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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는 운명(1)
“서, 서 대리. 이게 무슨···.”
“저, 저···건 뭔가요?”
김 부장과 강 대리가 소곤대며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도, 눈 앞에서 떨어지는 여우의 침에 더욱 신경을 집중했다.
[예를 아는 인족이 있는 무리이니, 함부로 해를 끼치지는 않으나. 내 영역에서 있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할 터. 너희 중 하나만 내게 사지 하나를 바치면 너희의 거주를 잠시 인정해 주마. 누가 사지를 바칠 것이냐.]
그래.
어차피,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바치겠습니다.”
나는 덜덜 떨며, 왼팔을 내밀었다.
지난 삶, 아무것도 몰랐을 그때에는 모두가 여우를 보며 비명을 질렀고,
여우의 진노를 사 모두가 팔다리가 뜯어먹힌 채 죽어갔다.
그때 살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숲의 예(禮)를 알고, 여우의 호감을 샀다.
지난 생처럼 모두의 팔다리도.
사지 전부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사지.
그중 하나만 바치면 된다.
그마저도 이틀 후 올 수도자들이 회복시켜 줄 것이다.
[예를 아는 인간이로구나. 네 예는 잘 알았으니 최대한 아프지 않게 맛봐 주마.]
여우는 커다란 입을 벌려, 내 팔을 그대로 씹었다.
“···!!!! 아아아아아악! 끄하아아악! 꺼허억! 끄아아악!”
생살이 커다란 이빨에 의해 그대로 찢긴다.
뼈가 으스러지고 혈관이 파열된다.
우득, 우드득, 우득!
툭!
촤악!
얼마간 내 팔을 씹던 여우는, 그대로 강하게 내 팔을 몸에서 뜯어내 버렸다.
“아억··· 끄하악··· 끄악···.”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내가 미리 뜯어 놓은 진통초를 한 움큼 집었다.
그리고 그대로 뿌리째로 입에 집어넣어 삼켰다.
뿌리에 남아있는 진흙과 모래가 이빨에 우득거리며 걸렸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너무 고통스럽다!
얼마나 진통초를 집어먹었을까, 어느 정도 약효가 돌기 시작하며 고통이 잦아들었다.
우득, 우드득··· 쩝쩝.
그리고, 얼마 후 내 팔을 전부 씹어삼킨 여우가 혀로 입가를 닦았다.
[독특한 향기가 나길래 맛이 다른가 싶었더니만. 일반 인족과 크게 다르진 않군. 되려 혈관에 불순물이 많이 끼어 있어 텁텁하고 뒷맛이 좋지 않구나.]
“···미욱한, 공물을, 바칩니다.”
[네 그 예를 받아, 너희가 내 영역에서 칠 주야간 머무는 것을 허한다. 내 신통(神通)이 깃들었으니 그 상처로 죽지는 않을 것이니라.]
여우는 그렇게 말한 후, 펄쩍 뛰어서 숲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허, 허억··· 헉, 허억···.”
나는 지혈초를 입에 넣고 씹은 다음, 그 즙을 팔이 뜯겨나간 자리에 발랐다.
얼마 후 피가 멎고, 고통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끄···으윽···.”
“서, 서 대리!”
“서은현 대리님!”
김 부장과 강 대리가 황급히 와서 나를 부축해 주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방금 그건 또 뭐고?”
“···이, 일단. 들어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이들에게 진상을 말해 주었다.
“오늘 새벽, 일찍 일어나서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가 그 여우를 만났습니다. 여우가 말해 주더군요.”
어차피 이들도 며칠 후면 다 알아낼 사실이긴 했지만.
나는 내가 미리 알고 있었던 지식을 여우가 알려 준 지식인것처럼 알려 주었다.
이곳은 원래 우리가 살던 세계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선인(仙人)과 수도자들, 그리고 무림인들이 실존하는 세상이라고 했다고 한다.
“···무림이라. 이것 참 가슴이 두근거리는군그래.”
“허허, 살다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김 부장과 오 차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쩐지 억지로 들뜬 듯한 표정과 함께 무림에 대한 농담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하, 서 대리. 무림 세상이라면 내가 또 전문이라네. 그러니까···.”
그러나 완전히 감정을 숨기지는 못했는지, 김 부장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죽지 말게나. 자네가 죽으면···.”
무림에 왔으니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팔이 뜯겨 나간 내 고통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 억지로 농담을 하는 것이었다.
김 부장과 오 차장은 억지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 둘이 이곳에서는 제일 어른이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안 죽습니다. 아까 여우가 그랬잖습니까, 자기 신통이 깃들어 있으니 이 상처로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실제로 지난 삶에도 예를 차리지 않아 모두가 사지가 찢겨 나갔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선인은 또 뭔가? 수도자?”
