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에필로그(1) - 세바스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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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에필로그(1) - 세바스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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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에필로그(1) - 세바스찬의 아침
2023.08.10.
대륙 유일의 제국. 볼셰이크 황실이 다스리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그 중심인 황궁의 하루는 어느 곳보다도 일찍 시작된다.
새벽 근무를 마친 이들과 교대하는 사용인들이 느른해지는 몸을 깨우려 일부러 크게 손을 흔들고, 밤새 빈 그들의 배를 채우는 식당도 정신없이 돌아갔다.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히며, 한 곳에 고여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해진 시기나 규칙 없이 황궁 곳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이들 중 평생을 볼셰이크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단 두 번의 자리 이동만 한 이가 있으니.
세바스찬.
올리비아 황녀가 태어났을 때도 황제의 곁을 지키던 시종장은 황손이 태어나자 그 자리를 내려두기를 희망했다.
황제는 오랜 지기인 그의 결정을 존중했고, 황녀 역시 크게 기꺼워했기에 세바스찬은 황제가 아닌 황손의 곁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난 세월이 햇수로 다섯.
세바스찬의 아침 역시 황궁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찍 시작되었다.
옅은 태양 빛이 새벽을 밀어내는 시각, 몸을 일으킨 세바스찬은 여느 때와 같이 단장을 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단정하게 정돈한 그는 서랍을 열고 안에 있는 작은 수첩을 꺼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반질반질한 가죽 표지를 쓸어 넘기는 손길은 차분했다.
아마 그 수첩을 대대로 썼던 전대의 세바스찬들도 그랬으리라.
일종의 의식처럼 수첩을 한번 쓸어 본 세바스찬은 이윽고 방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전하께서 문안 인사를 가신다고요! 어떻게 되는지 꼭 알려주시기에요!”
그가 가는 걸음걸음마다 사람들의 인사와 웃음이 번졌고, 세바스찬 역시 규칙적인 걸음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에게 일일이 답을 돌려주었다.
대대로 볼셰이크가에서 일했던 세바스찬은 황제를 보필하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누구도 그를 전과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늘 하는 아침 일정으로 황손뿐만이 아니라 황녀, 부마 그리고 황제의 식사와 간식까지 꼼꼼히 챙겨야만 했다.
그의 후임으로 들어간 이는 오 년 간 그 일을 실수 없이 해내고 있으면서도 늘 세바스찬의 확인을 받고 싶어 했다.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황궁, 아니 볼셰이크 가문 전체를 아우르는 이가 있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세바스찬이라고 모두가 입 모아 말할 테니까.
함께 일하는 이들은 모두 세바스찬을 존중했고, 그의 경험에 기댔으며, 그의 혜안을 구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황제가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말한 적도 있다.
‘세바스찬, 황궁에서는 자네가 나보다 입김이 더 센 거 같단 말이지.’
‘그건 사실이군요.’
그리고 세바스찬은 태연하게 농으로 받아쳤고, 황제 역시 크게 웃었던 날이었다.
-달칵.
세바스찬은 황녀가 어릴 적 선물한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바스찬은 황손, 그러니까 현 황제의 손자이자 황녀의 아들의 방에 도착했다.
-똑똑.
견고한 문을 두드리는 손짓은 더없이 정중했다.
하지만 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익숙한 듯 세바스찬이 다시 노크했고, 그제야 안쪽에서 잔뜩 잠에 잠겨 웅얼대는 답이 돌아왔다.
“우응. 세바스……찬.”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연 세바스찬은 커튼이 걷히지 않아 아직 어스름한 방으로 들어섰다.
“전하, 좋은 밤 보내셨습니까.”
“응…… 꿈이 화려했어.”
올해 다섯 살이 된 황손은 확 밝아진 사위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또박또박 답했다.
능숙하게 황손의 잠자리를 정돈한 후, 황손의 아침 단장을 하면서 세바스찬이 입을 열었다.
“오늘 처음으로 황제 폐하께 정식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시지 않습니까.”
“응!”
“기분은 어떠십니까.”
“좋아! 오늘 문안만 잘 드리면 종일 놀아도 된다고 하셨거든!”
‘황제 폐하’와 ‘정식’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붙었는데도 긴장감이라고는 부스러기도 느껴지지 않는 천진한 황손의 말에 세바스찬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어젯밤 꿈에 말이야, 아버지가 검붉게 빛나는 엄청나게 이상한 곳에서 멋지게 싸우다가 갑자기 빛이…….”
