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31화 (3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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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5)

3개월이 흘렀다.

나는 검은 무복을 입고, 각기 무기를 손질하고 있는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준비는 됐나."

"네!!!"

대답은 쩌렁쩌렁했다.

3개월 전,

막리세가 영지 침공 계획 설명회에서.

황제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모두 이성을 잃을 듯이 흥분했었다.

그나마 직후, 황제는 아니지만 막리세가의 다른 영지를 공격할 것이라는 말에 그나마 이성을 찾았으나, 나름 큰일날뻔한 사건이었다.

'다들, 복잡한 심경이군.'

정작 그들이 꿈꿔왔던 황제는 죽일 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다른 흉수들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은 원하든 살행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각기 심정이 복잡해 보였다.

단순한 증오도, 분노도, 기대도 아니다.

모든 것이 혼재된 기이한 감정.

'무슨 색인지 읽을 수가 없군.'

그렇다고 저것들이 욕망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수천가지 색조를 알아낼 수 있을지언정, 절대로 인간의 모든 색조를 알아낼 수는 없을지도...'

인간의 감정이 과연 몇 개인가.

누가 그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기에 경계를 지을수도, 그 색을 모두 알아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오기조원의 경지는 도대체 뭐지?'

오기조원의 경지가, 단순히 모든 색을 알아낸 경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신(神)이 아닌 이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가 김영훈이 오기조원에 이르던 순간에 보았던 것은...

'김영훈의 내면에서, 내가 미쳐 알아볼 수 없는 무한한 색조가 나와 그의 영역을 채우던 것이었다.'

그의 식(識)은 무한한 색조들이 채워져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지금 인간의 감정은 전부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는 걸까.

'모르겠군...'

기이하다.

무한은 결코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김영훈은 수도자들에게 밀리지 않고 오히려 결단기든 그 위의 경지든 압도했을 터.

하지만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은 무한이었다.

"...모르겠군."

지금 생각해봤자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재능으로는 김영훈이 설명해 주어도 쉬이 알아낼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알아낼 수 없는 것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맞겠지.'

나는 제자들의 채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후, 각자에게 내가 배합한 특수독과 해독제를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은 각기 내가 배합한 독을 받아가 자신의 소매나 품 속에 넣었고, 나는 각자의 채비를 확인한 후, 소리쳤다.

"오늘, 수도자들을 죽이러 갈 것이다!"

모두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맴돈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결연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모두들, 함부로 죽을 생각을 하지 마라. 수도자와 동귀어진을 할 생각도 하지 마라!"

내 말에, 결연한 표정을 지었던 제자들의 표정에 약간의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마 살라느니, 어쩌느니 한다면 이들의 짜증만을 돋울 뿐.

진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유를 줄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살아갈 동기를 만들어 줘야겠지.'

"너희는 황제가 아니라 단순히 막리세가의 저급 수도자들을 치러 간다는 것에 약간 불만이 있겠지. 하지만! 내가 약속하마. 너희가 모든 막리세가의 영지와 거점을 부수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 때는 나도 너희의 실력을 믿을 수 있으니.

너희와 함께 황궁을 치러 갈 것임을 약속하마! 황제 막리정의 수급을 취할 수 있게 도와주마! 대신! 너희는 그때까지 결코 쉬이 죽지 말아라.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서, 너희가 훈련을 해 온 이유가 헛되지 않게 만들어라! 반드시!!!"

나는 사자후를 담아 크게 외쳤다.

"살아남아라!"

내 이유있는 생환 명령에, 제자들의 눈에 결연한 빛 대신 굳은 의지와, 막리정을 향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예!"

나는 그들의 대답을 듣고, 야행복을 입은 후 앞섰다.

500여명의 제자들 역시 모두 귀식대법을 펼치며 소리소문없이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진씨세가의 영지를 나서, 첨벽성 서북쪽 구릉으로 향했다.

그곳에 막리세가의 비지가 있다.

* * *

'...지난 삶보다 훨씬 많군.'

나는 김영훈이 끌어모은 무림고수들, 그리고 나를 따라온 500여명의 절정고수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기에 내 제자들은 지난 생처럼 억지로 기량을 끌어올려 도달한 반편이 절정고수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뼈를 깎는 훈련을 거쳐, 억지로 도달한 경지에 맞는 기량을 갖춘, 절정고수에 걸맞는 실력들이었다.

