝은 것이었다.

"네놈, 내 제자가 될 생각이 없느냐?"

이번에도 청문령은 내 선각후통의 이해도를 보고 마음에 든 것인지.

나를 제자로 삼으려 들었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드렸다.

"하루를 배웠을지라도, 평생을 스승으로 기억해야 함이 아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이미 제 스승이십니다."

"흠, 입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라! 하루동안 스승이고 뭐고 자시고 난 네놈을 진짜 제자로 받고 싶구나. 정녕 본가에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승님께 고개를 숙였다.

"...소인은 가문에 소속되지 아니하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힘들 듯 싶습니다."

"......"

스승님이 침묵했다.

잠시 침묵하던 스승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겠다는 사람을 잡을 수도 없지. 모처럼 네놈만큼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었건만...

됐다. 가거라! 알아서 썩 가버려라!"

나는 스승님께 절을 하고,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방을 빠져나왔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청문세가의 영지를 나서려 할 때였다.

쿵!

근육질 장년인.

청문력신이 굳은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네놈, 어딜 가느냐?"

"...예?"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청문령님께 가르침을 받고 인사를 드린 후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만..."

"뭬야!!!"

쿠웅!

강력한 기파가 주변으로 뿜어진다.

"감히 령 형의 가르침을 하루 동안이나 받아놓고도. 가르침만 날름 먹어치우고 제자로서의 도리는 다하지도 않은 채 도망치려는 것이냐!"

"아, 아니..."

"이 빌어먹을 놈! 감히 대청문세가를 우습게 아는 것이로구나! 네놈 같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감히 령 형님의 제자로 삼을 수는 없으니.

네놈을 적당한 방계와 맺어 데릴사위로 삼겠다!!!"

화악!

청문력신의 손이 뻗쳐왔다.

나는 등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잡히면 진짜 강제로 혼인하게 된다...!'

파앗!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해 허공을 뛰쳐올랐다.

"이놈이 감히 피해!"

쿠구구!

주변에서 흙덩이들이 솟아오르며 내게 날아든다.

흙덩이들이 하나하나가 손으로 변하며 나를 잡으려고 날아들었다.

나는 즉시 장심을 뻗어 손에서 강환을 뿜었다.

콰앙! 콰각, 콰가각!

빛나는 구체가 주변을 회전하며 나를 잡으려는 흙의 손들을 전부 터트려 버렸다.

부우웅!

나는 강환을 흡수하며 사고를 가속시켰다.

파바밧!

그리고 동시에 허공을 밟고 빠르게 영지 바깥쪽으로 몸을 놀렸다.

저 뒤쪽에서 청문력신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 * *

청문력신은 잠시 얼이 빠진 얼굴로 서은현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축기기 수도자인 내 손에서 달아나...?'

연기기 수도자들끼리도 1성 차이는 상당한 차이이다.

하나, 연기기와 축기기 사이의 차이만큼은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방금 도망간 서 씨 애송이가 연기기 극성이라고 할지라도 축기 중기인 청문력신에게 비할 바는 되지 않았다.

원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저 애송이는 청문력신의 법술에 잡혀 꽁꽁 묶인 채 청문력신의 후손 중 한명과 강제로 합방당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법술을 부수고 도망쳤다?

고작해야 연기기 극성인 애송이가?

"...축기기..."

청문력신의 입가에 찢어질듯한 미소가 서렸다.

"당장 축기기급의 전력(戰力)이다...!"

수많은 원영기 이상의 노괴(老怪)들이 쓸만한 인재란 인재는 전부 데리고  상계로 비승하며.

전 대륙에 인재가 거의 고갈이 나 버렸다.

안 그래도 결단기 윗 경지의 강자들이 전부 사라져서 사방이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시간과 자원만 주면 축기기에 오를 연기기 극성의 인재들은 어디서든 찾아보기 힘든 보물 중 보물이었고.

