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 어서 오세요. (139/146)


#139. 어서 오세요.
2023.07.24.


올리비아는 상처가 아물어가는 탓인지 자꾸 간질거리는 목의 상처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워낙 얕은 상처였기에 하루면 다 나을 줄 알았건만, 종종 간지러운 탓에 저도 모르게 긁으려다 멈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치의에게 받은 연고를 대충 펴 바른 그녀는 눈앞에 놓인 서류를 한 글자씩 해부하듯이 뜯어보았다.

그레타가 노르덴국으로 추방된 후 며칠이 지나고 그녀가 국경을 넘어 왕궁으로 향했다는 보고.

올리비아는 감흥 없는 얼굴로 서류 모서리를 매만지다가 이내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폐쇄된 왕궁으로 향했다는 건 보나 마나 신전으로 갔다는 말이겠지?”

“인형인 왕도 없어졌으니 신전밖에 없다.”

과연 신전에서 그녀는 무엇을 할까.

암살도 맥없이 실패해버린 마당에 추방도 순순히 당했다고 했다.

황실 기사를 상대로 공개적으로 저항한다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물러났다.

심지어…….


“당신을 보러 오지도 않았어. 같이 가자고 할 법했는데 말이야.”

그레타는 크라이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제국을 떠났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갑자기 날 죽이려고 들던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고.”

그레타가 보니타에게 충동질 당한 후 두 사람의 입맞춤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는 올리비아로서는 그녀의 행동 양상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잠시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이내 의자에 깊숙이 묻었던 허리를 세웠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가봐야겠어.”

“신전으로?”

“응. 정확히 말하면 제단으로. 또 제물을 모은답시고 사람을 납치해대면 골치 아프니까.”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기 남지 않을 거다.”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어.”

뜨끔한 그녀가 짐짓 모르는 체하자 그는 덤덤히 덧붙였다.


“내가 있을 곳은 네 곁이고, 다른 어디에도 갈 생각 없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진리를 말하듯 크라이어는 고했다.

그래서 올리비아는 차마 지난번처럼 그가 어딘가로 끌려가 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기뻐서 웃는 듯 불안해서 울상인 듯 미묘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그가 허리를 숙여 작은 손바닥에 제 뺨을 기댔다.


“함께 가자.”

 

 

***



“얼마나 걸릴까.”

노르덴 국에 돌아온 그레타는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예상대로 곧바로 신전 중앙의 제단으로 향했다.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시커먼 구멍이나 얼룩 같은 제단을 바라보며 반쯤 눈을 내리감은 그녀는 이내 완전히 눈을 감았다.

신이 자신과 함께하는 기분은 안온했지만, 대가로 가져가는 고통은 끊임없이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니, 갉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마구 뜯어 먹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뜯어 먹고 있었기에 그녀의 늘어진 손끝에서 끊임없이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 여자는 반드시 이곳으로 올 테고, 그러면 모든 것이 올바르게 돌아갈 테니까.


“크라이어 님도 돌아오실 거야.”

돌아오시고말고.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지.

그분의 눈앞에서 황녀가 갈기갈기 찢겨 제단에 바쳐질 것이다.


“그러면 그분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벗겨지고 신의 의지를 행할 수 있어. 그분만 있다면 곧바로 정화를 시작할 수 있을 테니.”

혼자만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그레타의 곁에 있던 티슨이 저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제가 시작할 수는 없습니까.”

그레타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가 없었다.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티슨은 입을 다물었을 터.

하지만 제단 가까이에 있어서인지 혹은 이제껏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쌓인 것이 임계점을 넘은 건지 티슨은 재차 물었다.


“대륙을 정화할 힘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가 시작해도…….”

“네가 뭐라고.”

티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레타가 툭 잘라버렸다.

그녀는 그야말로 한심하다는 듯 티슨을 내려다보았다.

경멸과 비웃음, 깔봄과 업신여김이 여실히 드러난 그레타를 마주한 티슨은 이번에야말로 입을 닫았다.

내가…… 뭐라고.

나는 뭐지?

나는 왜 안 되는 거지?

내가 원했던 건…….

고개 숙인 티슨의 일렁거리는 검붉은 눈동자에 맞춰 제단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

전처럼 크라이어의 품에 안겨 국경을 넘은 올리비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멀미를 하는 건 아닐 테고, 기분 탓인가.

입을 꾹 다물고 속을 진정시키던 그녀는 곧 왕궁에 도착해 땅을 밟았다.


“너무 조용해.”

“기척은 있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

폐쇄되긴 했지만, 왕궁에 남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도 무덤 같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없는 불온한 공기가 흐르는 왕궁을 지나친 둘은 곧 신전 앞에 다다랐다.

