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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나는 너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으니까. (129/146)


#129. 나는 너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으니까.
2023.06.19.


심지어 그날 이후 귀족들은 왕궁에서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기억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흐릿하게 안개가 낀 듯 어렴풋한 것만 떠오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아마 선대 노르덴의 왕을 인형으로 만들고 왕궁을 장악했던 염소 수염 마법사와 그레타가 왕궁에 그런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겠지.”

귀족들은 서서히 왕궁 자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그 공포는 선대 노르덴 왕의 갑작스러운 서거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선대 왕이 죽고 염소수염 마법사도 죽어버린 후, 그레타까지 제국으로 넘어오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


“왕궁에 드나들어도 기억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간신히 확신했나 보더라고. 뭐, 영문도 모르고 그런 마법 같은 일을 당했으니 몇십 번이나 확인하고 저희끼리 교차 검증까지 한 건 이해해 줘야지.”

사실 귀족들끼리도 왕궁의 ‘왕’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같은 찜찜함과 불안을 공유하고는 있었다.

다만 약점으로 남을까 봐 쉬쉬하고 있었을 뿐.


“아무튼 잔뜩 겁을 먹고 있던 귀족들이 용기가 좀 생겼는지, 전대부터 있었던 일과 현 노르덴 왕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구구절절 정리 잘해놨더라고.”

올리비아는 아까와는 달리 휙휙 돌아가는 어깨를 만족스럽게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신이나 마법 이런 건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고 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 수 있으니.”

“그걸 토대로 외교적 협력으로 제국에서 무언가 조처하기로 했나?”

“응. 황실 기사들과 그런 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인력을 특사형식으로 파견하기로 했지.”

그레타의 인형이 무슨 짓을 하건 전처럼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노르덴국의 사람들도 안전할 것이다.


“제국에서 일어났던 납치가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기도 했고.”

올리비아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크라이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마법사가 죽은 후로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슨 마법이 약화되었다는 거 알았어?”

“딱히 느끼지는 못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보다는 둘이 더 강한 힘을 쓸 수 있기는 하지.”

“그렇다면 그레타가 마법사보다 특별히 더 뛰어난 건 아닌가 보네. 지금까지 노르덴 왕을 인형처럼 부리고 있긴 하지만…….”

말을 하던 올리비아는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머릿속이 간질거리기만 했다.

노르덴 왕, 왕……. 자신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태도나 대화에서 대단히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는 못했었지.

그렇기에 그가 그레타의 의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딱히 수상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귀족들은 무슨 위화감을 어떻게 느낀 걸까?


“아이작이 노르덴 국에 방문했을 때 왕과 만났었지? 그를 불러줘.”

곧장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던 올리비아는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당겨 제 품에 앉힌 크라이어가 어지러워하는 올리비아의 눈을 가린 채 속삭였다.


“알겠으니까, 지금은 생각을 좀 비우고 잠시라도 쉬어라.”

“그……래야겠어.”

아득하게 빙글거리던 시야는 그의 손 아래 내린 어둠에서 금세 사그라들고 올리비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건 떠오르는 법이건만 어쩐 일인지 그의 말대로 정말로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었다.

제 눈을 덮은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마치 심장이 그곳으로 옮겨 가기라도 한 듯 쿵쿵거리는 둔중한 진동에 슬슬 졸음마저 쏟아지려는 찰나.

멀어지려는 의식의 끈을 잡아당기던 올리비아는 불현듯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근거도 없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목을 길게 뽑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작게 벌린 도톰한 입술 사이로 혼잣말 같은 질문이 새어 나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이 빌어먹을 신을 위해, 대륙을 정화한답시고 준비하던 것들은 대부분 실패했으리라.

강력한 우군으로 추정되던 보니타도 내분으로 합당한 최후를 맞았다.

게다가 본래 그들의 가장 앞에 서서 가장 큰 존재감을 발했어야만 하는 크라이어는 그들과 대적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레타는 이제 정지 혹은 자제, 라는 단어를 모르는 미친 망아지처럼 폭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 아예 소파 위로 올라앉았다.

이내 크라이어와 마주 보며 앉은 그녀가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바싹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는 익숙한 듯 목을 위로 약간 젖혔고, 올리비아는 그의 쇄골에 있는 낙인을 확인했다.

낙인은 제단인지 신의 아가리인지 모를 것을 보고 온 이후 모서리에서 중심부 방향으로 단숨에 흐려졌다.

무슨 조화인지, 무슨 원리인지 알 수 없지만 대단히 좋은 것임은 틀림없었지만.


“그 이후로 흐려지진 않았어?”

“그래.”

“으음, 신에게 직접 한마디 하는 게 낙인을 지우는 방법이었나?”

“글쎄. 한마디고 백 마디고 갈겨 줄 수야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크라이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도 그녀도 알았다.