'아마 이런 영지에는 제대로 된 수도자는 없을 터.'

대부분의 수도가문은, 나라 곳곳에 설치해둔 영지에는 크게 중요 인력을 배치하지 않는다.

그저 가문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연기기 1~5성 수도자들이나 보내는 정도고, 그들을 관리할 연기기 후기, 혹은 축기기 초기 수도자나 한둘 보내는 정도였다.

대다수의 전력은 깊숙히 숨겨진 수도가문의 본가(本家)에 있었다.

지금 우리가 진입할 영지 역시 극저계 수도자들이 더러운 연단을 하는 일차 정제소일 뿐이었고, 중요 인력은 크게 배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생에선 내 제자들이 없었지.'

이번 생에서는 수백의 가공할만한 전력이 추가되었다.

아마 고전할 것도 없이 그냥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제자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막리가의 영지에 진입하면 끔찍한 꼴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광경을 보더라도 냉정을 유지해라. 우리의 우선순위는 분노에 미쳐 날뛰는 게 아닌, 냉철하게 수도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고, 혹여라도 있을 일반인들을 구출하는 것이니까."

내 말에 제자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후, 구릉 앞에 선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가 결인을 맺었다.

"개(開)!"

파아아앗!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우리가 막리세가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

우리는 수도자들을 따라 막리세가의 영지로 진입했고, 나는 익숙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결계에 휩싸인 거대한 마을.

그리고, 우리를 보며 황급히 침입을 알리는 막리세가의 수도자들.

'이제 시작이다.'

우우우웅-

이번에도 선봉장은 김영훈이었다.

조수월무결로 빠른 경지에 이른 그가, 지난 생과 같은 신기(神技)를 보인다.

강기압환(罡氣壓丸)!

쿠구구구구-

지난 삶에서는 절정 중기였기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강기압환의 묘리.

삼화취정에 이르러, 수많은 의념의 결을 볼 수 있게 된 지금에야 어느 정도 보는 것이 가능했다.

정확히는, 보는 것 '만' 허락되었다.

'여전히 어떻게 하는 건지는 감도 안 잡히는군.'

수많은 의념의 저 구체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의념을 떼어내서 저 안에서 휘몰아치게 하는 것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꾸과과광!

김영훈의 강환이 막리세가의 결계에 떨어졌다.

결계가 터져나가며 커다란 바람구멍이 뚫렸다.

수도자들과 김영훈, 그리고 그가 데려온 삼화취정의 고수들 열댓명이 먼저 구멍으로 들어갔다.

"가자."

나 역시 제자들을 이끌고 구멍을 넘었다.

"치, 침입자다! 해치워라!"

"이 벌레같은 범인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

퍼억!

입을 놀리던 수도자 하나가, 빠르게 접근한 계화에게 맞아 머리가 터져 버렸다.

계화는 비수를 들고 재빠르게 움직이며 수도자들을 상대했다.

콰앙!

만호는 대검을 휘두르며 수도자들의 방어법술을 두들겨 박살냈고, 녹현은 철편으로 수도자가 부리는 강시의 다리를 휘감아 집어던졌다.

지난 삶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빠르게 수도자들의 마을이 불타기 시작했다.

콰과광!

연기기 3성 수도자를 막 해치울 때.

수도자의 집 한 채가 그대로 무너지며, 그 안에서 피와 시체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수도자의 집을 부순 이는 암기를 주로 쓰는 청야였다.

그녀는 그 작은 몸으로 기절한 수도자의 목을 잡아 올렸다가, 다시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꾸과광!

내공을 들어 내리치자, 수도자는 상반신이 거의 박살이 나듯이 죽어버렸고, 그녀는 시체들의 한 가운데에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니..."

그녀는 가족이 눈 앞에서 죽지 않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갔다고 했었다.

수도자들이 약을 만드는 것을 본 그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흐르는 듯 했다.

[정신차려라. 지금은 전장이다. 막리가 수도자들을 찢어죽이는 건 우선 전투에 이긴 후에도 상관이 없다.]

나는 분노에 미쳐 날뛰기 직전인 그녀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내 전음을 받은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른 수도자들을 잡으러 몸을 옮겼다.

"...미안하구나."

내가 해 줄수 있는 것은, 이런 것 밖에 없다.

