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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너나 있을 자리로 가! (140/146)


#140. 너나 있을 자리로 가!
2023.07.27.


그는 그녀를 부르려고 했지만, 티슨이 그의 속을 마구 헤집던 칼을 단번에 뽑아내자 벌어진 입술과 뻥 뚫린 옆구리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뭐 하는 짓이야!”

티슨이 한발 물러남과 동시에 크라이어의 신형이 반쯤 무너졌고, 그 모습을 본 그레타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녀는 티슨에게 크라이어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티슨은 그레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땅을 짚으며 무너지는 크라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크라이어의 피가 흥건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티슨은 그레타가 그의 팔꿈치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길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크라이어님! 맙소사.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여자만 제단에 바치면 신께서 힘을 주실 거에요.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게요!”

그리 말하는 그레타는 입을 쭉 찢으면서 웃었다.

그가 무너진 사이 올리비아가 제단으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타에게 크라이어의 상처는 큰 의미가 없었다. 말한 대로 힘만 있다면 고칠 수 있으니까.

그녀는 그 역시 타인과 마찬가지로 고통이나 아픔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익숙했기에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의 기분이나 감정은 그레타의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그레타가 집요하게 집착하고 매달린 건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크라이어가 ‘자기 곁에’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녀는 크라이어를 향해 활짝 웃은 후 티슨을 잡아끌고 제단 쪽으로 향했다.

도구 주제에 크라이어 님께 또 흠집을 내는 건 싫었기 때문이다.

티슨은 그레타의 손을 거부하지 못해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기실 크라이어가 올리비아를 놓친 후 몇 분도 채 흐르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 정신을 차린 올리비아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으며 제단에서 멀어지려 했지만, 당기는 힘은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으윽.”

올리비아는 제 발을 꾹 밟는 구둣발에 시선을 올렸다.


“네가 있을 곳으로 가야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레타가 그녀의 발을 자근자근 짓밟아 누르며 제단을 가리켰다.


“개……소리.”

“아직 입을 놀릴 여유가 있나 보네.”

그레타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올리비아의 목을 빤히 내려다보면서 가볍게 손을 올렸다.

툭, 하는 소리가 들릴 리 없을 텐데, 그레타가 제 가슴께를 쳐서 넘어뜨리는 순간 올리비아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런 미…….”

욕설을 씹어 뱉으면서도 올리비아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갔고,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제단은 그녀를 더 빠르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올리비아도 그대로 끌려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땅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다.


“아아, 정말이지 끈질기다니까.”

그레타는 그런 올리비아를 보면서 짜증스레 고개를 마구 휘젓다가 성큼성큼 다가섰다.

-콰직.

그녀는 올리비아의 발을 밟았을 때보다 더 강하게 그녀의 손등을 발뒤꿈치로 내려찍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딱딱한 구두 굽에 사정없이 찍힌 손등이 피투성이가 되자 결국 올리비아는 손에서 힘이 풀렸고, 그레타는 이제 손수 그녀를 질질 끌고 제단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제단 자체에서 당기는 힘이 강했기에 그레타는 올리비아를 무리 없이 끌고 갈 수 있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제단이 곧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자 그레타는 티슨에게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던 조금 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갈퀴처럼 올리비아의 손목을 움켜쥔 그레타는 마침내 제단과 단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도달했다.


“흐음, 크라이어 님께서 이걸 보셔야 하는데.”

노래를 흥얼거리듯 중얼거린 그레타가 크라이어를 확인하려 고개를 돌린 직후.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어?”

그레타가 눈을 크게 찢으며 입을 벌리기 무섭게 제단은 올리비아가 아닌 그녀를 먼저 먹으려고 아가리를 쩍 벌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제단의 변화에 그레타는 올리비아를 던지듯 놓아 버리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저항이 통할 리 없었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레타는 삽시간에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시……신이시여. 신이시여! 아아악! 신이시여!”

곧 제단에 먹힐 거라 생각해 각오를 굳히던 올리비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했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인 그레타도 알지 못했지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기다리면서 제단 바로 곁에서 머물던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피를 제단은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리고 그레타의 뒤죽박죽 어지러이 흩어졌다 뒤섞이는 감정이 신을 대단히 즐겁게 했다.

그녀가 느끼는 신체적 고통과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으로 인해 오는 비통.

그가 저를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분노와 그런데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뒤엉킨 광기 어린 복수심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무자비한 고대신이 즐기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대가를 지나치게 많이 체납했다.

그 몸과 정신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지만, 케슬란을 인형으로 만듦으로써 그 한계도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레타는 자신이 신의 힘을 아주 잘 다루고 제어하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그녀 역시 인간일 뿐.

