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 반드시 자유로워질 테니까. (138/146)


#138. 반드시 자유로워질 테니까.
2023.07.20.


그가 예상보다 길게 자리를 비운 이유를 알게 된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은빛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올리비아의 상태를 훑은 크라이어는 단번에 가느다란 목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그는 자기의 고통에는 지독하게 무관심하면서, 그녀의 아주 작은 상처에는 지나치게 반응했다.


“목에 상처가 났다.”

“긁힌 정도야.”

올리비아는 잘게 떨리는 손을 휘저으며 손수건으로 제 목을 대충 눌렀다.

그 말대로 얼핏 피가 비치기는 했지만, 더 묻어나오지도 않는 얕은 상처였다.


“그보다 케슬…….”

-쿵!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에 박혀 있던 몸을 빼내려던 케슬란이 타의에 의해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전하.”

어느새 나타나 케슬란의 팔을 꺾고, 무자비하게 얼굴을 땅에 박아 제압한 아이작이 얼굴을 굳혔다.


“이 기사,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나 평온하니까 말이야.”

올리비아는 하얗게 질리긴 했지만, 말을 더듬거나 떨지 않았다.

크라이어가 그녀의 등을 받쳐주려 했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우, 괜찮아. 내 발로 서 있을게.”

그녀는 아이작을 향해 눈짓했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 것보다.”

하지만 아이작은 말을 하다 말고 케슬란의 뒷목을 아주 세게 내려쳤다.

단숨에 케슬란을 기절시킨 아이작이 그를 몇 번 더 툭툭 치고 눈의 움직임을 관찰한 후에야 덧붙였다.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았습니다.”

그에 올리비아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레타의 호위가 갑자기 미쳐서 황녀 궁에 침입을 감행했을 리는 없을 터.

그러니 그는 크라이어를 자신에게서 떼어놓기 위한 미끼였으리라.

그리고 그레타의 인형이 된 케슬란이…….


“케슬란 경이 지난번에 왔을 때 기억이 없다고 했었지.”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에 예기가 올올이 맺혔다.


“그리고 노르덴 국의 왕궁에 드나들었던 귀족들도 기억을 잃거나 인지 자체가 흐릿해졌고.”

“인형으로 만들었다는 건가.”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실해.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는 너무나도 선명한 증거도 있고.”

올리비아는 숨은 쉬는지 의심스러운 케슬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씁쓸함을 삼켰다.

충성스럽고 재능 있는 기사였건만, 불가항력인 일에 휘말리다니.

그나마 이전에 그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기억의 공백을 고백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노르덴국의 왕이 죽었다고 했었지. 그리고 케슬란 경이 완벽한 인형이 되었고.”

“인형을 하나 이상 유지할 수는 없다는 거군.”

“응. 그러니까 아이작.”

“네.”

올리비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명령했다.


“케슬란 경을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 꽁꽁 묶어둬. 크라이어도 빠져나올 수 없…… 아니, 빠져나오기 힘들도록 꽁꽁 묶어야 해.”

이내 아이작이 케슬란을 어깨에 메고 자리를 떠났고, 올리비아는 지체하지 않고 기사단과 케슬란의 가문으로 보낼 공문을 작성했다.

황녀의 명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 당분간 차출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당장 할 일이 끝나자 올리비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크라이어가 단번에 그녀의 허리를 감아 넘어지지 않게 막아주었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크라이어.”

“여기 있다.”

“살려줘서 고마워.”

그리 말하면서 그녀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제껏 저를 죽였던 이에게 이제는 살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다니.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직도 더 많이 바꿔야 하지만…….


“그리고 지금 방금 생각난 건데.”

“그래.”

“당신 과거 기억이 전혀 없는 거 말이야. 부활해서 그렇다기보다.”

“신의 인형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으. 입 밖으로 내니까 진짜 기분 더러워지네.”

올리비아는 그의 낙인이 찍힌 자리를 제 머리로 거칠게 문질렀다.


 


“당신이 신의 뭐건 상관없어. 반드시 자유로워질 테니까.”

더없이 단단한 선언에 크라이어는 그녀의 머리 위로 깊이 입을 맞췄다.


‘너는 내 것이다.’

언젠가 신이 제게 속삭였던 말은 그녀의 선언 앞에서는 한낱 헛소리가 되리라.

올리비아는 한 말은 반드시 지키니까.

***



“그레타 님.”

티슨이 그레타 앞에 무릎 꿇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의 명령으로 크라이어를 올리비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황녀 궁에 잠입했지만, 호되게 당한 탓이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나 핏자국은 없었지만, 내장에 타격을 입은 티슨은 입안을 채우는 핏물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런 티슨을 내려다보는 그레타의 눈에는 그가 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케슬란의 눈을 통해 모든 정황을 보고 있었다.

크라이어가 그녀의, 아니 케슬란의 검을 막아서는 그 순간에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전부 다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케슬란이 의식을 잃고 눈을 감은 탓에 그레타의 눈에도 더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올리비아를 암살하려던 계획이라고 치면 처참한 실패였다.