그 중에서도 연기기 주제에 축기기 수도자와 어느 정도 견줄 수 있는 녀석이라면...

"월척이다! 흐하하! 미약을 강제로 먹여서라도 내 후손과 혼인시켜 버릴테다!"

청문력신의 눈이 돌아갔다.

그가 저물탁에서 전음부를 꺼내며 근처에 있는 몇몇 축기기 장로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런 후 그는 서은현과 이야기를 나눴던 청문령이 있는 영지 내 저택으로 들어갔다.

"령 형! 왜 저런 인재를 안 잡은 거요!"

"...본인이 할 일이 있다는데 뭘 잡겠느냐."

"이런 형님. 답답하기는! 저 놈이 내 일격을 걷어내고 도망쳤소!"

"...뭐?"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저 놈은 당장에 데려다가 써도 축기기 장로급 일인분 몫은 톡톡히 할 놈이란 말이요!

형님도 보아하니 저 놈이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왜 안 잡은 거요!? 형님, 마음에 좀 솔직해 지시오. 형님도 솔직히 저런 말이 통하는 녀석을 찾고 있던 게 아니었소?"

"......"

청문력신의 말이 이어졌다.

"저 놈을 잡는 건 앞으로 혼란스러워질 정국에 대비해 인재들을 육성하라는 가주님의 말에도 부합하고.

동시에 형님이 평생 염원하던 형님의 의발을 이을 제자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오!!

답답하기는! 언제까지 참기만 할 거요! 형님이 평생을 염원해 왔던 거잖소, 뭘 그리 아쉬워하며 앉아만 있으시오? 솔직해 지시오!"

청문령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어 청문력신과 눈을 마주쳤다.

청문력신은 순간 흠칫했다.

청문령의 눈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열망!

"...그래, 네 말이 맞다."

청문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의 명에도 부합하고, 나도 내 자신에게 조금 솔직해져야겠어..."

움찔

청문력신은 강력한 영기의 압박에 전신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이군. 이런 형님의 모습은.'

청문세가의 거목(巨木)이 몸을 일으켰다.

"근육과 싸움밖에 모르는 이 집구석에서 처음으로 만난 말이 통하는 놈이다. 그래... 지금 잡아야겠어...!"

청문령의 눈에서 청광이 번뜩였다.

* * *

타다닷!

나는 허공을 박차며 청문세가의 영지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저 앞으로는 청문세가의 수호결계가 있다.

부우웅!

나는 장심을 뻗었다.

빛의 구슬이 손에서 뿜어진다.

그때.

"력신 녀석이 잡으라는 놈이 이 놈인가?"

한 명의 축기기 장로가 내게 날아왔다.

파아앗!

그가 수결을 맺자, 청문세가 영지내의 수호결계가 더더욱 강화된다.

"순순히 잡혀.."

꽈아아아앙!

난 장로의 말을 무시하고 수호결계를 향해 강환을 날렸다.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퍼지며, 영지 수호결계에 그대로 바람구멍이 났다.

"뭣...!"

축기기 장로가 경악했고, 나는 빠르게 결계를 넘어서 영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문득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구!

뒤쪽으로 어마어마한 영기의 압력 두 개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스, 스승님!?'

스승님, 그리고 청문력신이 나를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이 놈! 게 섯거라!"

"잡히면 내 후손과 강제로 합방시켜주마!"

"무슨 망발이냐! 저놈은 내 후손과 혼인할 것이니라!"

"아무렴 어떻소! 먼저 잡는 사람이 원하는 사람과 혼인시키기로 합시다!

이 놈, 본가의 데릴사위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이런 미친.. 왜!'

나는 다시 황급히 강환으로 사고를 가속시키며 허공을 박찼다.

파앙, 파앙, 파앙!

순식간에 둘과의 거리가 벌려졌으나, 둘이 비행법기에 오르자 다시 거리가 좁혀졌다.

'연국! 연국으로 도망쳐야 한다!'