그때, 오 차장이 내가 했던 말에서 선인과 수도자라는 말에 갸웃거리자, 이번에는 전 과장이 나섰다.
“무협지가 아닌, 선협 소설이라는 게 있습니다만···.”
전명훈은 김 부장과 오 차장에게 대강 선협이라는 개념을 이해시켜 주었다.
“그렇군···.”
“전 과장도 신기한 걸 알고있군 그래.”
“평소에도 관심이 있어 알아보곤 하니까요.”
‘업무 시간에 업무는 안 하고 선협 소설이나 읽었단 말이지···.’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업무 짬처리를 맡겨 댔던 건가.
순간 울화통이 터질 뻔했지만, 나는 빠르게 흘려 버리고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 숲의 주인이 이 숲에서 잠시 머물고 싶다면 제물을 내놓으라고 하여 제 팔을 내 주었습니다. 그 댓가로 이제 일주일 동안은 숲에 있어도 안전할 겁니다.”
“이,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또 다른 제물을 바쳐야겠지요.”
그 말에, 모든 이들의 눈길이 내 어깻죽지를 향했다.
전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진통초 좀 가져다 주십시오. 너무 아프군요.”
“아, 알겠네. 이건가?”
“감사합니다.”
나는 미리 캐놓은 진통초를 또 한뿌리 씹어 삼켰다.
“한 숨만 자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긴장이 풀리자 자연스레 잠이 왔다.
고통을 진통초로 억누른 후, 나는 달콤한 잠에 빠졌다.
***
사람의 감각 중 가장 오래 가는 것은 청각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정신을 차리자 들리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목소리였다.
“아니, 제물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주일이 지나면, 또 저런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겁니까?”
“일주일 안에 최대한 이곳을 벗어나는 걸 생각해 봅세.”
“서 대리님 불쌍해서 어떻게 해···.”
“서 대리님이 처음으로 그···걸 마주쳐서 뜯어먹히신 거나 다름없잖아.”
“그렇다기보단, 처음으로 희생하신 거죠.”
나는 비몽사몽한 와중,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를 들었다.
“그런데, 만약 일주일이 지나도 숲을 못 벗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전명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또 누가 팔을 뜯길 거죠?”
굴 안쪽에 침묵이 맴돌았다.
‘어차피 사흘 후에··· 선인들이 나타나서 당신들을 납치해 갈 거니까 상관은 없을 거다만···.’
회귀에 대해서 털어놓을 게 아닌 이상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때였다.
상당히 신경이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서 대리 잘 자고 있죠?”
“네에··· 완전 기절하셨어요.”
“서 대리, 혹시 일어났으면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일어나 봐요.”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전명훈은 내가 자는 걸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입구로들 와 보시죠.”
“예? 그냥 여기서 얘기하면···.”
“아, 와 보라고요.”
전명훈은 결국 동굴 바깥 입구로 다른 이들을 끌고 나갔다.
얼마 후, 입구 쪽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동시에 전명훈을 질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 과장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서 대리님은 자기 팔을 희생해서 저렇게 되셨는데···.”
“으음. 전 과장. 그건 나도 좋게 볼 수가 없겠군.”
“으으음···.”
동굴 바깥에서, 전명훈이 목청을 높였다.
“아니, 그럼 다들 일주일 후에는 누가 자기 팔, 다리를 괴물 여우한테 뜯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오 차장님, 차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이게 합리적이라고 봅니다만.”
“···모르겠군. 그리고, 서 대리는 유능하네. 약초도 많이 알고, 먹을 것도 알고···.”
“그럼 일주일 동안 최대한 서은현한테 최대한 배운 다음에···.”
동굴 바깥이라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으나,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기왕 내가 장애인이 됐으니, 내 팔다리를 잘라서 일주일마다 여우한테 바치자는 건가.’
어차피 일어날 일은 없지만, 기분이 좀 더럽다.
굉장히, 굉장히 많이.
‘죽일까.’
한 팔만 있어도, 내가 지난 생에서 50년 동안 배워온 ‘폭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외팔로도 전명훈 같은, 아직 현대에서 제대로 벗어나지도 못한 문명인은 손쉽게 죽일 수 있다.
‘···아니. 아니다.’
이틀 후 우리를 발견할 수도자들은 ‘우리’를 발견한 게 아니다.
‘재능있는 존재’를 발견해서 왔다고 했었다.