"이 범인 놈! 감히, 감히 네깟 놈이!"

나는 내게 일갈하며 달려드는 연기기 3성 수도자를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네깟 놈은 무슨."

파앗!

내 검이, 수도자가 쏘아내는 술법의 결을 잘라내고 그의 목을 향했다.

방어법술이 걸리는 듯 했으나, 일순간 검기에 정신을 크게 집중하자, 검에서는 환한 검강이 터져나왔다.

콰작, 슈칵!

내 검은 수도자의 방어법술을 유리처럼 깨 버리고 녀석의 목을 잘라버렸다.

"너도 고작 연기기 3성 주제에.."

절정 초, 중기야 연기기 1, 2성 상대지만.

삼화취정부터는 의념의 결을 보다 자세하게 보며 모든 헛점이 사라지고, 검강을 사용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삼화취정의 고수는 연기기 3~6성을 상대할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살아온 세월로 인해 다른 삼화취정 고수들보다도 훨씬 빨리 삼화취정의 경지를 헤쳐나가고 있다.

또한 월수궁무록으로 수도자와 무림인의 상성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이제는 연기기 5~8성 정도는 되어야 내 상대였다.

"...이제, 끝나 가는건가."

나는 수도자의 시체를 지나치며, 활활 타오르는 막리가의 영지를 둘러보았다.

"다들 무사할런지..."

이미 하늘에서 싸우던 축기기 수도자들의 결투도, 김영훈의 활약으로 결판이 났다.

우리의 승리였다.

* * *

"모두 살아남았군."

나는 제자들을 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장하다."

'그리고, 고맙다.'

살아남아주어서.

"그럼 이제, 다들 수도자들의 집을 뒤져, 억울하게 희생당한 일반인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묻도록 한다."

내 말에, 제자들은 묵묵히 나를 따라 땅을 파고, 시체들을 묻었다.

우리는 김영훈의 주도로 수많은 무덤들의 앞에서 짤막하게 제문을 읊고 읍을 하였다.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기를.'

나는 짧게 그들의 명복을 빌어준 후,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일반인들이 수도자들에게 잔혹히 학살당한 흔적을 본 후, 의념이 거칠어져 있었다.

"다들, 속은 좀 어떻나."

"......"

아무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제자들의 의념을 읽어내며 그들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짐작할 수 없었다고 해야할까.

제자들이 내뿜는 의념은 모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게 꼬여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피처럼 새빨간, 분노의 의념.

분노의 의념을 뿜지 않는 제자는 없었다.

"모두 같은 기분이겠지. 하지만, 모두 명심해라. 수도자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복수가 끝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할 것이다!"

"...그게, 뭐가 다른 겁니까?"

기세구라는 이름의 제자가 물어왔다.

나는 잠시 그와, 그리고 모두와 눈을 마주친 후 말했다.

"추후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동한다. 따라와라."

뭐가 다르냐라.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는 아직 모르겠지.'

알고 싶지도 않을 테고.

알고 싶지 않은 이에게 알려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천천히 알게 해 주는 수밖에...

우리는, 막리세가의 다른 영지를 향해 또 다시 달렸다.

* * *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13개에 달하는 막리세가의 영지를 불태우고,

15만 6천여구의 범인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들의 눈에는 핏빛의 의념이 더욱 많이 깃들었다.

수도자들의 극랄한 짓을 볼 때마다 그들의 분노는 커져만 가는 듯 했다.

"이 범인 놈들 따위가! 무림 잡것들 따위가!!"

콰앙!

콰앙, 콰앙!

연기기 3성 수준의 수도자가, 내 제자들이 펼치는 합격진에 고전하며 법술을 마구 흩뿌린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콰과광!

수도자에게 빠르게 쇄도한 희아가 작은 낫을 들고, 수도자의 수급을 향해 휘둘렀다.

카앙!

낫에 실린 기(氣)가 수도자의 방어법술을 파고든다.

수도자는 이를 악물고 방어법술에 힘을 집중하려는 듯 했으나, 합격진을 상대하며 상당히 기력이 빠진 탓인지 점차 그의 방어법술이 내는 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내가, 내가 어떻게...! 어떻게 이 자리까지..."

그리고.

슈칵!

결국 녹현과 희아의 합공에, 수도자의 방어막이 깨지고 수도자의 목이 잘려나갔다.

