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을까? (125/146)


#125.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을까?
2023.06.05.



 
아니, 그 정도 표현은 너무 순화한 것으로 그녀는 당장이라도 보니타를 향해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 듯 악귀 같은 얼굴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거야?”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요. 이해는 하셨습니까.”

보니타가 사막같이 메마른 얼굴로 대놓고 비꼬았지만, 그레타는 그녀의 건방진 태도보다 그 전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정신이 팔리다 못해 격노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헛소리지. 뭐? 그분이 배신? 신의 의지를 소홀히 해?


“네가 실패해놓고 왜 그분을 들먹이는 거지?”

“실패의 원인이 그분께 있으니까요.”

확신에 찬 보니타의 말에 그보다 더한 맹신이 가득한 그레타의 답이 돌아왔다.


“헛소리. 그분께서 그럴 리가 없지.”

“아니, 그분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

“없어. 없다고. 없다는 말 알아들어?”

보니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꼬리를 잡아챈 그레타가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서며 반복했다.

마침내 보니타와 딱 반걸음 거리에 멈춰선 그레타가 치미는 고통과 광기로 범벅된 눈을 태우며 말했다.


“네 실패는 네 실패야. 어디서 감히 그분을 들먹여? 네까짓 게 뭐라고!”

둘 사이에 공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평소라면 보니타가 이미 물러났어야만 했다.

아니, 이런 상황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간 홀로 삭히고, 쌓은 질척거리는 감정이 구정물처럼 넘쳐흘러 보나타를 물러날 수 없게 했다.


“순전히 네 망상일 뿐이잖아!”

“근거가 있습니다.”

“그럼 그 근거부터 말해!”

그레타는 고래고래 고함쳤지만, 보니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크라이어의 사랑이 당신이 아니라 황녀라고 전했을 때 올 파장과 오히려 좋게 풀릴 경우의 수를 계산하느라 분주하게 머리를 굴렸다.

하나, 그레타는 보니타의 답이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참지 않았다.

애초부터 보니타를 짓밟아 줄 마음만 가득했으니 참을 이유가 없었다.


“주제를 모르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자에게는 제 주제를 알 만한 경고가 필요하겠지. 실패를 책임질 벌도 더해서.”

입꼬리를 뒤튼 그레타의 말에도 보니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어라 하건 크라이어를 겨냥한 자신의 확신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쯤 이렇게 기분을 풀고 나면 제 말에도 귀를 기울이겠지.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그레타의 역린을 건드려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었기에 보니타는 침묵하기로 했다.


“티슨!”

유리로 철판을 긁는 듯한 부름을 내지르는 그레타를 보면서도 보니타는 굳건했다.

신체적 고문을 당하는 건 상관없었으니까.

보니타는 제 사랑과 아이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그날부터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레타가 준비한 ‘경고’를 더한 ‘벌’은 보니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건 물리적 고통이 아니라 그녀의 가장 깊은 어둠과 아픔을 흙발로 마구 밟아 긁어대는 것이었으니까.

그레타의 부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티슨은 누군가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밀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흔들거리다 겨우 바로 선 이를 향해 그레타가 명령했다.


“자 말해보렴. 눈앞에 있는 하인데르 후작께서 네 억울함을 풀어주실 테니까.”

그레타의 턱짓에 쭈뼛거리면서도 희망을 감추지 못하는 여인의 품에는 아기가 있었다.

보니타는 그 여인과 아기를 인지한 순간, 그레타가 하려는 짓거리를 알아챘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하고 발등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멀거니 그 여인의 입이 움직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였고, 보니타는 과거를 절대 버리지 못하니까.


“후, 후작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겨우 끝낸 여인의 눈에서는 말라비틀어진 희망이 빛났지만, 보니타가 꽉 막힌 목에서 무언가 소리를 뽑아내기도 전.

무언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티슨이 여인의 품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렇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한 생명이 사라졌다.


“어머나, 세상에. 안타깝기도 해라.”

그레타의 조롱 어린 목소리를 뒤로한 채 결국 보니타는 결코 뿌리치지 못하는 어둠에 박제되어 과거가 반복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레타의 경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꺄, 꺄아아악! 아악! 아아악! 아가! 내 아가가! 아악! 아아!”

처음에는 멍한 얼굴로 제 품에서 축 늘어진 아기를 내려다보던 여인이 고통 어린 절규를 질러댔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지? 그런 슬픈 일이 반복되게 할 수는 없잖아. 동의하지, 보니타?”

그레타는 여인의 비통한 울음과 비명을 음미하며 티슨을 향해 눈짓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악.

