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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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돌아간다.
2023.06.08.
의심으로 시작하면 확신이 되고, 확신으로 시작하면 의심이 된다고 했다.
크라이어를 향한 보니타의 의심은 확신이 되어 이미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다.
크라이어를 향한 그레타의 확신은 의심이 되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정말일까? 그럴 리 없어.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 그렇다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 그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한다는 말이잖아!
그레타는 낮과 밤,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를 가리지 않고, 제 마음에서 피어나는 상반되는 두 가지에 골몰했다.
보니타가 쏟아냈던 말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과 확인할 필요 없다는 믿음이 대립각을 세우기를 며칠.
꿈에서도 이미 죽어 나자빠진 보니타가 나타나 같은 말을 계속 지껄여 댔기에 그레타는 잊으려고 해도 그녀의 말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분이라고? 그분? 하, 너의 그분께서 지금 누구와 함께 계시지?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그 볼셰이크의 핏줄.’
보니타가 남긴 저주와 같은 폭로가 그녀를 끊임없이 흔들고 또 흔들어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네가 바라는 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그레타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입안을 잘근잘근 씹으며 방을 돌아다녔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보니타가 속살거린 말의 의미는 너무나도 투명했다.
그러니까 그분이, 크라이어가 황녀를…….
아니야.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보니타를 처리하기 며칠 전에 봤던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까.
처음 낙인을 받고 부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크라이어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고, 어느 것에도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 검붉은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기에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것이리라.
그의 그런 면이 그레타가 둘만 남았을 때 그도 자신을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한 축을 담당했다.
크라이어는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을 테고,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은 세계에서 그의 곁에 있을 사람은 자신일 테니까.
한데, 그녀의 맹목적인 믿음의 한 축이 뿌리째 뽑혀 나갈 듯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방안 전체를 정처 없이 배회하던 그레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감시……를 하면…… 아니야!”
그레타는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낸 자기 말을 깨닫고 그 즉시 크게 자신에게 분노했다.
감시! 감시라니! 감히 그분을!
이러면 마치 보니타의 망상 가득한 헛소리를 믿고 그분을 의심하는 것처럼 되지 않나.
절대 아니다. 그분은 신께서 직접 선택하신 첫 번째 전사이며, 대륙을 정화한 후 자신과 오로지 단둘만 남아 고대신의 낙원에서 살아갈 유일한 남자니까.
그런 분이 황녀를 사랑? 사랑한다고?
기어코 보니타는 담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말까지 선명하게 떠올린 그레타는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지만…….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을까? 응? 뭘 하고 있을 거 같아?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서?’
한 번 뿌려진 독을 품은 씨앗은 이미 단단히 뿌리내렸다.
그렇기에 그녀의 생각은 돌고 돌아, 설마? 하는 자신을 강하게 부정하다가 다시 의심하는 처음 상태로 돌아올 뿐.
그레타는 이제 입 안을 씹다 못해 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힘 조절이 되지 않는 건지 곧 다 뜯긴 손톱 아래 살을 씹어 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입 안에 고인 핏물의 비릿함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온 신경이 크라이어의 ‘사랑’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은 온몸을 좋을 대로 할퀴고 물어뜯는 고통조차 느끼지 않았다.
엄지손톱만이 아니라 손가락을 통째로 씹어먹을 기세인 그레타는 며칠간 몇 시간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티슨에게 낙인을 준 후부터 시작된 대가 지불, 그러니까 고통으로 인해 가뜩이나 불면증이 있던 그녀는 보니타가 터뜨린 말 때문에 아예 잠을 자도 악몽만 꾸는 지경에 이르렀다.
“크라이어 님, 크라이어 님, 아니죠? 아니잖아요. 아니, 아닐 거니까.”
핏물이 흥건한 입안에서 부정을 되뇌며 어떻게든 자신을 다잡으려고 했지만, 해일처럼 밀려오는 의심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둘만의 세상? 그럴 리가 없지. 그분께서 너와 둘이 남느니 같이 정화되는 걸 선택하실 테니까! 사랑이란 그런 거야!’
그건 절대 안 돼! 그분이 없는 낙원에 홀로? 그건,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던 그레타가 작살이라도 맞아 바위에 꽂힌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핏기는커녕 시퍼렇게 뜬 얼굴과 이마에 울룩불룩 솟은 핏줄, 흰자위가 시뻘겋게 물들어 부풀어 오른 눈과 하도 씹어댄 탓에 피딱지가 얼룩덜룩한 입술까지.
미쳐버리기 직전의, 아니 미쳐버린 사람 꼴이 된 그레타의 입이 열렸다.
“티슨.”
그녀가 무엇을 하건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하물며 시선조차 주지 않던 그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티슨은 진실로 보니타가 한 말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녀의 죽음조차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에 흥미가 없고, 왜 살아야만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그가 유일하게 갈망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 소망을 이뤄줄 신의 낙인을 내려준 그레타의 명령에는 착실히 반응했다.
