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 네 곁에 있으려면. (128/146)


#128. 네 곁에 있으려면.
2023.06.15.



“앞은 보이냐.”

“자자, 슈가는 이걸 들자.”

어느새 온 건지 아이작과 앙브흐가 아이의 양옆에 섰다.

아이작은 슈가가 안고 있던 마른 수건을 아주 간단하게 제 손으로 옮겼고, 앙브흐는 비어버린 슈가의 품에 약초가 담겨 보기에는 부품 하지만 무게는 가벼운 바구니를 안겼다.


“안 무거웠어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슈가가 스멀거리는 낙인의 고통을 무시하며 항의하자, 두 사람의 웃음기 섞인 답이 돌아왔다.


“그래, 그래. 하나도 안 무겁네.”

“그것만 가져다 두고 이거 먹어.”

앙브흐가 주머니에 쏙 집어 넣어주는 단단한 사탕을 먹지도 않았는데, 슈가는 벌써 입안이 달아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슈가의 옆구리에 자리하던 낙인은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각.

사용인들이 저마다 오늘 있었던 일로 잡담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고 있는 황녀 궁의 심장부에 자리한 집무실은 여전히 불이 환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서류의 산맥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책상에서 펜을 쥐고 씨름하고 있어야 할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꽤 장기간이었던 출장 때문에 서류 더미에 점령당했던 소파를 올리비아가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크라이어가 올리비아를 소파에 앉힌 채 어깨를 누르고 있었고, 그녀는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니까.”

“조금 쉬고 하는 편이 효율이 더 낫다는 걸 알지 않나.”

“쉴 시간도 아까워 지금은.”

피로에 찌들다 못해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린 올리비아가 일을 하겠다며 허우적거렸지만, 크라이어는 물러나지 않고 아예 그녀를 휙 들어 올려 소파에 눕혀 버렸다.


“이러기야?”

그가 잠깐 손을 뗀 사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벌떡 일으키려던 올리비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는 제 이마를 가볍게 누르고 있는 그의 검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럴 거냐고.”

“그럴 거다. 좀 쉴 필요가 있어. 어차피 지금 서류의 글씨도 눈에 잘 안 들어오면서.”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뜨끔한 기색을 감추며 제 눈을 옆으로 굴렸다.

그의 말대로 눈을 지나치게 혹사한 나머지 침침해져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눈부터 감아라.”

옅은 한숨이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도 약간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그녀를 안고 제국의 수도에서 노르덴 왕국까지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는 크라이어도 지친 것이다.

서류 정리에…….

기실 그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을 그저 잘한다는 이유로 떠맡기고 있던 올리비아는 미안함과 머쓱함에 가타부타 더 말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 크라이어. 당신이랑은 관련 없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서류 처리 그만하라고 하고 싶은데…….”

그녀는 지금 진실로 아비가 저를 지켜주겠다면 지극히 멋진 말을 해놓고서는 곧바로 서류는 절대 혼자 떠맡지 않을 거라며 멋없게 군 이유를 절절히 이해했다.

올리비아는 이제 크라이어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물론 다른 의미도 수없이 많지만, 일단 지금은 서류 처리를 함께하는 의미로.

아예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덮어버린 크라이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련 없지 않으니 상관없다.”

“어?”

“어차피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이런 위치가 아니라 너와 같은 자리에 앉아, 네 곁에 있으려면.”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제가 덮고 있는 올리비아의 얼굴에 열감이 확 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진동에 올리비아는 제 얼굴 반을 덮은 손을 치워버리며 말했다.


“정말 이런 말을 숨 쉬듯이 하는 남자일 줄 몰랐는데.”

“나도 이제야 알게 되었군.”

과거의 기억이 없다고 해도, 과거의 자신도 그런 말을 입에 담은 적은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전혀 알지 못했던 감정이나 자신을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알아가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쇄골은 물론이거니와 가슴의 심장 어름까지 태워버릴 듯 날뛰는 낙인의 고통을 느끼며, 동그란 이마로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정말로 나쁘지 않아.

지나치게 다정한 손길에 올리비아는 재차 달아오르는 얼굴을 포기하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어디 보자, 일단 급한 건은 다 처리한 거지?”

“긴급이라고 찍힌 건 전부 나갔다.”

“한숨 돌려도 되겠어.”

그제야 바짝 긴장되었던 그녀의 등허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럼 좀 부탁할게.”

올리비아가 아예 얼굴을 소파에 뭉개며 웅얼거리자 크라이어는 익숙하게 그녀의 목과 어깨, 등과 허리를 풀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비아는 신음과 탄성을 삼키며 노곤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노르덴국에서 돌아와 실종자들을 앙브흐와 아이작에게 맡기고, 보고를 위해 황제 폐하를 알현했었지.

늘 그렇듯이 눈 밑에 짙은 그늘이 진 황제는 휘갈기는 서명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고대신이니 제단이니 하는 것들은 빼고 한 설명이라 좀 엉성하긴 했지만, 황제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돌아온 실종자들은 타렌가가?’

‘네. 그리고 이 사건에 얽힌 하인데르 후작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는 편이…….’

‘그게 말이다.’

 
그 뒤에 이어진 황제의 이야기는 올리비아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네? 죽었다고요?’

‘그래. 자택에서 발견됐다고 하더구나.’

