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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練氣期)(3)
눈을 뜨자, 코를 찌르는 약내가 물씬 풍겨왔다.
'홍감주, 원량초, 구릅지... 아는 것도 있다만 모르는 게 과반수군...'
나는 약재 냄새를 맡으며 약재의 배합을 떠올렸으나, 역시 내가 모르는 배합의 약이 더 많은 듯 했다.
나는 기운을 돌려 몸 상태를 점검한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아무래도 진씨세가의 의약당인 듯 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볼 때, 내 옆에 있던 작은 소반 위쪽.
다소곳이 올려져있던 붉은 옥석이 푸른 빛으로 변했다.
동시에 내 의식영역에, 옥석에 걸린 수많은 주술문자들이 연동되며 어떠한 연계를 형성하는 것이 잡혔다.
'이건..내 몸 상태를 바깥으로 알리는 건가...?'
주술문자들의 연계가 삽시간에 방 바깥으로 뻗어나갔고, 잠시 후 의약당 안으로 청문세가의 축기기 장로, 청문벽과 진씨세가의 의원으로 보이는 자가 들어왔다.
"장로님을..."
"앉아있어라. 하하하. 몸 상태는 괜찮으냐."
"예. 괜찮습니다. 거의 아무 상처도 안 입은 느낌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진씨세가의 가주님조차 둘의 비무를 보며 흥이 돋았다며 극진히 보살피라 명했으니. 축기기 수도자도 아니고, 고작 무공을 익힌 연기기 수도자 둘의 싸움에 그 정도 흥을 느끼시다니. 하하하, 네 공이 크다."
껄껄거리며 내 어깨를 두드린 청문벽이 진씨세가의 의원에게 말했다.
"진맥을 해 보고 딱히 이상한 곳이 없다면 퇴원해도 되겠나."
"예, 알겠습니다."
진씨세가의 의원은 내 몸을 진맥해 보더니, 바로 완치 판정을 내리고 나를 내보내 주었다.
나는 청문벽을 따라, 청문세가에 배정되었다는 숙소로 들어갔다.
내 숙소는 청문벽의 바로 옆 방으로 배정되었고, 나는 내 숙소로 들어가기 전 청문벽이 나를 불러, 먼저 그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덜컥
숙소의 문을 닫은 청문벽이, 자리에 앉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의 앞에 방석이 날아와 놓였고, 그가 방석을 가리켰다.
"앉거라."
"예."
"일단, 오늘 비무는 매우 잘 해주었다. 타 세가들의 앞에서 청문세가의 체면을 세울 수 있었어. 오늘의 일은 청문세가의 가주님께도 보고될거고, 너는 분명 공을 세웠다 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본가에서 네게 상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군."
그는 투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젊은 시절, 고서(古書)에서 본 적이 있지. 몇백년에 한 명 꼴로 나타난다는 오기조원의 무림인들에 대해서. 오기조원은 범인들이 일생(一生)을 극고(極苦)로 단련하여, 무공의 재능을 갈고닦고 또 갈고닦아도 도달하기 불가능하며. 범인이 죽음을 각오하고서 덤벼들어야 겨우 각성 가능한 경지라고 들었다."
맞는 말이었다.
김영훈이라는, 무재(武才)의 이단아나.
나라는 시간의 이단아가 아니라면, 일반적인 천재들은 일생을 갈고닦고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오기조원에 도달할 수 없다.
삼화취정의 극한에 오르더라도, 환골탈태를 제대로 완료해서 육신을 강화하지 못한다면 상단전이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버릴 테니까.
"그렇게 말도 안되는 확률로 탄생하는 존재들인만큼, 오히려 일반적인 연기기 수도자들보다도 의식이 훨씬 뛰어나고 세밀하며. 축기기 수도자들이 사용하는 정순지력(貞純之力)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일반적인 연기기 수도자들을 압도하는 전력을 지닐 수 있다고 하더군.."
"정순지력...?"
"모르느냐? 축기기에 오르면 연기기에서 활성화시킨 영로를 따라, 법력이 극도로 정순해져... 이런 것을 가지지."
우웅-
청문벽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罡氣)...!"
