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에필로그(3) - 세바스찬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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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에필로그(3) - 세바스찬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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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에필로그(3) - 세바스찬의 저녁
2023.08.17.
세바스찬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는 아늑한 벽난로 타는 소리가 톡톡 튀고 있었다.
벽난로와 가까운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고 있던 올리비아가 물었다.
“애들은?”
“잠드셨습니다.”
“고생했어.”
“무얼요. 제 기쁨이지요.”
세바스찬이 차분하게 고개를 숙이자, 올리비아는 발긋한 볼을 한 채 방싯 웃었다.
“세바스찬도 오랜만에 한잔할까?”
“한잔만이라면 받겠습니다.”
“여전히 깐깐하다니까.”
그녀가 웃으면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크라이어가 빨랐다.
조각된 둥글고 큰 얼음이 담긴 글라스에 옅은 주홍빛의 위스키를 담은 그가 잔을 건넸다.
“한잔으로 아쉬울 거야. 그거 아버지의 비밀 창고에서 크라이어가 빼 온 거거든.”
어릴 적과 변함없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은 올리비아가 세바스찬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그에 세바스찬도 잔을 살짝 올리며 답했다.
“그것참, 오늘 폐하의 차와 술 창고가 여기저기 비었겠군요.”
간단히 잔을 비운 세바스찬의 주름진 눈가가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서 더 깊게 주름졌다.
“술 외에 딴 걸 먹으면 배가 부르단 말이야.”
“술로 배를 채운다는 발상은 좀 버려라.”
“뭐? 술 마실 때 술 외에 다른 것으로 배를 채우라는 거야?”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아웅다웅하는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보던 세바스찬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에 크라이어는 기어이 올리비아의 입에 쓴맛이 진한 초콜릿을 하나 물린 후에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지요.”
세바스찬은 문을 나서면서 챙겨올 다과와 안주를 정리했다.
물론 올리비아의 입맛에 맞아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부군인 크라이어가 한 손으로 넣어주기 편한 쪽이 낫겠지.
황녀 전하께서 스스로 뭔가 드실 리는 없을 테니.
차분했던 그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바스찬의 빈자리에 여우 눈이 쑥 솟아났다.
“아이고 피곤해라.”
앓는 소리를 낸 아이작은 곧바로 앙브흐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똑…….
그가 노크를 다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앙브흐가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늦었어요!”
앙브흐를 안정적으로 품에 안은 아이작은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답했다.
“좀 봐주십시오. 오늘 이만저만 험난한 게 아니었다고요.”
“험난했다고요? 슈가는요? 설마 다치진 않았죠?”
“슈가 녀석만 걱정하는 거면 섭섭합니다만.”
능청스러운 아이작의 말에 앙브흐는 천진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당연히 당신한테도 물어본 거죠.”
“하여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뭘 새삼스럽게. 그보다 정말 슈가는 같이 안 왔어요?”
“그 녀석은 폐하께 보고하고 올 겁니다.”
아이작의 목에서 팔을 풀어낸 앙브흐는 그와 팔짱을 끼며 발랄하게 말했다.
“자! 그럼 오늘 불태우러 갑시다!”
그런 그녀와 발을 맞추면서도 아이작은 예감했다.
앙브흐가 원하는 만큼 활활 불타는 밤은 절대 될 수 없으리라.
오늘 그가 구르다 온 현장의 일은 절대 단발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황녀 전하께서 적당히 자리를 파하시겠지.
그보다 그건 대체……. 설마 또 고대신이니 뭐니 하는 게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건 분명 인간이 꾸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이작은 한숨을 삼키며 머리를 흔들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쩌다 보니 이렇게 제국을 위해 몸을 갈아 일하게 되었지만, 그런 건 내가 머리 굴려도 소용없는 문제니.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똑똑.
저녁을 지나, 밤이 깊어가는 시각인데도 경쾌하기 그지없는 노크 소리는 듣기만 해도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올리비아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얼른 들어와!”
“전하!”
문이 열리기 무섭게 아이작을 내버려 둔 채 앙브흐가 한달음에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섰다.
“먼저 시작하신 거예요?”
“한 잔만?”
“아이, 이제 같이 마셔요.”
그리 말하는 앙브흐의 앞에 어느새 아이작이 채운 잔을 놓아주었고, 둘은 곧 주거니 받거니 향이 좋은 위스키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앙브흐의 잔이 전부 비고, 올리비아의 잔이 반쯤 비었을 무렵.
“맛이라도 좀 보시지요.”
세바스찬이 결코 간단하다고 말할 수 없는 안주를 가지고 나타났다.
얇게 저민 고기부터 치즈, 한입 크기로 자른 과일, 초콜릿과 달콤한 쿠키에 캐러멜까지.
그야말로 이 중에 네가 원하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 라는 느낌의 구성에 크라이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바스찬이 손수 집어 건넨 치즈를 받아 들고 오물거린 올리비아가 캐러멜을 앙브흐에게 건넸다.
“이거 괜찮더라. 많이 달지 않아.”
“어머, 그러네요. 첫맛이 상당히 부드러워요.”
세바스찬이 짧게 고개를 숙이며 한쪽으로 물러나려고 하자 크라이어가 그를 향해 눈짓했다.
그에 세바스찬은 크라이어, 아이작과 나란히 서서 건넨 잔을 받았다.
“저는 한 잔만 마시려고 했습니다만.”
“어떤가. 오늘 일과는 이대로 끝내도록 하지.”
크라이어의 말에 세바스찬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잔을 쥐고 가볍게 돌렸다.
