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 이 녀석 이상하다고. (135/146)


#135. 이 녀석 이상하다고.
2023.07.10.



“어이, 케슬란! 내가 어제 기가 막힌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야.”

케슬란이 속한 기사단의 파란 머리 동료가 그를 부르며 다가왔다.


“들어 보라고, 어제, 아니지. 어제는 들은 거고 나흘 전에 말이지…….”

한참 떠들어대던 파란 머리는 케슬란이 영 반응이 없자 그제야 말을 멈추고 눈을 껌벅거렸다.

평소에도 딱히 대단한 답이나 반응하는 놈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 케슬란? 이봐.”

 

 
파란 머리가 케슬란의 눈앞에서 손을 휙휙 저었지만, 여전히 그는 허공만 응시하고 있을 뿐.


“이 녀석 왜 이래? 이봐! 케!슬!란!”

“뭐야, 왜 소리를 뻑뻑 질러대.”

그의 고함에 근처에 있던 다른 동료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이 녀석 이상하다고.”

“엉? 케슬란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녀석은 우리 기사단의 마지막 기사라고.”

“농담이 아니라, 이걸 봐라.”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흔드는 다른 동료에게 파란 머리가 인상을 쓰며 손을 들었다.

-딱!

파란 머리가 케슬란 앞에서 손가락을 크게 튕기자 그제야 케슬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음? 왜 이렇게 앞에 모여 있어.”

“봐라, 멀쩡하잖냐. 너야말로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또또 어디서 들은 말 과장해서 옮기고 다니지.”

다른 동료가 괜히 파란 머리를 타박하자 파란 머리는 억울하다는 듯 케슬란을 향해 외쳤다.


“너 인마! 내가 한창 말할 때는 무시하더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케슬란은 언제 멍하게 있었냐는 듯, 여상하게 반응했고 입이 가볍고 크기고 동료들 사이에서 통하는 파란 머리였기에 다른 동료도 케슬란이 아니라 그를 탓하기 바빴다.


“뭐 쓸데없는 소리나 했겠지. 이제 시간 다 돼간다고. 가자. 늦으면 단장님 시선에 찔려 죽을지도 몰라.”

케슬란과 다른 동료가 어깨동무하며 앞서나갔고, 파란 머리도 뒤따르긴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억울함, 그리고 약간의 당혹감이 번져 있었다.


“아니, 정말로 이상했다니까. 눈도 깜박이지 않고. 저 녀석 괜찮은 건가?”

이맛살을 찌푸리던 파란 머리는 이내 앞에서 그를 부르는 다른 동료의 외침에 헐레벌떡 달려갔다.


“얼른 안 와? 늦으면 오늘은 훈련장 292바퀴 뛰라고 하셨다고!”

“그 애매한 숫자는 뭐야! 으아아! 간다, 지금 간다고!”

충격적인 지각 벌칙에 머릿속에서 케슬란의 이상행동을 순식간에 지워버린 파란 머리가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내달렸다.

티슨이 케슬란을 찾아 그레타 앞으로 끌고 간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

-달칵.

오랜 시간 쓰지 않던 보석함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마도 방 안 전체를 짓누르는 침묵 때문이리라.

올리비아의 머리를 단장하고, 옷을 정리하며 보석을 고르는 사용인들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고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중 하나이자, 과거에 일어났던 비밀스러운 비극으로 직계 혈족이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던 하인데르 후작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제국을 떠받치던 기둥 중 하나가 돌연 무너졌으니,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연민과 안타까움을 삼켰을 뿐.

하나, 올리비아는 그녀가 어떤 짓을 벌였고, 어떤 것을 꿈꿨으며,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등등,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속사정으로 전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올리비아는 보니타 하인데르의 죽음이 하나도 안타깝거나 아깝지 않았다.

보니타 하인데르는 정치적 균형감각이나 모략을 꾸미는 솜씨는 뛰어났지만, 제국에는 그보다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보니타는 자기 능력을 선대 하인데르 혈통을 말살하는 것으로 드러내, 빌어먹을 신을 섬기는 것으로 이어 나가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제국은 물론이거니와 대륙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도움이 되지 않다 못해 대륙 전부를 불태우려는 야심만만했던 자였지.

그렇지만 올리비아는 그녀의 장례식에는 참석해야만 했다.

앞뒤 상황을 모조리 아는 사람으로서 혹시라도 보니타가 고대신이나 그레타를 위해 남겼을 더러운 안배를 찾아야 했다.

더해서 보니타의 죽음에 얽힌 일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 황녀가 직접 유서 깊은 가문의 급작스러운 부고를 친히 위로한다는 의미도 전달해야 했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제껏 올리비아가 끼어들었던 사건에 하인데르 후작이 얼마간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황제 또한 그리 말했다.


‘주변에 귀 밝고 눈 맑은 이들을 잔뜩 배치해두었다. 귀찮게 하는 놈들이나 적당히 달래주고 오너라.’

올리비아는 장식 없이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볼셰이크의 피라…….

크라이어가 입을 다문 이후, 볼셰이크에 대해 말했던 이유를 물었다.

