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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는 운명(2)
투둑, 투두둑···.
끝없이 내리던 폭우는 오 대리가 사라지자 점차 잦아들었다.
얼마 후, 다시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일단 앞으로 어떻게 되든, 먹을 걸 좀 구해 오겠습니다.”
나는 침울해져 있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잠깐, 은현 대리님. 같이 가요.”
“그, 그래. 혹시 떨어진 사이에 이상한 놈들이 납치할 수 있지 않은가?”
“···뭐, 그러죠. 그리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자니 혈족이니 하며 데려갔으니, 납치라기보다는···.”
“그게 납치지. 뭔가? 그 괴상한 놈들이 어디 각자 제대로 수락은 받고 데려간 건가?”
김 부장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하긴, 사실 납치가 맞기야 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붙어서 나와 함께 약초를 캐고, 열매를 땄다.
“여기 이 풀 좀 씹어 보시죠. 몸에서 열이 날 겁니다.”
나는 비가 온 후, 찬 공기 속에서 추워하던 김 주임과 김 부장에게 발열초를 건네주었다.
“고, 고맙네. 서 대리.”
“정말, 대리님 없었으면 저흰 아마 첫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굶주리기만 했겠죠···?”
“자네같이 유능한 사람을 왜 회사에서는 몰라봤을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 뿐이라서 그런 겁니다. 산 속에서 며칠 살아남는 거야 잘 하겠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능력도 재능도 없습니다.”
“겸손 떨 것 없네. 자네 덕분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니까. 자네는, 우리 목숨의 은인이나 다름없어.”
“맞아요, 대리님.”
둘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둘의 진심어린 말에,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금, 미래의 지식으로 김 부장의 호의를 사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유능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누군가의 은인이 될 수도 없는 인간이다.
그저, 당신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이것도 조금 드셔 보시죠. 머리가 맑아질 겁니다.”
“이 풀은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고···.”
“이 열매는 미용에 효과가 있다고 하고···.”
나는 숲을 돌아다니며, 김 부장과 김 주임에게 수많은 영초와 영과를 먹였다.
‘황주삼도 몇 뿌리 더 캤고. 지난 삶에서 귀히 취급되던 영초들도 많이 캤어. 그리고···.’
두 사람도 배불리 먹였다.
“고맙네, 서 대리. 배가 든든해지니 우울감도 조금 가시는군.”
“대리님. 대리님은 정말··· 어디 가시면 안 돼요.”
“···물론이죠. 저는 안 납치당합니다.”
숲을 돌아다니며 약초와 열매들을 캐 와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때가 되겠어.’
나는 상의를 벗어, 김 부장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세, 세상에. 서 대리! 뭐 하는 짓인가!”
“대, 대리님!”
비가 올 때는 동굴 안에 있었고, 비가 그친 후에 돌아다니며 입었던 옷이라 잘 말라 있어, 아주 잘 탔다.
나는 내 옷을 태운 불에 막 따온 열매들을 집어넣었다.
“···비가 와서 장작들을 못 구합니다. 곧 밤이 될 텐데, 불이 필요해요.”
“하, 하지만··· 자네 옷이···.”
“전 괜찮습니다. 발열초도 많이 따 왔잖습니까.”
김 주임의 송별 선물이다.
나는 당황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잠시 후 나뭇가지로 불 속에서 열매들을 꺼냈다.
“김 주임, 한번 드셔 보세요. 부장님도 잡숴 보시고요.”
“···고맙네, 서 대리.”
“정말, 감사해요.”
노을이 졌다.
우리는 굴속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구운 열매를 까먹었다.
아마 이것이 김 주임과의 마지막 식사이리라.
열매를 먹으며, 우리는 오 차장, 전 과장, 강 대리, 오 대리 등과 헤어진 우울감을 감추기 위해 수다를 떨었다.
가끔은 깔깔거리며,
가끔은 피식거리며.
가끔은 부장님의 농담에 재미없어하며.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붉게 노을 진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해가 지평선 아래로 거의 내려갔을 때 즈음.