‘오현석 차장, 강민희 대리, 그리고 전명훈 과장. 이 셋의 자질에 놀라서 왔다고 했지.’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들이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줄까? 아예 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려?’
어차피 선인들은 사지가 토막 나 있던 지난 생에도 우리를 찾아왔다.
녀석의 사지 정도는 부러뜨려 놔도 찾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아마 공포 때문에 머리와 감정이 마비된 거겠지. 다들 원래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냥 상황이 너무 급작스럽고 말도 안 될 뿐이다.
그리고 나중에 김 부장에게 의지하려면, 지금 너무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겠지···.’
오히려 보호받거나, 동정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게 좋다.
또한 김 부장 역시 저 모의에 동참한다면, 훗날 죄책감 때문에라도 나를 더 챙겨 줄 터.
‘오히려 좋지. 어차피 사흘째 되는 날 모든 게 해결될 테니.’
앞으로 이틀 후면 전명훈, 오현석, 강민희는 평생을 안 볼 것이다.
사흘 후에는 오혜서와 김연 역시 떨어지고, 나와 김영훈 부장은 괴인의 도움을 받아 등선향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나는 얌전히 계속 바닥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다.
얼마 후, 무언가 더러운 합의를 본 것인지 어두운 표정의 인원들이 굴 안으로 들어왔다.
“이보게, 서 대리. 괜찮나? 일어나 보게.”
전명훈이 자는 시늉을 하던 나를 굳이 흔들어 깨웠다.
“하하, 서 대리. 그동안 미안했네. 자네가 그 정도로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
“···.”
“앞으로, 잘 부탁함세.”
전명훈은 전에 다시 없던 미소로 나를 쳐다보며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나는 주변 인물들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어둡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어떻게 세 치 혀로 설득시켰나 보군.’
순간 짜증이 뻗쳐, 나를 껴안은 녀석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릴까를 고민해 보기도 했다.
‘참자. 후, 참는 거다.’
“···네. 어려운 상황에 다 같이 살아 나가야죠.”
“하하, 그래.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자네가 어제 따온 열매.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나?”
“···.”
이 새끼, 이래서 괜히 자고 있는 사람 깨운 거구나.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원래부터 전 과장님한테는 특별히 가르쳐 드리려고 했습니다.”
“핫, 정말 고맙네! 고마워!”
“숲에서 살아남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 가르쳐 드릴 테니까요.”
난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그래, 이깟 지식이야 실컷 알려 주마.
어차피 수도선파에 들어간 이후에는 평생 쓸 일 없는 지식이겠지만.
***
“전명훈 씨. 그 열매 아니라고 몇 번을 알려드렸습니까. 제 말에 집중 안 하시죠?”
“아니, 분명···.”
“꼭지가 갈라진 건 다른 열매라고요. 이 열매는 먹으면 뒈져요. 아시겠어요?”
“···.”
전명훈에게 약초와 식용 열매를 가르쳐 주며, 나는 이제 더 이상 녀석을 과장이라고 불러 주진 않았다.
녀석은 내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입가를 씰룩이며 약초들을 배우고 있었다.
‘새삼 저거 배워 봤자 저급 약초들이라 수도선파의 제자가 되면 쓸모도 없을 텐데.’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분통이 터지려나.
“아니, 전명훈 씨. 제 말 못 알아들어요? 제가 지금 설명을 몇 번이나 했는데. 그거 집중력에 문제 있는 거예요.”
“···알겠···네.”
전명훈의 얼굴은 산딸기처럼 시뻘개져 있었다.
입사 초기, 전명훈은 내가 녀석을 갈구던 것과 똑같은 형태로 갈굼 당하고 있었다.
아마 일주일 동안 최대한 지식을 빼먹을 생각으로 꾹 참고 있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틀 후에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란다.
“자 봐요. 이건 초록잎어귀라는 건데. 씹으면 독특한 향을 내뿜어요. 이빨 닦는 데도 쓸 수 있고, 벌레 쫓는 효능도 있어요.”
“초록잎어귀, 초록잎어귀···.”
“흠, 그런데 한국에서는 한 번도 못 들어본 것들인데···.”
오현석 차장은 조금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조금 전문적인 풀들이고, 국내 종이 아니라 잘 모르실 겁니다.”
물론 당연히 지구에는 없다.
나도 이 세계에서 배운 약초 지식으로 써먹는 거니까.
하지만 오현석 차장 역시 전문가는 아니었기에 대강 믿는 듯했다.
“그렇구만. 계속 알려 주게.”
“자, 이건 푸른아기손맥이라고 부르는데. 청혈초라고도 합니다. 아, 전명훈 씨. 제 말 지금 안 듣죠?”
