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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6)
나와 제자들의 투기가 부딪혔다.
얼마간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의념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 침묵 속에서, 만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사부님께선, 저희와의 약속을 어기실 셈입니까?"
"약속...?"
"예. 당신께선 분명, 우리가 막리세가의 영지를 전부 없애는데에 성공하면, 함께 황궁을 치시기로 하셨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저희더러 살아남으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도대체 이제와서 왜 말을 바꾸시는 겁니까? 돌아가라니요?"
만호를 제외한 다른 수많은 제자들 역시 거친 의념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왜 사부님께선 우리에게 약속을 하셔놓고, 어찌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으려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언제 죽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지옥같은 수련을 버텨왔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아이들의 의념을 살폈다.
역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색이다.
하지만, 녀석들의 색은 대체적으로 검푸른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애(哀)
제자들은, 모두 함께 울고 있는 중이었다.
'너희들도, 슬퍼하고 있구나.'
동료들의, 친구들의 죽음에...
'미안하다.'
너무나도 미안하고, 스승으로서 부끄럽다.
스승으로서 부족해, 제자가 죽게 만들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미안하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약속은... 지키겠다. 너희가, 제대로 나를 이길 수 있게 되는 날. 너희와 함께 황궁을 쳐 주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화가 비수를 들고 내게 쏘아져 왔다.
"포위!"
그와 함께 만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고, 제자들은 나를 중심에 두고 삽시간에 월수진(越修陣)을 펼친다.
수도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진법.
절정경의 고수들은 수도자의 식 내부에서 제대로 수도자의 의념을 감지할 수 없고.
반대로 수도자는 절정고수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무림인과 수도자의 극상성을 완화하기 위해 만든 진법.
'수도자가 행동을 들여다보아도 막을 수 없고, 수도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도...'
그 안에 갇힌 이를 완전히 갈아버릴 수 있는 합격진.
그것이, 월수진이었다.
'기본적으로 월수궁무록의 깨달음이 깃든 합격진이기에, 진의 흐름 자체가 의념의 결을 방해하게 만들어졌다.'
월수궁무록을 펼쳐, 이들의 인식에서 벗어나도 진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월수궁무록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인식을 잘라,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학체계이지.
갑작스레 공간 이동을 하는 술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수도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합격진답게, 상대의 행동이 예측이 되든 안되든.
상대가 인식에서 벗어나든 말든.
무조건 진에 갇힌 이는 그대로 갈려나가 버린다.
그것이 월수진!
34명의 전력이 비었으나, 제자들은 훌륭하게 서로의 의념을 연계하며 빈자리를 메우고 나를 압박했다.
파바밧!
원형으로 나를 둘러싼 제자들이, 회전하며 나와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수 개의 인간 장벽으로 둘러싸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장벽을 회전시키며 진세를 좁힌다.
그 진세 안에서 수많은 의념의 흐름이 얽히고설킨다.
'월수진의 숙련도가 모두 한창 물이 올랐군.'
제자들의 움직임 자체가 의념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누구의 의념이 누구의 것인지 잘 인지가 되지 않는다.
진 자체가 일으키는 기묘한 착시현상과 함께, 나는 녀석들의 행방을 읽을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분명 수도자를 상대할 수 있는 진이다.
어지간한 삼화취정의 무림인조차도 이 진에 걸리면 갈려나갈 터.
하나, 나는 삼화취정의 극한(極恨)에 가까워지고 있다.
오기조원을 눈 앞에 둔 나다.
최근에는 월수궁무록의 상위호환인 조수월무록과 조수월무경 역시 이해하고 있는 차.
"이런 실력으로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무슨 자신감으로?"
피잉-
정신의 집중력이 극한에 이르자, 의념의 세계에 진입하며 수만가지의 의념의 색조가 보였다.
그 색조 안으로 진입하며, 나는 제자들의 의념과 나의 의념을 삼화취정의 깨달음으로 동화(同和)시켰다.