제멋대로인 신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은 다를 거라고, 다른 인간들과 달리 신의 의지를 받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그레타의 망상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허무함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아, 아아악! 안 돼, 안 돼!”

발끝이 구멍에 먹히자 그레타는 눈을 뒤집고 벗어나려 발악했다.


“티슨! 티슨, 이리 와서 날 당겨! 당기란 말이야!”

그녀는 티슨을 향해 손을 있는 힘껏 뻗었고, 여전히 피가 떨어지는 제 손바닥만 보고 있던 티슨이 움직였다.

눈 깜박할 사이에 그레타 곁으로 온 티슨은 그녀가 뻗은 손을 잡고 제 쪽으로 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티슨이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그레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건지 제 몸을 휙 돌려 그와 방향을 바꾸었다.

발목까지 먹혔던 그녀는 빠져나오면서 대신 티슨을 제단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에게 떠밀린 티슨이 본능적으로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몸에 힘을 줬지만, 곧바로 터진 그레타의 명령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만히 있어!”

그녀에게 의구심을 가졌고, 끝내는 크라이어를 자의로 찔러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려고 했던 티슨이었지만, 그녀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었다.

티슨의 몸이 시커먼 구멍 쪽으로 기울고, 숨을 몰아쉬던 그레타가 안심하려던 찰나.

그가 그대로 우뚝 멈췄다.

크기를 키운 제단에 티슨의 오른쪽 어깨 반절이 넘게 먹혔지만, 제단은 그를 삼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뱉어내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본 그레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왜? 왜 너는?”

황망함과 경악, 분노와 억울함이 점철된 그레타의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티슨은 제단과 맞닿는 순간 알아챘다.


“아무것도 없어서.”

허무할 만큼 간단한 답은 티슨의 속에서 고개를 쳐들고 튀어나오는 의문의 답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정이나 욕심, 하다못해 남을 미워하는 부정적인 감정조차도.

아니, 가진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대륙을 정화하고자 하는 열망.

하나 그건 고대신이 바라는 것이었기에 의미가 없었다.

티슨이 그토록 찾았던 답은 너무나도 허무하고 간단하게 나왔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탐욕스러운 신에게 아무 가치도 없었다.


“뭐? 뭐라는 거야?”

이제는 숫제 티슨의 등을 밀어 저를 당기려는 제단을 피하려던 그레타는 무어라고 더 입을 놀리지 못했다.


“너나 있을 자리로 가!”

이제껏 제단에, 그레타의 손에 질질 끌려가던 올리비아가 어느새 일어나 그레타의 등을 걷어찼기 때문이다.

제가 살기에 바빠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했던 그레타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절묘하게 티슨과 스쳐 교차하듯 제단으로 고꾸라졌다.


“꺄, 꺄아아아아악! 안 돼! 안 돼, 제발! 신이시여, 신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제단은 그 안으로 무너지는 그레타를 아주 즐겁게 맞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 맛있게 쩝쩝거리며 먹어 치웠다.

제 몸이 산채로 뜯어 먹히고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끼면서 그레타는 절규했고, 그런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보니타의 웃음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아, 아아아아악!”

고막을 찢을 듯이 할퀴어대는 그레타의 비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용돌이치는 제단에 먹혀 사라졌다.

어찌 보면 허무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인간이 신을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은 특별하다고 착각했으며, 힘을 과신했다.

신의 힘을 빌어, 신의 의지를 대행하려 하면서도, 제 욕망을 절대 버리지 않았던 그레타의 최후였다.

예상은커녕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나치게 짧은 시간에 연달아 일어났다.

올리비아는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잡고 있으려고 해도 눈앞이 다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경악하게 할 만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직. 으지직.

무엇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귀를 움찔한 올리비아는 티슨의 얼굴에 금이 가는 것을 보고 어깨가 크게 튀었다.

생기가 없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살아 움직이던 사람의 얼굴에 금이 가다니.

심지어 얼굴에서 시작된 금은 삽시간에 그의 온몸으로 퍼지고, 그의 손끝부터 가루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껏 상식 그 이상의 괴상한 것들을 많이 봤다. 제단이라고 하지만 꿀럭대는 시커먼 아가리 같은 것이 그레타를 통째로 삼키는 것도 방금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지금 눈앞에서 사람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경악하는 올리비아와는 달리 당사자인 티슨은 다리가 부서져 몸통만 바닥으로 추락하는데도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마치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레타의 머리카락 끝까지 제단에 먹힌 직후, 티슨은 등의 낙인이 불타는 듯한 느낌을 처음으로 받음과 동시에 그 낙인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리고 어떻게 잊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과거의 기억이 급격히 부상했다.

그건 죽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티슨 그 스스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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