“···미안, 하군.”
나는 전명훈에게 눈에 보일 정도로 꼽을 주며 계속해서 약초 수업을 계속해 갔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동굴 앞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머리가 두 개인 커다란 붉은 뱀을 마주해야 했다.
“히, 히이익···.”
“흐으으···.”
다른 이들은 공포에 떨며 동굴 안쪽에서 나뭇가지 같은 걸 들었고,
나는 조심스레 뱀에게 말을 걸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리고, 뱀이 말했다.
[영역의 주인이 독특한 향기를 품은 인족을 맛보셨다 하셨다.]
여우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겐 뱀 역시 상당히 두려운 존재였다.
물론, 여우에 비하면 정말 트라우마가 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물론 너희는 영역의 주인께 제물을 바치고 칠 주야간의 거주를 허락받았으니. 그 기간 동안은 건드리지 아니하겠다. 하지만···.]
뱀이 두 개의 머리로 입맛을 다셨다.
[너희의 피 맛을 조금만이라도 보게 해 준다면, 칠 주야가 지나도 딱히 너희를 건드리진 않으마.]
내 팔을 그대로 뜯어먹은 여우와 달리, 뱀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
심지어 지난 생에는 여우에게 거주권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머리 둘의 이 뱀은 그냥 와서 오 차장의 몸에 이를 박아넣고 피를 빨고 가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우리 허락을 받고 피를 조금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상관없겠지.’
우리의 몸은 현대인답게 온갖 콜레스테롤과 지방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 덕인지, 지난 삶에서도 뱀은 오 차장의 피를 맛 본 후 맛이 없다고 그대로 가 버렸었다.
“얼만큼의 피를 원하시는지요?”
[한 줌. 한 줌의 피만 다오. 그리하면 물러가 주마.]
나는 씨익 웃으며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전명훈 씨. 이분께 피 좀 드리시죠.”
“뭐, 뭐?”
“저처럼 팔을 희생하라는 것도 아니고, 피 한 줌 정도만 달라 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정도는 지혈도 금방 됩니다.”
“이, 이···.”
“아, 전명훈 씨. 혹시 약초 지식 필요 없으십니까?”
“···알았다.”
전명훈은 시뻘개진 얼굴로, 근처에 만들어 놓은 날카로운 돌칼로 본인의 손을 그었다.
뚝, 뚝···.
뱀은 화색을 띈 채 전명훈의 피를 받아먹었고.
얼마 후.
[피에 불순물이 많군. 심지어 독까지 들어있어. 끔찍한 맛이군···. 내가 먹어 본 그 어떤 인족의 피보다 맛이 없다.]
뱀은 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콜레스테롤과 니코틴에 쩔은 21세기 직장인의 피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피를 맛보게 해 줬으니, 물러가겠다.]
뱀이 물러간 후, 나는 전명훈의 상처에 지혈초를 발라 주었다.
전명훈은 상당히 짜증이 나고, 뱀에게 핥아질 때 느꼈던 기분이 더러운지.
굉장히 불쾌한 얼굴이었다.
“서은현 씨. 내가 은현 씨한테 입사 초기에 많이 괴롭힌 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금 같은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럼 뭐 어떻게 합니까. 여성 분들한테 하기도 그렇고. 부장님 차장님 등 나이 있으신 분들 피 뽑기도 조금 그런데.”
“피 한 줌 정도는 자네가···.”
“···전 어제 팔이 잘려서, 피가 조금 모자란 상태입니다. 피 한 줌도 제겐 큰일이에요.”
“크윽···.”
전명훈은 입술을 짓씹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웃긴 놈 같으니. 자기는 나를 일주일 후에 여우한테 팔아치워 버릴 계획이면서.’
내가 저를 희생 제물 삼으니 괜스레 분노하는 것이다.
어차피 이 녀석은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
‘뭐, 내일부터는 다시 볼일 없을 테니···.’
나는 그 전에 최대한 굴려먹으며 뽕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전명훈을 한참 굴리기 시작했다.
***
그렇게, 우리가 이 숲에 떨어진 지 사흘이 되었다.
후웅, 후웅···.
오늘은 새벽부터 바람이 거셌다.
찌릿, 찌릿···.
동시에, 공기가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아침 일찍부터 전명훈을 깨웠다.
“전명훈 씨, 아침에 약초 좀 뜯으러 가 봅시다.”
“아침부터···.”
“아, 빨리요.”
“···.”
나는 전명훈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얼마 후.
“오, 심 봤다!”
“이, 이거 좋은 약초인가?”
“예, 뭐 그렇죠.”
“확실히, 삼을 닮긴 했어···.”
