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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여(2)
밤이 지나고, 동이 텄다.
그리고, 나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었다.
우웅-
내가 반으로 갈라버렸던, 상상 속의 김영훈에게 만들어주었던 석도.
두쪽난 석도가,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오른다.
'어...?'
그리고, 희미한 인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반으로 쪼개버렸던 그 인영.
그 인영은 반으로 갈라진채, 각자 오른쪽과 왼쪽이 도신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반으로 갈라진 인영들의 반대편에서 새로운 몸이 자라났다.
꿈틀, 꿈틀-
새 몸이 완전히 자라나, 두명이 된 인영의 실체가 다시금 뚜렷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김영훈이었다.
두 명이 된 김영훈이 각기 도를 잡고 나를 겨누었다.
두 명의 김영훈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한판 겨루자고.
"흐, 흐흐흐..."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충혈된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낄낄 웃으며 석검을 잡고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흐하하하하...!"
나는 두 명의 김영훈에게 달려들었다.
미쳤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 일단 놀고 생각하자.
* * *
두 명의 김영훈을 베어버린 것은 또 다시 육개월이 지나서였다.
나는 등선향 곳곳을 돌아다니며, 두 명의 김영훈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단악검법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두 명의 김영훈을 동시에 베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반쪽이 나버린 두 명의 김영훈의 사체가 눈앞에 있다.
둘은 반으로 쪼개졌음에도 싱긋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자못 기괴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베었는데, 원망스럽진 않습니까?"
반으로 쪼개진 상태에서, 두 명의 김영훈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내 무공이 상승한 것 같아 기쁘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으로 갈라진 두 명의 김영훈의 몸에서, 또 다시 새로운 신체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꿈틀, 꿈틀...
이제, 둘이었던 김영훈은 네 명이 되었다.
네 명의 김영훈이 무기를 잡고 나를 포위하였다.
더더욱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였다.
"좋소, 해 봅시다..!"
* * *
다시금 몇 달이 지났다.
시운이 돌아오면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고, 매번 제사가 실패하면 이제는 여섯명으로 증식한 김영훈들과 함께 제단을 때려부쉈다.
"왜! 왜! 왜!"
나는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김영훈들과 함께 제단을 때려부쉈다.
"왜 나를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하늘이여...!"
왜 나를 아직도, 아직도...!
이 정도 지성이 모자라면, 도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 것이냔 말이다!
콰앙!
여섯 번째 김영훈이 도를 놀려 제단의 마지막 조각을 때려부쉈다.
나는 김 형에게 고맙다고 한 후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 형."
나는 김영훈들에게 말을 걸었다.
"알고 있습니다. 난 지금 정신이 나가버린 게지요. 하지만, 나는 한편으론 정신이 나갔으면서도, 한편으론 이성적이기도 합니다."
반복되는 실패와,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고독감.
그리고 반복되는 회귀에 대한 우울증들이 지금의 환영들을 만든 것일 터.
나는 그러한 내 심정들을 돌아보며, 눈 앞의 김영훈들에 대한 어떠한 가설을 세웠다.
"...당신들은, 내가 기억하는. 지난 삶들의 김영훈들이지요?"
그 말에, 여섯 명의 김영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가 없던 최초의 삶의 김영훈을 제외하고.
그리고 이번 회차의 김영훈을 제외하면, 총 여섯 번의 회귀동안 만났던 6명의 김영훈.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내가 그리워하는 그 때의 김영훈들.
눈 앞의 환영들은, 분명 그들이었다.
"...제 망상에 억지로 불려나오셨구려. 고인(故人)들을 함부로 불러내어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씨익 웃으며 어차피 내 망상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하였다.
나는 큭큭 웃으며 검을 잡았다.
"...나랑 놀아주셔서, 늘상 감사할 뿐이외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뜨자,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섯 개의 석도가 허공에 둥둥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다시 깜빡이자, 그들은 다시 여섯 명의 김영훈으로 변하였다.
* * *
7년이 지났다.
"하늘이여... 힘을 내려주소서."
하늘이여, 나를 허락하소서...
쿠우우우-
나는 이번에도 나를 가로막은 먹장구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아직도다.
아직도 나는, 하늘에게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일류에서 절정으로 넘어가던 시절과도 또 달랐다.
그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나를 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벽 너머가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었고, 나는 그 벽을 허물기 위하여 일생을 망설임 없이 바쳤었다.
하나, 지금은 거대한 벽이 아니었다.
막막한 우주공간에 맨몸 하나만 덜렁 던져진 느낌.
벽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다음 경지가 보이지조차 않는다.
하늘이 언제 나를 허락해줄지, 아무런 기약이 없으며 그저 내가 저 드높고 냉혹한 하늘의 자비를 기대하며 매달려야 하는 상황.