황손의 꿈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바스찬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갖춘 복장을 입혔다.
소매 끝에 석류알같이 투명하게 붉은 앙증맞은 커프스까지 채운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황손의 삐쭉 튀어나온 뒷머리를 한번 매만져주었지만, 아마 조금만 지나면 다시 뽁, 하고 튀어나오리라.
그마저도 귀엽기 그지없어 세바스찬은 잔잔하게 웃었고, 황손은 기운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좋아. 황제 폐하께 인사드리러 가자!”
“그러지요. 자, 가실까요”
***
“전하!”
“어이, 뛰지 마라.”
위풍당당하게 문을 나선 지 고작 몇 분.
황손 궁을 나서기도 전에 손님이 들이닥쳤다.
“응? 일찍 왔네?”
선약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 몇 시간 남아 있었기에 황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이 스륵 흩어졌고, 볼셰이크의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런 황손 앞에 득달같이 달려왔지만, 칼같이 멈춰선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와락 외쳤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좀 들어보세요. 글쎄, 이 자식이…… 아얏! 왜 때려!”
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불쑥 나타난 분홍 머리의 소년이 아이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오빠한테 이 자식이 뭐야. 그리고 그런 상스러운 말 전하 앞에서 쓰지 말라고 했지.”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네 오빠다.”
“엄마 아들이면서!”
“그럼 넌 어머니 딸 아니냐.”
황손을 앞에 두고 저희끼리 바락바락 아침부터 기운 좋게도 다투는 남매의 몇 걸음 뒤에서 앙브흐와 아이작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황손을 향해 짧게 예를 취했고, 황손도 의젓하게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싸우더니 황손 전하께 답을 들어야겠다고 방방 뛰는 바람에 이리 일찍 오게 되었네요.”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지닌 앙브흐의 말에 황손은 눈을 깜박거리다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일인지 들으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궁금하시면 지금 말씀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
다섯 살 아이답지 않게 칼같이 잘라 버리는 황손의 답에 아이작은 긴 한숨을 삼키며 여전히 아전 투구를 벌이는 남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희들은 어디까지 와서 언제까지 싸우는 거냐. 동갑이신 황손 전하의 반의 반이라도 따라가 봐. 넌 심지어 연상이면서.”
“아, 아빠! 그렇게 잡지 말라고요! 그리고 내가 뭐 어때서!”
“황손 전하께 비하는 건 좀 치사합니다만, 아버지.”
말을 하면 무얼 하겠는가. 아이작은 흐린 눈으로 제 자식들을 바라보다가 일단 잡고 있던 뒷덜미를 놓아주었다.
호랑이 새끼들처럼 아릉거리던 남매는 서로를 죽일 듯이 흘겨보면서도 제대로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렇게나 싸워대더니 남매는 남매인지 둘의 목소리가 겹쳐서 울렸고, 그에 황손은 키득거리며 웃어버렸다.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갈래?”
“갈래요!”
“어디 가시는데요?”
두 남매가 동시에 말했고, 황손은 티 없이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집무실!”
“네?”
“아니, 거긴…….”
“여기 다들 모여서 뭘 하시는 겁니까.”
남매의 얼빠진 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낮지만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슈가 삼촌!”
검은 머리 아이가 우다다 달려가 길고 곧은 다리에 박치기했지만, 슈가는 휘청거리지 않고 익숙하게 아이를 받아냈다.
분홍 머리 아이도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황손도 슈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됐군요. 마침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왔거든요.”
“재미난?”
“이야기?”
“뭐예요? 그게 뭐예요 삼촌?”
각기 다른 반응이었지만, 근간에 깔린 호기심은 똑같아서 슈가는 부드럽게 웃으며 검은 머리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오시면 알려드리도록 하죠.”
슈가의 말에 검은 머리 아이는 눈을 번뜩 빛냈고, 분홍 머리 아이는 김이 빠졌다는 듯 심드렁했으며 황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가볼까요.”
세바스찬의 뒤를 따라 세 아이의 작달막한 그림자가 쫑쫑 거리며 사라졌다.
그런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던 슈가의 곁으로 앙브흐가 다가왔다.
“재미난 거?”
“네. 누나도 해보시면 재미있을걸요. 형도요.”
“아, 난 일이 있어서. 이따 밤에 들려줘.”
