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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너는 오늘 죽을 거다. (137/146)


#137. 너는 오늘 죽을 거다.
2023.07.17.


끊임없이 힘을 쓰는 그레타의 가슴과 속이 아니라 머릿속이 지글지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불이 붙어서 뜨거운데 한편으로는 미치도록 추워서 그레타는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뿌옇게 흐려지면서 마구 엉클어지는 시야까지.

가뜩이나 엉망진창이었던 그레타의 머릿속은 완전히 곤죽이 되어 온갖 생각과 망상, 현실과 착각이 마구 뒤섞여 돌아다녔다.

그레타의 눈이 흰자위만 남고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자, 곧이어 케슬란도 똑같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웅, 하는 이명에 어디선가 보니타의 비웃음과 기꺼워하는 신의 웃음소리가 교차해 울렸다.

그레타는 그 모든 소리에 둘러싸인 채 기어이 케슬란의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석상처럼 굳어 눈앞에 벌벌 떨리는 피투성이 손이 다가오는데도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다.

그레타는 손바닥으로 케슬란의 눈을 완전히 덮고 이전보다 더 빨리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손바닥부터 시작된 검붉게 울렁거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케슬란의 발끝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제 의지대로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간신히 거두어들인 그레타는 귀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하아……. 하……흐…… 흐으. 흐흐흐흐흐흐흐흐.”

신의 힘이 속삭이고 있는 건지, 본능인 건지 그레타는 직감했다.

드디어!

그레타는 신경을 긁는 소리로 숨이 넘어갈 듯 웃다가 뚝 그치며 말했다.


“황녀를 찔러라.”

“황녀를 찔러라.”

케슬란의 입에서 그레타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네가 할 건 황녀를 찌르는 거야.”

그레타는 환희에 찬 얼굴로 완벽한 인형이 된 케슬란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황녀를 검으로 꿰어 신에게 바칠 인형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르덴국에 있던 왕의 신형이 크게 들썩거리면서 온몸에서 피를 뿜어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누구도 알지 못했고, 심지어 그레타조차 알지 못했지만, 왕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왕세자 시절부터 그레타의 인형이 된 그는 케슬란이 완전한 인형이 되어 그의 자리를 대체한 순간 폐기되었다.

지나치게 오래 인간이 아닌 인형으로 버텨온 왕의 몸은 한정적인 그레타의 힘이 끊기자마자 버티지 못하고 멈춰버린 것이다.

인형의 주인인 그레타조차 알지 못하는 죽음이었다.

인형이 된 왕을 누구에게나 자주 보여 줄 수 없었기에 시중을 최소한으로 줄였던 탓일까.

-쨍그랑!


“꺄, 꺄아아아아악!”

노르덴 왕의 죽음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알려졌다.


“뭐라? 갑자기?”

“네. 그게, 온몸에서 피가…….”

왕실에서 온 전령을 맞은 귀족들은 선대에 이은 현왕의 급사로 혼란에 빠졌고, 수습할 만한 이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회의 끝에 그들은 대륙의 평화를 위해 모든 분쟁을 억제하는 제국에 다시 한번 읍소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을 바로잡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왕의 급사라니.

외부에서 도발이 들어오면 결코 대응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제국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노르덴 왕궁의 폐쇄가 시작되었다.


 

***



“왕이 죽다니.”

올리비아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긴급이라며 보좌관이 헐레벌떡 뛰어왔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급사라고만 하고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고.”

“알 수 있지 않나.”

물론 알 수 있었다. 노르덴 왕궁에 황제의 눈과 귀가 있었으니까.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는데. 이 이상 나온 이야기가 없어. 왕궁이 폐쇄 절차를 밟는 바람에 정보가 느리게 흐른다고 해.”

“왕궁을 폐쇄했다고.”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혀를 찼다.


“선대에 이어 현 왕까지 그럴 나이도 아니고, 건강 상태도 좋은데 갑자기 급사했잖아. 왕궁이 불길하다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때로는 목숨을 걸고 권력을 위해 머리를 풀고 달리는 게 위정자의 본능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상식 안의 위험을 감수할 뿐.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불길한 일이 계속 일어나는 곳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권력을 탐하는 이는 없었다.


“이건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을 지우거나 인지를 흐리게 만드는 마법이 걷힌 지금의 왕궁이라면, 누구나 그 신전을 볼 수 있겠군.”

“그렇지. 신전뿐이야? 그 안으로 들어가서 제단까지 일직선이야. 막아서는 사람이 없으니까. 불길하다는 이야기가 돌기는 해도 다들 쉬쉬하니, 만약 호기심 왕성한 귀족이 들어간다고 하면 말릴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펜대를 툭툭 두드리던 올리비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제단을 어떻게 해야 할 거 같긴 한데.”

크라이어의 말에 따르면 그 제단을 통해 곧바로 신과 대면했다고 했다.

그걸 대면이라고 해야 할지는 좀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거 뭐 어떻게 할 수는 있는 건가?”

“글쎄.”