다음 경지로 갈 수 있는가...?
'...해 봐야지.'
뿌드득...
강기를 실은 손가락으로 제단을 움켜쥐었다.
지주원법의 법술로 만든 석제단에 내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패인다.
'그래도, 해 봐야지.'
아무리 하늘이 나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저 발버둥하는 벌레에 불과할지라도.
버틸 수 있는 곳까지는...
버텨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 오늘이 아니라면 다음 날에, 다음 날이 아니라면 다다음 날에.
나를 받아줄때까지.
계속, 계속 시도할 것이다...!
"하늘이여... 기다리고 계시오...!"
콰앙!
나는 발을 굴렀다.
제단이 우그러진다.
옆에서 각자 제무를 추며 나를 보조하던 여섯 명의 김영훈들이 나와 함께 제단을 마구 두들겨 부쉈다.
"반드시 도달할 것이오..!"
* * *
촤악!
나는 어느순간.
김영훈 여섯명을 베어넘길 수 있었다.
하늘은 나를 허락하지 않는데.
철쪼가리 휘두르는 법이나 늘어가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조차도 사실 내 망상이나 다름없다.
눈 앞의 김영훈들이 진짜 김영훈인가?
아니었다.
진짜 김영훈이었다면 강환 하나만 쏘아서 나를 그대로 터트려 버렸을 터.
내가 싸우는 것은 내 상상력이 받쳐주는 김영훈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가 그리워했던 회차의 김영훈들도 전부 베어넘겼다.
이젠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
누구와 겨루며 이 괴로움을 토로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꿈틀, 꿈틀...
내가 베어넘긴 김영훈 여섯의 환영들.
그 사체들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의 사체조각들에서, 뭔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막리황실 어좌 암중호위대 대주.
그리고 그 부대원들이었다.
"..허?"
암중호위대가 김영훈의 사체에서 자라났고, 김영훈 여섯이 꿈틀거리며 다시금 자라났다.
이젠 김영훈 여섯과 더불어, 어좌 암중호위대까지 생겨났다.
"...하하, 나쁘지 않군."
고수들의 합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침이 입가를 흐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쳤다.
"덤벼라! 전부 덤벼! 오냐 그래, 무기는 내가 만들어주마!"
나는 법결을 맺어, 암중호위대 대원들과 김영훈들에게 돌로 된 무기를 만들어준 후, 강기를 불어넣어 던져주었다.
그들은 내 무기를 받고, 전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전투를 벌일 때마다 머릿속에서 짜르르한 쾌락이 일며, 제의 실패에 대한 괴로움과 절망을 날리는 것을 느꼈다.
"흐하하하하!"
즐겁다!
너무 즐겁다!
나는 즐겁다!!!
내 의념은 어째선지 검푸른 빛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좋구나!!!"
* * *
2년이 흘렀다.
회귀햇수로는 32년.
칠성제의를 시작한 후로는 22년.
나는 그날도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암중호위대 여럿과 내가 만나온 몇몇 절정지경의 고수들의 합공, 그리고 김영훈 무리의 합공을 받아냈다. 우리는 허공답보로 등선향의 산 하나를 넘어가며 전투하는 중이었다.
"음...?"
문득, 암중호위대주의 극을 받아내던 중, 나는 문득 저 아래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저, 저건...!"
난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느끼며, 잠시 나와 놀아주던 인원들에게 손짓을 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은, 하나의 석조건물이었다.
문명의 흔적!
나는 황급히 석조건물로 달려갔다.
"이곳은..."
석조건물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기껏해야 등선향 곳곳에 피는 영초나 독초, 그리고 연기기 저계 수준 정도 되는 요수들 몇몇이 모여살며 내게 이를 들어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은 내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암중호위대와 대문파의 절정고수들, 그리고 김영훈 무리를 보고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망쳤다.
'음, 그런데 이상하군. 이들은 내가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일텐데... 왜 저 녀석들이 도망치는거지?'
잠시 생각해보던 나는, 생각해보니 수많은 무구가 허공에 둥실둥실 떠서 따라오는데 그것도 굉장히 무시무시한 광경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뭐 좋다... 어쨌든 이 건물은 도대체...'
건물은 수천년 전에나 쓰이던 양식의 건물인 듯 했고.
안쪽에는 딱히 뭔가 있지는 않았다.
'일단 사람이 사는 용도로 만들어진 건 아니군.'
그렇다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이건 건물이라기보단 차라리...
'사당 같은 느낌이군.'
나는 위패, 혹은 그 비슷한 것을 올려놓는 단을 보고는 그 생각에 확신을 굳혔다.
제단 위쪽에는 예전에 뭔가가 올라가 있었는지, 네모난 모양으로 커다란 홈이 파여져 있었다.