전명훈은 눈앞의 산삼을 닮은 풀을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눈앞의 삼은 황주삼이라는 삼의 종류로.
사실 그렇게 희귀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삼의 크기.
천지영기를 가득 머금은 등선향이라서 그런지, 본래 새끼손가락만 하던 황주삼은 내 팔뚝처럼 굵어져 있었다.
“괴, 굉장히 굵은데. 이거, 그 산삼 맞나?”
“예, 뭐. 맞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찾아보죠.”
“그, 그러지.”
전명훈도 산삼을 찾는다고 생각하며 더욱더 열심히 나를 따라다녔다.
그 결과, 황주삼은 두, 세 군데에서 몇 뿌리를 더 뽑아낼 수 있었다.
“하하하, 어, 엄청나군. 산삼을 이렇게 많이 캐도 되는 건가?”
“···.”
전명훈은 희열을 느끼는 듯했지만,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 너는 그런 거 먹을 일 없다.’
심지어 전명훈은 자기 손으로 캔 저 황주삼들도 못 먹을 거다.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황주삼은, 범인용 저급 약초였으니까.
‘물론 무림인들에게는 내공 증진용으로 쓰이기에··· 나중에 김 부장님이나 드려야겠군.’
“자, 삼은 나중에 드셔 보시고. 일단 여기 넣으시죠.”
난 내 옷을 찢어 만든 주머니를 건넸다. 전명훈은 조심스레 삼들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 그럼 돌아가죠.”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다.
나는 동굴로 돌아가, 전명훈에게 불을 피우게 시키고는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콰광! 콰과광!
순간 번쩍하더니, 하늘에서 뭔가가 부딪혔다.
검은빛과 황금빛, 그리고 새하얀 빛이 부딪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커헉! 끄아악!”
갑자기 전명훈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아악, 아아악!”
강민희 대리 역시 자리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비명은 귀곡성이 되어 주변을 울렸다.
또한 오현석 차장 역시 심장을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때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파아앗!
우리가 있는 동굴 위로, 세 개의 빛 덩어리가 날아왔다.
[허어, 놀랍군. 귀찮은 놈들과 부딪히다 이런 원석들을 발견할 줄이야.]
[누가 할 소리. 꺼져라, 벽호. 이 녀석들은 모두 내 것이다.]
[양심이 없는 소리를 하는군. 허곽.]
빛 덩이 속에서는 각각 황금빛 장포의 장년인,
남성인지 여성인지 헷갈리는 흑색 마의인.
그리고 청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걸어 나왔다.
“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김 부장이 두려운 듯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 부장을 흘긋 쳐다본 후 무시해 버렸다.
[영근이 없군.]
[범인이야.]
[내 법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녀석이군.]
그들의 시선이 우리 일곱을 차례로 흝었다.
[영근이 있는 건 저 셋인가.]
[그나저나 놀라운데. 어떻게 수련도 안 한 범인들이 등선향에 있는 건지···.]
[크크, 그 여우 녀석한테 뜯긴 녀석도 있는 것 같은데. 뜯긴 자국을 보아하니 스스로 바쳤군. 범인이지만 기개가 있구나.]
쿠웅!
청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발을 구르자, 희미한 청록색 빛이 물결치며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동시에, 내 몸이 그 빛에 닿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늘색 빛이 돌며 내 팔이 다시 자라난 것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나는 황송하다는 듯이 거한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거한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수도자도 아니고, 고작해야 범인의 정혈 정도는 회복하기가 굉장히 쉬우니 너무 그럴 건 없다. 그나저나···.]
까딱
청색 갑옷의 거한이 허공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와 함께 내 몸은 뒤로 밀려났고,
전명훈, 오 차장, 강 대리의 몸이 앞으로 끌려왔다.
[이 셋이 영근을 가졌으니, 셋 중에 알아볼까?]
황금빛 장포를 입은 장년인이 앞으로 나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 위로 황금빛 검이 떠올랐다.
우우웅!
파지직!
동시에 황금빛 번개가 하늘을 울렸고, 전명훈이 다시금 바닥으로 쓰러지며 피를 토했다.
[역시··· 놀랍군! 천상금뢰지체(天上金雷之體)야···!]
[비켜, 내 차례다.]
여인인지 사내인지 알 수 없는 흑색 마의인이 황금 장포의 장년인을 밀치며, 풍에서 흑색의 비파를 꺼내 들었다.
퉁―
비파 현을 퉁기자, 강민희 대리가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녀의 비명은 다시금 귀곡성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흑색 마의인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귀도음화선근(鬼導陰化仙根)···! 그게 실제로 있는 거였다니! 아아아···.]
