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결혼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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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결혼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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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결혼할 거예요.
2023.08.03.
노르덴 국의 하늘이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주 불길하고 구역질 나는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던 날로부터 한 달 후.
오늘은 바람이 불었다. 돌풍이나 강풍이 아닌 살랑살랑 뺨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날이 좋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좋은 날이라니.”
노르덴 국의 새로운 왕실이 탄생하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본래 왕실의 혈통이 끊기자 노르덴국의 귀족들은 오랜 논의와 심심한 폭력, 그리고 제국의 중재를 거쳐 새로운 왕가 옹립을 결정했다.
그에 더없이 평화로운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축하 사절을 보냈고, 노르덴국의 왕궁은 몇십 년 만에 가장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왕의 즉위식이 열리는 왕궁 동쪽의 거대한 야외 연회장에 삼삼오오 모인 사절들은 대륙 정세처럼 큰 덩어리부터 잡다한 이야기까지 가리지 않고 나누었다.
그들 중 노르덴국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나라의 사절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얼마 전에는 하늘이 완전히 시커멓게 물들더니. 오늘은 날이 좋아 다행이네요.”
그에 노르덴국 바로 옆에 붙어 있던 나라의 사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날 하늘 보셨어요? 검은색이 아니라 검붉은 색이었어요.”
“네? 그럴 리가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두 사람이 아옹다옹거리자 주변 사람들도 각자 자기가 본 하늘색을 토로하면서 잠시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날씨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소소한 잡담에 불과했기에 사람들은 금세 다른 화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들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어느 사절의 말대로였다.
기실 노르덴국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고 해서 대륙 전역의 사절이 몰려들 이유는 없었다.
노르덴국이 대륙에서 뭔가 그럴듯한 위치가 있거나, 독점적인 강점이 있는 나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나, 모르셨다면 곤란한 거 아닌가요.”
그런 사절을 비웃는 듯 아닌 듯 우아한 웃음을 흘린 이의 말에 다른 이도 동조했다.
“그럼요. 다들 확인하러 오셨잖아요.”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이 자리에 바로…….
“오셨답니다.”
“오셨어요? 이럴 때가 아니네요. 먼저 가보겠어요.”
“저도 이만.”
“크흠, 좀 비켜주시면.”
누군가의 도착이 알려지기 무섭게 모여 있던 사절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한곳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몰려간 자리에는 제국을 상징하는 볼셰이크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달칵.
웅성거림을 뚫고 마차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일시에 숨을 죽였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기사를 보고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내질렀다.
따가운 햇살 아래 차갑게 빛나는 은발과 그 아래 자리한 마주한 사람의 목을 잡아채 고개를 아래로 박게 만드는 선명한 붉은 빛의 눈동자.
“맙소사. 소문보다 더.”
숨소리마저 고요하던 연회장에 누군가의 탄식과도 같은 감탄이 새어 나왔다.
물론 마차에서 먼저 내린 크라이어는 그에게 집중된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그의 신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쏠려 있었으니까.
“손을.”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하얀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홀린 듯이 바라보았던 크라이어의 붉은 눈과 같이 선연한 붉은 머리카락이 굽이치며 나타났다.
제국의 황녀.
올리비아 역시 자신을 뚫어버릴 듯 응시하는 시선을 익숙하고도 자연스럽게 무시하면서 사뿐히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대륙의 끝에 있는 나라의 사절까지 노르덴국으로 걸음 하게 만든 소문의 주인공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예정일보다 훨씬 빨리 열렸던 대회의에서 황녀의 돌발행동 이후 시간이 꽤 흘렀다.
그때 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타국에서 노르덴의 이름 없는 기사처럼 황녀의 눈을 사로잡겠다며 앞다투어 기사 비스름한 이들을 우르르 보낸 지도 한참 전이다.
당시 제국으로 파견 나갔던 기사 비스름한 인간 중 몇은 돌아오지 못했고, 또 몇은 일상생활이 힘든 몸으로 돌아왔으며, 다른 몇은 버려졌다.
한데, 그런 이들이 아는 이들의 기억에서도 희미해질 때까지 ‘소문’의 기사와 황녀의 염문설은 들리지 않았다.
그 기사는 그저 호위에 충실했고, 황녀 역시 ‘이름 없는 기사에게 한눈에 반해 제국으로 빼앗듯이 데려갔다.’라는 소문을 비웃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윽고 대륙의 단 하나뿐인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녀이자 차기 황제의 혼사에 지대한 관심을 보던 이들조차 의혹의 눈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제 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무려 황녀가 그 기사와…….
“세상에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요.”
“저 기사가 노르덴국 출신이라고 했죠? 이름이 크라이어? 였던가요. 노르덴국에서도 출신을 잘 알 수 없다고 하더니, 가문이 어디인지…….”
“제가 잘못 들은 걸까요. 저렇게 루비같이 투명한 붉은 눈이라고 들은 적이 없는데.”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향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몇몇은 소문으로만 듣던 크라이어에 관한 감상과 그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보다 황실에서 언제 확실한 공표가 날까요?”
“글쎄요. 그리 늦지는 않을 거 같아요. 오늘 이런 자리에 함께 오신 걸 보니.”