이전부터 흉흉한 소문이 돌던 신전 근처에는 그야말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겉으로 봐서는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군.”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차라리 알아볼 수 있도록 뭔가 대단한 장치라도 해두면 어디가 덧나나.”

올리비아는 긴장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괜히 투덜거리며, 거대한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얼마간 그렇게 있었지만, 속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가자.”

올리비아는 의연하게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걸음을 옮겼지만,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았기에 뺨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속이 뒤집힌 탓에 그녀 스스로도 목의 상처가 전보다 더 간질거리고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목까지 올라온 로브에 가려진 탓에 크라이어도 보지 못 했다.


“안쪽도 달라진 게 없어 보이긴 하는데.”

기분 나쁜 벽화와 조각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꿀렁거리긴 했지만, 어른거리는 빛 때문에 보이는 착시였다.

올리비아는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전과는 달리 신전 내부로 진입할 때 발을 내딛기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단이 있는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올리비아의 걸음이 급해지고 있었지만, 잔뜩 긴장한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뒤를 따르는 크라이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레타가 노르덴국으로 떠나고 얼마간 시간이 있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은 똑같았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지난번에 왔던 그 장소에 도착했다.

하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는 전혀 달랐다.

올리비아의 시선이 시커먼 얼룩처럼 보이는 제단 바로 옆에서 일어서는 그레타에게 박혔다.


“어서 오세요.”

그레타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두 사람을 향해 웃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입만 벌어진 탓에 아주 기괴한 표정이었다.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티슨은 크라이어가 나타난 이후로 쭉 그만을 보고 있었다.

물론 그레타는 크라이어만을 바라보았고, 크라이어는 올리비아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엇갈리는 시선 가운데 그레타는 천천히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향해 다가섰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아아, 이곳은 처음 보시죠? 신이 거하기에는 많이 모자라지만, 신께서 힘을 내려주시기에는 무리 없답니다. 부디 실망하지 말아주세요. 어차피 전 대륙이 불타면 상관없어질 테니.”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며, 혼자 바라는 미래까지 쏟아내는 그레타의 목소리만이 벽에 반사되어 웅웅거리다가 사라졌다.

그레타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올리비아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너. 제국의 황녀. 볼셰이크의 피. 너 역시 기다렸지.”

“뭐?”

그리고 그때야 깨달았다.

단순한 멀미나 긴장 때문에 속이 뒤집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해서 지금 입 밖으로 금방이라도 토하고 싶은 것이 바로 속에서 역류하는 피라는 것까지.

그럴 수야 없지.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어.

올리비아는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켜내며 버텼다.

겨우 핏덩어리를 혀뿌리로 밀어낸 올리비아는 문득 그레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에게 말을 하면서도 크라이어만을 보고 있던 여자였는데, 지금? 갑자기? 아니, 어디를 보고 있는…….

그레타는 올리비아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 다른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뱀이 기어가는 듯한 그 시선을 따라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목의 상처에 손을 댄 순간.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무슨……!”

올리비아의 몸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쭉 밀리더니 제단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툭, 투두둑.

그런 그녀의 목에 있던 아주 얕은 상처가 어느새 한껏 벌어져 피를 아낌없이 흘린 탓에 올리비아의 발이 끌린 자리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아하하하! 너는 특별한 제물이 될 거야! 신께서 아주 기뻐하시겠지!”

광인처럼 허리를 접어 웃는 그레타의 뒤로 그녀의 말을 긍정하듯, 시커먼 얼룩처럼 보이던 제단이 이젠 검붉은 색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크라이어가 가만히 서서 멀거니 올리비아가 맥없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당사자인 올리비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제단 반대쪽으로 당겼다.

일자로 다물린 그의 입술 사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올리비아는 그가 아주 다급하고 강하게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직, 지지직.

크라이어가 그녀를 잡고 버티고 있는데도 올리비아는 조금씩 제단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더 힘을 주면 그녀가 다치리라.

그는 올리비아를 아예 품에 안기 위해 반대쪽 팔을 뻗었다.

다음 순간.

-으직. 콰드득.

무언가 찢어지고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크라이어의 동공이 세로로 수축했다.


“당신과 내가 뭐가 다릅니까.”

크라이어의 갈비뼈 아래에 칼을 박아넣은 티슨의 검붉은 눈동자는 이제 제단의 그것과 같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답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푹 찌른 칼을 그대로 휘적거리며 돌렸고, 내장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충격에 고통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크라이어조차 순간적으로 손에서 힘이 빠졌다.

잠깐 점멸하는 시야로 올리비아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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