조수월무록(眺修越武錄)
단순히 월수궁무록에서 의념과 인식을 베는 것을 넘어서서, 삼화취정의 깨달음을 극한으로 발전시켜,
상대의 움직임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어버리는 무학.
내 검이, 빠르게 회전하는 월수진의 의념 사이를 그대로 파고들어갔다.
분명 상이한 의념이 끼어들었건만, 제자들은 내 검세가 진세의 안으로 완전히 섞여들어갈때까지도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이 중에 한 명이라도 검사(劍絲)를 쓸 수 있는 절정 중기 완숙의 경지라면 조금이라도 이상을 느낄 터.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상단전에 깃든 가족의 원혼들 때문에 오히려 성장이 막혀있었다.
슈칵!
나는 진의 흐름 속으로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가, 진의 흐름을 향해 검강을 휘둘렀다.
콰앙!
흙먼지가 비산한다.
땅이 울린다.
"크윽...!"
"막아라!"
단악검법
첩첩산중!
검강이 수천 갈래로 쪼개지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쪼개졌더라도 검강.
단순히 검기가 쪼개진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쿠과과광!
본래는 검기를 무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식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진형을 궤멸시킨다.
"너희는 나를 막을 수 없다. 너희 스스로가 그 집착을 끊어내어 가족들을 천도시키고,
의(意)를 깨닫지 못하는 한은!"
콰아앙!
월수진이 붕괴된다.
"강해져서 가족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 너희의 목표가 아니더냐!
강해지고 싶다면, 집착부터 끊어내라!"
번쩍!
나는 능곡지변의 초식으로 지형을 뒤흔들어 완전히 합격진을 파훼해버린 후, 마비산을 흩뿌렸다.
영지 습격으로 가진 독과 해독제를 전부 써버린 제자들은 내 마비산에 저항하지 못하고 전부 쓰러져 버렸다.
낭아봉을 쓰는 제자, 규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이걸 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가족들의 목소리를,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
"당신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단 말입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쓰러진 제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못난 스승이라, 미안하구나... 가자. 더 강해질 수 있게... 도와주마. 더..."
"어딜 간다는 겐가. 범인들 무덤 만들어준답시고 해서 기다려주고 있었다만, 갑자기 저들끼리 쌈박질이라니... 이래서 무림 것들은."
암살부대 총괄주 노인이 혀를 차며 내 말을 끊고, 비행 법기를 타고 내려왔다.
"듣자 하니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네가 무슨 권리로 암살부대를 빼간다는 거냐.
좋은 무공교관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이 상황에서 부대의 이탈은 허할 수가 없다."
"...삼화취정에 이르지도 못한 허약한 내 제자들이 앞으로의 싸움에서 뭐가 도움이 된단 말이외까?
앞으로 삼화취정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을텐데... 양보다는 질이 중요해질 겁니다."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건 아니지."
"막리세가에서도 이제 슬슬 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영지들에 있는 수도자들은 대부분 연기기 중후반일 터.
그들에게는 이제 제 제자들이 쓸모가 없습니다."
"스스로가 교육을 미진하게 시켰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군."
"맞습니다. 제가 미진하게 시켰으니 죄를 청해 다시 제자들을 쓸모있게 교육시키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시지요."
꿈틀
총괄주 노인의 이마에 작게 혈관이 돋았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법력을 끌어올렸다.
나는 황급히 그의 영역 바깥으로 물러나며, 언제든지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자꾸 헛소리를 하며 부대를 이탈시키겠다니. 제정신인거냐? 어찌되었건 진씨세가와 막리세가의 이 암중혈투는 범인들의 비율이 높기에 명분이 있는 것이야.
그런 상황에서 범인 녀석들이 대거 이탈한다면 막리세가의 상위 가원들이 개입할 명분을 줄 뿐이다."