"범인들은 강기라 부르던가...? 축기기 수도자들은 정순한 법력이라 하여 정순지력이라 부른다. 불순물을 최대한 제거한채, 기존의 법력을 수십 배 이상 압축하여 만들어낸 기운이지."
나는 어떤 의념도 없이 그냥 바로 손 위에서 강기를 뿜어내는 청문벽을 보며,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중, 나는 그가 내뿜는 정순지력을 관찰하며, 강기와는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검강(劍罡)과 달리, 저 힘에는 의념이 깃들어있지 않다.'
그저 막대한 기(氣)를 압축해 놓았을 뿐이었다.
내가 검사(劍絲)를 사용할 당시, 기산심천의 초식으로 검사에 기운을 욱여넣어 몇 초간 강기를 만들어냈듯이.
축기기 수도자는 천지영력을 무식하게 압축해 놓은 기운을 뿜어낼 뿐이었다.
'내 검강이 절삭력에서는 조금 나을 수 있겠지만...'
나는 아무런 깨달음이 없이, '몇초'가 아닌.
'꾸준하게' 강기를 뿜어내는 청문벽을 보며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출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 거기다가, 내 검강과 비교해도 기(氣)의 정순함이 훨씬 높다. 훨씬 기에 불순물이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렇게 무식하게 강기를 뿜어낼 수 있다는 말은 곧.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축기기에 오른다면... 그 강기... 아니, 정순지력이란 것이..."
"축기기에선 이 정순지력이 '기본'이다."
"....!"
"경맥 곳곳에 기력 대신 정순지력이 흐르지. 정순지력이 밀도높게 전신을 흐르며 자연스러운 반탄력도 만들어주기에, 너희 무림인들이 말하는 호신강기인지 하는 것 역시 실시간으로 펼치고 있는 셈이다."
경맥에, 기가 아닌 강기(罡氣)가 흐르는 괴물!
강기가 흐르다 못해 매분 매초 매순간 아예 쉴새없이 호신강기를 펼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인외(人外)의 존재!
그것이, 축기기(築氣期)의 수도자인 것이었다.
'강환(罡丸)이 축기기 수도자와 힘싸움을 벌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축기기 괴물들이 실시간으로 호신강기를 뿜어대는 괴수들이기에. 축기기 수도자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는, 강기를 넘어선 공격력이 필요한 거로군...'
저런 개념은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기에, 나는 조금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기운 대신 강기가 경맥을 돌고 있다니!
이게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하기사, 축기기 수도자부터 수명이 크게 늘어난다고 했었던가...'
왜 수명이 늘어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몸 안이 강기로 꽉 차있다 못해 계속해서 수도공법을 운용하며 강기의 용적을 늘려갈 테니까.
그런 괴물들이 수명에 변화가 없으면 오히려 그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뭐 어쨌든. 너희 무림인 중 삼화취정에 다다른 이들부터는 우리 축기기 수도자의 정순지력을 흉내낼 수 있고. 오기조원의 무림인들은 꽤나 자유자재로 정순지력을 흉내내니... 연기기 이하는 당해낼 수가 없겠지.
하나, 정작 그런 딱 봐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을 제외하면... 너희 오기조원의 무림인들은 너무 희소해서 네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 하여, 청문세가에서 줄 상에 대하여 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거라."
"필요한 것이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제가 있는 영지의 관리수사이신 청문목 장로께서 제게 선통후각, 선각후통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영질이 오영질이라 수행속도가 빠르지 못하니. 선각후통의 방식으로, 법결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각후통... 법술들과 진언의 이해에 관한 것이라면, 본가로 돌아간 후 너를 청문령이라는 녀석의 제자로 추천해주마. 청문령 녀석은 결단기에 이르기에는 포기했지만 법술들과 진언들을 연구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특이한 녀석이니, 선각후통을 추구하는 네게 도움이 될 터다."
"...!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수염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진씨세가에서도 가주께서 네 무위를 흥미로워하셨다 하여. 한 가지 상을 주기로 결정이 났다. 너무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무엇이든 바라면 들어주실 것이니, 무엇을 받고 싶은지 생각해 두거라."
말을 마친 청문벽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나가보라고 하였고, 나는 바깥으로 나와 읇조렸다.
"진씨세가에서도 상을..."
말투를 보아하니 특정한 상품을 주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사소한 선에서 들어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가능하려나...'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무엇을 받을지를 생각해 두었다.