“네. 그레타 님.”
“그분을 좀 봐야겠어.”
“모셔 올까요.”
티슨의 ‘모시겠다’라는 말은 보니타를 데려온 것과 같은 의미였기에 그레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분께 감히 그럴 수는 없지. 내 말만 전해. 이 그레타가 당신을 너무나도 간절히 뵙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 이럴 필요가 없어. 그분께서 아니라는 답만 해주시면 될 일이야.
티슨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그레타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아니, 앉지를 못했다.
티슨을 보낸 것으로 정리가 돼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크라이어가 원래 계획대로 노르덴국이 아닌 제국에 머문다고 했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분께서 제국에 머무른다고 했을 때 그러시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야. 그분께서 그리한다고 하셨잖아.
하지만…… 하지만.
그레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심과 확신의 굴레를 쳇바퀴처럼 돌면서, 자신이 홀로 쌓아 올린 맹목적인 믿음을 자기 손으로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
노르덴국으로의 출장 이후 아이작은 얼마간 후유증에 시달렸다.
제단을 보고 느꼈던 만들어진 갈증과 평온함이 불쑥불쑥 치솟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제단을 앞에 두고 자력으로 벗어났었다.
비록 매우 힘들고, 이러다 진짜 죽겠다 싶을 만큼 진이 빠지긴 했지만.
후유증의 증상 자체가 대단히 특별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검은 구덩이에 빨려 들어가서 미라가 되는 악몽을 며칠간 계속 꾼다던가, 잠시 멍하니 있으면 어느새 어둑한 곳으로 걸어가고 있다던가. 하는 정도였다.
뭐 당장이라도 노르덴국으로 달려가 그 제단에 몸을 던지고 싶은 욕망이 일지는 않았으니 그리 대단치 않았다.
아이작은 그리 생각하며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고 보냈지만, 앙브흐는 대번에 그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요즘 잠을 못 자요?’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눈이 안 보일 텐데.’
‘눈은 안 보여도 얼굴색하고 눈 밑에 그늘은 보이잖아요. 턱까지 내려왔어요.’
심지어 슈가는 그의 손에 말없이 달콤한 것들을 계속 쥐여 주었다.
누가 저 같은 애인 줄 알고.
그러면서도 아이작은 슈가가 준 간식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저도 모르게 어둠으로 가려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후에 꼭꼭 씹어 삼켰다.
입안에 퍼지는 단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으슬으슬하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아이작이 앙브흐와 아이작의 합작으로 한입 크기의 달달한 간식을 주머니 가득 넣고 다니기는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제국으로 귀환하기 전, 그러니까 노르덴국에서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제단으로 향한 후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가만히 있느니 뭔가에 몰두하는 편이 끔찍한 기분을 잊는 데 훨씬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아, 아아아악! 아악! 제발 날 보내줘!”
아이작은 눈앞에서 발작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남자를 간단히 제압하면서 과거를 더듬었다.
그날도 바빴지.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노르덴국의 왕성에 도착했던 밤.
어차피 황녀 전하의 명령으로 실종자들을 한데 모으고 무사히 탈출시켜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었기에, 아이작은 아직 덜 아문 다리를 이끌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마법 혹은 귀신이 한 짓 같은 대탈출을 위해 이리저리 홀로 분투하던 아이작은 문득 어느새 새벽이 다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밤에 사라졌던 두 사람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이작은 즉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찾으러 가 봐야 하나. 아니야. 주인님이 버티고 계신 데 무슨. 아니, 그래도 혹시나? 아니지.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겠지.
괜히 갔다가 이겨내지 못하고 그 구덩이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게 무슨…….
올리비아를 향한 걱정을 크라이어로 진정시키다가 결코 원하지 않는 자신의 눈물 나는 최후까지 떠올린 아이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그만두자.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입을 찢어버리시겠다고 하셨으니, 잘 찢고 오시겠지.
하지만 차가운 새벽공기를 밀어내고 태양이 빛나기 시작하자 아이작은 저도 모르게 신전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멍청한 짓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그는 꾸역꾸역 신전으로 향했다.
‘하…… 이걸 다시 들어가야 하나? 정말로? 이게 맞는 건가?’
한탄한 아이작이 크게 숨을 들이켜고 눈을 질끈 감고 한발 크게 내디디려던 순간.
‘뭐 하나.’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강제로 익숙해진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이작은 내딛던 발을 즉시 원래 자리로 회수하며 떠오르는 햇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굳건히 서 있는 크라이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돌아간다.’
‘네…… 네. 돌아가야죠.’
크라이어의 말을 반사적으로 따라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아이작은 뒤늦게 정신이 든 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