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 볼셰이크의 피 말이다. (131/146)


#131. 볼셰이크의 피 말이다.
2023.06.26.



“머리가 좀 이상한 여자의 계획을 어떻게 믿어. 그나마 계획이라는 것도 다 하인데르 후작의 머리에서 나온 걸 텐데. 그러니 직접 묻는 것보다 움직임을 보는 게 훨씬 정확할 거야.”

대단히 논리적이지만 한없이 비논리적인 답을 한 그녀는 저도 제가 하는 짓을 아는 건지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크라이어는 눈가를 길게 접어 웃으며 잘 익은 사과색으로 익어가는 뺨을 살살 매만졌다.


“전에는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손수 보내더니.”

“그, 그때는 그레타를 몰랐으니까!”

“지금은 알고?”

물면 당장 과즙이 배어 나올 듯 빨갛게 익은 올리비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크라이어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웃음과 약간의 장난스러운 기색에 올리비아는 화를 내려다 말고 퉁명스럽게 그를 밀어냈다.


“적어도 당신이 직접 그 여자를 만나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지.”

그의 숨결이 남은 뺨을 괜스레 문지르던 올리비아가 목을 한번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일단 이 행적을 토대로 주변을 더 캐봐야겠어. 그레타의 움직임이 첫 번째 우선순위지만, 보니타가 사라졌으니 그 호위인 티슨이 더 활발히 움직일 거야.”

“그쪽은 아이작을 붙여두도록 하…….”

그답지 않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크라이어를 향해 올리비아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일 초, 이 초, 그리고 삼 초가 지나 올리비아가 입을 열려는 찰나.


“호위가 황궁을 떠났습니다.”

마치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아이작이 그림자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당신이 불렀어?”

“아니요. 호위가 평소와 다르게 움직여서 얼른 보고하러 왔습니다.”

올리비아의 질문에 아이작이 곧바로 답했지만, 충분한 답은 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읽은 크라이어가 덧붙였다.


“그에게 그놈을 주시하라고 명해두었다.”

올리비아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이미 아이작에게 티슨을 주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의 뒤를 밟으면서 끔찍하거나 구역질이 나지는 않았지만, 자주 불쾌감을 느꼈다.


‘인간 같지가 않던데요.’

크라이어에게 투덜거린 감상을 티슨을 보면서 끊임없이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 같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일 텐데.’

‘주인님처럼 인간 같지 않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 특유의 그 생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숨도 쉬고 심장도 뛰고 있기는 하지만 인형에 더 가까운 느낌이라.’

인간과 완벽히 같지 않아도 어느 정도까지 유사한 개체를 보고, 사람들은 ‘불쾌한 골짜기’를 느낀다고 한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 있지 않아 보이는 존재가 사실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작이 티슨을 보면서 느끼는 위화감과 미묘한 기분 더러움이 바로 그 불쾌감이었다.

기실 아이작은 티슨에 대해 아주 정확한 평을 내렸다.

티슨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기 없이 삶을 갈망하지 않고, 살아 있지 않아 보이면서, 열기를 가지는 삶의 목표는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그 빌어먹을 신과 관련된 인간들은 하나같이. 으…… 아니, 슈가는 빼고요. 주인님도…… 음.’

아이작은 차마 크라이어와 슈가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도 없고, 그레타나 티슨과 같다고 쌍욕을 할 수도 없었기에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크라이어는 아이작의 그런 감상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뒤이은 보고를 눈짓으로 명했을 뿐.

이후 이어진 아이작의 보고가 크라이어의 입을 통해 올리비아에게 전해졌다.


“황실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볼셰이크를 조사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게 그거지. 흐음.”

턱을 톡톡 두드린 그녀가 아이작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지나치게 뜬금없긴 하지만, 그래서 뭘 알아 간 거 같아?”

“그걸 특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 볼셰이크의 역사인데요.”

“하긴. 뭔가를 특정해서 알아보려고 해도 역사서가 지나치게 많아서 말이지.”

올리비아는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웃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게 나하고 깊은 관련이 있고, 절대 나에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건 알겠어.”

이제야 자신을 건드리려는 이유는 모르겠…… 아니, 설마.


“크라이어. 당신 제국에 남아 있으려는 이유를 뭐라고 했어? 전에 말했던 대로.”

“그래. 대륙 정화를 위해 반드시 제국을 무너뜨려야 한다면, 황실의 안쪽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지.”

“맞아. 노르덴국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하라고 했었지.”

대륙을 불태우려면 제국부터 무너뜨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긴 했다.

가장 견고하고 거대한 지지대가 무너지면 그보다 약한 것들은 연쇄적으로 쓰러지기 마련이니까.

물론 그레타는 크라이어가 어떤 말을 했건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어쨌든 그가 제국에, 그것도 황녀의 곁에 머무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그럴싸한 이유였다.