* * *
며칠 후, 나는 진씨세가의 가주, 진여운을 배알할 수 있었다.
그는 나에 대해 아주 흥미로워해하며,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본 가주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부탁하도록 하라."
나는 가주를 배알하기 전날.
청문벽에게 '너무 과하지 않는 선'이란 연기기 이하 수준에서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어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받은 바가 있었다.
"하면, 가주님께 부탁드립니다. 저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생각해놓았던 바람을 꺼내놓았다.
"...이전에. 연국에서 잠시 지냈을 당시. 연국의 범인들과 연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다만 추후에 소식을 들은 바, 그들은 전부 막리세가의 연단 재료로 사용되었고. 그 자식들이 진씨세가에서 의탁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을 가 보고 싶습니다."
"흠, 진가에서 일하는 범인들을 말하는가보군..."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옆에 있던 진씨세가의 장로 중 하나를 불렀다.
"막리가에게 희생당한 범인들의 친지들이라면, 분명 영지 곳곳에서 이전에 암살을 훈련시켰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다들 무공 재능도 없고. 이전 막리정이 아예 누군가에게 암살을 당해버려서, 암살부대로 키울 필요도 없어진지라... 다들 그냥 영지내에서 농사를 짓거나 잡일을 하게 교육을 시켜두고 그리 인원을 편성시켰습니다."
"흠, 그렇다면 그 정도야..."
진가의 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하겠다. 단, 아무리 범인들의 처소라 해도, 그들은 우리 진가에서 일하는 이들. 청문세가의 식솔인 네가 진씨세가의 영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다. 하니 너는 범인들의 터전 외에는 영지내의 다른 곳을 돌아다닐 수 없으며, 본가에서 감시역을 둘 붙일 것이다."
"가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물러가거라."
나는 진가의 가주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범인들의 터전으로 나를 데려다줄 안내역 겸 감시인 둘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또 만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김영훈은 진씨세가를 상징하는 적색 장포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무림에서 활동할 시절 만났던 동생이네. 잠시 얘기 좀 해도 되겠지?"
"...그러시게나."
다른 한 명의 감시역은 연기기 10성 수도자였는데, 김영훈의 눈치를 조금 보며 은근슬쩍 빠져버렸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다. 네가 청문세가의 사절단에 있다니... 아니, 거기에, 그 의식의 크기를 보아... 넌 수도공법을 익힌 거로군? 잘 느껴보니 영기의 압력도 은은히 느껴지는 것 같고."
"잘 알아보셨습니다."
오기조원의 무림인은 아무리 무공을 단련하고 검을 휘두르며 의식을 단련해보았자, 그 의식의 크기가 커지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더 세밀해지고, 월수월무록의 깨달음에서 볼 수 있듯 의식을 다루는 데에 있어 자유자재가 되거나 의식을 쪼개서 사용하는 등 수도자보다 세밀한 영역을 다룰 수는 있지만.
의식이 세밀해질지언정 절대 크기가 커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등봉조극에 이른 김영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역시 등봉조극에 올랐음에도 의식의 크기는 나보다 조금 작은 상태였다.
"너는 수도자가 되기로 한 거구나. 그래, 그 역시 하나의 방법이겠지."
"...김 형이 저와 합을 겨룰 당시, 의식을 통해 했던 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하하, 그것 말이냐."
그는 나와 함께 걸으며 진씨세가의 건물을 나왔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당시. 나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네가 내게 알려준 단맥도법을 익히며. 그 생각은 더욱 더 가중되었지. 그 무공에 깃든 의지를 느끼며... 하하, 초식명부터가 도묘(刀墓)라니! 너무 잔인한 게 아니냐?"
"......"
"여하튼. 분명 오기조원의 단계에 있을 당시까지는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등봉조극의 경지를 창시하고, 생각을 바꿨다. 월수월무록을 통해, 등봉조극의 극한까지 올라갈 확신을 얻으며..."
그가 손을 펼쳤다.
그의 장심에서 기가 뭉치더니, 환(丸)을 만들어냈다.
환이 쪼개진다.
