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거야. (133/146)


#133.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거야.
2023.07.03.


슈가는 헤실헤실 풀리는 얼굴을 막지 못했다.


“큼. 크흠.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포크로 자허도르테를 콱 찍은 올리비아의 선언으로 온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내리는 빗줄기가 창에 부딪혀 톡톡거리는 소리가 점차 선명해지는 가운데, 올리비아는 양 뺨을 부풀린 채 열심히 간식거리를 입에 넣는 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인데르 후작의 눈은 사라졌지만, 티슨이라는 훨씬 더 위협적인 눈이 생겼기에 슈가는 전처럼 밖에 마음대로 나다니지는 못한다.


“빗길인데 오는 길은 괜찮았고?”

“네. 그렇지 않아도 위험하니 천천히 달리라고 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이 좋고 구름 한 점 없이 좋은 날씨였건만, 하필 오늘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오다니.

슈가는 날씨를 어쩌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괜히 제가 눈치가 보여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슈가의 기색을 그 자리에 모인 넷이 거의 동시에 알아차렸다.


 
그들의 대표로 올리비아가 피식 웃으며 아이의 콧잔등을 톡 두드렸다.


“뭐, 비도 보슬보슬 오는 참이고 안에서 오붓하게 즐기기 딱 좋지?”

“네. 네에.”

당대 황제 폐하와 하나뿐인 황녀 전하의 푸른 눈동자를 이르기를.

마주치면 뼛속까지 얼어붙을 만큼 시리다. 라고 했지만, 슈가는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황녀 전하의 투명한 푸른 눈동자는 넘실거리는 따끈따끈한 봄볕보다 더 따뜻한데…….


“오히려 비가 와서 더 운치 있고 좋은걸요? 차 맛도 더 잘 느껴지고.”

앙브흐의 재잘거림에 슈가도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런 아이의 얼굴에는 이제 그늘 한점 찾아볼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괜찮은가.

슈가가 밖으로 나설 수 있는 반경은 타렌 저택과 황궁, 그리고 그 둘을 오가는 곳이 다지만, 아이가 자유를 느끼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오히려 단계적으로 세상을 넓힐 수 있었기에 마음대로 밖으로 다닐 수 있다 하더라도 행동반경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원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던 제물이 되는 낙인이 찍힌 아이.

그 탓에 살아온 짧은 인생 전반이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이 어두웠고, 지금도 여전히 낙인을 짊어지고 있건만.

말간 얼굴로 볼이 미어터질 듯 몽블랑을 먹는 슈가는 그저 평범한 아이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더 먹어 더. 맘껏 먹고 맘에 드는 게 있으면 말해둘 테니까, 가지고 가렴.”

혀가 녹을 듯이 단 것으로 입안이 가득한 슈가가 햄스터처럼 빵빵한 볼을 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눈가까지 발그레하게 붉힌 슈가와 올리비아를 지그시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문득 불손한 시선을 느꼈다.

아이작은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그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뻐끔거렸다.

어린아이지 않습니까.

그 말은 이전에 아이작이 앙브흐와 슈가의 돈독한 모습을 보고 크라이어가 질투하지 말라며 했던 것과 같았다.

크라이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이작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아주 잠깐 의기양양했던 아이작은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아이작은 어느새 제 앞에 오밀조밀 모인 간식거리들을 발견했다.

무의식적으로 살랑거리는 분홍 머리를 향해 눈을 돌린 그는 마침 고개를 돌린 앙브흐와 눈이 마주쳤다.

방실방실 웃은 앙브흐는 곧 다시 슈가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아이작의 눈은 그대로 그녀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리고 아이작이 잔뜩 움츠러들게 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약이 오르지도 않아서 별다른 의미 없이 응시하던 크라이어는 피식 웃었다.

아이작이 봤다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미소였지만, 다행히 그는 여전히 앙브흐를 보고 있었다.

얼마간 소소한 잡담과 그보다 더 사소한 일상 이야기들이 침묵을 치우고 시간을 채웠다.


“자, 이제 몸도 데웠고 배도 좀 채웠으니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볼까.”

빈 찻잔을 내린 올리비아의 말에 슈가는 등을 바짝 세우며 눈을 또렷하게 떴고, 앙브흐 역시 자세를 바로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 둘을 흐뭇하게 보던 올리비아는 이제껏 알아낸 것들과 앞으로 있음 직한 예상을 찬찬히 쉽게 풀어 설명했다.

앙브흐는 놀라고, 슬퍼했으며, 환호했다가 끝내는 양손을 꼭 맞잡고 외쳤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충분해.”

올리비아는 만류하는 기색이 아니라 진심으로 앙브흐를 향해 그리 말하며 옅게 웃었다.

정말로 앙브흐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그랬던 탓에 자칫 다시 위험에 처할 뻔했고.

보니타 하인데르가 그레타의 명령으로 티슨의 손에 허무하게 목이 꺾이기 얼마 전.


‘전하, 타렌저에 수상한 자들이 아가씨를 노렸습니다. 뒤를 밟아서 꼬리를 잡은 후, 그것들의 머리를 아예 밟아주었더니 배후로 하인데르 후작을 꼽더군요.’