수도자의 얼굴은 죽는 순간까지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막리세가 측에서도 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전장을 정리하며 제자들의 안위를 확인했다.

'처음 기습했을 당시에는 연기기 1, 2성 수준이 많았다면, 슬슬 연기기 3, 4성 수준도 많이 영지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다. 점차 막리가 놈들도 대비를 하고 있는 거야...'

좋은 일은 아니었다.

연기기 수도자는, 비록 수도계의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라고 하지만 그 힘은 감히 무림인에 비할 수가 없었다.

'고작 1성 차이로도 상당히 격이 달라진다.'

쓸 수 있는 법술의 갯수와 범위의 차이가 넓어지고, 의식영역이 커지며 공격의 위력이 올라갔다.

'슬슬 이런 녀석들이 계속 나오면,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물론 연기기 7성 이상의 수도자들은 최소 삼화취정의 고수가 붙었고, 9성 이상의 실력자는 김영훈이 정리했으나, 우리가 막리세가의 영지를 습격할수록 점차 대비가 굳건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조차도 진씨세가의 정보망을 이용해, 가장 허술한 영지들을 급습하는 거라고 하니...'

계속해서 막리세가의 영지를 습격만 한다면, 언젠가는 크게 당할 것이다.

'더욱 무서운 건, 아직도 막리세가와 진씨세가가 전면전을 벌이는 게 아니란 거지.'

진씨세가의 말에 의하면, 이 정도 격돌은 '암중혈투'의 영역이라고 했다.

영지 수십개가 통채로 불타고 수십의 수도자가 죽었는데도 암중혈투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도 했었으나, 듣기로 수도가문의 고위층 수도자들에게는 극저계 연기기 수도자들의 목숨 역시 범인들의 목숨과 심대한 차이가 있지는 않다고 하였다.

거기에, 우리가 막리세가의 영지를 칠 때에 보내는 인원 역시 모두 가문의 윗사람들이 보기에는 벌레 수준이라고 한다.

'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모두 연기기 수도자급의 전력이지만, 어찌되었든 모두 무림인이나, 범인이다. 그리고, 진씨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우리와 함께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들과 싸우고 힘을 빼놓으면 결정타를 날려 죽이는 건 항상 김영훈의 몫이니...'

아직까지는 '두 세가가 관리하는 범인들의 싸움' 정도로 취급되어 전면전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범인들'에게 죽은 막리세가의 하부 영지들은 너무 나약한 것들이라 막리세가의 상부에서도 혀를 찰 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다.

'...하지만, 진짜로 전면전이 벌어지면...'

나는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을 모두 참한 후, 그들에게 희생당한 일반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제자들을 보았다.

전투가 끝난 직후, 일반인들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주는 저 때만이 제자들의 눈에 씌인 핏빛의 의념이 옅어지는 순간이었다.

'삼화취정 이하는 도망치기에만도 급급하겠지. 그리고 제자들은...'

운이 좋다면 10~30 정도는 살아남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전멸할 것이다.

* * *

이번 막리세가의 영지 습격이 끝난 후, 나는 제자들과 함께 시신들을 수습해서 무덤을 만든 후, 김영훈의 주도로 제문을 외웠다.

우웅-

김영훈이 제문을 외자, 미약한 빛이 무덤 주변으로 맴돌며 주변에 깃든 원망과 귀기를 조금 씻어내는 듯 했다.

지난 몇 달간, 김영훈은 수도법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딱히 무공이 막히거나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죽은 이들에게 외워줄 제문과, 위령(慰靈)의 법술을 익히기 위해서 익힌 것이라고 하였다.

김영훈에게서 뻗어나온 저계 법술에, 남아있는 잔혼들이 천천히 천도되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본디 영(靈)들은 범인(凡人)들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삼화취정의 성취가 깊은 이들이나 의념의 흐름을 읽어 보일락말락 하는 것이 영혼이었으나,

천도(天度)의 술법을 맞은 영혼들은 빛무리의 형태로 잠시 무덤 주변을 떠돌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본 후,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 개의 막리세가의 영지를 파괴했다. 그리고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을 수없이 참하고 또 참했다. 또한 이들에게 희생당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묻어주고, 원혼들을 천도해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제... 됐지 않았느냐?"

내 말에, 녀석들의 표정이 씰룩였다.