모호한 답에도 올리비아는 그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뭐야. 뭔데. 확실하지 않아도 일단 말해 봐.”

“아마도.”

잠시 뜸을 들이던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마도? 뭐냐니까.”

그의 손에 달랑 들려 품에 쏙 안긴 그녀는 자연스럽게 편하게 자리 잡으며 재촉했다.

제 품 안에 딱 맞게 들어차는 올리비아아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내린 크라이어가 속삭였다.


“내가 닫을 수 있을 거 같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올리비아의 어깨가 크게 튀었다.

그녀는 찰싹 달라붙어 있던 몸을 휙 떼어내며 단단한 어깨를 콱 잡았다.


“어떻게? 언제? 무슨 수로?”

“그게 확실치 않군.”

“그게 뭐야!”

“말 그대로다. 그냥 느낌상 그런 것뿐이니까.”

그 시커먼 구덩이에 통째로 끌려 들어갔을 때, 검붉게 울렁거리는 것들이 올리비아를 부르고, 올리비아가 부름으로써 썰물처럼 밀려났다.

낙인 역시 단숨에 희미해졌으니, 아마 열쇠는…….

크라이어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올리비아는 바짝 긴장했던 등에서 힘을 쭉 풀어버렸다.


“뭐, 늘 확실한 건 없었지만, 어떻게든 헤쳐나왔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네가 원한다면.”

희미하게 웃던 크라이어의 시선이 한순간 베일 듯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잠시.”

“응?”

“외부인이다.”

그가 거미줄처럼 넓게 펼쳐둔 기감에 황녀 궁에서 느끼지 못했던 기척이 느껴졌다.

평범한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박자를 가진 심장박동과 움직임.

올리비아가 눈을 한번 깜박하는 사이 그는 그대로 사라졌고, 홀로 남은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빈자리에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일이나 할까.”

거한 한숨을 내쉰 올리비아는 다시 책상에 앉아 펜을 잡았고, 한동안 사각거리는 소리만 집무실에 울렸다.


“으. 으아아. 으아.”

얼마간 서류와 씨름하던 올리비아는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다 곧 몸을 일으켰다.

계속 앉아 있는 것보다 집무실 안에서라도 서성거리면서 서류를 보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차라리 잠깐 나갔다 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러다가 지난번처럼 다치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했기에 마음을 접었다.

서류 더미 사이를 미로를 더듬듯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하나하나 일을 처리하던 올리비아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늦네.”

크라이어의 귀환이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별일이야 있겠냐만은…….


“아이작이 또 고생하겠는걸.”

크라이어의 뒷수습을 담당하는 슬픈 아이작을 향해 잠시 애잔한 마음을 표하던 올리비아가 이제 앉으려고 몸을 돌리던 때.

-똑똑.

예상치 못한 노크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황녀의 집무실을 방문하기에는 꽤 늦은 시간이었기에 올리비아는 의아했다.

또 긴급 사안인가?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들어오라 허락한 그녀는 문 뒤에서 나타난 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슬란 경?”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지극히 기사다운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올리비아의 바로 앞에 선 케슬란이 허리를 숙였다.

예법에 어긋남은 없었지만, 어쩐지 좀 가까운 거리에 더욱 의아했지만, 케슬란의 말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래. 이 늦은 시간에 찾아왔으니 긴히 할 말이 없다면 곤란하지 않겠나.”

그의 충절과 관찰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더해서 지난번에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굳이 뾰족하게 답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문제였다.

지난번 보고 때는 이렇게 가까이 있지 않았…….


“너는 오늘 죽을 거다.”

만약 거슬릴 만큼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케슬란의 중얼거림에 올리비아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코앞으로 검이 날아드는 장면은 낯설지 않았지만, 결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빠른 검 끝이 그녀의 목 동맥을 가르려는 순간.



“올리비아!”

굉장히 낯선 크라이어의 다급한 부름과 함께 귀를 찢는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챙!

올리비아의 눈앞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불꽃이 튀기 무섭게 크라이어가 맞붙은 검을 크게 휘둘렀고, 케슬란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콰드득!

황녀의 집무실 특성상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설계되어 있기에 케슬란의 신형이 벽에 형편없이 처박혔는데도 뭔가 무너지는 굉음이 터지진 않았다.

다만 크라이어의 힘으로 케슬란이 박힌 벽이 그 모양 그대로 움푹 파였을 뿐.

뒤이어 집무실에는 짙은 적막이 내렸다.

그건 아주 묘하고 기분 나쁜 고요함이었다.

방금 죽을 고비를 넘긴 올리비아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크라이어 역시 그녀를 한 번 부른 후에 입을 열지 않았기에 이 적막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독하게 기괴했다.

올리비아를 향해 검을 빼 들고 암살하려고 한 장본인, 그러니까 지금 벽에 처박혀 입으로 피를 울컥 토해내는 케슬란에게서 아주 작은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었으니까.

크라이어는 케슬란이 더는 검을 들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확신한 후에야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핏기가 가신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레타의 호위인 낙인자가 왔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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