그렇게 올리비아와 앙브흐가 사소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소리와 간간이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만 울리던 때.
-똑똑.
“슈가인가 본데요?”
“들어와.”
앙브흐의 말대로 열린 문 뒤로 슈가가 나타났다.
“슈가. 오랜만에 보네.”
“네. 전하. 오랜만이죠.”
훤칠하게 자란 슈가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올리비아는 새삼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내 허리에서 살랑거리던 머리가 말이야 어느새 훌쩍 커버렸어.”
“너무 어릴 적인데요.”
슈가는 쑥스러워하면서 볼을 긁적였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아이작은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크라이어와의 거리를 바싹 줄인 채 속닥거렸다.
몇 년 전보다 확연히 편해진 모습이었지만, 당사자인 둘은 눈치채지 못했다.
본래 사람이란 가까우면 잘 볼 수 없는 것도 있지 않은가.
“저저 내숭. 저 녀석은 어릴 때만 귀여웠다니까요. 저 모습을 귀족들이 봐야 하는 건데. 밖에서 슈가를 부르는 별명도 있지 않습니까.”
“칼날의 르위르?”
“그것도 들을 때마다 웃기긴 하지만, 뭐. 밖에서 저 녀석 하는 걸 보면 이해는 갑니다.”
크라이어는 아이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타렌가의 그림자라며, 당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겁을 내지 않던가.
당연히 크라이어의 그런 시선을 기민하게 느낀 아이작은 일부러 더 그를 외면하며 세바스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희 애들이 이만저만 시끄러운 게 아니었을 텐데. 늘 죄송합니다. 세바스찬.”
“아닙니다. 활기차서 더 좋지요.”
아이작이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는데, 슈가와 짧은 해후를 마친 올리비아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손짓했다.
“그래서 갔던 일은?”
굳이 보고를 들어야겠다거나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하자는 어투는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 갔다 왔으니 그 이야기나 좀 해보라는 의미였지만, 이어진 아이작의 답에 다시 잔을 들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닌 거 같습니다.”
“단발성이 아니라고?”
“네. 폭동이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작은 소란이라고 하기에는 본격적이더군요.”
“흐음.”
올리비아가 턱을 톡톡 두드리자, 슈가도 입을 열었다.
“그들이 준비했다기에는 지나치게 무기가 좋아서 그쪽도 좀 파봤습니다만.”
“배후가 있었어?”
“네. 있는 건 확실합니다. 다만 아직 특정하기에는 단서를 더 모아야 해서요. 그렇지만 추측하기로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브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알 것 같아요! 농기구가 아니라 무기에 사용되는 철 수입량을 야금야금 늘린 나라가 있거든요!”
“음. 아마도 정답이겠지.”
“네. 그쪽으로 예상합니다.”
올리비아에 이어 슈가도 고개를 끄덕이자 앙브흐는 자축하며 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웠고, 아이작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잔을 전보다 훨씬 적게 채웠다.
“흐으으음.”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타닥타닥 튀는 불티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뭐, 좋아. 심심해서 헛짓거리 꾸미나 본대. 싹 밀어버려.”
너무나도 강경하고 과격한 해결책에 아이작은 잔을 든 채 굳었고, 슈가는 빙긋 웃었으며 앙브흐는 손뼉을 쳤다.
“밀어버리기 전에 제대로 조사해봐야겠지. 그 후에 밀어도 늦지 않다.”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손에서 잔을 빼내며 덧붙이자, 제일 먼저 슈가가 반응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도 나눴으니 슬슬 빠져야 할 때인가.
슈가는 그간 아이작과 함께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듯 기척 없이 움직여 슬그머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본 아이작 역시 앙브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다음의 즐거움을 기약하고 이만 가죠.”
그에 앙브흐는 아쉽다는 표정을 했지만, 무언가 속삭이는 크라이어와 그에 미소 짓는 올리비아를 보고 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이 방을 나섰지만,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와 여전히 실랑이 중이었다.
“그만 마시라니. 아직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걸.”
병의 반이 빈 위스키를 가리키는 올리비아의 손가락을 잡아 내린 크라이어가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뜨거움 뺨을 쓸었다.
“마구 밀어버리자는 소릴 하는 걸 보니 충분히 마셨다.”
“밀어버릴 놈들은 밀어야지! 아니, 그보다.”
올리비아는 그의 목을 바짝 끌어당겼고, 서로의 콧날이 부딪쳤다.
“아직 모자란 데. 당신이 채워 주는 거야?
“거기까지만 마셔준다면.”
“좋아, 그럼 그렇게 합의할까.”
피어는 꽃처럼 눈가를 휘며 웃는 올리비아의 은은한 장미 향을 들이키며 크라이어는 그녀의 눈가에 기꺼이 입을 맞췄다.
그 사이 세바스찬도 조용히 뒷걸음질로 방을 나섰다.
-탁.
문이 완전히 닫히고, 안쪽에서 어른거리던 빛과 위스키 향이 사라지자 세바스찬은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 밤에서 새벽으로 가는 시간이라 교대하는 이들이 눈에 띄었고, 인사를 나눈 그는 잠시 아이 셋이 나란히 잠든 황손의 방에 잠깐 들렀다.
이리저리 성향대로 자는 아이들의 잠자리를 정돈한 후, 그제야 세바스찬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혀를 살짝 굴리자 황제 폐하의 비밀 창고에 있던 위스키 향이 은근하게 목까지 데우는 듯했다.
그는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씩 넘기던 그는 곧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종이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가지런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적은 후 펜을 놓았다.
[바라건대, 오늘처럼 모든 날이 따뜻하고 향긋하기를.]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