"뭐가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청야가 거친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아직도 이 더러운 놈들은 많고도 많습니다. 아무리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고, 아무리 죽여도 다음 영지를 가 보면 민간인들의 시신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도대체 뭐가 됐다는 말입니까!"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네 가슴에 담긴 그 노(怒)가 온전히 너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 모두. 아직까지도 인간이 수 년전의 일로 그렇게 또렷한 분노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하느냐?"

나는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의념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의념은, 단지 저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의념 사이로, 이질적이고 탁한 의념이 더 새어나온다.

각기 친지와 혈육들의 노(怒)가 깃든 의념.

진씨세가는 제자들의 혈육들. 막리세가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그 원귀(怨鬼)들을 녀석들에게 흡수시켜 강제로 재능을 개화하였다.

어차피 수명은 줄을대로 줄었으나, 지금이라도 원귀를 천도시켜준다면 살 만큼은 살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저희와 함께하는 가족들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만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맞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막리가 놈들을 베어넘겨도, 이 끓어넘치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것은, 분명 저희 가족들의 분노도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저희의 분노만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기에!"

만호의 표정은 굳건했다.

"단순히 저희의 분노만이 해갈된다 하여 복수를 끝낼 수는 없는 겁니다! 가족들과 함께, 모두의 한을 풀어야 이 감정이 해갈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만의 한이 아니기에 우리는 모두의 한을 풀어야만 하는 거란 말입니다!"

나는 잠시 우리가 수습해준 무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 방금 빛무리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방금 보인 빛은, 희생자들의 혼들이다. 하나, 희생자들은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지언정, 천도되는 순간에는 빛무리와 함께 흩어졌다."

나는 다시 만호와 제자들을 보며, 그들의 상단전에 숨어있는 탁한 의념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에게 당장 그만두라고는 하지 않으마. 하지만 최소한, 이제 어느 정도의 복수를 이뤘으니 죽은 이들을 다시 보내주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으냐?

죽은 이들은 이제 그들이 갈 곳으로 놓아야주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냐?"

내 말에, 만호의 얼굴에는 잠시 머뭇거림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당신은, 저희의 아픔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죽은 가족과 함께하며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저희의 위안인지, 모르실 겁니다."

"...계속 너희 가족을 잡아둘수록, 너희 가족도, 너희 자신도 좋은 결과는 얻을 수 없다! 너희의 수명은 계속 깎여만 갈 거고, 너희 가족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해 원귀로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스승님은 저희를 살리려고만 하시지요."

그의 눈에, 설명할 수 없는 색조가 깃들었다.

"저희는, 죽어도 상관 없단 말입니다! 남은 생애동안을 막리세가 놈들을 베어죽이는 데에 쓰다가, 그렇게 수명이 다해 죽으면, 가족들과 함께 제대로 저세상에 가도, 그래도 상관 없다는 말입니다!"

"......"

"......"

잠시 나와 제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 되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우리는 그렇게, 그 날의 대화를 피하고 지나갔다.

* * *

수 개월이 흐르고, 우리는 계속해서 막리세가의 영지를 습격했다.

많은 막리세가의 수도자가 참살당했고, 우리가 상대하는 막리세가 수도자들의 역량은 점차 높아져만 갔다.

연기기 1~3성 수준이었던 수도자들의 경지는 점차 높아져, 연기기 2~5성 수준까지 높아졌다.

'제길, 강하다!'

나는 연기기 7성의 수도자와 접전을 벌이며 이를 악물었다.

"눈이 좋군. 범인답지 않게 영감도 상당히 깨어있는 듯 하고. 범인도 영감을 갈고닦으면 우리처럼 영통이 뚫린다지? 네 시체로 강시를 만들면 그 강시는 수도자의 시체와 같을까 다를까?"

나는 수십마리의 강시를 조종하는 수도자를 상대하며, 검강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이런 녀석들이 수두룩하다. 제자들이 위험해!'

단악검법

능곡지변!

콰과광!

내 검강이 지형으로 파고들어, 강시들의 진세를 흐트러뜨렸다.

단맥도

산바람!

피잉!

내 검강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강시들의 사이로 수도자에게 쏘아졌다.

카앙!

"흠, 내 방어법술에 흠집을 내다니, 훌륭..."

단악검법

기산심천!

부웅!