연국 국경을 넘으면 축기기 수도자들은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동쪽을 향해 허공을 박찼다.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어마어마한 목 속성의 법력이 휘몰아치는 듯 하더니, 목 속성의 영기로 이뤄진 거목(巨木)이 허공에 자라난 채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못 도망간다!"

번쩍!

콰과과과!

거목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속박용 법술들이 내게 쏘아져 왔다.

'안 돼! 잡힌다!'

나는 장심에서 강환을 쏘아냈다.

의념의 세계로 나와 똑같은 분신이 나타나, 의념을 발한다.

부우우웅!

강환에 불어넣은 강기들이 빠져나오며, 허공에 수천 개의 어검의 형태로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청문력신과 스승님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신외화신(身外化神)의 술?"

콰앙, 쾅! 콰아앙!

강환을 통해 사용한 어강들과 속박 법술들이 부딪히며 파훼되었다.

"더욱 더 욕심이 나는군. 도대체 무슨 공법을 익힌 거지?"

"그런 거 궁금해할 시간 없소, 형님! 저놈 도망치잖소!"

쿠구구구!

주변의 흙이 모여들며, 청문력신의 몸을 뒤덮었다.

얼마 후 청문력신과 똑같이 생긴 거대한 토상(土狀)이 대지에 발을 디뎠다.

쿠웅!

[하아아압!]

쿠과광!

토상이 대지에 손바닥을 부딪히자, 대지에서 수십 개의 거대한 손바닥이 튀어나와 나를 향해 뻗쳐왔다.

[순순히 묶여서 혼인해라!]

"젠장, 저는 해야할 일이 있단 말입니다!"

나는 강기를 사방으로 쏘아댔으나, 축기기 수준의 법술은 강기 정도로는 흠도 나지 않았다.

쿠구국...

곧이어 사방이 흙의 손으로 뒤덮혀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파아앗!

그러나, 나는 이미 강환을 재생성한 후였다.

번쩍!

다시금 빛이 휘몰아치며, 내가 나갈 바람구멍을 만들어내었다.

우웅!

사고를 가속시킨다.

나는 내게 날아드는 또 다른 목 속성의 속박법술들을 피해내며, 빠르게 동쪽으로 향하였다.

나와 청문세가 장로들의 추격전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중간에 청문력신이 연락을 넣은, 한가한 다른 몇몇 장로들 역시 추격에 합류했고, 나는 수많은 법술 폭격을 받으며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도망치고 또 도망치기를 나흘째.

나는 기묘한 감각에 접어드는 것을 느꼈다.

강환을 몇 번이나 사용했을까.

등봉조극에 이르며 이토록 강환을 절실히 사용한 적이 있을까.

파아아앗!

나는 강환을 손 위로 띄우며, 어쩐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 것 같았다.

'강환은 이전부터 삼재의 이치에 반응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때는 몰랐던 이유.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 강환에는 또 다른 나 자신이 깃들어 있다.

말하자면, 강환은 한 명의 사람(人).

하나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늘(天)과 땅(地)의 은혜 아래에.

그 속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간다.

인간은 본디 자기 자신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수많은 인연 속에서 한 존재가 이뤄지듯.

그 인연은 어쩌면 하늘과 땅 역시 포함일지도 모른다.

지난 나흘간, 스승님의 추격 속에서 느낀 것이었다.

스승의 은혜가 하늘과도 땅과도 같다면.

하늘과 땅 역시 스승의 은혜만큼 큰 뭔가를 내게 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인연이 내게 주었던 것이 지금의 나를 이룬다면.

하늘과 땅이 내게 주었던 것 역시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일부가 아닐까.

우우우웅-

손 위에 떠오른 빛이 진동했다.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을 축으로.

빛의 환을 음양(陰陽)으로, 건곤(乾坤)으로, 천지(天地)로 나누었다.

사람(人)을 중심으로 천지(天地)가 순환을 시작했다.

'그런 건가...'