세 개로 나뉘며 쪼개진 환은 빙글빙글 돌며, 다시 삼분되어 총 아홉 개의 환이 되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고작 축기기 수도자를 상대하는 정도고. 목숨을 걸어야 결단기 수도자의 팔을 하나 가져갈 정도다. 뭐, 결단기라는 놈들은 인간 형상을 한 자연 재해인지라... 팔 하나정도는 한달쯤 안에 다시 회복한다는 걸 알고 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
"하지만."
그가 눈을 부릅떴다.
"나는 알 수 있다. 분명 이것은... 끝이 아니라고! 분명 끝이 아니라고! 나는,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이 이상의 경지를, 분명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을 이었다.
"단맥도법과 단악검법의 16초, 23초는 둘 다 똑같이 산외산부진이지. 산 바깥에도 산이 있다지만, 분명 네가 단악검법과 단맥도법의 최후절초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느냐?"
나는 침묵했다.
내가 단맥도법과 단악검법을 창시했다고 생각하여 벌어진 오해였다.
두 검도법의 최후절초가 그런 이름인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
"분명, 나는, 우리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가능하다!"
"...김 형은."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승천문에 가는 것이 목적이라 말하셨지만, 제 눈에는 마치... 승천문은 그저 이유일 뿐이고, 어쩌면 그저 무공의 극한을 보는 것이 더 궁금하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고향이 그립다는 건 사실이다. 이 향수병은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아. 내가 무공에 이리 집착하는 것 역시, 가끔은 이 향수를 잊기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하더구나."
향수를 잊기 위해서라.
나는 무색으로 변한 의식영역의 세계에서, 의식을 해체하여 의념의 색조를 다시 관찰하였다.
내 시선을 알아챈 김영훈이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의념은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쁨(喜)의 의념.
중간중간 그리움과 슬픔 역시 섞여있지만, 무공을 이야기하는 김영훈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뭐. 무공을 익히는 게 재미있는 것은 맞지 않느냐. 솔직히, 내 적성에 이렇게 꼭 들어맞는 것이 이제껏 없기도 했고... 어쩌면 네 말대로 나는 그냥, 무공을 익히는 것이 기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기쁘다라..."
어쩌면, 저것이 김영훈의 재능의 원천인지도 몰랐다.
내게 무공은 분명 삶의 일부일지언정.
내가 이뤄온 역사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기쁜' 감정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는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내가 향수 때문에 무공을 익히든. 그저 기뻐서 무공을 익히든. 내가 등봉조극 그 너머로 향하고자 함은 분명 진심이다. 그리고, 너도 무인(武人)인 이상. 더욱 더 높은 경지에 이르르자 하는 마음은 있겠지."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끔 찾아오거라. 오기조원에 이른 무인은, 현 세대에는 이 세계 전체에서 너밖에 없으니. 언제는 기껍게 가르침을 주마."
"...예. 감사합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 웃음을 받아주었다.
분명 그가 승천문에 도달하고자 함을 알았을 때는 걱정이 앞섰었다.
그는 이번 생애에 승천문에 도달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오히려 김영훈의 목적이 승천문보다는 무(武)의 궁구에 초점이 더 맞아있다는 것을 알게되니.
되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자, 그나저나 몸도 다 나은 것 같으니 가볍게 한 수만 부딪혀 볼까?"
"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나는 가볍게 다시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손 위에 띄워올렸던 강환 중 하나를 내게 날렸다.
그 일수(一手)에 월수월무록의 진의가 담겨져 있었다.
월수월무록은, 타인의 의식과 인지를 베어내던 월수궁무록에게서 출발하여.
의식을 동화시키는 조수월무록의 깨달음을 지나.
자신의 의식을 베어내어 떼어내서 조종하는 무학이었다.
나 역시 허공에 강기를 씌운 이후 월수월무록으로 의식을 떼어내서 강기에 행동을 입력시킨 후 허공에서 조작이 가능했다.
물론, 저런 식으로 강기를 압축시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유영하게 하는 것은 아직 엄두도 못 낼 정도였지만.
그러나 나는 월수월무록을 운용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내 의식을 베어내고, 내 의식에 행동을 입력시킨다.
동시에 검에 강기를 불어넣는다.
부웅-
파아앗!
검이, 손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하앗!"
의식을 집중하자, 손에서 떠난 검이,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한다.
콰아아아!