경맥을 열어젖히며, 검강을 크게 강화하여 대각선으로 베어나갔다.

콰과광!

커다란 검강이, 균열이 난 방어법술을 헤집고 수도자의 몸을 갈라갔다.

"무, 무슨...! 내가 범인 따.."

콰작!

나는 수도자의 상반신을 완전히 잘라버린 후,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너무 강한 이들이 많다.

'제발 살아있어 다오!'

검이 불길을 가르고, 내 제자들에게 합격을 받고 있는 연기기 4성 수도자에게 향했다.

연기기 수도자가 풍계 법술을 날리고 있었고, 제자들이 힘겹게 법술을 막아내는 형국.

나는 바람의 결을 베어가르며, 월수궁무록으로 그에게 접근하여 검을 휘둘렀다.

번쩍!

검강이 치솟았고, 연기기 수도자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나는 바람이 걷혀지며, 피를 흘리는 몇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너희..."

뿌드득-

나는 이를 갈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게 배운 기초적인 의술로 지혈은 해 두어 피는 더 흘리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죽는다.'

살릴 방도가 없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은 둘째치고, 경맥이 완전히 뒤틀리거나 내장이 파열된 경우도 있었다.

"...멍청한 녀석."

나는 마지막 제자의 얼굴을 확인하며 이를 악물었다.

훈련장에서 멋대로 탈출한 전적이 있는, 녹현이었다.

"내가... 복수는 이만하라고 했잖느냐."

"흐, 흐... 저는, 만족, 합, 니다... 드디어, 드디어, 가족들과... 가족들과 함께할 수..."

제자의 몸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점차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여기 남겨진 사람들은, 네 가족이 아니냔 말이다."

뿌득-

이를 악물었다.

목이 막힌다.

녀석들의 눈빛은, 죽어가면서도 평안했다.

죽은 제자들은 나를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당신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어쩐지 눈앞이 흐렸다.

그러나 이 이상 감정이 변하면 오히려 위태롭다.

지금은 전장이었다.

더 이상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이빨이 으스러져라 이를 악물며, 천천히 제자들에게 속삭였다.

"...겠다."

내 말에, 제자들의 눈이 커졌다.

"...괜찮으시, 겠습니까?"

"분명 저희의 한은 전부 풀리지는 않았습니다만."

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한 번 고개를 끄덕여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면혈을 눌러주었다. 곧 잠이 들 수 있을게야. 나는 이만 가 보겠다. 다른 녀석들도 할 수 있는 한 구해야겠다."

쓰러져 죽어가는 일곱 명의 제자를 뒤로하고, 나는 검을 잡았다.

"녹현, 희아, 청주, 장삼소, 구오오, 서문림, 금란... 모두, 잘 자거라."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수도자들을 참살하고,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 * *

이번 전투는 격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34명의 인원이 전사했다.

"녹현, 희아, 청주, 장삼소, 구오오, 서문림, 금란, 개진, 구삼, 일매, 서진, 기진태, 배기태, 허진수, 상현, 산호, 금쪽이, 대아, 칠득, 팔오, 팔륙 형제, 이력, 금삼, 견훈, 대식, 길수, 한수, 몽진, 주한, 주겸, 검오, 장칠, 홍화, 만숙..."

제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나는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모두, 미안하다."

제자들을 묻어준 후, 나는 나머지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들어라. 이제 점차 막리세가 수도자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다. 이제 아무리 너희들이 합격진을 펼친다 해도 상대하기 어려운 연기기 후반의 수도자들이 즐비해서 반격해 오겠지.

그러니, 무공스승으로서 명하겠다."

앞이 흐리다.

스승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건만, 자꾸만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너희는 이제 다음 급습부터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훈련장에서 다시 훈련을 다져갈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어떤 심정인지 아신단 말입니까! 저희는..."

제자들이 핏발이 가득 선 눈으로 저항해왔으나, 나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부탁이나 제안이 아니다. 스승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스릉-

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내 뜻을 꺾고 싶다면, 나를 꺾어봐라. 나를 베기 전까지, 너희는 더 이상 복수를 할 수 없다!"

더 이상 봐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백 개의 의념이 나를 노려들었으나, 나는 수천 수만개의 의념을 관찰하며, 제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최적의 경로를 계산해내었다.

"더 이상, 너희는 죽지 않게 하겠다... 아니, 너희는 이제 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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