이제야, 등봉조극의 경지에서 어찌 나가야 하는지가 조금 보인 듯 했다.

강환이 두 개로 쪼개졌다.

파아아앗!

나는 두 개의 강환을 양옆으로 날려 터트렸다.

수많은 법술들이 일거에 지워진다.

그리고 다시 두 개의 환을 띄우자, 나는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속, 3배!'

파아앗!

수많은 영기의 뿌리가 하늘과 땅을 뒤덮어, 나를 잡으려는 감옥으로 변한다.

그러나, 나는 그 찰나를 파고들어 감옥이 완성되기 직전.

일말의 틈새로 나갈 수 있었다.

"놈...!"

"더 빨라졌다!"

이제 연국의 국경이 코앞이었다.

나는 땅으로 내려가, 청문령을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스승의 마음을 통해 이 깨달음을 얻었다.

이전 삶과 같이 깊은 인연은 맺지 않았다.

그분과 이분은 동일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스승의 은혜가 하늘과도 땅과도 같기에.

하늘과 땅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는, 혼인을 할 수도. 가문에 묶일 수도 없습니다."

혼인을 했다가 자식이 생기면 어찌되는가.

자식이 회귀에 사라져 버리면 내 정신은 어찌되는가.

감히 상상하기 싫었다.

또한 가문에 묶이는 것 역시, 내 실력을 보여주었으니 장로급의 전력으로 취급되어 타 국가를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연국에도 들리고, 성제국으로 가 금신천뢰문의 흔적을 찾고, 남쪽 흑풍해로 가 요족어도 배워야 하는 나로서는 청문세가에 묶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저를 위해 마음을 써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인사를 마친 후.

나는 나를 덮쳐오는 수많은 법술들을 뒤로한 채, 빠르게 연국의 국경을 넘었다.

청문령이 진도를 짜서 용맥의 흐름을 바꾸는 듯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연국의 안쪽으로 들어서자, 더 이상 용맥도 변치 않았고, 청문세가의 장로들도 더는 날 쫓지 않았다.

"정말 살벌하군. 잡힐 뻔 했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산을 몇 개 더 넘어가서 몸을 추스렸다.

기분이 묘했다.

이전까지는 나를 별 신경도 안 썼던 이들이, 연기기 극성에 이르자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는 것을 보자 기이한 기분이었다.

'속이 좀 울렁이는군..'

어쩌면 허공답보를 통해 계속 하늘에 떠 있다가 안정적으로 대지를 밟으니 육지 멀미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기분도 이상하고, 속도 좋지 않다.

나는 문득, 땅을 바라보고서야 내 눈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

그렇구나.

기분이 이상한 이유도, 속이 울렁이는 이유도 알겠다.

나는 잡히고 싶었었다.

청문세가가 좋은 가문인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를 살벌하게 잡으려 했던 장로들도 호인인 것은 알고 있다.

투전판이라고도 하지만, 그만큼 실력과 자부심이 있는 곳이 청문세가라는 것도 안다.

어쩌면 그곳에서 혼인을 해서, 데릴사위가 되어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장로님들과 교류하며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나는 분명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욱, 우윽..."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되는가.

"끄으윽..."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무 일도 없었던 허무(虛無)가 되어 잊혀진다.

지금도 스승님을, 제자들을 다시 볼 때마다 이전 삶에서의 인연과 다르단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데.

살을 섞고, 자식을 낳고, 인연 속에 잠긴다면.

나는 어떤 고통을 맛봐야 하는 것인가.

방금 얻었던 깨달음.

인간은 그 자신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의 인연 속에서, 하늘의 인연 속에서, 땅의 인연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의 존재건만.

그 모든 인연이 결국 무너지고 없어질 존재라면.

그 존재의 삶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울렁이는 기분을 삼키며, 다시 스승님이 있던 방향으로 절을 올렸다.

언젠가.

정말 멀고 먼 저 훗날에.

진짜 삶을 살 수 있게 된 그 후에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김영훈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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