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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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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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너를 사랑한다.
2023.08.07.
“아, 아이작.”
“뭘, 두리번거리려고 해. 고개 딱 고정하고 이리 와라.”
머뭇거리는 슈가를 본 아이작이 슬쩍 아이에게 다가서서 냉큼 앙브흐 곁으로 붙여두었다.
앙브흐와 아이작 그리고 슈가 외에도 노르덴국을 방문한 제국의 인사는 적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를 수행하는 이들과 호위와 의장을 위한 기사단이 동행했고, 그 기사 중에는 케슬란도 있었다.
전보다 마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사의 표본처럼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그는 다른 평범한 이들처럼 눈을 깜박거리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레타가 고대신의 손아귀에 처절하게 떨어진 후, 황궁의 한구석에 묶여 있던 케슬란은 전대 노르덴 왕과는 달리 다행히 살아남았다.
후유증이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만한 것이었기에 신체적으로는 멀쩡했다. 신체적으로는.
황녀 암살이라는 중죄인이었지만, 올리비아의 안배로 그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는 여전히 전도유망한 기사단의 차기 부단장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케슬란을 더더욱 압박했으리라.
가뜩이나 소심한 성정의 그는 아무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지만, 감히 황녀에게 칼끝을 겨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날이 수척해져 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올리비아가 한숨 돌린 어느 날.
‘죽여주십시오.’
황녀 궁을 서성대고 있던 그는 크라이어에게 덜컥 뒷덜미가 잡혀 올리비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의 잘못이 아니었어. 그러니 자책하지 마.’
‘하지만 제가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제 손으로 감히.’
파리하게 질린 낯짝과 눈 밑에 진한 검은 그늘을 턱까지 늘어뜨린 그는 손을 덜덜 떨면서 이마를 바닥에 댔다.
세계 멸망이자 대륙 전쟁은 막았지만, 서류와의 전쟁에서는 통렬히 패배한 올리비아는 뒷수습에 치여 피곤한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녀는 그대로 힘을 줘 케슬란을 일으킨 후, 가볍게 토닥였다.
‘그렇게 치면 오히려 내가 경을 책임지지 못한 거지. 경은 분명히 내게 기억의 공백이 있다고 했지만, 해결하지 못했지 않나.’
‘저는 기사입니다.’
지키는 검이 찌르는 검이 되었다는 케슬란의 조용한 비통에 올리비아는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황녀지. 그대는 나의 백성이고. 그러니 케슬란 경. 고개를 들어. 어깨를 펴고 검을 쥐어라.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경의 의지로 제국을 지키면 그것으로 족해.’
케슬란은 울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지만, 크라이어에게 다시 목덜미가 잡혀 나가면서 끝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자책감과 죄책감에 몸서리치던 케슬란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고,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소심한 성정은 그대로였지만, 그를 지지하는 굳건한 의지는 조금 더 날카롭게 벼려졌으니까.
아이작은 케슬란을 흘긋 확인한 후, 여상하게 눈을 돌렸다.
저 기사를 기절시키고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둔 과거가 있지만…….
아니, 이렇게 생각하니까 굉장히 기분이 더러워지는데.
아무튼 더는 마주할 일 없겠지.
아이작이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릴 무렵, 앙브흐의 곁에 붙은 슈가는 잔뜩 긴장했는지 어깨가 바싹 올라와 있었다.
주먹쥔 손은 긴장으로 차가웠지만, 땀이 나서 축축하기까지 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에 온 건 처음이다. 아니, 슈가에겐 오늘 하는 거의 모든 일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르위르가를 복권해줄게. 너도 이제 누려야 할 권리를 찾아야지. 물론 의무도 잊지 말고.’
환한 대낮에 슈가를 당당히 궁으로 불러들인 올리비아는 아이의 완전한 자유를 선언했다.
슈가는 얼떨떨했지만, 앙브흐가 워낙 기뻐한 터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이후로 숨 가쁜 생활이 이어졌다.
르위르 가문은 타렌가에 막대한 빚을 지면서 껍데기만 남아 있었지만, 올리비아가 사적으로 그 빚을 해결해주면서 복권했다.