'위패나 혹은 어떤 비석 같은 것을 올려놓은...'
잠깐, 비석?
나는 건물에서 나와 황급히 건물을 바라보았다.
황급히 건물에 들어와 살피느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 건물은 단순히 오래되서 방치된 느낌이 아니었다.
주변에는 석조 건물의 잔해로 보이는 돌들이 흩어져 있었고, 석조 건물의 밑부분은 뜯겨나가 있었다.
그리고 석조건물의 주변 지형.
이건 마치.
'굉장히 강한 힘을 지닌 자가, 이 석조 건물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뽑아, 이곳으로 집어던진 듯한 모양새가 아닌가...?'
석조건물의 주변 지형은 한쪽으로 깊게 패여있었다.
마치 집어 던져져서 대지에 자국이 남은 듯한 상흔.
나는 자국의 방향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승천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석조건물 안쪽에 있던 단에 패인 홈. 그 홈의 크기는... 마치 승천문 위에 떠 있던 비석과 똑같은 크기가 아닌가...?'
어쩌면 이 석조건물은 본디 승천문이 있던 곳에 세워진 건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천인기의 수도자 중 하나가 어떤 일로 이 건물을 뽑아 이곳으로 집어던진 듯 했다.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건가..?'
나는 석조건물 근처를 뒤지던 중, 반가운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갑골문이 적힌 돌 파편이었다.
너무 오래전의 고어인지라 제대로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아는 것에 의하면, 아마 뢰(雷)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뢰라는 글자가 적힌 돌 파편 주변을 한참 찾아보았으나,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건 좀 궁금해지는군. 이 등선향에 뭔가 숨겨진 비밀 같은 게 있는것인가.'
천둥을 뜻하는 이 갑골문은 무슨 의미인가.
승천문 주변에 있던 그 뇌운과 관계가 있을까?
"흠... 궁금해지는군."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며 머리가 맑아지자, 내 주변에 있던 수많은 인영은 투명해졌고.
수많은 석제 무구들만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꼴이 되었다.
"일단 이 비슷한 게 더 있는지 찾아볼까..?"
난 이런 석조건물과 비슷한 것이 더 있는지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등선향 곳곳을 돌아다녔다.
등선향의 크기는 그 자체로 연국의 성 예닐곱개를 합친 것만큼 거대했다.
대략 남한만한 크기라고 생각되었다.
난 이 가공할 크기의 등선향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등선향 중심에는 승천문이 있었고, 이 등선향은 승천문을 중심으로 원형의 대지가 허공에 떠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등선향 곳곳을 살폈음에도 나는 더 이상 저 비슷한 석조건물은 찾을 수 없었다.
'흠, 뭘 알아보려 해도 단서 자체가 더 없으니 알아보기도 힘들군...'
난 한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승천문 근처로 갔다.
시기가 지나서인지 승천문은 닫혀있었으나, 그 주변에 산재한 공간균열들과 뇌운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전에는 신경쓰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
승천문 근처에 있는, 석조건물의 흔적.
석조건물과 같은 석재로 보이는 돌들이 저 인근에 잔뜩 깔려있었다.
아무래도 석조건물의 밑동인 듯싶었다.
"흠..."
나는 얼마간 석조건물의 밑동 부분인 듯한 석재들을 살펴보고, 다시 석조건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석조건물이 날아간 방향은 승천문을 기준으로 북쪽.
나는 문득 석조건물의 크기와, 승천문 근처에 있던 석조건물의 밑동으로 보이는 부분의 크기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밑동 부분이, 거의 열 배는 더 크다.'
그 말인 즉슨, 석조 건물은 본래 훨씬 더 거대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는 이 석조건물밖에 남지 않았는가.
석재 잔해들이 풍화되어 부스러진 것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이 주변엔 딱히 그런 잔해들이 더 이상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큰 석조건물이 있었고, 이 건물을 날려버린 수도자가. 건물을 뜯어내어 던져버릴 때 석조건물의 이 부분만이 이곳으로 떨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더욱 더 북쪽.
등선향의 바깥으로 떨어졌다는 말이 되었다.
나는 등선향의 북쪽 끝을 향해 달려가, 그 아래의 답천사막을 내려다보았다.
"...쯧, 전부 모래군."
하지만 어쩌면 저 모래 속에 파묻혔을 수도 있었다.
석재는 몇 번 만져본 바, 상당히 단단했고 쉬이 흠이 가지 않는 재료였으니.
나중에라도 저 근방의 모래 아래쪽을 파 보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토둔술을 익혔으니, 땅 밑을 파고들어가 보는 것도 방법일 터고.
'어쨌든 추후에 한번 조사해보지.'
나는 일단 그렇게 결론을 지은 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갑작스레 생긴 의문과 호기심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난 이제 다시 제의를 지내야 했다.
