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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에필로그(2) - 세바스찬의 점심 (145/146)


#145. 에필로그(2) - 세바스찬의 점심
2023.08.14.


황제 궁을 떠나 황손 궁으로 화다닥 달려온 세 아이는 곧바로 슈가를 찾았다.


“삼촌! 슈가 삼촌!”

누구보다 빠르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검은 머리 아이가 외쳤다.


“재미있는 거요!”

뒤이어 도착한 황손과 분홍 머리 소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눈으로 슈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아이들을 앞에 두고, 꼬고 있던 긴 다리를 내리고 앞으로 몸을 숙인 슈가는 신록의 눈동자를 둥글게 휘며 웃었다.


“볼 일은 다 마치셨습니까.”

“네! 오늘은 종일 놀아도 된다고 폐하의 허락을 받았어요!”

“저도요!”

“아, 그럼 저도.”

황손의 말에 남매가 은근슬쩍 수저를 얹으며 앙브흐의 눈치를 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오늘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슈가와 만난 자리다. 그녀 역시 오늘 밤, 오랜 친우들과의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남매가 크게 안심하자 슈가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재미난 놀이를 해볼까요.”

“놀이요? 이야기라고 했잖아요.”

“이야기 겸 놀이죠. 정확히 말하면 놀이를 한 후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 놀이 자체도 재미있지만, 따라오는 이야기는 더 재미있을 거야.”

앙브흐가 거들자 아리송하던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놀이부터!”

황손이 외치자 검은 머리 아이도 같이 외치려다가 멈칫했다.

아이는 손을 힘차게 든 채 갑자기 제 오빠인 분홍 머리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놀이가 설마 술래잡기나 미로 탈출은 아니죠?”

작년 타렌저택에서 세 아이는 미로 탈출과 술래잡기를 벌였고, 결과는 분홍 머리 소년의 압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 그렇지. 그런 놀이라면 너무 재미없어. 내가 그림자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너무 유리하다고.”

분홍 머리 소년의 감흥 없는 목소리에 검은 머리 아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꼈고, 황손도 시무룩해졌다.

소년의 말대로 그런 놀이라면 너무 시시하게 끝나는 탓이다.

한 아이는 풀이 죽고, 한 아이는 화가 났으며, 마지막 소년은 흥미를 잃은 그때.


“그런 평범한 놀이가 아닙니다.”

마치 비밀을 공유하듯 입가에 미소를 띤 슈가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몸짓에 아이들의 기대에 다시 불이 탁 켜졌고,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이고 다음 나올 말을 기다렸다.

앙브흐는 찻잔을 올려 웃음이 터지려는 걸 막았고, 세바스찬의 입매도 한층 더 느슨해졌다.


“지금부터 할 놀이는 ‘찾기’ 놀이입니다.”

“찾기? 숨바꼭질이에요? 그것도 오빠가.”

“조용히 해. 아직 삼촌 말씀 안 끝났잖아.”

“우씨.”

때를 가리지 않고 투덕거리는 남매를 뒤로한 채 황손이 빛나는 눈으로 슈가를 재촉했다.


“평범한 놀이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찾기는 찾되, 뽑은 종이를 가지고, 거기에 적힌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겁니다.”

“찾은 후에는요?”

“찾은 물건과 함께 종이를 공개하면서 왜 그 물건을 찾았는지 이야기하는 거죠. 같은 것이 적혀 있는 종이를 받더라도 완전히 다른 ‘찾기’를 할 수 있으니 재미난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슈가의 말에 앙브흐가 덧붙였다.


“그렇지. 종이에 똑같이 ‘무서워하는 것’이 적혀 있어도 너는 귀신을 고를 테고, 너는…….”

“어머니! 그건 비밀이라니까요!”

분홍 머리 소년이 앙브흐의 말을 다급히 막았고, 검은 머리 아이는 기회를 포착한 것처럼 은근히 앙브흐에게 달라붙었다.

그에 위기감을 느낀 분홍 머리 소년이 외쳤다.


“앞으로 두 달간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네 비밀은 두 달간 안전할 거란다.”