"제 미진한 제자들이 빠져나가더라도 김 형께서 데려오신..."
"이제 헛소리는 됐다. 명령불복종으로..."
우우웅-
총괄주 노인의 손에 법력이 맺힌다.
그때였다.
콰악!
소리없이 다가온 억센 손길이 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김영훈이었다.
"어, 언제 내 의식영역으로..."
"흐음, 이보시게 진가 양반."
김영훈이 노인의 팔을 더욱 억세게 쥐며 미소를 지었다.
노인의 팔에 더 이상 피가 통하지 않는지, 손끝이 새하얘지며 법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 동생은 내 동향 사람이네. 동향 사람의 죄는 내 죄이기도 하니, 나도 같이 벌해주시게나."
"이, 이익..."
총괄주 노인은 김영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주고, 다른 손으로 뭔가 법술을 쓰는 듯 했다.
그러나 김영훈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의 흐름이 노인의 법술을 모조리 베어내며 없애버렸다.
얼마간 김영훈과 기싸움을 하는 듯 싶던 총괄주 노인은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알겠네, 알겠어. 명령불복종 건은 넘어가겠네. 이만 팔을 놓으시게!"
"흠."
그제야 김영훈은 노인의 팔을 놓았고, 노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팔에 법력을 불어넣어 회복하기 시작했다.
"...나는 넘어가지만, 가문의 어른들은 자네들이 그냥 이탈하게 두지 않네. 내가 방금 말한 것들은 전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야.
저 녀석들은 단순한 전력을 떠나서 하나의 명분이란 말이다! 전력이 되든 안 되든 녀석들은 일단 전투에 투입되어야 해!"
"하면,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제자들은 재능을 강제로 개화하여 억지로 절정경에 이르렀지만, 내 훈련으로 어떻게든 절정경에 안착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저 이상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의(意)를 깨달아 기사(氣絲)의 경지에 이를 필요가 있지요.
하나 제자들의 상단전에 그들의 친지가 깃든 이상, 이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귀 부여의 술자(術者)가 당신인 걸로 압니다만. 제자들의 상단전의 원혼들을 천도시켜 주시지요.
이제 내 제자들에게 저런 것은 오히려 제약일 뿐입니다."
"흠, 원귀들을 다시 떼어내달라는 건가?"
잠시 제자들의 상단전을 흝던 총괄주 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안 된다. 내가 술법을 해지하려 해도, 이 놈들이 자기 가족하고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 이상 술법을 풀 수가 없어.
이제 술법을 풀 방도는 두 가지야. 결단기 수준의 어른이 강제로 원혼들을 떼어내 주거나, 혹은 저들 스스로 놓아주는 수밖에."
"......"
"아, 생각해보니 하나가 더 있군. 저 녀석들이 죽으면 알아서 술법이 풀릴 테지. 이런 것들은, 너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총괄주 노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고 있는 건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부질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리고, 슬슬 마비가 풀리기 시작한 제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내 가족을, 떨어지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부족한 실력은, 조금 더 전투경험을 쌓으면 된단 말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녀석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놓아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내 제자들을 바라본 총괄주 노인은 나를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하, 꼴에 교관이란 놈이 자기가 어떤 놈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몰랐나 보군.
네가 가르친 저 아이들이 살아있는 놈들로 보였더냐?
저 아이들 모두, 이미 목숨을 버렸다 생각하고 있다! 네 제자 놈들은 전부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놈들이야!
복수에 넋을 맞긴 망인(亡人)이란 말이다!
하, 좋다. 내가 조금 도와주지."
파아앗!
노인이 결인을 맺자, 그의 손아귀에서 녹색 빛이 터져나와 남은 제자들의 뇌리로 스며들었다.
"원혼 천도의 술법이다! 네 제자들이 각자 가족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는 데에 성공하고,
술법을 풀게 된다면 원혼들이 자연히 천도될 것이다. 그래, 네 제자놈들이 미련을 끊어낸다면 말이지!"