[흐흐, 나도 내가 느꼈던 게 거짓이 아니리라 믿는다.]
청색 갑옷의 거한이 흑색 마의인을 지나쳐, 오현석 차장에게 다가갔다.
“뭐, 뭡니까.”
오 차장은 두려운 듯했으나, 청갑 거한은 의외로 가장 멀쩡하게 오 차장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문성체(一紊聖體)! 이, 이게 존재할 수 있는 육신이었나! 마, 말도 안 되는···.]
얼마 후, 충격에 빠진 듯한 셋은 잠시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하더니, 우리 쪽의 셋에게 물어보았다.
[자네들, 수선(修仙)에 뜻을 둬 볼 생각이 없는가?]
황금빛 장포의 장년인이 전명훈에게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자네들은 한 명 한 명이 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재(才)를 가지고 있어. 그 재능을 썩힌다는 건 있을 수가 없네.]
흑색의 마의인이 강민희 대리를 끈적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영생불사! 천지를 뒤집어엎을 힘! 막대한 부와 명예! 모든 걸 가지고 싶지 않나? 내 장담하지. 나를 따라오면 자네들은 100년 안에 모든 걸 얻게 될 걸세.]
청갑의 거한이 오현석 차장에게 대놓고 다가가 그의 몸을 주무르며 말했다.
[나는 금신천뢰문(金神天雷門)의 태상문주, 금벽호라 하네. 자네들 셋 다 우리 금신천뢰문에 입문하는 게 어떤가?]
[흥, 욕심도 많기는! 우리 흑색귀골곡(黑色鬼骨谷)에 입곡하면 없는 속성 공법이 없다네. 본인은 곡(谷)의 원로원 원주 백골귀마라고 합세. 자네들 모두 본 곡에 입곡하면 최대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 테지.]
[뭐, 난 저 둘은 굳이 필요 없다. 자네만 오게, 일문성체. 창천개벽문(蒼天開闢門)의 개파 사조, 이 창호자가 직전 제자로 받아들여 잘 가르쳐 주지. 원한다면 창천개벽문을 물려줄 의향도 있다네. 아, 나머지 둘도 원하면 오게나. 방향성은 다르지만 막대한 재(才)를 가졌으니, 오면 어쨌든 직전 제자로 받아 주지.]
세 수도자는 말로는 셋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는 듯했으나.
실상은 반강제로 협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청갑을 입은 창호자란 거한은 아예 오현석 차장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잡고 있었고.
백골귀마란 중성적 마의인은 강민희 대리와 눈을 마주치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강민희 대리는 점차 눈빛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금벽호란 이는 뭔가 보이지 않는 압박감으로 전명훈을 압박하며,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면 죽일 것 같은 기색을 쏘아내고 있었다.
얼마 후, 전명훈, 오현석 차장, 강민희 대리는 반강제로 세 수도선파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하하, 본문에 온 것을 환영한다!]
[본곡의 원로원이 너를 잘 보듬어 줄 것이다.]
[제자야, 가자.]
세 수도자는 세 사람을 데리고 날아오르려는 기색이었다.
그때쯤 정신없이 상황을 보던 김 부장이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달려나갔다.
“자, 잠깐! 이보시오! 우, 우리를 혹시 이 숲에서 빼내 주실 수 있으시오? 우, 우리는 이곳에 있다가는 전부 죽을 겁니다!”
[흠, 범인이라서 그런가, 걱정이 많군. 그 여우 놈 때문에 걱정인가? 걱정하지 말라.]
청갑 거한, 창호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면서 등선향의 모든 요괴와 마물을 전부 때려잡았다! 이제 그 여우 놈도 잡으러 갈 테고, 향후 10년간 등선향은 안전할 게다!]
“아, 아니··· 이, 이보시게! 전 과장! 오 차장! 강 대리! 뭐라고 말 좀 해 보게! 우리는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도 모르네!”
그러나 정작 전명훈은 금벽호가 금색 호리병을 꺼내서 포O몬처럼 안에 집어넣은 상태였고.
강민희 대리는 백골귀마에게 홀렸는지 완전히 맛이 간 얼굴이었으며.
창호자는 오현석 차장이 무어라 말을 해도 껄껄거릴 뿐, 별로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50년 전에도 그랬지.’
저 셋은 안하무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리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 대도, 우리가 벌레인 마냥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을 갔었다.
나는 목 아프게 세 수도자를 부르는 것보다는, 다시 회복된 팔을 만져 보았다.