타렌가의 가주다운 정확한 셈에 분홍 머리 소년은 절망과 안심이 뒤섞인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고, 검은 머리 아이는 아쉬움을 삼켰다.


“아 참, 그리고 아쉽게도 저도 일이 있어서요. ‘찾기’에 성공하면 여기 세바스찬에게 돌아오시면 될 겁니다.”

그리 말한 슈가는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 세 장을 꺼냈다.

미리 준비해둔 것 같지만, 사실 아이들 셋이 오기 전 앙브흐와 머리를 맞대고 몇 분 만에 휘릭 적은 것이었다.

접힌 종이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아이들의 설렘과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나만입니다.”

슈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종이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펴 봐도 돼요?”

“그럼요. 다만 찾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에게 비밀입니다.”

아이들은 흘끗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흩어져 제가 쥔 종이를 펼쳐 보았다.

무인도에 간다면 가지고 갈 것 딱 하나.

황손은 제 종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무인도? 무인도라면 사람이 없는 섬이잖아. 으으음. 으음.

작고 동그란 사과같이 붉은 머리통이 기우뚱거리기도 잠시.

황손은 빠르게 문으로 향했고, 거의 동시에 남매도 후다닥 달려갔다.

아이들이 입을 꾹 다물고 사라진 후, 세바스찬은 슈가와 앙브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차 한잔 더 들고 가시지요. 폐하께서 기분이 좋으셨는지 좋은 차를 내리셨습니다.”

“어머나, 당연히 좋죠.”

“저도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있으니까요.”

“밤에는 돌아오는 거지?”

“네. 아이작 형님하고 같이 올 거예요.”

셋은 우당탕거리는 아이들이 없는 여유로운 시간을 풍부하게 퍼지는 차향과 함께 음미했다.

***

-똑, 똑똑똑, 똑똑똑똑.

성마른 노크 소리에 한창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활짝 열리면서 황손이 도도돗 달려와 그녀의 무릎에 답싹 매달렸다.


“어머니!”

“그래. 오늘 문안 인사는 잘 마쳤니?”

“네! 할아버지가 잘했다고 칭찬해주셨어요!”

“그……래. 성공했구나.”

황제가 배꼽 인사로 장난친 것을 알고 있는 올리비아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해 아쉬움을 느끼며 동글동글한 머리를 만져주었다.

아이는 배슬배슬 웃으며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다가 어느새 다가온 아버지를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어?”

“응?”

“아아아!”

“응? 왜 그러니?”

아들이 아버지를 보더니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은 후, 곧 머리를 감싸 쥐자 올리비아는 의아하게 물었지만, 아들은 끙끙 앓기만 했을 뿐.

한동안 볼이 통통한 다섯 살 아이의 얼굴에 온갖 고민이 스쳐 가자, 올리비아는 참지 못하고 아들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무슨 일이야 아들.”

“하나만 이랬어요.”

여전히 알 수 없는 답이 돌아왔지만, 올리비아는 구태여 더 캐묻지 않았다.

아들이 별안간 비장한 얼굴로 손을 척 내밀었기 때문이다.


“저랑 같이 가주세요!”

“그래. 좋아.”

아들이 내민 앙증맞은 손을 잡은 올리비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그래.”

“너무 섭섭해하지는 마시고요!”

표정만큼이나 비장한 아들의 영문 모를 말에도 크라이어는 피식 웃었고, 올리비아도 웃어버렸다.

아들은 어머니의 손을 끌고 문을 나섰고, 두 사람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크라이어는 긴급으로 분류된 서류를 한번 훑은 후 곧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

올리비아는 아들의 손에 끌려 세바스찬 앞에 다다랐다.


“세바스찬! 나 왔어! 이거, 이거 봐줘!”

황손이 내민 접힌 종이를 받은 세바스찬이 안에 적힌 말을 확인한 후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일등이야?”

“네. 그렇습니다.”

“해냈다!”

황손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기뻐하자, 앙브흐가 슬쩍 다가섰다.


“뭐였어요?”

“보시지요.”

“어머나.”

