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 아니. (130/146)


#130. 아니.
2023.06.22.


평소 올리비아 주변에 촘촘히 거미줄처럼 감각을 뿌려두고 모든 위협에 대비하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그런 크라이어조차 그레타의 기척과 심장 박동, 근육의 움직임이 단 며칠 만에 그토록 달라졌으리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몰골이 되기 전의 그레타는 신의 힘을 남용한 대가를 치르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근육도 비틀리고 있었기에 극적인 변화는 더했다.

크라이어는 황녀 궁에 그레타의 기척이 끼어들었다는 건 알았다.

다만 그 기척이 그레타인지, 혹은 몸이 좋지 않은 황녀 궁의 사용인인지 구분하지 못했을 뿐.

그렇게 천운인지 불운인지 모를 이유로 황녀 궁의 가장 깊은 곳에 그레타는 우뚝 멈춰 섰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에 닿는 대리석의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지만, 발에 감각이 없는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렸더라면 오히려 나았으리라. 그녀의 활활 타는 속을 조금이라도 식혀줄 수 있었을 테니까.

곳곳에 빛을 밝히긴 했지만, 몇 걸음 앞의 거대한 문 너머에서 비치는 빛처럼 환하지는 않았다.

그레타는 해골처럼 마른 손을 들어 거대한 문의 둥근 문고리를 콱 잡아챘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곳에 크라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을 만나기만 하면 돼. 만나서, 만나기만 하면.

엉망진창인 머릿속에서 덜그럭거리며 굴러다니는 하나의 일념으로 그레타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린 문 뒤로 그녀는 원하던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레타는 멍청한 얼굴로 시야를 가득 채운 하얀 산을 바라보았다.

몇십 초가 지난 후에야 간신히 그것들이 서류 더미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레타는 다시 몸을 질질 끌었다.

미궁에 갇힌 듯 어지러운 서류를 헤치고 간신히 흔들리는 은발을 발견했을 때, 그레타의 뻘건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의 그레타의 신체 활동은 대가로 받는 고통으로 인해 가끔 경련하는 근육 외에는 거의 멈춰있었다.

아아, 크라이어 님.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를 향해 달려들 듯 손을 뻗으며 입을 벌렸지만,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를 부르지도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버렸다.


“……니, 여기서부터는…….”

“그런 거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웅웅거려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레타의 눈에 똑똑히 보이는 건 있었다.

그토록 눈에 그리고 잠 못 이루게 보고 싶어 하던 크라이어는 황녀와 너무나도 가까웠다.

이마를 맞댄 듯 서로의 머리카락이 섞이다가 흩어질 만큼 물리적으로도 가까웠지만, 그보다…….

그레타는 작살에 맞은 듯 몸을 벌벌 떨면서 목에 핏발이 서도록 턱에 힘을 줬다.

호위니까. 호위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황녀와 그분이 함께 있는 건 당연한 거야.

당장 티슨만 해도 그녀가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상 늘 곁에 있지 않은가.

황녀 궁에 오기 전 황녀에 대한 자료를 긁어오라고 시키지 않았다면, 지금도 충실하게 뒤를 지키고 있을 터.

그래. 호위란 마치 방 안의 늘 같은 곳에 있는 가구처럼 호위 대상의 바로 곁에서 맴도는 게 지극히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이상하지 않아.

단순한 호위일 뿐이야.

저렇게 가까이에 있는 것도 일이라는 거지.

그레타의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외면해둔 불안과 원하는 희망이 교차하며 차오를 무렵.


“……잠시…….”

“오늘은 안…….”

서류의 산맥 너머로 작게 실랑이 소리가 들렸다.

그에 시체 빛이었던 그레타의 뺨에 조금씩 생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이도 좋지 않잖아? 그래, 맞아. 단지 이용하기 위해 호위로 머무른다는 그분의 말이 맞다고!

물론, 황녀가 그분을 사모……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분께서 처음 제국으로 가실 때 황녀가 직접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에 돌던 소문 역시.


‘황녀 전하께서 이름도 모를 기사에게 첫눈에 반해서…….’

‘어머나,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때의 기억이 구멍 난 치즈처럼 듬성듬성 떠오르는 동시에 그레타의 속 깊은 곳에서 검붉은 불길이 확 치솟았다.

그건 분노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화염이었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걸 그레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 안을 좋을 대로 헤집으며 갉아 먹고 뱉어버리는 신의 힘이 꿈틀거리며 구역질 나는 악의를 드러냈다.

아아, 신께서도 저 황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 대륙의 정화가 시작되는 그날, 가장 처음 땅에 뿌리는 피는 저 여자의 것이 될 테니.

반쯤 검어진 시야 때문에 목을 기괴하게 꺾으며 두 사람을 살피던 그레타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에 매달린 보니타의 그것처럼.