아이작이 여느 때와 달리 매우 짜증이 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그런 보고를 올렸더랬다.

물론 올리비아도 짜증을 참지 않았다.


‘전부 정리했어?’

‘네. 하지만 근본을 뽑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겁니다.’

‘하인데르 후작을 아주 바쁘게 해줘야겠네.’

보니타를 불 맞은 송아지처럼 정신없게 해주려고 준비하던 중에 그 당사자가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황녀 전하.”

올리비아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앙브흐가 눈가를 촉촉이 물들였다.


“영애, 이걸…….”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던 올리비아는 아이작이 냉큼 손수건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갈 곳 잃은 손수건을 쥔 그녀의 눈은 가늘어졌고, 크라이어는 아이작에게만 보이게 입 모양으로 한마디 해주었다.

아이에 이어 올리비아까지?

앞뒤 말이 전부 잘린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질투도 작작 하라는 의미를 아이작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아이작은 반사적인 행동이라며 속으로만 투덜거리면서도, 앙브흐의 손에 기어코 제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은 타렌가의 아가씨 덕분에 상비하는 손수건이 늘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가자미눈을 뜨던 올리비아는 곧 슈가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즘 낙인 상태는 어때?”

“아, 많이 희미해졌어요.”

“아픈 건?”

“그…… 음.”

입을 다물어 버리는 슈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준 올리비아가 말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거야.”

“네.”

그런 둘을 바라보는 크라이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고, 기울어지는 햇살도 그를 따라 서쪽으로 긴 빛을 뿌리고 있었다.

***

티슨이 노르덴국으로 떠난 이후 그레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처럼 초조하게 돌아다니지도, 머리가 터지게 고민하거나 갈등으로 속을 태우지도 않았다.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망가지고 엉망이 된 밀가루 반죽처럼 곤죽이었다.

배신.

크라이어의 배신.

배신, 배신, 배신, 배신.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어떻게 그분이!

작동이 멈춘 인형처럼 앉아 있던 그레타가 별안간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는 제 머리를 움켜쥐고 고래고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마구 토해냈다.

고통스러웠다.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찢어지다 못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제 몸을 다시 찢어발기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토해내고 또 토해냈을까.

그레타는 피눈물을 흘리며 코로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귀가 간질거리는 것이 거기서도 피가 나오는 듯했지만, 그녀는 형형한 눈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그래……. 보니타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 하기 무섭게 그녀의 귀에 보니타의 식은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그것 봐. 넌 아무것도 몰랐다니까?

보니타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웃음소리가 웅웅거렸다.

그레타는 제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 소리는 그치지 않아 그레타는 결국 다시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이미 쉬어버린 목에서 피가 나도록 고함을 지른 그레타는 손톱을 세워 대리석 바닥을 마구 긁었다.

배신, 배신하다니. 나를! 배신하다니!

그레타는 결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티슨이 돌아오자마자 그를 노르덴국으로 보냈다.

배신했어도, 그가 그랬어도 그녀는 결코 그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둘만 남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리라.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아니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전부 죽여버리고 둘만 남게 된다면, 그는 자신 곁에 있겠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지 않나.


“그러니까 변한 건 없어.”

아니, 황녀를 확실하게 처리해버려야지.

그런 것을 다른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편하게 정화할 수 없어.

감히 그분을 탐하다니. 감히 그분을 눈에 담고, 감히!

그래. 그것이 모든 걸 망친 거야. 그분의 눈을 어지럽히고 심상을 방해한 거지.

그러니 황녀는 최대한 잔인하고 확실하게 그의 눈앞에서 죽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의 눈에 씐 거짓의 껍데기를 벗겨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레타는 크라이어의 배신을 모조리 올리비아 탓으로 돌렸다.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감아 진실을 보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럴 리가. 그는 둘만 남는다고 해도 너와는 절대로 함께하지 않을 거야.

그레타가 보니타의 비웃음을 외면하다 못해 반박하려던 찰나.


“그레타 님.”

노르덴국으로 갔던 티슨이 돌아왔다.

그는 그녀가 요구했던 마법사의 기록을 건네주었고, 마침 몰두할 곳이 필요하던 그레타는 그 기록을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낙서 자체가 아무렇게나 나열되어 있고, 그나마도 많지 않아서 헤집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타는 기어코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이거야.”

그레타는 희열을 느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찾았다. 찾았어!”

염소수염 마법사가 남긴 엉망진창인 기록을 눈알이 터지도록 들여다보고 또 들이 판 끝에 발견했다.


“맞아. 어디선가 들어봤다고 했어. 그래. 볼셰이크. 볼셰이크의 피.”

어느 날 무언가가 잘 풀리지 않는 건지 씩씩거리던 염소수염 마법사가 그레타를 앉혀두고 떠들어댔었다.


‘모자라! 형편없이 모자란다고! 이런 피를 가지고는 안 돼. 이미 더럽혀진 놈들이 아니라 어린애도 똑같군! 역시 그 가문의 피가 필요하겠다!’

‘그 가문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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