“호위로 온 거잖아요?”
“나 참, 단순히 그런 거였다면 같은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았겠지요.”
“그래요. 게다가 보세요. 옷을 맞춰 입으셨…….”
몇몇은 저 대륙의 끝에 붙은 나라까지 소문이 퍼진 둘의 공공연한 결혼 소식으로 열을 올렸다.
제국 황실의 경사나 흉사는 전 대륙의 관심사이긴 하지만, 이번 결혼 소식은 기묘할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온 대륙에 퍼졌다.
제국에서 암약 중인 타국 첩자들의 입이나 외교관의 은근한 서신에서 나온 말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 수도가 들썩거리더니 달리는 말보다 빠르게 대륙을 강타했다.
타국의 왕실과 귀족 가문은 뒤집어졌다.
‘하나의 소문이 이토록 정확하고 빠르게 퍼지다니.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이오!’
‘제국에 있는 충실한 이들이 본국에 소식을 보내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이 중요한 정보를 접하게 되다니!’
‘이런 식이면 제국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대륙의 정보와 소문을 통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황녀의 결혼 소문은 타국의 정보부에 야근을 선물했고, 당장 제국에 사람을 더 파견하라는 닦달을 불러왔지만, 기실 제국이 뭐 대단한 이유나 획기적인 방법으로 소문을 퍼뜨린 건 아니었다.
그저 황제가 동네방네를 넘어 아주 마음 먹고 전 대륙에 소문을 내라고 아주 벙긋 웃으며 외쳤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흘 내에는 전 대륙이 이 결혼을 축하하게 만들어!’
올리비아는 회귀 전이나 지금까지 연애나 사랑에 영 관심도 없고, 의욕도 없어서 툭하면 이런 소리나 했었다.
‘후계를 위해서라면 할게요. 적당한 사람 찾아 주세요.’
그런 소리나 하던 딸이 대뜸 사윗감을 들이밀다니.
‘이 사람 아시죠?’
‘그래. 대회의 때 제국으로 함께 온 그 기사가 아니더냐.’
‘결혼할 거예요.’
‘그래! 내 언젠가 그럴 줄 알았지! 어디 보자, 아주 건강 하구만! 그거면 됐다!’
‘무슨 송아지 감정하세요? 건강하면 됐다니.’
‘네가 좋다고 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겠느냐. 자자, 그래서 결혼은 언제가 좋을까. 최대한 빨리하는 편이 낫겠지?’
‘아버지!’
피로한 낯에 생생한 활기를 띤 황제의 의욕적인 추진으로 둘의 결혼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자 차기 황제의 결혼식이라면 준비 기간만 연 단위가 되기 마련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집무실에 들이닥쳐 ‘이건 어떻습니까, 저걸로 할까요?’ 묻는 이들에 진저리를 친 올리비아가 황제를 찾았다.
‘그만 좀 하세요!’
‘으응?’
‘결혼 준비요. 결혼 준비!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제가 어디 도망가요?’
‘너는 도망가지 않지.’
‘뭐예요. 그 미묘한 말은.’
‘아니. 너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딸이지만, 사위는 모르지 않느냐.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아버지!’
부녀는 한바탕 푸닥거리를 거친 후, 합의를 보기는 했다.
결혼에 대단한 환상이나 바람은 신부, 신랑 양쪽 다 없으니 한 사람에게 위임하기로.
그리고 난데없이 황제가 눈에 불을 켜고 준비하는 딸의 결혼식을 통째로 떠맡게 된 이는 올리비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황제의 곁에 있던 세바스찬이었다.
‘전하. 정말로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세바스찬이잖아.’
구태여 믿는다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후 올리비아는 가끔 오는 세바스찬을 반겨주었고, 세바스찬 역시 올리비아가 장성한 이후 가지지 못했던 오붓한 시간에 그 단정한 얼굴에 평소와 다른 미소를 띠었다.
황궁의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르는 이들은 예상하지 못하리라.
그들이 기다리는 결혼 공표와 동시에 결혼식이 열릴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달리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결혼 날짜까지 정확히 받은 이들이 황실 마차에 뒤이어 도착했다.
“다들 즉위식이 아니라 다른 안건에 관심이 지나치네.”
“그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는데.”
앙브흐가 방실방실 웃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하려다가 지금 자신이 호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입으로만 답했다.
“그러는 아가씨께서도 그날 아주 난리를…….”
“너무 기뻐서 참을 수가 없었는걸요.”
“아니, 아무리 기쁘시다지만 왜 저를 잡고 춤을 추신 겁니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음악도 없이.”
“그러고 싶었으니까요! 싫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앙브흐에게 아이작은 절대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좋았다는 말도.
그래서 그는 그냥 시선을 피해 버렸고, 앙브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이들을 타렌가의 후계다운 미소로 맞았다.
앙브흐가 다른 제국의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타렌가의 마차 뒤를 쫓은 르위르가의 마차에서 이제 막 내린 슈가가 어색한 몸짓으로 내렸다.
혼자 타는 마차는 처음이었지만, 르위르가의 가주로 참석하는 자리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엉거주춤 마차에서 내린 슈가는 아이작과 눈이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