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134/146)


#134.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2023.07.06.



‘볼셰이크 말이다! 빌어먹을 다른 가문도 있지만, 찾을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볼셰이크도 문제군. 제국 황실의 피는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거긴 손이 귀해서 방계라고 하는 놈들도 진짜가 아니고…….’

눈을 거의 뒤집은 채 중얼중얼하던 마법사는 그 길로 비밀방으로 사라졌고, 그레타는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제 품의 단도를 매만졌다.

그래. 그런 기억이 있었지.

새삼스럽게 아비와의 추억을 떠올리던 그레타는 누렇게 바랜 종이를 소중하게 쓸어내렸다.


“황녀에게 걸맞은 죽음이 되겠어. 신의 제물이라니 지나치게 영광스럽기야 하지만, 신께서 바라신다면.”

최대한 올리비아를 잔악하게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신의 제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올리비아 볼셰이크.

세간에 알려지기를 볼셰이크 가문은 대륙에 역사가 기록되던 순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수천 년간 대륙은 온갖 제국과 왕국의 흥망성쇠를 거쳤지만, 볼셰이크는 작위가 내리거나 올랐을 뿐.

가문 자체는 그 자리에 언제나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리하여 볼셰이크의 역사를 탐구하면 대륙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가문.

하지만 볼셰이크와 깊이 연관된 이들이나 그들의 가신들이 볼셰이크를 칭하는 말은 좀 달랐다.

신이 편애하는 혈통.

신의 관심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끊임없이 받는 혈통.

그리하여 보통 사람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회귀, 빙의, 환생 그리고 차원 이동까지 심심하면 일어나는 혈통.

그레타에게 중요한 건 하나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그래. 이래서 신께서 그 여자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구나. 그 여자의 피 때문에!”

오로지 크라이어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어느 때보다 머리를 빠르게 굴린 그녀는 해법을 찾아냈다.


“티슨.”

“네.”

“제단은?”

“변동 없습니다.”

“그래.”

만약 필요하다면 자기 몸이 어느 정도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더 힘을 써서 손수 찢어 죽이고 싶었던 여자다.

한데, 제단에 필요한 제물에 딱 들어맞는 혈통이라니.

심지어 그 혈통 덕분에 아주 특별한 제물이 되어, 보통 사람 몇십, 몇백을 바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황녀가 죽기 전 고통과 공포, 비탄에 빠져 울부짖는다면 그 어느 제물보다 신께서 흡족해하시리라.

그 여자를 신에게 바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대가도 사라질 테고, 힘은 늘어나겠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입이 찢어져라 웃은 그레타는 덜덜 떨리는 손끝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이제야 처음으로 제게 도움이 되시네요.”

-툭, 투둑, 투투투툭.

볼셰이크라는 단어 위로 그레타의 코피가 번져 뭉개졌다.


“콜록콜록, 콜록.”

곧이어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낸 그레타는 피가 흐른 입과 턱을 문지르며 다시금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시뻘겋게 물든 입안에서 유리를 긁는 듯 듣기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형을 만들어야겠어. 미뤄두었던 일을 할 때가 되었구나.”

황녀의 목을 쥐고 제단까지 질질 끌고 갈 비수를 만들어야 할 때였다.

그리고 이미 그런 비슷한 용도로 쓰기 위해 점찍어둔 아주 적합한 자가 있었다.

반쯤 돌아간 그레타의 시선이 티슨이 온 이후 문밖도 아니고 몇 걸음 더 먼 곳에서 호위를 서게 된 케슬란에게 향했다.

***



“오늘 좀 춥지 않나.”

케슬란은 아침부터 등골이 서늘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은 탓에 유난히 싸늘하게 느껴지는 공기에 한마디 던졌다.


“무슨 소리야? 태양이 저렇게 난리인데.”

“그래. 푹푹 찐다. 푹푹 쪄.”

하지만 새벽 훈련을 마친 동료들은 흰소리를 들었다는 듯 케슬란을 퍽퍽 두드리며 지나갔고, 단장조차 그를 보며 말했다.


“아직 추우면 더 달리다 가라. 열이 펄펄 날 테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목덜미에서 등으로 얼음이 흘러가는 듯 오싹했지만, 케슬란은 기꺼이 하얀 거짓말을 입에 담으며 곧바로 훈련장을 떠났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단장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좀 작아진 거 같은데, 어디 아프기라도 하나?”

단장의 말대로 케슬란은 그레타의 호위를 맡은 이후 살이 좀 내렸고, 확 티 나지는 않지만, 얼굴색도 어두워졌다.

하지만 본인이 워낙 아무렇지 않게 다니고 말이 많지 않았기에 주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가뜩이나 매일 부대끼는 거칠고 무심한 기사들 사이에 턱선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고 일일이 반응하는 이가 있을 리도 없었고.

물론 케슬란의 상태를 일부분 알아챈 이가 있기는 했다.

그가 속한 기사단의 건강을 책임지는 황실 소속 의사는 얼마 전 그를 찾아왔다.


‘그 이후로 기억은 좀 어떻습니까?’

‘요즘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의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케슬란도 딱히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예컨대 기억의 공백을 경험하지 않은 건 자신의 호위 대상인 그레타와 직접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던가…….

어차피 호위 업무에 관련된 것이기에 의사에게 할 말은 아니기도 했다.