"......"
"흐흐, 자기가 뭘 가르치는지도 모르고 웃기는 명령을 하는 꼴이란! 가문의 어른들도, 네 제자들 본인들도 앞으로의 전투에서 빠지길 원하지 않는다!
너야말로 쓸데없는 망상을 집어치우고, 제대로 부대를 이끌기나 해라."
말을 마친 총괄주 노인은 김영훈을 잠시 노려보더니 '범인 출신 주제에' 라고 중얼거리고는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가 버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김 형. 진씨세가의 힘을 빌린 것이, 잘한 일인지... 너무나도 회의가 듭니다."
"나도다."
"어찌해야 합니까..."
"......"
"내가...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다. 진씨세가도 분명 선한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막리가의 수도자들은, 최악(最惡)이다! 우리는 저런 것이라도 선택할 수밖에는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쓰러진 제자들에게 해독약을 먹이고, 그들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을 수습해서 다음 전투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 * *
다시 반년이 지났다.
오늘도 치열한 전투가 끝났고, 나는 막리세가의 영지를 돌아다니며, 희생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최근 들어, 흰머리가 많아지는 것 같구나."
"......"
"괜찮은 거냐?"
나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던 김영훈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최근 나는 급격히 늙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생애에서는 최초의 삶을 제외하고는, 나름 영약을 많이 먹은 터라,
그리 노화가 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머리칼이 더욱 빠르게 회백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멀쩡합니다."
"...무리하지 말아라."
김영훈은 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른 시신들을 수습하러 떨어졌다.
무너진 막리가 영지의 잔해에서, 나는 내 제자인 기세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녀석의 독문병기인 대도(大刀)는 언제나 잘 관리되어 있어, 그가 죽은 후에도 말끔하게 내 얼굴을 비추었다.
내 두 눈은 핏발이 붉어져 있었으며, 눈 아래로는 시커먼 눈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입술은 말라터졌고, 머리는 회백색 산발이 되어 있었다.
나는 또 다시 죽은 제자의 시신을 잔해에서 빼냈다.
내가 약해서, 오늘도 나는 제자를 구하지 못했다.
"왜!!!!!"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내게 왜 이러는 거냐! 왜!!!"
목이 끊어져라 외쳤다.
"왜 내게 이런 재능을 준 것이야! 왜 내가 아직도 삼화취정에 머물러야 하는 거냔 말이다!
왜! 왜! 왜! 왜 아직도 나는 오기조원에 들 수 없는 거냐!
왜 나는..."
나는 땅을 잡고서 으르렁거렸다.
땅에 내 손자국이 그대로 패였다.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야..."
알고 있다.
이건 하늘의 탓이 아니다.
전부 내 탓이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조금만 더 죽을 듯이 의념을 단련했다면.
뇌가 폭발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욱 더 높은 곳을 궁구했더라면.
그래, 내가 조금 더 강하다면, 해결되었을 문제였다.
"제발... 내게 재능을 주십시오... 제발... 힘을 주십시오..."
나는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
"왜 나는 아직도...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이리도 무력하단 말입니까..."
후회된다.
왜 멍청하게 제자들을 이런 곳에 투입시켰을까.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대해야 했다.
아니, 왜 이 녀석들을 가르쳤을까.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녀석들을 맡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왜, 이 곳에 들어와 인연을 맺었을까. 그래, 막리세가의 악행을 막기 위해 진씨세가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죄책감으로 가르쳤던 제자들은 어느새 내 생(生)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숨을 거둘 때마다, 내 살이 깎여나가는 듯 했다.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스승님."
"...생존자는?"
만호가 기세구의 시신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내게 다가와, 이를 악물고 보고를 했다.
"314명.. 입니다."
"그래... 가자."
나는 비틀거리며 제자의 시신을 안고, 매장지로 향했다.