‘그래도, 팔을 다시 만들어 준 게 어디인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일단 창호자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김 부장은 멀어져 가는 세 개의 빛무리를 보며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허억··· 헉···젠장할···.”
결국, 김 부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고··· 이 숲에서···.”
이제 남은 사람은 넷.
나, 김 부장, 오혜서 대리, 김연 주임.
‘아마 내일이면 오 대리랑 김 주임도 납치(?)당할 테니까···.’
이제 김 부장과 함께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
김 부장은 잠시 침통해 있었으나, 내 팔이 회복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정말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에 그 창호자란 사람이, 여우도 잡아 준다고 했으니. 살려고만 한다면 충분히 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후우··· 그렇군···.”
“서 대리님 팔이 뜯겼을 때는 정말 정신 나가는 줄 알았어요···. 아, 사실 지금도 동료가 셋이나 사라져서 조금, 아니 많이, 정말 많이 당황스럽긴 한데···.”
“대리님,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는 동료를 잃고, 목숨을 보장받은 이 기이한 상황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며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늘에 유성이 지나가듯, 새하얀 빛이 또다시 하늘을 가로질렀다.
“어, 어엇···.”
그것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빛 이후로, 수 개. 수십 개의 빛이 마치 유성우처럼 하늘을 건너 날아갔다.
모두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가 날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저 방향에 뭐라도 있는 건가···.”
김 부장은 당황한 듯이 그 방향을 쳐다보았고, 나는 오늘 먹을 나무열매를 모아, 모닥불을 피워 열매들을 굽기 시작했다.
이제 내일이면, 오 대리와 김 주임과도 작별이다.
***
쏴아아아아―
다음 날이 되었다.
이날은 특이하게도 비가 내렸다.
하늘 곳곳에 먹구름이 끼고, 천둥이 친다.
“···이래서야 열매 구하러 가기도 그렇겠네요. 어떻게 할까요?”
김 주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오 대리님도 상태가 안 좋으신데.”
말 그대로였다.
오혜서 대리는 열이 잔뜩 나서 드러누워 있었으며,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오늘도 어제 같은 기적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걸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 물론 서 대리님 팔이 다시 돌아온 건 정말··· 정말 기적 같은 일이긴 한데···.”
나는 피식 웃으며 김 주임에게 말했다.
“혹시 압니까. 누가 나타나서 오 대리님 병도 전부 낫게 해 주실는지요.”
나는 김 주임, 그리고 김 부장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점심때가 되었다.
콰르릉!
뇌성이 울렸고.
쿨럭! 쿨럭!
오 대리의 기침과 열은 점차 심해졌다.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 서 대리님. 이럴 때 필요한 약초라도 있나요? 어, 어떻게 해야···.”
“일단 해열초를 조금 먹여 보죠.”
그때였다.
저벅, 저벅···.
누군가가 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청포를 입고 있는, 잘생긴 중년인이었다.
꽁지머리를 한 중년인의 머리에는 작은 사슴뿔 같은 것이 한 쌍 나 있었다.
[등선향에 범인들이라. 진룡들 경쟁에 개미 허리가 터져 나가는 형국이로군.]
“다, 당신은 누구요!”
김 부장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새로운 인물을 경계했다. 청포 중년인은 씨익 웃으며 여유롭게 자신을 소개했다.
[해룡왕(海龍王), 서휼(瑞鷸). 갑자기 천기에 없던 호풍환우가 일어나기에 그 비틀림의 근원을 좇아왔네만. 그 처자가 호풍환우의 술법을 부리고 있군.]
자신을 서휼이라 소개한 중년인이 오 대리를 가리켰다.
[아니, 술법이라기엔 조금 그런데··· 그래. 호풍환우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인간의 육신으로 저런 막대한 기사를 벌이니 몸이 무리를 받는 게야.]
“호, 호풍환우?”
[그렇네. 호풍환우. 정말 기이하군. 인족. 그것도 범인··· 영근조차 없는 인족 여성이 어찌 이런 광대한 힘을 휘두르는 것인지···. 심지어 의식적으로 휘두르는 것도 아니군. 정말 기이해.]
기이하다라···.
나는 서휼에게 되려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저희야말로 사실 더욱 더 기이합니다. 어제, 세 분의 엄청난 수도자분들께서 각자에게 딱 맞는 제자를 우리 일행 중에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 당신께서 오 대리를 봐 주시러 오셨습니다.
왜 당신들처럼 대단한 분들께서 저희에게 딱딱 맞춰서 와 주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서휼은 멀뚱히 있는 듯싶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러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가 자네들 동료 중에 있었고. 그 자질에 딱 맞춘 스승들이 자네 동료를 딱 맞춰서 데려갔는데. 오늘은 내가 저 처자에게 또 딱 맞춰서 나타난 게 기이하단 건가?]