저 멀리.
수많은 수도자들, 그리고 해룡왕이 향했던, 승천문이 있다는 그 방향으로.
김 주임이 휙 고개를 돌렸다.
“김 주임, 무슨 일이야?”
김 부장이 김연 주임에게 물었다.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떠는 그녀를 보며, 시간이 되었음을 짐작했다.
“어, 어어···.”
그녀가 능력을 각성했다.
“이, 이상···해요. 갑자기, 주변의 모든 게 전부 느껴져요. 몇 킬로미터 바깥까지 감각이··· 으, 으아···.”
김연 주임은 갑작스레 주변 수 킬로미터 안을 감지하는 감각을 손에 넣자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으··· 끄으으···.”
“서, 서 대리! 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두통에 좋은 약초 같은 게···.”
“두통에 좋은 건 여기 있긴 합니다만.”
아마 쓸 일은 없을 거다.
50년 전.
지난 삶에서도, 분명 이 즈음에 왔으니.
“아, 아아···!”
그녀가 승천문이 있는 방향을 보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오, 온다! 와요! 뭐가, 오고 있어요!”
수도자들이 향했던 승천문의 방향에서, 작은 점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점은 급속도로 커지더니 삽시간에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파아아앗!
미쳐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우리가 있는 동굴 상공에 도착한 그것은, 거대한 흉수(凶獸) 형태의 꼭두각시였다.
마치 해태를 닮은, 그러나 그보다 훨씬 사악해 보이는 형태의 괴뢰(傀儡) 위쪽에는 한 곱사등이 노인이 지팡이를 쥐고 앉아있었다.
[이게 뭐야. 범인(凡人)들이 아닌가? 어찌 영근도 없는 범인들이 비승도 외곽까지 도달한 거지? 아, 그런가. 승천문이 열릴 시기에는 인근 공간이 불안정해지니 범인들이 공간 폭풍에 휩쓸렸을 가능성이 높겠군! 키히히, 역시 나는 천재야. 이런 난제의 답을 순식간에 알아내다니!]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던 곱사등이 노인은 얼마간 낄낄거리더니, 우리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범인들아. 방금 전에 어마어마한 식(識)을 늘어뜨렸던 이가 누구냐? 강대한 식(識)에, 상계(上界)의 선사가 강림한 줄 알고 화들짝 놀랐거늘···. 아, 저 녀석인가?]
펄쩍!
노인이 괴뢰의 위에서 펄쩍 뛰어내려, 두통을 호소하는 김 주임에게 다가왔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김 주임은, 저희의 동료입니다.”
김 부장은 용기를 내서 노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노인이 턱 끝을 까딱거리자 김 부장은 힘없이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달려가서 김 부장을 온몸으로 받아 냈고, 내 등이 쓸리긴 했으나 김 부장은 안전하게 받아낼 수 있었다.
“서, 서 대리, 고맙네. 허, 헉! 괜찮은가! 등이!”
“괜···찮습니다.”
우리가 그러는 사이, 곱사등이 노인이 김 주임에게 다가가 말했다.
[기이하구나, 기이해. 범인의 식(識)은 자기 뇌 내에서밖에 머무르지 아니하거늘. 이 아이의 식은 마치 실처럼 늘어져서 천지사방에 뻗쳐 있다. 그 기세가 하도 거대하여 내가 상계의 선사인 줄 착각했을 정도니···.]
곱사등이 노인은 김 주임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이야, 내가 너를 거두어 주마. 영근이 없다지만, 내 능력이면 영근 정도는 충분히 각성시켜줄 수 있지. 이런 기묘한 식이 수도자의 신식으로 진화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해지는군···.]
김 주임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우리를 향했다.
“부, 부장님··· 대리님···!”
[흠···? 이 내가 거두겠다고 했거늘, 아직도 속세의 인연 따위에 집착하겠다는 게냐?]
“으, 흐으···.”