"...언제까지."
그러나 문득.
전부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 밀려들었다.
"언제까지... 나는...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어쩌면 나는 굉장히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사실 하늘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날 허락할 생각이 없는데.
괜히 진땀을 빼는 건 아닐까.
나는 괜히 아직도 등선향에 남아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스승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콰앙!
발을 구르자, 흙이 치솟아오르며 제단을 만들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셨지요... 제자는,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
아직은.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더라도, 이번 삶을 전부 바쳐 도전한 후에야 포기하겠다.
포기하기에는, 수많은 삶 속에서 내 등을 밀어준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수많은 인영이 나를 감쌌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있는 이도, 무기를 들지 않은 이도 있었다.
김영훈도 있었고, 무림맹주 시절의 부하도, 신마전 시절의 부하도, 암중호위대도...
그리고 내 제자들과,
스승님도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나도 그리운 마음에 저들을 불러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있던 수많은 이들이, 내 의지에 따라 잠시 눈앞에 투영되었을 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모두를 보며.
김영훈을 보며.
제자들을 보며.
스승님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도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제구를 모으고, 제단을 치장하며, 그날 밤의 제의 준비를 하였다.
* * *
하늘이여.
하늘이여.
힘을 내려주소서.
나를 허락하소서.
나는 먹장구름을 머금은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늘은 묵묵부답.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침묵하고 나를 내려볼 뿐이었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이여... 내게 힘을 내려주소서..."
"하늘이여... 나를 허락하소서..."
간절히 청하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의를 치루고 기도한다.
하늘은 나를 보지 않았지만, 나 역시 이제는 하늘을 보지 않았다.
대신 나는 제의를 치룰때마다 내 주변에 자리한 수많은 인영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나를 밀어준.
내가 밀어준, 나를 지탱해준 수많은 인연들.
이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지언정, 내 가슴 속에 함께하는 이들.
"하늘이여..."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제의가 끝나면 분노에 차 제단을 때려부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금 석재들을 모아와 제단을 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는 일에 집중하였다.
내 제단은 점차 높아졌다.
언젠간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아질 터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둘러싼 인영들은 더더욱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탑이 높아질수록, 더더욱 견고해질수록.
나와 무를 겨루던 여섯 명의 김영훈, 암중호위대, 몇 몇의 절정고수들.
그리고 내 제자들.
500여명이 넘는 무수한 제자들과, 암중호위대, 김영훈, 여러 대문파의 장로, 호법들.
진씨세가에서 같이 싸웠던 결사대들.
그들이 전부 무기를 들고 나와 대련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버겁기도 했지만, 몇 년이 지나자 나는 어느새 그들 전체를 상대로 동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내 실력이 늘면 늘수록, 내 대련에 참여하는 인영들은 점차 많아졌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무림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가 잡아들였던 사소한 산적, 수적, 사파 무림인.
혹은 내가 대련을 했던 일류고수들까지 점차 범위가 넓어지자, 그 수는 이젠 거의 이천명에 달하였다.
회귀 35년차.
칠성제의를 시작한지는 25년차.
몇천번이고 제의에 실패했는가.
'기억도 안 나는군.'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꺾이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난 혼자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데, 어찌 혼자란 말인가...!'
"하늘이여, 보십시오."
인간은 홀로서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본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인연과 관계 속에서.
'우리'라는 그 안쪽에서, 비로소 인간은 태어나고, 살아간다.
"하늘이여, 당신은 나를 쳐다보지 않겠지요."
나는 비단 나 하나만으로 구성되지 아니하였다.
그렇기에, 하늘은 '우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젠 거의 4층 전각만큼 높아진 거대한 제단으로 올라갔다.
제단 아래로는 수천 개의 병장기들이 허공에 떠서 도열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병장기들은 모두 수많은 인영들이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영들 외에도, 병장기를 잡고 있지 않은 수천 명의 인영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정신이 나가 가상의 인물들을 만들어 노는 광인이라고 칭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광인이 맞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과연 미친 것인가?
모든 인간은 인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죽는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찾게 되어있다.
사람이 사람을 갈구하는 게.
사람이 삶을 갈구하는 게.
사람이 그를 위하여 더 높은 곳을 갈구하는 게 광기인가?
"하늘이여, 나는 이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인영들을 바라보며 읇조렸다.
나도 알고 있다.
저들은 내 고독함과 갈망,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
하지만, 내가 회귀와 운명의 굴레를 모두 끊어낼수만 있다면.
저 허상을 모두 찾아다니며, 그렇게 나의 삶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나는 저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제단을 올라가며,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하늘이여, 보십시오! 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게 힘을 내리십시오!
그러니, 나를 허락하십시오!
제(祭)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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