나는 양지바른 곳에 제자들을 묻고, 김영훈의 주도로 제문을 외웠다.
김영훈이 익힌 위령의 법술이 스며들며, 희생자들의 영혼이 천도되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내 제자들의 시신 앞에서도 제문을 외워주었다.
그가 제문을 왼 범인들의 무덤에서, 작은 빛무리들이 날아오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이었다.
"하, 하핫! 드디어,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우리와 함께 싸우던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 중 하나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전음부(傳音附)가 들려있었다.
"모두 모여라! 본가의 어른들과 막리가 상부에서의 대화가 끝났다!"
그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우리를 둘러보며 외쳤다.
"협상이 끝났다고 한다. 막리세가에서 범인들과 연기기 수도자까지의 참전만을 수락한다면,
연국 황실의 교체 도전을 허용해준다고 하더구나!"
"오오오! 드디어 어른들께서 협상에 성공하셨구려."
"역시 어른들이십니다."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의 눈에 희색이 감돌았고, 내 제자들, 그리고 김영훈 휘하의 무림인들의 눈에 엄청난 감격이 깃들었다.
그러나 나와 김영훈은 각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협상이라.'
그동안 죽었던 수백의 목숨은, 그저 수도가문 상부의 협상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김영훈도 같은 같은 심정인 듯 했다.
쓴웃음을 짓던 그가 축기기 수도자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니까... 교체를 허용했다 함은, 우리가 막리세가의 하부 세력인 연국 황실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거요?"
"그렇다. 본래는 대규모로 황실을 습격한다면 막리세가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막리세가와 전면전을 벌여야 했겠지.
하지만 그들이 교체를 수락했다는 말은, 우리가 막리가 황실에 대규모로 군대를 꾸려 쳐들어가도 전면전이 없다는 소리이다."
'...황실의 교체도 하부 세력이 사라진 정도인가.'
말투를 들어보아하니, 막리세가에겐 연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하부 세력에 불과하고,
그들이 교체되는 것 정도는 용인할 수 있는 선인 듯했다.
"다만, 황조를 교체하는 것도 어쨌든 그들이 순순히 허락해주진 않는다.
그저 도전만을 허용해주는 거고, 그나마도 앞서 말했듯, 우리 측은 이제 축기기 수도자가 개입할 수 없어.
심지어..."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퍼져 있었다.
"막리세가 놈들은 황조(皇祖)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수도자는 전부 개입이 가능하다.
역대 연국의 황제(皇帝)로 지냈던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건국황(建國皇)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래, 연국 건국황 막리황신! 역대 황제는 모두 연기기 저계 수도자였지만,
그 놈은 가문의 뜻에 따라 황위에 오를 때부터 연기기 후반의 재능 넘치는 수도자였다.
그리고... 그는 황제의 위에서 내려와, 축기기 수도자에 등극했다."
진씨세가 수도자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말은 즉슨..."
"그래, 우리는 범인들과 연기기 수도자들로만 놈들에게 도전할 수 있지만,
그 놈들은 막리황신이라는 축기기 수도자가 한 명 있다는 거다."
"이 개 같은 막리세가 놈들! 어떻게 연기기 수도자가 축기기 수도자를 이깁니까! 이..."
그러나, 잠시 짜증이 어렸던 진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얼굴을 폈다.
그는 김영훈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걱정 말아라... 우리에겐 이 놈이 있잖느냐!"
그는 김영훈에게 다가가 김영훈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이 어린 무림인이, 축기기 수도자급의 전력이니... 네 임무가 막중하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가문의 어르신들께서, 너를 상위 가원과 혼인시켜 진씨세가의 데릴사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광으로 알거라!"
"혼인..."
김영훈은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 그건 나중에 다시 말하고. 내 전력이 축기기급이라는 건 막리세가도 알지 않소? 나중에 또 무어라고 말이 있는 건 아닌지?"