슈가는 원래 받던 교육에서 올리비아와 앙브흐가 선별한 한 가문을 이끌어갈 가주가 되기 위한 수업까지 받게 되었다.
그렇게 슈가는 타렌가의 저택과 황궁 외에 더 넓고, 더 많은 곳으로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막 날아오르는 어린 르위르가의 가주는 황녀와 타렌가의 후계자라는 막강한 배후를 두고 공식 석상에 섰다.
앙브흐는 슈가의 왼쪽 손을 잡아주는 대신 아직은 작은 아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받쳐주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수를 헤아리기 힘든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슈가, 기억하지?”
“네. 이제 제가 르위르 가문의 가주니까 등을 세우고 허리를 펴고 턱을 당겨 당당한 자세를 유지할게요.”
“그래. 가문이 복권되었으니 널 어리다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혼쭐을 내줘. 르위르 가문도 아주 유서 깊은 곳이니까.”
앙브흐는 올리비아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해주었다.
“그리고 황녀 전하의 말씀대로 넌 누구도 겪지 못한 것들을 아주 훌륭하게 이겨냈어.”
그 말 그대로, 신의 제물이 되어 견디고 살아남는 경험을 누가 해보겠는가.
그때 슈가는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말 예상치 못했던 사람인 무서운 기사님, 크라이어가 아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이제껏 버텨서 살아남았으니 그걸로 넌 할 일을 다 한 거다.’
그에 슈가는 눈을 별처럼 빛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도 그때처럼 또렷한 시선으로 자신을 흘긋거리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의 눈동자는 더 이상 검붉은 색이 아닌 신록을 품은 녹색이었다.
낙인이 사라지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완전히 같은 검붉은 색이었던 크라이어와 슈가의 눈동자가 바뀌었다.
아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는 말이 정확할 터.
사절을 혼란에 빠뜨렸던 크라이어의 깨끗한 붉은 눈이 그랬고, 슈가의 싱그러운 녹색 눈이 그랬다.
크라이어가 신을 향해 통렬히 비웃었던 그 말처럼, 고대신은 존재하되 이 대륙에 더는 손을 뻗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붉은색과 녹색. 완전히 다른 색이 된 두 사람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올리비아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제 어디 가서 아들이라는 오해는 안 받겠네.’
그 말에 습관처럼 꿀에 절인 달콤한 대추야자를 집어 먹던 아이작이 사례로 들려 기침하면서도 순식간에 자리를 피한 건 사소한 소동이었다.
“뭐, 아가씨가 하는 대로만 하라고.”
아이작은 함부로 사람들이 슈가를 불 수 없게 슬쩍 제 몸으로 가리면서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앙브흐도 냉큼 슈가의 손을 잡았고, 셋은 익숙한 구도가 되었다.
얼마간 둘의 손을 잡고 긴장이 확 풀린 슈가는 아이작과 앙브흐를 번갈아 바라보다 장난꾸러기같이 씩 웃었다.
아이는 은근슬쩍 제 양손을 당긴 후 냉큼 손을 놓음과 동시에 두 사람의 손을 연결했다.
“뭐냐?”
“슈가?”
얼떨결에 손을 꼭 잡게 된 앙브흐와 아이작은 슈가를 바라보았지만, 아이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이내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앙브흐가 반사적으로 손을 꼼지락거리자 아이작의 귀 끝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았고, 슈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옆구리를 한 번 쓸었다.
‘전부 끝났단다.’
많이 우셨는지 눈가가 짓무르고 뺨이 빨갛게 튼 황녀 전하께서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으시며 그리 말씀하신 날.
나날이 흐릿해져 가던 슈가의 낙인이 완전히 사라졌다.
익숙해졌지만, 고통은 경감되지 않았던 낙인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주 작은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귀밑머리를 간질이며 지나는 바람이 속까지 쓸고 지나간 건지, 슈가는 연신 흘러나오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즉위식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에 맞춰 손뼉을 쳤다.
즉위식이 열리는 홀은 수용 인원이 정해져 있었기에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지는 못했다.