검은 월수월무록의 구결에 따라, 강기를 담고 허공에 떠올라 김영훈의 강환과 부딪혀갔다.
이기어검(以氣馭劍)!
나는 원거리에서 몇 번이고 의식을 잘라내어, 내 어검에 던져내며 끊임없이 행동을 입력시켰다.
부웅, 붕, 붕!
검이 허공을 헤집으며, 내 의지에 따라 월수궁무록의 구결을 운용하며 인식을 베어낸다.
그러나 김영훈의 강환 역시 똑같이 인식을 베어내며 허공에서 없어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미친 듯이 눈으로 의념의 결을 좇으며, 김영훈의 강환을 찾았다.
문득, 허공에서 의념의 결이 비틀린다.
'저기!'
나는 내 어검에 다시 의념을 입력시키며 황급히 김영훈의 강환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그의 강환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내 어검을 쫓아온다.
그와 동시에 김영훈의 의념이 내 의념에 달라붙으며, 내가 어검에 행동을 입력하는 것을 방해한다.
비무와 같이 직접 손발을 부딪히진 않았으나, 허공의 사이로 어마어마한 의념의 폭풍이 부딪힌다.
수많은 실선과 실선이 부딪혔고, 나는 그 의식과 의념의 폭풍을 뚫고 기어코 내 어검에 마지막 행동을 입력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
촤락!
그의 강환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듯 하더니, 바로 내 검강에 담긴 내 의념과 충돌하였다.
그와 동시에, 내가 어검에 입력한 의식들이 전부 소멸되었고, 그 자리에 강환의 의식이 들어차 버렸다.
어검을 김영훈에게 뺏긴 것이었다.
"...뭐 어떻게 한 건지 감도 안 잡히는군요. 저 강환은 뭐 살아있기라도 한답니까."
"그럼, 살아있지."
"...농담입니까, 아니면 진짜입니까."
그는 씨익 웃으며 강환을 회수하고, 내 어검을 몇 번 움직여본 후 다시 내게 검을 돌려주었다.
"진짜다. 월수월무록의 길을 따라가면 등봉조극의 깨달음을 알게 될 테고, 그 때는 내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게 될 터다."
"...새겨듣지요."
나는 다시 검을 집어넣으며 그에게 포권을 했다.
"하하하, 이제 충분히 놀았으니 한번 네가 가고 싶다는 곳으로 가 볼까?"
그리고, 나는 김영훈과 또 다른 진가 수도자의 안내에 따라 진씨세가의 변두리 영지 중 하나로 향하였다.
* * *
범인(凡人)들이 일을 하고 있다.
목공 일을 하는 이도, 세공을 하는 이도, 대장장이를 하는 이도 있다.
농사를 짓는 이도 있었으며, 약초를 캐는 이들도 있었다.
진씨세가의 영지에서 일을 하는 범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되 보였지만, 특별히 학대를 받거나 고통스러운 일은 없어보였다.
하기사 수도가문의 영지에서 일한다면 영지 바깥의 국가들이 흉년을 입든 말든 상관없이 늘 꾸준하게 풍족하게 지낼 수 있으니.
그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물론 막리세가 같은 마도가문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면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나는 영지에 도착하고 나서, 영지 곳곳을 탐색할 수 없게 정해진 길로만 다닐 것을 통보받았으며.
의식에 약한 금제를 당하였다.
나는 김영훈과 진가 감시인의 안내를 받으며, 내가 아는 얼굴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들, 많이 컸군."
몇년 전에 영지에 잠입했을 당시에는 수련생 신분의 소년소녀들이었지만.
지금은 하나같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야는 의원직을 하고 있나보군."
지난 삶에서도 내 밑에서 암기술과 독술을 배우더니, 그런 쪽이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희아는 베를 짜고 있고... 하하, 안 그래도 고운 손이었는데 무기를 드는 것보다 낫구나."
"열오는 나무를 하나 보군. 훨씬 잘 어울리는구나."
"대현은 목수인가."
"그리고..."
나는 지난 삶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무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들 모두 건강히 살아있으며, 암살훈련 같은 고되고 적성에도 맞지 않던 일이 아닌.
각자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지내는 듯 했다.
내가 장성한 청년이 된 지난 삶의 제자들을 둘러볼 때였다.