서휼은 재미있다는 듯이 내게 물어왔다.
[이보게 범인 친구. 이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대략 듣기로, 등선향이라는 지명인 것 같습니다만···.”
[등선향. 등선향이라고도 하고, 비승도(飛昇途)라고 하여, 상계(上界)로 비승할 수 있는 통로로 향하는 길목일세. 그리고 몇달 후 비승도 너머, 승천문(昇天門)이라고도 불리는 공간 균열이 입을 여는 시기일세.
천 년에 한 번 있는 시기로, 이 시기에는 주변 공간이 불안정해지고, 비승도 근처로 수많은 수사와 영물들이 싸그리 몰려든다네. 상계로 승천하기 위해서지. 이 계면(界面)에 존재하는 고위 수사란 수사는 싸그리 몰려들었을 테니.
확률상 자네들한테 딱 맞춘 스승들이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저 처자 역시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동급 수사들이나 영물들이 발견했을 확률이 크지.]
“그렇습니까···.”
나는 우리를 이렇게 빠르게 뿔뿔이 흩어 놓는 것에, 우리를 이 세계로 날려 보낸 어떤 존재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이라기보단, 그냥 확률의 문제였던 듯싶었다.
“음, 그런데 내 동료들을 그 수사란 이들이 데리고 갔는데···.”
김 부장은 내가 서휼과 말을 트는 것을 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 역시 서휼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각기 자기 문파에 가입시키겠다거나, 문파를 물려주겠다고 하던데, 그 상계···란 곳으로 비승을 하면, 어찌 자기 문파에 가입을 시킨단 겁니까?”
[흠, 범인이라 수도자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군. 수도자들의 선술 중에는 커다란 물건을 축소시켜서 보관하는 기술도 있지.]
이어진 서휼의 말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아마 그들 모두 자기 문파를 본인의 저물법기에 보관하고 있을 걸세. 문파 자체를 승천문이 열린 이때에 상계로 함께 비승시키려는 야망인게지. 아, 사실 나도 우리 해룡족(海龍族)의 성(城) 하나를 떼어서 이 저물법기에 넣어놨다네. 성안에는 천팔백여 명의 우리 해룡족원들이 잠들어 있고.]
그 가공할 말에, 나와 김 부장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스윽···.
그때, 서휼은 오 대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붉게 달아오른 채 가쁘게 숨 쉬던 오 대리의 상태가 빠르게 안정되었다.
[···기이하군, 기이해. 하지만, 해룡족원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마어마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스윽···.
말을 하며 서휼은 오 대리를 안아 들었다. 김 부장은 당황해서 그를 말리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반탄력에 튕겨 나가 버렸다.
“어이쿠!”
[이 처자는 본왕(本王)의 피를 주어 혈족으로 받아들이지. 아마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야. 그리고 등선향에 무시무시한 수사들이 많이 지나갈 터이니 노파심에 하는 말이네만···.]
파앗!
서휼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졌다.
“컥! 커헉··· 어억!”
“끄···으윽···!”
나와 김 부장, 서휼에게 질문을 한 우리 둘은 숨쉬기조차 힘든 압박감에 주저앉아 버렸다.
[함부로 고위급 수사에게 질문을 하지 말게. 본왕은 성격이 좋아 대답해 주었으나, 성격이 더러운 일부 수사들은 자네들이 질문한 것만으로도 벌레처럼 그대들을 터트려 죽일 수도 있으니까···.]
말을 마친 서휼은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번쩍!
우르릉!
빛과 함께 뇌성벽력이 울렸고, 얼마 후 우리는 저 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의 청룡(靑龍)을 볼 수 있었다.
쏴아아아―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다.
김 주임은 허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전부 납치당했네요. 이젠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산사태에, 갑자기 다른 세계라 하고, 신선들이니, 용이니 하는 것들이 직장 동료들을 납치해가고··· 하, 하하···.”
그녀는 울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김영훈 부장 역시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사람 사는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고. 신선이니 용이니 하는 것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는··· 제길.”
“···.”
나는 얌전히 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때, 갑자기 김연 주임이 내 팔을 붙잡았다.
“대리님, 은현 대리님은 갑자기 안 사라지실 거죠?”
“···.”
“대, 대리님도 갑자기 납치당하시면 안 돼요. 대리님까지 납치당하시면, 이 숲에서 살 자신이 없어요···.”
나는 씁쓸하게 웃어 주었다.
오늘 저녁.
마지막으로, 김연 주임이 괴인에게 납치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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