그렇지만 그레타는 고함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뒤틀어 올렸다.


“무사히 성공했네.”

애초부터 황녀를 죽이라고 케슬란을 보내지는 않았다.

케슬란의 입을 통해 오늘 네가 죽을 거라는 말도 그저 혼선을 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올리비아를 죽이고 싶은 그레타의 진심이 담겨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신께 바칠 특별한 제물을 그냥 죽여버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를 보낸 이유는 따로 있었고, 그 시도는 성공했다.

케슬란이 올리비아의 목에 남긴 아주 얕은, 종이에 베인 것 같은 상처.

그 하나면 됐다.

올리비아의 상처는 표식이었다. 너는 신께 바치는 제물이라는 표식.

그레타는 슈가의 조상, 그러니까 고대신과 계약하여 제물을 바치기로 약조한 그 욕망에 미친 사람처럼 빙빙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옛 르위르 가문의 사람과는 달리 고대신과 닿을 통로인 제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잡하고 힘이 많이 드는 낙인이 아닌 표식만으로 올리비아를 제물로 만들었다.

기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신이 관심을 가지고 선호하는 혈통인 볼셰이크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고대신과 그레타가 바라는 바가 일치했다.

올리비아의 죽음.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신은 볼셰이크이자 자신의 것인 크라이어를 흔드는 그녀를 삼키고 싶어 했지만…….

어찌 되었건 그레타가 정말로 피를 죽을 만큼 토하면서 만든 인형은 제 역할을 다했다.

그레타가 성공의 희열에 몸을 떠는 사이, 티슨은 의구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간 그 자신도 모르게 한 조각씩 쌓아 올린 의문이 어느새 그의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목을 빼고 히죽거리고 있었다.


‘치워.’

‘네네. 오늘은 그래도 숨이 붙어 있네요.’

 
황녀 곁에서 그분을 떼어놓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하나, 격돌은 한순간이었고, 티슨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내장이 진탕되어 무너졌다.

크라이어를 유인하기 위해 최대한 꼬리를 감추며 이동했던 시간이 아니었다면, 티슨은 임무에 실패했으리라.

그분의 강함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티슨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산을 보았고, 절대로 건널 수 없는 절벽을 마주했다.

그레타의 말처럼 자신은 힘이 생겼고, 그 자신도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황녀 궁에서 마주한 크라이어는 그야말로 그를 압도하다 못해 개미를 짓이기듯 밟아버렸지 않은가.

그보다 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차이가 극심할 줄은 부딪쳐 보기 전까진 몰랐다.

약하다. 그건 당연하다. 그와 자신은 태생부터 다르니까.

그는 신에게 직접 선택받은, 첫 번째고 자신은…….

그렇지만 제 손으로 직접 대륙을 정화할 힘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

꽤 오래 잤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을 때, 그레타는 그리 약조하며 자신에게 낙인을 새겼다.

티슨은 수긍했고, 신의 의지를 기꺼이 받들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보라.

어째서?

티슨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는 속에 담아 둘 수 없을 만하게 자라버린 의문이 드디어 고개를 쳐들었을 때.

-탕! 탕탕탕!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진한 강철의 내음을 풍기며 들어온 이들은 황실 기사들이었다.

그중 가장 앞서 있던 차가운 낯의 이가 그보다 더 냉한 소리로 그레타를 향해 말했다.


“귀하는 오늘부로 노르덴국으로 귀환하시오.”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챙겨갈 것이 있다면 지금 시간을 줄 테니 바로 준비하시오. 지금 당장.”

타국의 외교관에게 보이기에는 폭압에 가까운 태도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진노한 황제 폐하의 명령이 내렸기 때문이다.


‘당장 그것을 추방해! 감히 황궁에서 내 딸을 해하려고 들다니!’

 
딸을 향한 암살 시도를 전해 들은 아비는 폭발했고, 당장이라도 그레타를 죽이려 들었다.


‘추방해주세요. 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딸의 단호한 말을 이길 수는 없었고, 부글부글 끓는 화를 감추지 않은 채 그녀의 말대로 명했다.

그리고 그 즉시 황실 기사단이 움직였다.

평소에도 그리 고요하지는 않지만, 이토록 큰 소란은 없던 외교관 궁이라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 활짝 열린 문 너머의 대치를 힐끗거릴 법도 하건만.

타국의 외교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몸을 사리고 목을 움츠리며 제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황실 기사들이 무더기로 움직이는 일이다.

호기심에 모가지를 들이밀었다가 같이 목을 잡혀, 질질 끌려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국의 행사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살벌하지만 어디까지나 차분한 황실 기사들과 정면으로 대치한 그레타는 불만을 터뜨리지도, 논리적으로 항의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아무 가치도 없다는 듯 슥 훑어본 그녀는 기사들과 한마디도 섞지 않고 그대로 휙 떠났다.

필요해서 챙겨야 할 것도, 남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듯.

그 뒤를 티슨이 마치 없는 사람처럼 따랐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떠난 둘은 행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노르덴 국을 향해 일직선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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