아이작은 슈가의 어깨를 툭 한번 두드린 후 그대로 그림자로 사라졌고, 남은 앙브흐와 슈가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
세 아이의 걸음으로도 황제궁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황손의 궁보다 확연히 조용해진 사위에 삐죽거리던 남매의 기세가 단숨에 잠들었고, 황손 역시 전보다 더 등을 곧게 폈다.
“근데 우리 뭐 하러 가는 거야?”
“그러게. 우리 뭐 하려고?”
뒤늦은 남매의 속닥거림에 황손도 작은 소리로 답했다.
“문안 인사 드리러. 나만 잘 따라 하면 돼.”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는 황손을 대단히 믿음직스럽게 바라본 남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황제의 집무실에 다다른 그들은 거대하고 위압감 넘치는 문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황손 역시 매일 보는 할아버지이지만, 이렇듯 정식으로 집무실에서 문안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마찬가지로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똑똑.
세바스찬의 정중한 노크 뒤로 허락이 떨어졌고, 세 아이는 열린 문 너머로 들어섰다.
황제의 집무실에 익숙한 황손과는 달리 남매는 산처럼 쌓여 산맥을 이루는 서류 더미에 기가 질린 기색이었다.
미로가 된 서류 산맥을 지나 황제 앞에 도달한 아이 셋은 곧 그보다 앞서 있는 강철같은 기사를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명을 받듭니다.”
“오, 황손이 왔군.”
황제의 말에 기사, 케슬란은 절도 있게 뒤로 돌았다.
그는 볼셰이크 특유의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미미하게 움찔했지만, 아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사들 하거라. 이쪽은 케슬란 경. 황실 기사 중에서 특출난 부단장이지.”
황제가 친히 하는 소개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소심한 케슬란은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간 갈고닦은 자기관리 능력은 빛을 발해 겉으로 보기에는 세간의 평처럼 여전히 누구보다도 기사다웠다.
검은 머리 아이는 그야말로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케슬란을 올려다보았고, 분홍 머리는 미묘한 표정으로 오히려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남매 앞에 있던 황손이 방싯 웃으며 말했다.
“제국을 지키는 검을 봐서 반갑네.”
“황송합니다. 전하.”
황손과 기사 간의 첫 만남은 지극히 교과서적으로 끝이 났고, 케슬란은 곧 자리를 떠났다.
“재미있는 기사야. 용케 제 성정을 감추고 다니면서, 능력은 또 좋으니.”
“네? 할아버지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무 말도. 자, 그보다 오늘 할 일이 있지 않느냐.”
피로한 낯인데도 빙글빙글 웃던 황제의 표정이 근엄하게 변하자 황손은 빠릿하게 답하며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네! 할아…… 아니, 폐하.”
그런 황손 뒤로 얼떨결에 따라온 남매도 나란히 서서 얌전히 손을 모았다.
이윽고 황손이 배꼽에 모은 양손을 붙인 채 허리를 팍 접었다.
“폐하, 지난밤 평안하셨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뒤이어 남매의 합창이 울리자 황제는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를 실룩거렸고, 뒤편에서 세 아이를 보던 세바스찬도 그 단정한 얼굴을 모로 돌렸다.
기실 오늘의 문안 인사는 황제의 장난에 가까웠다.
지금 황손과 아이들이 하는 인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제국의 예법과는 일억 광년은 멀리 떨어진 배꼽 인사.
정식 문안 인사라며 거창하게 말했지만, 황제는 단순히 손자의 재롱이 보고 싶었을 뿐.
붉고 검고 분홍인 정수리를 바라보던 황제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후 전보다 더 근엄하게 말했다.
“그래. 너희들도 평안했느냐.”
“네! 어제 꿈이 화려했어요!”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리를 확 편 황손이 대표로 외쳤다.
“오호라, 무슨 꿈을 꿨느냐. 볼셰이크의 꿈은 또 특이한 힘이 있지.”
“그게 말이죠…….”
의젓했던 다섯 살 황손은 황제의 손짓에 냉큼 그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황손이 재잘재잘 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자 황제와 지나치게 가까운 나머지 바짝 얼어있던 남매도 어느새 긴장이 풀렸는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황제의 눈치를 보던 둘은 세바스찬이 간식을 놓아두고, 황제가 눈짓하자 각자 좋아하는 것을 집어 볼이 빵빵해지도록 오물거렸다.
그렇게 무사히 문안 인사를 마친 황손은 그날 하루 마음껏 놀거라! 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고,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던 슈가에게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