그러니 크라이어가 올리비아 곁에 머무는 걸 이제까지 묵인했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그레타는 내가 빌어먹을 신의 존재를 아는 걸 모르잖아? 설마 알아챘나? 그래서 날 제거 하려고?”

“그랬다면 이렇게 에둘러 조사를 하지도 않았을 거다.”

“아…… 하긴.”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는 갑작스럽게 제 목을 쥐는 크라이어의 손을 멀뚱멀뚱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주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목이 부러질 텐데, 그녀의 푸른 눈은 평온한 호수 그 자체였다.

정작 조금 떨어져 있던 아이작이 경기를 일으키며 입을 뻐끔댔을 뿐.

크라이어는 그런 올리비아를 지긋이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만약 네가 모든 것을 안다는 사실을 그 여자가 알았다면, 곧바로 네 목을 가르고 피를 보러 왔을 거다. 황가의 피는 특별하니까.”

“그렇지. 대륙에서 제국이 가지는 의미가 크니…….”

“아니. 볼셰이크의 피 말이다.”

“뭐?”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크라이어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손끝으로 그녀의 목선을 훑으며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자신조차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볼셰이크의 피가 특별하다? 볼셰이크는 분명 아주 기묘하게 역사 깊은 가문이긴 하지만 그 혈통 자체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

한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꺼낸 거지?


“크라이어?”

“그 여자가 뭔가 알아차린 건 아닐 거다.”

그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올리비아의 부름에 원래 하려던 말을 했다.

그녀는 크라이어의 상태가 미묘하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캐물으려고 해도 뭘 물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 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사이, 구석에서 잔뜩 숨을 죽이고 있던 아이작이 이미 그림자에 한 발을 넣은 채 물었다.


“전하, 저는 이만 물러나도 될까요.”

그가 크라이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는 걸 아는 올리비아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아 참.”

그녀가 이제 막 생각난 듯 재빠르게 떠나려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전에 노르덴 국에 갔을 때, 왕을 본 적이 있지?”

“네. 신전 벽을 무너뜨리기 전에 잠깐 봤습니다.”

“그때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어?”

“이상한 점이라니요?”

“그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없었나 보네.”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흔들자 아이작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황녀 전하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슈가만큼 큰 건 아니었지만, 어쨌건 아이작에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축축해지는 등을 적시는 식은땀의 이유는 비단 그런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크라이어가 지금은 일견 무심해 보이지만, 언제 살기가 날아와 제 턱 끝을 겨눌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없는 걸 있다고 거짓을 고할 수도 없는 노릇.

아이작은 억울했다. 그가 노르덴 국의 왕을 보긴 했지만, 코앞에서 본 것도, 하다못해 알현하는 귀족처럼 가까이선 본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인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공사판 인근에서 서성거리다가 노르덴 왕이 행차했다는 말에 먼발치에서 스치듯 본 게 다였다.

아니, 그 후에 앙브흐를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올 때, 좀 가까이서 보긴 했…… 어라?

평소에도 그랬지만, 올리비아 앞에서 더욱더 가열차게 머리를 굴린 아이작이 냉큼 입을 열었다.


“노르덴국의 왕에 관해서 저는 별다른 걸 못 느꼈지만, 타렌가의 아가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작은 눈 사이를 좁히며 앙브흐의 말을 정확하게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왕이 눈을 한 번도 깜박거리지 않았다고요.”

“눈을?”

“네. 사람이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가씨도 잘못 본 것 같다며 잊어달라고 했지만.”

그는 제 눈가를 툭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저도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확실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왕은 벽이 무너져 난리가 났던 그 먼지 구덩이에서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까요.”

올리비아 역시 아이작의 말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지만, 그레타를 신경 쓰기 바빴던 그때 존재 자체가 희미했던 노르덴왕의 눈 깜박임까지 떠올리지는 못했다.

크라이어를 향해 무언으로 묻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군. 지금 왕뿐만이 아니라 선대 왕도 눈을 깜박이는 걸 본 적이 없다.”

올리비아를 만나기 전까지 타인은커녕 자신에게도 일말의 관심 부스러기조차 없던 크라이어였기에,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돌에 조금 이상한 무늬가 있다고 그걸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인간을 가뿐히 넘어서는 그의 관찰력과 기억력은 과거의 한 장면을 그대로 불러냈고, 아이작의 말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눈을 깜박이지 않는 사람이라니, 확실히 기괴하네. 귀족들이 위화감을 눈치챈 이유는 그것이었나 봐.”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거리는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거렸다.


“잠깐 보거나 선대 때처럼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왕과 눈을 맞대고 한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이상하다고 느꼈을 테지.”

이로서 찜찜하던 문제가 하나라도 해결되었다.

고대신과 관련된 의문이나 문제가 이토록 시원하게 풀린 예는 없었건만.

올리비아는 대단히 개운한 얼굴로 아이작을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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