감시역인 연기기 수도자가 나를 보며 물었다.
"지인의 자식들을 보러 왔다 하더니만... 아무에게도 말을 건진 않소?"
"그러게 말이다. 한번 말이라도 걸어보지 그러냐."
김영훈 역시 이런 내가 의아한지 물어왔고, 나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음 사람에게는 말을 걸어 보지요."
다음에 찾아간 것은 녹현이었다.
처음으로 내게서 달아나 감히 제멋대로 황제를 죽이겠다고 했던 녀석.
그리고, 가장 먼저 죽었던 멍청한 제자.
"...저기가 녹현의 집인가."
나는 녹현의 집으로 가 그가 무얼 하는지 보았다.
현이의 집에서는 나무 냄새가 났으며, 그는 작은 공방 안에서 뭔가를 깎고 있었다.
'녹현도 목수인가 보군. 뭔갈 조각하고 있는 건가.'
내가 빼꼼 그의 공방 안을 들여다보자, 그가 무엇을 조각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녀석은 한 쌍의 가족들을 조각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행복하게 둘러앉은 조각상이었고, 그 가운데에는 녹현 자신이 조각되어 있었다.
막리세가에게 죽은 녀석의 부모와 형제자매인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공방에는 그 비슷한 가족의 조각들이 수도없이 많았다.
나는 소리없이 그 조각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녹현이 공방에 드리운 내 그림자를 보았는지, 흠칫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누구십니까?"
나는 수도자와 김영훈에게 눈짓을 보내 혼자 대화하게 해달라 하였고, 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멀어졌다.
"네... 아니. 자네의 가족인가..? 아니, 가족이오?"
"...? 맞습니다만."
"하고 있는 일은 적성에 잘 맞소?"
"그렇습니다만,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
그는 내가 입은 고급스러운 청문세가의 칠흑색 장포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오."
"아, 그러시군요."
물론 녹현의 눈빛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듯.
경계심을 품은 기색이 보였다.
"그래서 어인 일로 오셨는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어릴 때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사무치게 그리워 가끔 이러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못 보게 된 것에,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있소..?"
"응어리야 졌지요. 부모님은, 막리세가라는 이들의 손에 살해당했습니다. 제 눈 앞에서요. 가끔 그 기억이 떠오르고, 가끔은 치가 떨립니다."
"듣기로 자네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암살훈련을 받았다 하는데. 혹 원수를 직접 갚지 못한 것에 대해 어떤 감정은 없소?"
내 말을 듣자, 그는 내가 수도가문 관련자라 생각했는지 더욱 더 공손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사실, 저희가 고된 훈련을 마친 다음날. 저희 훈련장에 저희의 원수라던 황제 막리정의 수급이 놓여있더군요. 당시에는 그게 누구의 목인지 몰랐지만, 알게되고 나니, 그래도 조금은, 응어리가 풀렸습니다. 물론 감정이 다 해결되지는 못했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구려. 다행이오."
"한데 대인. 혹 누구신지 여쭤보아도 폐가 아닐런지요..."
"그냥, 진씨세가의 손님이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자리가 이래서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어..."
"됐소. 나는 가 보겠소."
나는 나를 대접하려는 녹현을 뒤로하고, 그의 집에서 나왔다.
'잘 지내는구나.'
다행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 했다.
역시, 저 녀석은 내 제자가 아니었다.
내 제자들은, 이미 다른 시간선에 있었다.
"......"
퍽, 퍽!
나는 가슴을 두들겨 울렁이는 기분을 억지로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집을 보러 갔다.
제자들의 대표였던, 만호의 집이었다.
'오며가며, 만호에 대해선 재밌는 소문을 들었는데...'
만호의 집에 가까이 가자.
집 안쪽에서 한 여성이 뒤뚱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녀의 배는 불룩 불러있으며, 그 안쪽에서 생명의 기운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계화로군... 만호 녀석, 결국 성공했구나.'
그녀는 나와서 빨래를 장대에 널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만호가 달려와, 기척을 죽이고 있는 나를 지나쳐 그녀에게 달려갔다.
"여보오오! 내가 감 구해왔어! 감 먹고 싶다고 했지!"
"아이고, 시끄러 이 양반아! 애 놀라면 어쩌려 그래! 그리고 이게 뭐야, 옷 찢어졌잖아! 저번에 꿰매준건데 또 찢어먹어!"