앙브흐의 뺨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리자 올리비아가 종이를 눈으로 가리켰다.


“음, 세바스찬?”

“직접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세바스찬이 건넨 종이에 적힌 건 한 문장이었다.


“무인도에 가지고 갈 것 딱 하나?”

“네에! 저는 어머니랑 갈 거예요! 아, 아 참. 아버지께는 비…….”

황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크라이어가 아이를 훌쩍 들어 올렸다.


“아하하하 아버지!”

까르륵대며 부유감을 만끽한 황손을 내려주며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이래서 섭섭해하지 말라고 했던 거군.”

“아아, 비밀이었는데!”

아들이 목을 움츠리자 크라이어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좋은 선택을 했구나.”

“정말요?”

“그래.”

“아버지만 없는데도요?”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아들의 물음에 올리비아가 답했다.


“네 아버지는 거기 있을 거니까 상관없지. 늘 함께 있으니까.”

크라이어는 무언으로 긍정했고, 황손은 그 나이 또래 아이답게 발끈했다.


“그럼 저도 늘 함께 있을래요!”

“어머나, 내가 크면 불…….”

아들의 순진한 선언에 올리비아는 태연하게 불가능을 입에 담으려 했지만, 크라이어의 손에 막혔다.

두 쌍의 푸른 눈이 동그르르 제 쪽으로 구르자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입에서 손을 떼며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크라이어 덕분에 동심이 지켜진 황손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주 멀리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어떻게 함께해요?”

“그 또한 상관없지.”

크라이어는 아들의 머리를 툭툭 두드린 후, 올리비아의 허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품에 폭 안긴 그녀의 머리 위로 입술을 떨어뜨린 그가 눈가를 길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언제 어디서든 내 황녀님이 부르시는 곳에 바로 내가 있을 테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철벽 방어에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다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어! 맞아! 맞아요! 어머니가 부르시니까 아버지가 갔어요!”

“응?”

“어제 꿈에서 아버지가 이상한 곳에 갇혀서 막 싸우는데, 어머니가 불러서 아버지가 바로…….”

그 후로도 한참 이어진 꿈 이야기에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서로를 향해 눈짓했다.

이거 왠지 익숙한 이야기 아니야?

그렇군. 고대신이 이 대륙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던 그때다.

과연 피는 못 속이나 봐.

볼셰이크의 꿈은 과거나 미래를 넘나든다고 했으니.

눈으로 대화를 나눈 둘은 여전히 재잘대는 아들의 이마를 차례로 쓸어주었다.

아이의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탕!


“혹시 여기 엄마 아들 없나요?”

“아, 뭐냐, 너 여기 있었냐.”

문이 벌컥 열리면서 검은 머리 아이가 구르듯 뛰어 들어왔고, 단 몇 초 차이로 분홍 머리 아이가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이이익! 어디 갔었던 거야!”

“그러는 너는 대체 어딜 그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닌 거냐.”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 둘은 당연하게도 으르렁거렸고, 그러다 동시에 멈칫했다.


“전하? 언제 오셨어요?”

“난 한참 전에 왔지.”

황손이 가슴을 활짝 펴고 의기양양하게 답하자 검은 머리 아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렇게 빨리요? 전하께서는 뭐였는데요?”

“이거.”

그 뒤를 느긋하게 쫓아온 분홍 머리 소년이 황손이 뽑은 종이를 소리 내 읽었다.


“무인도에 가져갈 거 하나? 그래서 전하의 답이…….”

분홍 머리 소년은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보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검은 머리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면 물건 아니에요? 뭘 가지고 오신 거예요?”

“이런 멍청이가 내 동생이라니.”

“왜 또 시비야!”

다시 시작된 남매 전쟁을 상큼하게 무시한 황손이 물었다.


“아, 저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입니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나온 답이 같아서 남매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황손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서로를 찾았던 거구나!”

시원하게 터진 웃음에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남매도 입꼬리를 실룩대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세 아이의 경쾌한 웃음소리에 황제가 내린 차향이 몽실몽실 뒤섞이는 점심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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