제국의 황제 대리인으로 참석한 올리비아를 필두로 한 최우선 인물들이 들어간 후, 차례차례 자리가 채워졌다.
이윽고 노르덴국의 국가가 즉위식의 포문을 열었다.
한 국가의 새로운 왕가의 시작이자 왕의 즉위식이니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모인 이들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늘의 주인공인 노르덴국의 왕이 아니라 왕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마련된 자리에 있는 제국의 황녀와 곧 부마가 될 기사를 살피느라 바빴다.
누군가는 티 나지 않게 흘긋거렸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하나, 이제까지 그랬듯이 정작 그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당사자들은 그들에게 시선 부스러기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크라이어. 지금 너무 가깝지 않아?”
“아니.”
“내가 정말 질문한 것 같았어?”
“아니.”
“알면 좀 떨어지라고.”
올리비아는 제 허리에 단단히 감긴 강철보다 더 단단한 팔을 탁 내려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던 올리비아는 석류알같이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검붉은 색이 아닌 본연의 색을 되찾은 그의 눈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근심이나 걱정 없이 말갛게 웃는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충동을 참지 않고,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그를 밀어내지도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가에 맺힌 미소가 더 빛을 발했을 뿐.
그리고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이들도 당연히 그 장면을 목격했다.
한순간 홀이 술렁거렸다.
“어머나. 어머어머!”
“좋을 때네요.”
누군가는 얼이 빠졌고, 또 다른 누군가는 흐뭇하게 웃었으며, 누군가는 곧 제국의 부마가 될 크라이어에게 진상할 선물의 등급을 훨씬 높게 조절했다.
그렇게 오늘의 주인공이 돼야 했을 노르덴의 왕은 반쯤 잊혔지만, 그 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많은, 심지어 노르덴국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시선을 모조리 감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즉위식을 올린 왕이 거창하고 지나치게 화려한 식을 지양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홀이 열렸다.
타국의 주요 인물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향해 돌진하려 했지만, 그 앞으로 제국의 인사들이 막아섰다.
그들 중 선두에 선 앙브흐가 방긋 웃는 얼굴로 당혹감을 감추려는 타국의 인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하께서는 선약이 있으시답니다.”
***
선약이 있다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와 단둘이 왕궁의 중앙, 고대신의 신전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전과 같았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같았지만 몸을 타고 흐르는 공기는 완연히 달랐다.
말없이 걸어 도착한 곳에서 올리비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환하게 비어 있는 공터를 보니 속이 다 시원했기 때문이다.
“싹 밀어 버렸네. 역시 말해두길 잘했어.”
제단이 닫힌 후, 돌아가기 전 올리비아는 노르덴에 남아 있는 제국의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기둥뿌리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부숴버려. 지하도 전부 무너뜨리고.’
그들은 황녀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고, 신전이 있던 자리는 그야말로 주춧돌 하나 없이 깨끗한 공터가 되었다.
빈곳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공터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이쯤에 제단이 있었겠지?”
“그래. 중심부니까.”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올리비아는 더없이 찬란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눈이 부신 듯 물끄러미 보던 크라이어가 한걸음에 그녀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올려다보는 것처럼 눈을 떼지 않던 그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너를 사랑한다. 네 곁에 있고 싶고,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한다. 그러니 너와 평생을 함께할 기회를 주지 않겠나.”
대단한 미사여구나, 그보다 더 대단한 준비도 없는 담백하기 그지없는 청혼이었다.
그런데도 붉은 태양과 같은 그의 눈에 오로지 푸른 꽃망울만이 터지고 있어서, 올리비아는 한낮에 활짝 핀 꽃처럼 웃었다.
허리를 굽혀 그의 뺨을 잡고 짧게 여러 번 입맞춤을 한 올리비아가 속삭였다.
“기꺼이.”
다음 순간 그녀의 시야가 확 높아졌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맑은 웃음이 하늘 높이 올랐다.
올리비아를 안아 든 크라이어는 동그란 이마에 제 이마를 붙이며 그녀와 함께 소리 내어 웃었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서로가 서로의 곁에 남은 모든 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