의사는 일반적인 문진을 쭉 한 후 당부했다.


‘기억의 공백이 아니더라도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찾아주십시오.’

당시에는 황실 기사의 표본처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케슬란은 제발 제 발로 의사를 찾을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나,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왜 이렇게 춥지.”

외교관 궁으로 향하던 케슬란은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의사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그의 소심한 성정상 의사를 본다는 작은 공포보다, 몸에 무언가 일어나서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더 큰 공포가 유효했기 때문이다.

호위 업무를 위해 외교관 궁으로 가야 했기에 케슬란은 최대한 빠르게 의사에게 향했다.


“음, 체온도 정상이시고, 기침이나 다른 증상도 없으시다고 하셨지요.”

“네. 없습니다. 잠도 잘 잤고요.”

“일단 약을 지어드릴 테니 약제원에서 받아 가시면 될 겁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별다른 병이 있다거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었다.

심지어 감기조차 아니었기에 케슬란은 별다른 소득 없이 굳건한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음. 왜 이러는 거지. 느낌이 아주 좋지 않아.

어쩐지 의사를 방문하기 전보다 지금이 더 심장이 빨리 뛰는 거 같고…….

케슬란은 제 심장 께를 쓱 문지르면서도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바로 뒤에서 들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멈춰 섰다.


“여기 계셨습니까.”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던 터라 케슬란은 혀끝까지 밀려 나온 비명을 간신히 목젖 아래로 밀어 넣었다.

다년간의 표정 관리로 놀란 얼굴이 아니라 굳은 얼굴을 한 채 뒤로 돌아선 케슬란은 티슨과 마주했다.

여전히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시체 같은 눈을 본 케슬란은 뒷걸음질 치려는 제 발을 필사의 의지로 붙잡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평소와 달리 오시지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무덤덤하다 못해 기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티슨의 답에 할 말이 참 많았다.

평소에는 찾지도 않고, 방에도 들이지 않는 것도 모자라 복도 끝에 서 있게 하더니.

심지어 늦지도 않았다. 지금부터 서둘러 가면 정시에 맞출 수 있는 시각이었다.

그리고 ‘찾아왔다’라고 했는데 대체 무슨 수로? 케슬란이 모든 궁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호인은 아니었지만, 황실 기사 중에서도 미래가 보장되다시피 한 유능한 인재였다.

게다가 소심하고 겁많은 자신을 너무 잘 숨긴 덕에 기사다운 기사로 소문이 난 터라 누구도 그의 행적을 함부로 떠들어 대지 않았을 터.

기사단의 동료들이라면 아랑곳하지 않았겠지만, 어디까지나 황궁 내부의 사람들에게나 그리할 뿐, 외부인에게는 칼같이 자르는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기만 해도 괜히 입안이 마르고 불쾌해지는 자다.

더해서 그 노르덴국의 외교관의 곁을 비우지 않는 자이기도 하고.

아침부터 오한이 들고, 심장이 빨리 뛰면서 느낌이 좋지 않았던 건 이 자를 이렇게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상황 때문이었나.

전혀 근거는 없었지만, 꽤 그럴듯한 가설을 세운 케슬란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차라리 티슨이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던 연유는 따로 알아보는 편이 낫겠지.


“지금 바로 가려고 했습니다. 가시죠.”

케슬란의 손짓과 함께 둘은 외교관 궁까지 무덤 같은 침묵과 동행했다.

케슬란은 아예 그에게 시선 부스러기도 주지 않았고, 티슨 역시 그레타의 명령으로 그를 찾은 것뿐이니 따로 말을 걸 이유가 없었다.

괜히 뒤에서 쫓기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거의 뛰듯이 걸은 덕분에 평소보다 오히려 일찍 도착했다.


“저는 그럼, 여기서.”

늘 서 있던 곳에 멈춰 선 채 일시적인 동료를 향한 예의로 고개를 숙이려던 케슬란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요. 오늘은 안쪽에서 계시라고 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자신을 찾았던 티슨이 또다시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안이라면.”

“곁에서 호위하라는 명령이십니다.”

케슬란은 그 즉시 그건 싫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학습된 묵직한 기사의 태도가 그 충동을 성공적으로 억눌렀다.

선뜻 그러마, 하고 움직이지 않는 케슬란을 열없는 눈으로 응시하던 티슨이 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가시……죠.”

잠깐 말을 버벅거릴 뻔했지만, 당황스럽다 못해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속은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다.

케슬란은 그레타가 있는 방까지 가는 내내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호위라면 호위 대상의 곁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곁으로 오라는 말에 반박할 이유도 찾을 수가 없다.

어차피 그가 방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자리에서 종일 서 있었던 이유도 순전히 그레타의 변덕 때문이 아닌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습격 같은 오늘에 케슬란은 혼란에서 허우적거리며 벗어나지도 못했건만.

-똑똑.


“티슨입니다.”

“들어 와.”

무정하게도 그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구역질 나도록 불길한 방의 문은 속절없이 활짝 열렸다.

다음 순간, 그레타와 케슬란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서 와요. 오늘은 좀 긴 하루가 될 거 같네.”

묘하게 긁어내리는 듯한 그레타의 쉰 목소리와 함께 케슬란의 등 뒤로 문이 탁,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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