속에서 꿈틀거리는 신의 허락까지 받아낸 그레타는 크라이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확인해야 할 것은 이미 했다. 역시 내가 맞았어.

크라이어 님은…….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잘 보지 못하는 그를 전부 담기 위해 바닥에서부터 핥듯이 그의 전신을 훑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젠 그의 곁에 있는 올리비아를 아예 지워버리고 제가 그 자리에 있는 망상을 하며 몽롱해지던 그레타의 시야 끝에 저녁노을을 받아 갖가지 색으로 물든 한 쌍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레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 크라이어와 올리비아의 그림자가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던 그레타는 미친 듯이 생각했다.

그럴 수 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언쟁하다가 서로 얼굴을 붉히며 고함치다 보면, 가까이 붙을 수도 있으니까. 저건 아무것도 아니…….

그레타는 필사적으로 자기 눈으로 본 장면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발아래를 지지하고 있던 가장 굳건하고 가장 사랑스러웠던 기둥이 송두리째 뽑혀 나갈 것 같았으니까.


“하아……”

하지만 현실 부정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야 이어갈 수 있는 법.

평소에는 아니, 그를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른하고 만족감이 넘치는 그의 옅은 숨소리가 그레타의 귀에는 천둥보다 크게 울렸다.

그제야 겹친 그림자가 아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를 직접 눈에 담은 그레타는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고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두 개의 그림자가 하나로 보였던 이유는 결코 실랑이나 언쟁 따위로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달려들어서가 아니었다.

온 세상을 불태우는 노을이 절정으로 치달아 저물어가기 직전의 집무실에서 두 사람은 입을 맞추고 있었다.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허리를 당겼고,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붙은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결이 흩어지다 빨려들어 갔다.

그레타는 본 적도 없고, 볼 거라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크라이어가 그곳에 있었다.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던 남자가 아닌, 올리비아만을 탐하는 남자.

늘 텅 비어 있던 검붉은 눈동자가 아닌, 올리비아만을 온전히 담은 눈.

신의 첫 번째 전사이자 둘만의 낙원에서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남자가 배신했다.

신과 자신 모두를!

그리하여 그레타는 비명을 질렀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누군가 억지로 눈꺼풀을 잡은 채 고정한 듯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

그녀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절규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새는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은 채 그녀가 내지른 비명은 그저 속에서만 그레타를 산채로 집어삼켰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얼룩덜룩하던 그레타의 시야를 시체의 회색빛 손이 까맣게 덮었다.

내 말이 맞잖아? 그렇지?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뭘 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나? 어리석은 것아! 그가 황녀의 곁에 머문 진짜 이유를 알았냐고!

그레타의 귓가로 보니타의 비웃음 섞인 광소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

올리비아는 기가 막힌다는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표정으로 손에 쥔 단 한 장의 서류를 읽고 또 읽었다.

-파스락.

이윽고 그녀는 서류를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손자국이라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잖아!”

보니타 하인데르의 장례식 전 정보를 빼내는 데 성공한 올리비아는 그녀의 사인이 교살, 그러니까 타살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확인해야 할 것은 나머지 하나.

올리비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크라이어를 올려다보자, 그는 간단히 답했다.


“목에 남은 손자국이 그 호위 놈과 일치한다.”

직접적으로 치수를 재거나 남은 흔적에 티슨의 손을 대본다는 극단적인 검증은 아니었지만, 크라이어의 눈대중을 올리비아는 전적으로 신뢰했다.

지나가는 사람의 근육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는 남자의 눈썰미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확답에 올리비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예상이 전부 맞아떨어졌네. 그레타가 보니타를 죽인 거야.”

적의 내분이라니.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니 아주 좋은 소식이긴 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마음 놓고 기뻐하기보다, 그 후 그레타의 움직임이 적힌 서류를 뒤적거렸다.


“칩거했다고 나오긴 하는데. 보니타를 죽인 후에야 드디어 계획이라는 걸 세우고 움직이려고 하는 걸까?”

“글쎄.”

크라이어는 굳이 올리비아에게 그 기간 내내 그레타가 무수히 많은 초대장을 보냈다고 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기간에만 초대장이 온 게 아니라 그 전부터 꾸준히 미친 듯이 초대장이 왔었기 때문이다.

원래 많이 오던 초대장에 몇 장 더해졌다고 특이하고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한번 찾아가 볼까?”

“아니.”

크라이어가 그레타를 먼저 찾아간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올리비아가 숨 쉴 틈도 없이 딱 잘라버렸다.

스스로도 너무 빠른 답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뒤이어 말을 덧붙이긴 했다.


“갈 이유가 없잖아. 아니, 이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맞아. 굳이!”

말을 하면서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를 뽑아낸 올리비아가 뿌듯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라면 찾아가지 않는 것도 굳이? 가서 묻기만 하면 알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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