"미, 미안 여보."
"어휴 내가 못 살아 정말..."
잠시 만호에게 잔소리를 하던 계화는 문득 배를 부여잡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머, 이것 봐. 애가 찬다."
"저, 정말?"
"그래, 들어봐."
오기조원에 든 내 감각에, 그녀의 뱃속에서 발을 걷어차는 생명의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만호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계화의 배에 귀를 대고 웃었다.
문득,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래.
너희에게도 이런 가능성이 있었구나.
고된 훈련을 하고, 전신을 피에 물들이며, 죽은 가족들의 귀곡성과 원한을 듣는 삶이 아닌.
그냥, 서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그런 가능성이 있었구나.
"...끅, 끄윽..."
억지로 가슴 속에 집어넣은 감정이 결국 조금씩 터져나왔다.
너무나 기쁘다.
이 아이들이 커서, 이런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
동시에 너무나 슬프다.
이 아이들은, 내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와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와 관계가 있던 아이들은, 이 아이들이 아닌.
내가 피와 죽음만을 가르쳤던, 그래야만 했던.
다른 시간선에 있는 아이들이란 사실이.
지난 삶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이들의 모습에, 나는 기쁘면서도 역설적으로 다시는 그들을 볼 수는 없다는 것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이것이 회귀의 실체이다.
나는 어떤 인연을 맺든, 그 모든 인연은 전부 사라지며 다른 시간선으로 가 없어져 버린다.
내가 똑같은 이들과 인연을 아무리 맺는다 한들, 매 회차의 모든 인물들은 사실 모두 생긴 것만 똑같은 전부 다른 인물일 뿐이었다.
1, 2회차의 김영훈을 '영훈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과 달리.
다른 회차에서는 '김 형'으로 짧게 호칭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였다.
물론 완전히 같은 인물이기에, 완전히 호칭을 정리할 수는 없어 급박한 상황이나 의식하지 않을 때는 영훈 형님이라는 호칭도 튀어나왔지만.
그는 어찌되었든 지난 회차의 인물과는 명백히 다른 인물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같았다.
인연을 정의하는 것은 인연 속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다.
이들은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낸, 내 제자들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번 삶의 첫날.
이미 지난 삶의 기억들은 가슴 속에 묻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인간의 감정이 단순히 묻어지겠는가.
이미, 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기억과 감정은, 그 시간은 내 삶의 일부가 된 채였다.
"...미안하구나."
내 지난 삶의 제자들아. 이런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게 해 주어, 너무나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이번 삶의 아이들아.
이렇게 살아주어, 너무나도 고맙다.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시전하던 월수궁무록이 어느새 풀렸는지.
문득 계화가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어머, 저 분은 누구셔?"
"어, 어? 그러게... 울고 계시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둘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죄송하오. 둘을 보니, 아는 사람들이 생각나서 그랬소. ...소중한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오."
"저런... 사실 저희도 비슷한 아픔이 있습니다만. 혹 괜찮으시면 들어오셔 차라도 한 잔 하심이..."
"괜찮소. 가정이 화평한 모습이 어떤 차보다 향기롭구려. 부디 백년해로하시길 바라겠소."
나는 말을 마치고, 둘에게 인사를 한 후 월수궁무록을 사용했다.
둘은 내가 갑자기 허깨비처럼 사라지자 놀랐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내가 어느 수도자라 생각했는지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다 만났느냐."
"...예. 만날 이들은 모두 만났습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로서, 내 결심은 더더욱 굳어졌다.
이 회귀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더더욱 경지를 높여갈 것이다.
내 삶이 시간의 장난에 부정당하지 않기 위하여.
며칠 후.
진씨세가에 온 사절들이 돌아갈 때가 되었고.
나는 김영훈과 작별을 한 후, 청문세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청문세가의 가주를 뵈어 작게 인사를 한 후.
상당한 주요인력으로 배정이 되어, 청문세가 본가(本家)에서 머무르는 것이 허락되었다.
나는 이후 청문벽의 소개를 받아, 청문령이라는 축기기 장로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앞에서 제자의 예를 취하며, 나는 다짐했다.
이 온 몸이 부숴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더 높은 곳으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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