그의 말에,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는 씨익 웃었다.
"흐, 네가 최근 들어 위령이니 뭐니 하며 수도공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해도, 네 법력(法力)은 분명 연기기 3, 4성 수준.
그쪽에서 정한 상한선은 분명 연기기 14성 수도자까지였고, 너는 그 기준에 부합하다!
하하하, 제놈들이 아무리 뭐라 딴지를 걸어봤자 어쩔텐가? 흐하하하!"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비록 우리가 도움을 주지는 못할 테지만, 네 실력 정도라면 막리황신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 죽일 필요까지도 없다. 막고만 있어도 충분하다!"
설명이 이어졌다.
"연국 황실의 정통은 어찌되었든 현 황제 막리정과, 그 아들 막리현. 이 둘만 사살하는데에 성공하면,
어찌되었든 진씨세가의 승리이다. 역대 황제들은 모두 재능이 없어 축기기에 오르지 못했기에 전부 죽었고.
막리황신도 대외적으로는 죽은 녀석이니, 녀석은 살아있어도 딱히 문제가 없어!
네가 막리황신을 막는 사이, 연기기 수도자들과 범인들이 막리정과 막리현만 죽이면,
진씨세가가 다시 이 나라를 되찾는 게 가능하다!"
축기기 수도자는 흥분한듯, 큰 소리로 외쳤다.
"진(秦)가 황조가 다시 이름을 세울 수 있단 말이다!"
듣자하니, 저 수도자는 본래 진가 황조의 후손이었고, 본래부터 연국의 황조를 되찾기 위해 가장 혈안이 된 자라고 했다.
아무리 수도가문의 하부세력이라지만, 황조(皇祖)가 주는 이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얼마간 그는 진씨세가가 황조를 되찾는 것의 영광을 열변했다.
그런 후 그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진씨세가 수도자들과 함께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갔다.
우리는 영지 바깥으로 나갔고, 나는 조용히 축기기 수도자의 말을 경청하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약속을, 지킬 때가 왔다."
제자들의 의념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며, 처음으로 이들이 전투에 나설 때 했던 것과 똑같은 부탁을 했다.
"부디, 살아다오."
그리고, 제자들의 반응 역시 똑같았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스승으로서 부탁하겠다. 제발, 살아다오."
"......"
이제는 녀석들을 막을 명분조차 없다.
나는 분명 살아남으면 함께 복수를 해 준다고 내 입으로 약속을 했으니.
"...너희들은 분명 가족들의 원을 갚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겠지. 그리고 죽기에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겨질 이들은 어쩌란 말인거냐... 왜 내 속은 생각하지 않는 거냐."
"...죄송합니다."
그들의 눈빛에 검푸른 의념이 깃들었다.
"스승님의 속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부께서는 저희의..."
"속을 모른다는 것이냐? 너희의 감정을 모른다는 것이냐? 내가?"
그때,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김영훈이, 내게 다가왔다.
"이 배은망덕한 놈들 같으니... 네놈들 스승이 어떤 감정인 줄은 알고서 막말을 하는 것이야!"
쿠우웅!
그에게서 막대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김영훈에게서 뿜어지는 기파에, 제자들 모두가 자리에 쓰러졌다.
"커헉!"
"크어억..."
"끄으윽...!"
"서은현이 뭘 모른다는 거냐! 이 녀석에게서 듣지 않았느냐!"
그가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난 시간 죽었던 네놈들의 친우들. 아직까지도 그 원(怨)이 전부 풀리지 않은 혼령들.
서은현이 내게 부탁하여, 자신에게 깃들게 하지 않았더냐! 지금 내 아우가 다 늙어가는 것도 그 때문인데 그것을 알고서도 그따위 망발을 입에 담아!
이 건방진 것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문득, 말을 하던 김영훈은 제자들의 의념을 읽고,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나를 홱 돌아보았다.
