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내 어디가 모자랐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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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내 어디가 모자랐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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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내 어디가 모자랐던 겁니까.
2023.06.29.
“사소한 것이었을 텐데, 잘 짚어냈어.”
“아무리 작은 거라도 황녀 전하의 명이라면 다 기억해야죠.”
척추반사 수준으로 올리비아에게 미소를 선사한 아이작이 살았다! 싶어서 슬그머니 사라지려고 다리에 힘을 주는 찰나.
“호위 행적 추적해.”
크라이어의 명이 끝나자마자 공식적인 축객령을 받은 아이작은 옳다구나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작은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노르덴 왕궁의 신전으로 다시 발을 들이게 되어 울음을 삼키게 된다.
***
아이작이 뒤를 밟는 티슨은 노르덴 국으로 들어가 왕궁으로 향했다.
“좀 이상한…….”
“쉿, 엄한 소리 하다가 끌려간…….”
뒤숭숭하고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왕궁 내부를 눈썹 한 올 미동도 없이 가로지른 그의 종착지는 고대신의 신전이었다.
‘제단을 확인해 봐.’
그레타의 명령만을 따르는 티슨은 곧장 제단으로 향했다.
마침내 도착한 제단은 고요했고, 그가 떠나기 전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
깊고 얕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가져다 둔 듯이 이질적인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검은 구덩이.
티슨은 홀린 듯이 그 앞으로 다가서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일정했고,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제단 주변을 전부 살핀 그는 처음 자리로 돌아와 죽은 생선의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티슨은 아이작이나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제단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올리비아처럼 기분이 더럽다거나 구역질 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제단을 통해 신의 손아귀에 끌려들어 갔던 크라이어처럼 반응하지도 않았다.
제단을 바라보는 티슨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회색지대에 있는 것처럼.
다만 그의 눈에는 삶보다 더 강한 열망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걸 이룰 힘을 얻게 될 거야.’
낙인이 찍히기 전 그레타는 그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힘을 얻었다.
제국에서 노르덴국까지 제대로 자지도 않고 말을 타거나 달렸는데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말의 목을 단숨에 꺾어버릴 힘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는 제 등에 찍힌 낙인을 쓰다듬을 수 없었기에 그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신이시여.”
깊이 허리를 굽혀 이마를 바닥에 댄 그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생기 없는 찬양이 흘러나왔다.
슈가나 크라이어와는 달리 그는 낙인에서 아픔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픔을 느끼는 조건, 그러니까 타인에게 느끼는 애정이나 호의, 설렘이나 감사함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티슨에게는 날 때부터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자신을 보고 슬퍼하거나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땅에 고개를 박고 신을 경배하는 그의 하나뿐인 열망이 강했던 탓일까.
열기 없는 인형으로 살아왔던 그도 힘이 생기면서 본능적으로 더 큰 힘을 갈구한 탓일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지만, 천천히 땅에 처박았던 얼굴을 든 티슨이 내뱉었다.
“내 어디가 모자랐던 겁니까.”
만약 자신도 그분처럼 신에게 직접 선택받았다면, 그분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직접 정화를 시작할 수 있…….
하나의 욕망만으로 움직이던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크라이어를 만난 후에 움튼 것이었다.
그건 세간에서 말하는 열등감 혹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질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평생 느껴본 적이 없고, 타인의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티슨은 알지 못했다.
다만 속에서 꿈틀거리며 존재를 과시하는 그것을 방치했을 뿐.
그 자신이 가진 것인데도 그것의 영향력과 끝을 티슨은 결코 알지 못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티슨은 제단에서 물러나 노르덴 왕에게로 향했다.
그레타의 두 번째 명령을 이행해야만 했으니까.
“망가지고 있나.”
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야말로 꼭두각시 인형처럼 옥좌에 앉아 있는 왕을 바라보다 결론을 내렸다.
저건 얼마 지나지 않아 망가질 것이다.
볼 일을 마친 티슨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곳으로 가서 기록을 전부 가지고 와.’
그레타의 세 번째 명령인 염소수염 마법사가 남긴 것을 모조리 회수하기 위해서.
두 번째 명령을 수행했던 것처럼 세 번째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레타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고, 그곳에서 무엇을 가지고 나올지도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티슨은 왕궁의 깊은 심부, 왕의 침실 바로 옆, 비밀 문의 손잡이인 다른 타일과 미묘하게 다른 바닥 타일을 툭 찼다.
벽이 미끄러지면서 열리자 그는 빛 한점 없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마법사의 비밀 방은 오랜 기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먼지가 쌓였고 공기는 탁했지만, 그 덕분에 모든 것이 온전했다.
티슨은 그곳에 자주 드나든 사람처럼 익숙하게 방을 뒤져 마법사의 기록을 찾아냈다.
고상하게 표현해서 기록이지, 기실 그건 마법사가 아무렇게나 떠오를 때마다 휘갈겨 놓은 종이 모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무엇이건 필요한 때가 있는 법.