그가 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올리비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제가 벗겼던 그의 옷을 야무지게 정리한 후 턱을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 건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 말했잖아.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올리비아가 가슴을 잔뜩 내밀고 뻐기듯이 말하자 크라이어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내리며 웃었다.


“그래. 넌 네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지.”

“맞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자유롭게 해줄 거야.”

“그건 좀 달갑지 않은데.”

“뭐?”

 

 
올리비아가 미간을 구기자 크라이어가 낮게 웃더니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나는 너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으니까.”

 

***

낮인지 밤인지.

며칠이나 지난 건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흐릿하기만 했다.

눈앞이 캄캄하다가 별안간 밝아졌지만, 뿌연 막을 씌운 것처럼 모든 것이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붉은가?

그레타는 실핏줄이 터지고 터져 아예 흰자위 전체에 검은 얼룩이 진 시뻘건 눈을 위아래로 굴렸다.

눈에 뭉친 그 얼룩 때문인지, 혹은 잠을 며칠째 단 몇 초도 자지 못한 탓인지, 그도 아니라면 방금 피를 너무 많이 토한 탓인지.

그레타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어떤 것의 반쪽, 반도 되지 않는 듬성듬성한 부분 부분만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질 뿐.

넋을 놓고 있는 것처럼 방에 앉아 초점 없는 눈을 뜨고 있던 그레타가 피가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 자기 피로 물든 시뻘건 이와 함께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 혀가 드러났다.


“티슨.”

“네.”

“황녀에 대해 알아 와. 뭐든 좋으니까 뭐든. 전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을 내렸지만, 티슨은 늘 그랬던 것처럼 순종하며 그 즉시 떠났다.

홀로 남은 그레타는 한동안 더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스륵 일어났다.


“그분을 봐야겠어. 아니야, 가지 마. 아니, 물어봐야지. 그럴 수는 없어. 가야 해.”

피비린내가 풍기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녀 자신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그레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오로지 한 곳만을 집요하게 쏘아보며 끈질기게 나아갔다.

한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그녀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지익지익 같이 따라왔지만, 어쩐지 그 끝에서 이미 죽어 나자빠진 보니타의 생기 없는 눈이 웃으며 머리채를 꽉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제 그림자에 웃고 있는 보니타를 업은 그레타가 황녀 궁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안온한 빛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들었어? 글쎄 걔가 뭐라고 했는지…….”

“어머나, 그런 말은 밤이 더 깊었을 때 하라고!”

저희끼리 깔깔거리며 웃고 떠드는 일상과 그 일상을 지탱하면서 누리는 이들의 온기가 은은하게 흐르는 한구석.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도 않고, 설사 보인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기세로 그레타는 걷고 또 걸었다.

이젠 밀랍 바른 시체 같은 안색으로 흐느적거리며 간신히 크라이어가 머문다는 황녀 궁의 안쪽으로 들어간 그레타는 숨을 헐떡거렸다.

코로도 모자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헉헉거리는데도 그녀는 계속해서 숨을 꼴깍거렸다.

마치 먹어도 먹어도 모자라서 남의 음식을 탐내다가 마침내는 타인을 산 채로 삼키려 드는 아귀처럼.

보니타가 그녀 안에 심은 불신의 씨앗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 그레타를 지탱하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고대신은 그레타의 고뇌와 고통, 의심과 불안, 초조함과 공포에 대단히 기뻐하며 더욱더 가혹하게 대가를 거두어들였다.

가뜩이나 심리적으로 깨지기 직전의 유리 같던 그레타는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더더욱 몰렸다.

그렇게 심신 양측이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좀먹는 굴레에 갇힌 그레타는 지금 오로지 단 하나만을 바랐다.


“아니야. 아닐 거야.”

신에게 바치는 대가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크라이어를 보고 눈물 흘리며 품에 안기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딱 하나만 확인하고 싶었다.

크라이어는 결코 황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의 믿음은 잘못되지 않았다.

오로지 그 하나면 충분했다.


“크라이어 님. 제가, 지금 제가 가고 있어요.”

그 일념 하나로 그레타는 몸을 질질 끌었다.

그녀는 홀로 지고 있는 힘의 대가와 벼랑 끝까지 몰린 심적인 고통으로 인해 낯빛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말 그대로 시체와 다름없었다.

심장은 현저히 느리게 뛰었고, 몸을 지탱하는 근육도 경직되었으며 눈 깜박임 하나조차 버거웠다.


“방금 저기 누군가 지나가지 않았어?”

“응? 없는데? 잘못 본 거 아니야?”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용인이 다른 사용인에게 끌려 사라진 후에도 그레타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녀는 사람이 내는 인기척도 없다시피 했기에 의도치 않아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황녀 궁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건 그녀에게 천금 같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만고의 불행이 되었다.

황녀 궁에 그레타가 귀신 같은 몰골로 나타났을 때도, 크라이어는 그녀가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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