"...너, 네 제자들에게 아무 말도 안 한게냐?"
"......"
"...멍청한 놈. 아둔한 놈! 아둔한 놈에 아둔한 제자들이구나!"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들겼다.
"모두 들어라! 너희의 스승이란 놈은, 너희의 그 비원을, 너희가 죽어서나마 들어주기 위해.
너희들과 똑같은 멍청한 짓을 했다!
혈육이 아님에도 너희 벗들의 혼을 상단전에 받아들여, 지금껏 그들과 함께 막리가 놈들을 베어왔단 말이다!"
김영훈의 누설에, 아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동안 네놈들의 스승이 급격히 늙는 것을 보며 아무 이상도 못 느꼈느냐!
혈육이 아닌 원혼들을, 이백여 명이나 강제로 받아들이는 탓에, 수명이 극단적으로 짧아졌다!
너희의 그 질기고 건방진 비원을 들어주기 위해... 네놈들 스승이 어떤 심정으로 지내왔는지 몰랐단 말이냐!"
그는 대노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이 아둔하고 건방지고 이기적인 놈들 같으니! 네놈들의 한(恨)만 감정이라는 게야? 네놈들 스승이 어떤지는 상관도 않는다는 게냐!"
"...그만하시오, 형님."
"...이 아둔하고 답답한 놈 같으니. 그걸 왜 네놈 혼자서 떠안고 있었다는 말이냐.
누가 칭찬이라도 해 줄줄 알았느냐? 저 아둔하고 이기적인 놈들이 너를 떠받들 줄 알았어?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준 건 너와 네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뭐냐! 지금까지도 그걸 속에 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이, 이..."
길길이 날뛰던 김영훈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되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네들끼리 정리하고 와라. 나는 먼저 출발하겠다."
잠시, 주변은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얼마간 감정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첫 사상자인 서른 넷의 수락을 받고 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고,
내 제자들의 혼을 내 상단전에 담았다. 이후로도, 죽은 아이들은 모두 나와 함께했다...
물론 그들의 친지까지는 모두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최소한 그들만은 모두 죽어서 나와 함께해왔지..."
이전까지는.
그저 죽을 이를 붙잡고, 복수를 갈고닦는 제자들을 답답하게 여겼다.
그러나, 제자들과 똑같이 원혼을 받아들이고 나니, 나는 그제야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다.
녀석들이 내게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듯이, 나 역시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제(師弟)는 한 묶음으로 불리우는 것이리라.
나는 이제, 마냥 제자들을 막아설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 감정을, 그 가슴에 맺힌 한(恨)을 내 마음으로 이해해버렸으니.
"...이제는, 미력하게나마 너희에게 공감할 수 있다. 다들, 그 안에 품은 한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감정을 정면에서 마주하며, 정면에서 공감하며.
나는 내 갈망을 입에 담았다.
"너희가, 살았으면 좋겠다."
내 재능은 비천하디 비천하다.
다른 고수들보다 한없이 유리한 조건에서 삼화취정을 헤쳐나가며.
제자들의 원혼을 받아들여 얼마 없는 재능을 극대화했음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칠정의 마지막.
욕(欲)의 의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 바람(欲)은 곧 삶(生).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마지막 의념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기조원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삶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못하고, 못하고, 또 못한 삶이었다.
그러니 부디.
"그 원을 갚지 말라고, 그 한을 잊으라고는 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만이라도.
"부디, 살아다오..."
그 삶(生)을, 살아가다오.
지금껏, 내 말은 전혀 듣지 않았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지금에서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반드시, 살겠습니다."
"살아서, 스승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만호를 시작으로, 녀석들이 우르르 내게 엎드렸다.
"살아남겠습니다! 스승님!"
어쩌면, 스승과 제자가 된 지 처음으로.
사제의 마음이 통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최종결전을 앞에 두고 마음을 트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결전일(決戰日)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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