그레타에게는 지금 그따위 낙서 무더기라도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물론 티슨은 그레타의 심정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에 그저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종잇조각까지 챙긴 후 방을 나섰다.
티슨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쉬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명령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성취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일이 끝났으니 그레타에게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으며 티슨의 뒤를 밟던 아이작은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신에 그 추종자라더니, 정말이지 젠장 맞게 기분 더럽다고.
***
슈가는 낙인이 찍힌 옆구리를 매만지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공놀이 이후 오랜만에 찾은 황녀 궁에서 황녀 전하와 무서운 기사님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의자에서 훌쩍 뜬 다리를 동동거리다가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님. 르위르 님?”
“아.”
“차가 식어서 다른 것으로 준비하려고 하는데, 선호하시는 차 몇 가지가 있습니다. 수국차와 실론, 리로이 꽃차입니다. 특히 그 중 리로이 꽃차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선하답니다.”
황녀 궁 사용인의 말에 슈가는 잠시 눈만 깜박거리다가 뒤늦게 답했다.
“그러면 리로이로.”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슈가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미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따끈하게 데운 새 찻잔을 내어왔고, 곧 온실 전체에 향긋한 리로이 향이 은은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조그마한 리로이 꽃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는 모양이 보이는 투명한 찻주전자가 기울었다.
옅은 노란빛이 찰랑거리는 찻잔을 쥔 슈가는 그 찻물에 무언가 보이기라도 하듯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황녀 궁의 사용인이 자신이 선호하는 찻잎을 모조리 아는 것도 모자라 그 모든 찻잎이 전부 구비하고 있다.
자신이 즐기는 차는 전부 단맛이 나는 것이라, 단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으시는 황녀 전하의 궁에서 굳이 두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손님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슈가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둥실둥실 떠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딱 알맞게 식은 차를 조금씩 마셨다.
아이의 찻잔이 반쯤 비었을 무렵.
아늑하던 온실에 한줄기 서늘한 바깥바람이 불었다.
“슈가!”
저를 부르는 앙브흐의 발랄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난 슈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아이의 검붉은 눈동자에 곧 그보다 훨씬 선명하고 투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저, 전하를 뵙습니다.”
“슈가, 오랜만이네. 몸이 가벼워 보여. 향도 좋은데? 나도 그걸로 한잔.”
조금 엉거주춤하기는 했지만,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아이의 예법을 가볍게 칭찬한 올리비아는 자연스럽게 슈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의 곁이 아닌 곳에서 보는 것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크라이어 역시 바로 곁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서서 슈가를 향해 짧게 눈짓했다.
“저도! 저도 그걸로 한잔할게요!”
“술이 아니라 차야, 영애. 아, 찻잔 두 개 더 준비해.”
앙브흐가 손을 흔들며 차를 마치 술처럼 주문하자 짧게 웃은 올리비아는 찻잔이 더 준비됨과 동시에 사용인들 전부를 물렸다.
“이건 무슨 찹니까?”
어느새 나타난 아이작이 불쑥 입을 열었지만,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그림자에서 예고도 없이 쑥쑥 솟아나는 것에 다들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리로이 꽃차야. 단맛과 은은한 향이 나는 게 특징이지.”
“어라, 황녀 전하 단 건 안 드시……우읍.”
“오늘도 안 괜찮아 보이시네요. 자자, 이거 드세요.”
아이작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앙브흐가 냉큼 그의 입을 에끌레어로 막았다.
눈치가 없기는커녕 너무 좋아서 탈인 그는 저항 없이 입을 채운 에끌레어를 우물거렸고, 슈가의 뺨이 한층 더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 크라이어조차 단 맛 나는 차를 말없이 한입 들이켰기에 온실은 잠시간 안온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아니, 내 앞이 아니라 슈가 앞에 놓아주라고.”
“지금은 네가 먼저 먹어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올리비아는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자신의 앞에 쌓이는 각종 달달한 다과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온갖 간식거리를 그녀 앞에 아예 쌓아둘 기세로 밀어주던 크라이어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이걸 다 어떻게 먹으란 거야?”
“다 먹을 필요는 없다만.”
“그럼 먹을 만큼만…….”
여느 평범한 연인들과 다를 바 없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앙브흐는 양손을 마주 잡고 눈을 무시무시하게 반짝거렸다.
맑은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이작이 황급히 속삭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 걸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아무 말도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어머, 그건 아니죠. 전하께서 저렇게나 알콩달…….”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라고요. 남의 연애에 끼어들면 말 뒷발에 차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에 이어 앙브흐와 아이작까지 속닥거리며 아웅다웅거리기 시작하자 슈가는 난감한 얼굴로 올리비아가 선뜻 밀어준 밀푀유를 콕 찍어 오물거렸다.
다들 사이가 너무 좋아서 가끔은 몸 둘 바를 모르게 될 때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