그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며칠 만에 사내 동료들이 납치당한 후, 또 누군가가 흩어질 것을 걱정한 그녀였다. 또다시 우리와 흩어진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곱사등이 노인이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리며 우리를 가리켰다.
“커, 커억!”
“어어어억!”
나와 김 부장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도 쉬기 힘든 압박감이 우리를 조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네 속세의 인연을 친히 끊어주마. 자···.]
“아, 안 돼요! 제, 제발··· 시키는 건 전부 할게요. 제발 저분들을 살려 주세요!”
김 주임은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발치에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본 곱사등이 노인은 미간을 꿈틀거리며 우리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던 압박감이 그제야 사그라들었다.
[좋다, 그리 말한다면 굳이··· 하지만, 넌 내 것이 되었으니 이제 속세의 인연은 전부 잊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기왕 이리 된 것, 여기에 놔 두면 네 미련이나 남을 테니, 저 둘은 근처 범인들의 국가로 돌려보내겠다. 공간 균열을 통해 무작위로 보내는 것이니 나도 어디로 보내질지는 모른다. 앞으로 저 둘과 만날 일은 없을 게다! 속세의 미련한 그 인연을 잊어라!]
“자, 잠깐만요···!”
파앗!
쩌어억!
나와 김 부장의 뒤쪽에서 시커먼 균열이 입을 벌렸다.
김 부장은 그 모습에 놀라 다른 쪽으로 달아나려 했고, 나 역시 황급히 동굴 입구에 내놓았던 영초와 약초 꾸러미를 챙겨서 품에 안았다.
[어딜!]
그리고, 곱사등이 노인이 손짓을 하자 우리는 다시금 균열로 향해 빨려가기 시작했다.
“은현 씨! 영훈 부장님!!! 안 돼!”
저 균열 너머, 우리에게 간절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손을 뻗는 김연 주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신을 잃었다.
***
깜빡.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나는 5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퀴퀴한 냄새.
저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들···.
“···어?”
나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억과 다르다.
지난 삶에서 떨어졌던 곳과 다른 곳이었다.
나는 왠 골목의 사이 같은 곳에 떨어져 있었고, 저 골목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왜, 왜 지난번과 달라진 거지?”
그러다가, 곱사등이 노인이 ‘무작위로 공간 균열을 잇는다’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랜덤이었나.’
그래서 티끌만 한 차이로도 나비 효과 때문에 확률이 달라져 지난 삶과 다른 곳으로 전송된 것이리라.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에는 김 부장과, 내가 품고 온 약초들이 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일단 바깥으로 잠시 나가 보자.’
나는 약초들을 정리해서 길목 구석에 밀어 두고, 근처에 있는 거적떼기로 가려 두었다.
그런 후 골목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내 귀를 강타했다.
“연국(鸢國) 최고의 비단이올시다!”
“오늘 들어온 물품은 성제국(盛製國)에서 들어온 경전들이오!”
“우리 약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번화가다.
그리고, 다행히도 익숙한 ‘말’들이었다.
‘순간 식겁했군. 완전히 다른 나라에 떨어져서 언어도 전부 새로 배워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도 내가 지난 삶에서 살아온 연국(鸢國)에 떨어진 듯 했다.
“이보시오, 내가 헷갈려서 그런다만. 여기 지명이 뭐였소? 내 촌에서 막 올라와서 이곳의 이름이 조금 헷갈린다만···.”
나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이곳의 이름을 물었다.
지난 삶에서 나와 김 부장이 떨어진 곳은 연국 연산성(鍊山城).
연국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성이었었다.
내 질문에, 행인은 왠 미친놈을 보겠다는 듯 내 손을 쳐내며 말했다.
“정신 나간 놈 같으니. 수도 한 가운데에서 여기가 어디냐니, 에잉, 재수 옴 붙었네. 대낮부터 미친놈을 만나고···.”
“수도···.”
나는 이 곳의 이름을 알아내고 미소를 지었다.
“서경성(西京城)!”
이번 생(生)에서는 연국 수도에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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