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전부 끝났다.
(141/146)
141. 전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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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전부 끝났다.
2023.07.31.
크라이어가 그랬던 것처럼 티슨 역시 죽음에서 돌아와 낙인찍힌 것이다.
크라이어가 신의 손을 직접 탔다면, 티슨은 그레타의 손을 빌었다는 점이 달랐다.
그렇기에 그레타가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지자 티슨도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티슨은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자는 끝까지 아무것도 없는 채로 갔다.
결국 고대신을 추종하여 그 종이 되길 자청한 이들은 이 세상에 단 한 톨의 무언가도 남기지 못했다.
사람 한 명분의 가루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그치자 숨 막히는 침묵만이 흘렀다.
기이하게 몸을 내리누르는 적막이었다.
이걸로 끝……인가?
여전히 검붉은 색으로 울렁거리기는 했지만, 더는 자신을 당기지 않는 제단을 노려보던 올리비아가 간신히 숨을 한 번 더 내쉬는 순간.
“올리비아.”
그녀의 귓바퀴를 타고 꺼질 듯이 낮은 부름이 들림과 동시에 코가 마비될 정도로 강한 피비린내가 덮쳤다.
그에 뒤섞인 익숙한 크라이어의 향기에 올리비아는 입을 뻐끔거렸고, 그는 그녀의 목에 여전히 남아 있는 표식을 제 피로 문댔다.
“크라……이어?”
꽉 막힌 목을 간신히 풀어 그를 조그맣게 부르자마자 제단이 크게 울렁거렸다.
“크라이어!”
올리비아가 제 숨을 다해 그를 부르는 순간, 제단은 전보다 더 크게 아가리를 벌렸다.
그레타를 삼켰지만, 늘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탐욕적인 고대신은 눈앞에 있는 볼셰이크의 피인 올리비아도 삼키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라이어는 기어이 올리비아를 빌어먹을 신의 손아귀에서 빼내고 그 자신을 던졌다.
그녀의 품 안에서 그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크라이어는 그레타처럼 아예 제단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전처럼 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을 뿐.
올리비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를 추슬러 안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전에도 이랬잖아.
전과 같았다. 아니, 전과 달랐다.
전과 같이 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지만, 전과 달리 그의 몸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그가 인간을 넘어서게 강하긴 했지만, 신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어두운색 옷을 입고 있었기에 얼핏 보면 알 수 없었지만, 몸 전체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를 안은 올리비아의 손도 이미 피투성이였지만, 크라이어가 흘리는 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올리비아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그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이가 부딪치고 턱이 아플 만큼 덜덜 떨렸지만, 그녀는 그를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크라이어. 크라이어. 듣고 있지? 듣고 있는 거 알아. 전에도 내가 불렀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러니…….”
끊임없이 속삭이던 올리비아의 눈가를 타고 터져 나온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며 턱을 타고 그에게 방울져 떨어졌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초점이 없는 눈동자.
마치 죽은 사람 같은 낯에 올리비아는 참지 못하고 기어이 비명처럼 외쳤다.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당신이 아니라 내가 지켜준다고 했다고!”
왜, 어째서. 그 순간 그는 그런 선택을 했나.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심장을 쥐어짜는 아픔을 느껴야만 했다.
그녀는 서서히 식어가는 크라이어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손 놓지 마. 내 손 꼭 잡아야 해.”
지난번, 제단에서 그가 세상을 놓쳐버렸을 때 자신이 불러, 자신을 불러 돌아왔다고 했다.
‘내 세계가 너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신을 불러오리라. 당신 역시 나를 부르겠지.
손을 뻗고, 뻗어서. 신의 손아귀 어딘가에 있을 너를 반드시.
“반드시 내게 돌아올 거야.”
그녀의 말처럼 크라이어는 검붉은 아가리를 헤매고 있었다.
아니, 헤매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어디론가 향했고, 때로는 멈춰 섰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변함이 없었고 그 자신이 무엇을 찾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어디선가 멀리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를 부르는 건가.
누가 부르는 건가.
알 수 없었지만, 하염없이 걷던 크라이어는 저도 모르게 바닥을 박차고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의 뒤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검붉은 손들이 나타나 그를 잡으려 해일처럼 일어나 쫓아왔다.
그렇게 달리고 얼마나 더 달렸을까.
부르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닿을 듯 닿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무언가가 속살거렸다.
네가 원했던 거잖아.
네가 원해서 들어왔잖아.
네가 원했어.
그래. 그랬다. 자신은 원해서 제 발로 이곳으로 왔다.
크라이어의 다리가 서서히 느려지고, 그의 목을 잡아채려는 검붉은 손들이 고작 손가락 하나 거리만을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볼셰이크를 위해서 자신을 부정하며 떠났던 첫 번째 전사이자 노예, 인형이자 종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한 신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웃는 순간.