그렇지만 그도 딱히 정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도 알지 못했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고대신과 관련된 구린 냄새가 풀풀 풍겼기에 일단 이야기는 거기서 멈췄다.

더 캐물어봤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괜히 그런 말을 꺼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빌어먹을 신과 관계된 거겠지. 갑자기 혈통이 튀어나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끝났습니다.”

답도 없고, 답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문제를 가지고 머리를 공회전시키던 올리비아의 초점이 현실로 돌아왔다.


“레이스는 두 가지로 준비했습니다만.”

“작은 것으로 줘.”

추모는커녕 이리도 허무하게 같은 편의 손에 죽어 나갔냐며, 한번 웃어주기라도 하고 싶은 자의 장례식이다.

필요해서 가는 것이지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오늘의 차림은 볼셰이크 특유의 선명한 빨간 머리가 아니었다면, 황녀라고 알아보기 힘들 만큼 대단히 단출했다.

미사용 레이스가 달린 작은 모자를 기울여 쓴 올리비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런 그녀와 짝을 맞춘, 어떤 장식이나 자수조차 없는 밋밋한 예복을 입은 크라이어도 벽에서 등을 뗐다.


“가볼까.”

올리비아가 내민 손은 언제나처럼 크라이어가 잡았고, 둘은 나란히 궁을 떠났다.

***

회색 구름이 서쪽에서부터 몰려와 슬금슬금 하늘이 인상을 찌푸릴 무렵.

무겁고 축축한 공기 사이로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이 속속들이 자리했다.

정승의 죽은 개 장례식에는 가도, 죽은 정승의 장례식에는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권력자가 살아 있고 아니고의 유무를 극단적으로 나타내는 옛말은 지금의 하인데르 후작 가문에 딱 맞는 말이기도 했다.

후작 가문의 직계는 보니타 하인데르의 급사로 뚝 끊겨버렸고, 방계 가문이 그를 대체하기에는 지나치게 한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옛말이 무색하게도 보니타의 장례식장 자리를 채운 이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황녀 전하께서 참석하신다고 하셨죠.”

“네. 하인데르의 비극을 추모하기 위해서 몸소 오신다고.”

일단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자 차기 황제의 행차.

당연하게도 그녀의 황권을 굳건히 지지하는 황실 친화적인 귀족 가문, 황제파 가주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고 귀족 가문을 우선시하는 귀족파 가주들이 오지 않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친구는 가까이하고 적은 더 가까이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황실의 중심이 움직이는데 그를 견제하려는 이들이 엉덩이를 깔고 앉아 먼 곳에서 구경만 할 리는 없었다.

그리하여 가뜩이나 어수선했던 하인데르 후작저의 남은 이들은 제국의 가장 위에서 군림하는 이들을 맞기 위해 그야말로 전쟁을 치러내고 있었다.

장례식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이들은 눈이 돌아가게 바쁜 가운데, 구름처럼 모여든 조문객은 무리를 이뤄 침중한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선대도 그랬는데 이번 대도…….”

“그런 말 마세요. 괜한 소문 거리라도 만들면…….”

“암살이라고 했던가요?”

“사고라고 들었는데요.”

장례식장을 채운 이들의 입은 쉬지 않았지만, 그것이 진짜 의미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만큼 소리가 크진 않았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알력 다툼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들 중 하인데르 후작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가까이 지냈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정치적인 이해나, 가문의 거래로 얼굴을 맞대기는 했지만 보니타 하인데르는 누구와도 그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오래전 그녀가 선대의 비극을 딛고, 처음 후작위에 올랐을 때는 선대와의 인연으로 많은 이가 찾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냉랭하다 못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보니타의 태도에 질려 떠나버렸다.

그 이후 누구도 그녀를 사적으로 찾지 않았고, 그녀 역시 누구도 사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보니타 하인데르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고, 곧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게 되리라.

지금 그녀의 진짜 망령인지 혹은 망상에서 태어난 것일지 모를 것을 달고 있는 그레타조차 보니타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어수선하고 미미한 불길함과 싸늘함이 흐르는 장례식이 시작되기 몇 분 전.

-달칵.

장례식장에 들어서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관심 속에 살았던 그녀에겐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 뒤에 선 크라이어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며 목소리를 죽였다.


“누군가 날 태워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거 기분 탓인가? 음, 이거 살기 맞지?”

검이라고는 호신이나 사냥용으로밖에 잡지 않았지만, 회귀하기 전 전쟁을 지긋지긋하게 겪은 올리비아는 제 목을 틀어쥐려고 안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챘다.

올리비아가 뺨을 굳히며 주변을 흘긋 훑음과 동시에 크라이어가 답했다.


“그레타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어. 이런 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기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황녀인 자신을 향해 이토록 노골적으로 살기 어린 시선을 쏘아 보낼 사람은 그레타를 제외하면 없었다.

그 탓에 그녀 주변에 있던 외교관들 몇과 귀족들이 경악, 당황하는 표정으로 그레타의 주변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이 몰렸기에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지만, 그레타는 말 그대로 주변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올리비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잠깐 봐서 확실하지 않은데……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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