‘사인은요?’

 
거기까지 떠올린 올리비아가 앓는 소리를 삼키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


“보니타 하인데르가 순순히 갔을 리가 없어.”

“저항한 흔적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저항할 새도 없이 죽었다는 말이지, 그게 자기 손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뜻은 아니잖아.”

엎드린 채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고 고민하던 올리비아는 이내 결정했다.


“사인을 확실히 알아봐야겠어. 이를테면.”

“타인의 손자국이 남았는지?”

말을 받은 크라이어가 보기만 해도 어깨와 목에 무리가 갈 법한 그녀를 아예 제대로 앉혔다.


“아, 그래도 전보다 훨씬 나아.”

올리비아는 그의 손길대로 순순히 자리에 앉아 목 뒤와 어깨를 조물거리며 감탄했다.


“그거 다행이로군.”

“음. 당신 허리 안마도 엄청 잘하…….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제가 한 말에 제풀에 놀란 그녀가 손을 휙휙 저으며 필사적으로 했던 말을 주워 담으려고 했다.

하지만 쏟아진 물과 한 번 뱉은 말은 이미 쏘아진 화살과 같은 법.

크라이어는 아무 말도 없이 눈가를 길게 접어 웃기만 했지만, 올리비아는 울상이 되었다.

그게 참는 거라고? 정말로? 이러다가 고대신을 해치워 버리고 나면 한입에 홀라당 뼈까지 잡아 먹히겠어.

생존에 위협을 느낀 올리비아가 슬금슬금 그에게서 엉덩이 걸음으로 멀어지려던 찰나.


“경고를 지나치게 했을지도 모르지.”

주어도 필요한 목적어도 없는 말인데도 올리비아는 즉시 알아 들었다.


“그러면 결국 자기들끼리 싸움이 났다가 그 꼴이 난 거란 말이지?”

“목에 난 자국을 보면 확실히 알게 되겠지. 장례식 전에 아무 처리도 되지 않은 시체를 확인해 봐야 할 거다.”

“지금 하인데르 후작저는 어수선하니까, 그 정도는 가능할 거야.”

턱을 톡톡 두드리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으음, 결국 원하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된 거겠지?”

본래 계획은 계획 없고 힘은 무지막지한 그레타와 그녀의 최측근이자 참모 겸 손발인 보니타 사이를 조금 갈라놓으려고 했었다.


“갈라지다 못해 아예 한쪽이 사라졌으니 목표는 초과 달성이군.”

“그건 그렇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최고의 결과가 나왔어.”

올리비아는 서류 더미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 제단인지 얼룩인지 나발인지에 잡혀갈 사람이 있는지 감시도 하고 있고.”

황궁으로 돌아와 황제에게 보고를 올린 직후, 황명으로 제국 전역에 공문이 내려갔다.

반역에 뜻을 둔 무리가 제국민들을 몰래 잡아들이고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라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사실과 먼 이야기였지만, 각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들의 뒤통수를 서늘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무려 ‘반역’이지 않은가.

반역을 일으키기는커녕 모의하는 것만 들켜도 가문의 주춧돌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뽑혀 사라지는 무시무시한 중죄.

반역이라는 단어가 황실에서 나온 순간부터 의문을 가지는 것조차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러니 대륙법으로 금지된 노예매매를 들먹이거나, 도덕과 상식에 기대어 주의를 촉구하는 것보다 효과는 수천 배 더 좋으리라.


‘하하, 반역이라는 단어도 써보고, 그놈들 궁둥이에 아주 불이 붙겠구나.’

 
정작 그런 공문을 내리라며 명령하는 황제는 피로한 낯에 꽃이 피듯 속 시원한 얼굴이었지만.


“제국이 아니라 타국에서 특히 노르덴국의 사람들이 잡혀갈 수도 있지 않나.”

“그 부분은 외교적 협력으로 일을 처리했지.”

“노르덴 왕은.”

“아아, 알아. 그레타의 말만 듣는다고 했지?”

올리비아는 개구쟁이처럼 입꼬리를 위로 말았다.


“그런 왕을 저지할 만한 힘이 있는, 노르덴 국을 지탱하는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귀족 가문 몇 곳이 제국에 도움을 청했거든.”

올리비아는 황제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뒷이야기를 쉬이 꿰맞출 수 있었다.

선대 노르덴왕이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 귀족들은 이유도 모른 채 왕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언제부터 그리되었는지, 어째서 그리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어느새 귀족들은 허수아비가 되어 있었고, 왕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제멋대로’인 결정은 아주 이상한 쪽으로 뻗어 나갔다.


‘이리할 수는 없는 법이외다!’

‘그렇소.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들을 어찌!’

‘내 말이 그 말이오! 평민이라지만 아이들을 데려다 뭘 어찌하는 건지 아이들이 돌아오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으니, 이런 통탄할!’

왕궁에서는 멍청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던 이들이 왕궁에서 벗어나면 하나같이 정신을 차리고, 왕의 미친 짓을 규탄했다.


‘왕이시여! 그런 명령은……!’

‘시끄럽구나.’

하지만 그 악랄한 명령에 반해 왕을 알현하러 갔던 이들은 왕의 손짓, 아니 마법사의 손짓 한 번에 다시 멍청한 얼굴이 되어 무릎을 꿇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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