“나는 네 것이 아니다.”
완전히 멈춰 선 크라이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단숨에 검붉은 손의 해일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그는 입매를 비틀며 찢어지는 검붉은 손 너머의 신을 보며 웃었다.
“나는 올리비아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온 사위에 선명하게 퍼졌다.
그건 어딘가 먼 곳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서 울리고 있었다.
“네가 나를 부활시켰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다. 넌 여전히 그곳에 처박혀 다시는 세상에 목을 들이밀지 못할 테지만, 네가 소멸하지 않는 이상 나는 살아갈 테니까. 네 것이 아닌. 그녀의 것으로.”
이 건방진 것이!
격노한 신이 그를 쥐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크라이어는 자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그녀의 부름과 희미한 빛을 잡았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만난 후, 언제나 그랬듯이 가늘고 보드라운 그녀의 하얀 손이 그가 뻗은 손을 힘차게 당겼다.
***
“저게 대체 뭐야?”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뒤를 이어 신전에 도착한 아이작은 아연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검붉게 물들어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듯이 일렁거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젠장.”
그는 전보다 더 빠르게 신전 안으로 발을 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작이 제단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 공기가 무섭도록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아이작이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발견했지만, 그는 선뜻 그들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주저앉은 채 크라이어를 끌어안고 그와 손을 포개어 잡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꽤 평온하다고 할 법한 광경이었지만, 그 아래 작은 웅덩이를 이루는 핏물에 아이작은 이를 악물었다.
“전……하. 전하. 제가 늦었습니다.”
아이작은 참담한 얼굴로 올리비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아니, 그래도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아이작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귀로 꺼질 듯이 작고, 쉬어버린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작. 아이작.”
“네. 전하.”
“끝났어.”
“네?”
“전부 끝났다고.”
아이작은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눈물을 쏟으면서도 무섭도록 투명한 올리비아의 푸른 눈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빌어먹을 신을 끝장내셨군요.”
“응.”
“그러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는 울 듯이 웃었고,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감긴 눈꺼풀을 조심조심 쓸다가 뺨을 매만졌다.
크라이어의 의식이 제단으로 빨려 들어간 후 올리비아는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자꾸만 힘이 빠지는 그의 식어가는 손을 잡고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 그가 돌아왔다.
‘올리비아.’
‘응.’
‘올리비아.’
‘여기 있어.’
‘전부 끝났다.’
그는 모든 것의 종언을 알리며 다시 정신을 잃었고, 올리비아는 울면서 활짝 웃었다.
차가워지던 그의 몸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꺼져가던 그의 심장 고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돌아가자.”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린 듯했다.
뒤늦게 온 자신을 자책하던 아이작은 그녀의 명에 저 아래까지 떨어졌던 심장을 수습함과 동시에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땅이 얕게 패인 자국과 아직 마르지도 않은 피 웅덩이, 그리고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쌓여 있는 영문 모를 잿더미 같은 가루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완벽히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했다.
또 뭔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었군.
그러다 아이작은 불현듯 깨달았다.
시커먼 얼룩, 그러니까 제단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신전 내부로 진입했을 때 느껴지던 구역감이나 불쾌함도 없었다.
그는 그 끔찍한 제단이 대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올리비아가 안고 있던 크라이어의 상처를 재빠르게 살폈다.
“피는 멎었고, 상처가 음…… 아물고 있네요.”
옆구리를 헤집어 놓고 내장까지 쑤신 중상이었지만, 어느새 드러났던 속이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평생 본적도, 볼 일도 없을 기이한 광경이었지만 아이작은 놀라고 당황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였다.
크라이어와 관련해서는 상식이라던가 세상의 통념 같은 걸 적용하면 저만 골치가 아프다는 사실을 학습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동은 무리 없이 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작은 꼼꼼하게 크라이어의 상처를 수습했다.
그는 곧 올리비아의 상태도 살핀 후 입을 벌리려다가 곧 다물었다.
그녀가 눈물범벅인 뺨을 피가 아직도 드문드문 흐르는 엉망진창인 손등으로 거칠게 훔치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스스로 일어났으니까.
“가자.”
“네.”
아이작은 더 말을 붙이지 않았고, 올리비아 역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더디지만, 한걸음 씩 나아갔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올리비아는 스스로의 힘으로 앞을 향해 차근차근 걸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다만……. 그녀는 걸음을 더 늦춰 한 발 뒤에서 따라오던 아이작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작이 아니라 그가 부축하고 있는 크라이어와 나란히 섰다.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미지근한 손끝을 꼭 쥐었고, 그녀에게서 옮겨간 따뜻한 온기가 그의 심장을 향해 수천 갈래로 번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