절망과 슬픔, 경악과 혼란으로 얼룩진 여인의 얼굴이 피를 뿌리며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광경이 지나치게 간단해서 비현실적이었다.

이 참극은 단 몇 분 안에 일어났다.

그리고 여인과 아기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린 그레타는 그나마 조금 기분이 풀린 건지 눈꼬리를 비틀며 보니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너무 꽉 깨문 나머지 턱으로 피가 흘렀지만, 보니타의 핏발선 눈은 한 번의 깜박임도 없었다.

그녀는 제 과거의 거울 반대편에 있던 여인의 최후를 끝까지 눈에 담았다.


“휴우. 얼마나 다행이야.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서. 저것들을 구하느라 좀 힘들었는데. 어때?”

그레타는 한 서린 피와 고통이 가득한 방에서 숨을 크게 들이켜며 양팔을 벌렸다.

몸을 쥐어짜던 고통이 아주 조금 나아진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리라.

이제껏 바치지 못했던 대가를 조금쯤 지불했으니 그녀가 짊어진 대가는 그만큼 가벼워졌다.

더해서 소금기둥처럼 굳어져 실핏줄이 터진 건지 벌건 눈으로 하염없이 자신의 경고를 응시하는 보니타까지.

그레타는 크라이어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얼마 가지 못했다.

영원히 거기에 굳어 있을 것만 같던 보니타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고막을 후벼파는 듯한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아하하하하하하!”

웃음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날카롭게 비산했다.

실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다가 좌우로 저으며 난데없이 웃는 보니타를 보던 그레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웃는 거야?”

그 순간 배까지 잡고 웃던 보니타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레타가 그 질문을 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보니타는 귀신같은 웃음을 걸친 채 그레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뭐?”

“그래. 너 말이야. 너. 신의 힘을 휘두르는 너.”

그녀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이 음울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속살거렸다.


“그분이라고? 그분? 하, 너의 그분께서 지금 누구와 함께 계시지?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그 볼셰이크의 핏줄.”

핏발이 서다 못해 터져버려 흰자위 전체가 시뻘겋게 물든 보니타의 목소리는 어딘가 귀기마저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을까? 응? 뭘 하고 있을 거 같아?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서? 모르지? 넌 모르겠지. 알려고 하지도 않지. 그러니까 어리석다고 하는 거야.”

보니타의 말은 두루뭉술했다. 무엇하나 구체적으로 짚어서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들 터.

자신의 아버지인 전대 후작을 손수 처리하여 하인데르 후작위에 오른 후 정계에서 오래 구른 보니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과연 그녀의 의도대로 조금 전 좋았던 그레타의 기분은 순식간에 휘발되어 사라졌다.

더해서 잠시 밀려났던 대가가 신이 난다는 듯 다시 활개를 치며 그녀를 아작아작 갉아 먹기 시작했다.

과연 그레타의 공언대로 고대신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 좌절과 체념같이 고꾸라지는 감정을 더없이 기껍게 즐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생명을 눈짓과 턱짓으로 앗은 그레타의 기쁨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활화산으로 터지는 분노와 분노.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분노의 밑바닥에 깔린 작은 돌멩이 같은 의심.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아까부터 마음대로 입을 놀리는데 그러다가 크게 다칠 수 있어.”

표독스럽고 악랄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보니타를 쏘아보았지만, 그레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미 흠집이 생겼다.

이름을 붙인다면 의심이라고 할 수 있는 흠이.

그렇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전혀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건만, 보니타와 그레타의 균열은 크라이어를 향한 그레타의 맹목적인 신뢰에 미세한 의심을 끼워 넣었다.

보니타는 평소와는 정반대로 산발이 된 머리와 시뻘건 눈으로 크라이어와 올리비아의 사랑에 대해 열화를 토해냈다.


“네가 바라는 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둘만의 세상? 그럴 리가 없지. 그분께서 너와 둘이 남느니 같이 정화되는 걸 선택하실 테니까! 사랑이란 그런 거야!”

악다구니를 쓰는 보니타를 향해 턱에 힘을 잔뜩 준 채 부들부들 떨고만 있던 그레타는 툭 내뱉었다.


“죽여버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머리를 무자비하게 파내는 고통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그레타는 그저 자신의 욕망이 속살거리는 대로 명령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단 몇 초면 충분했다.

보니타에게 그러했듯이 그레타는 티슨에게도 자신이 내리는 명령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보니타와 티슨의 다른 점이라면, 그는 그레타의 명령에 의구심을 품지 않고 곧바로 실행하며, 실패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나, 보니타가 그랬던 것처럼 티슨 역시 의문을 가지고는 있었다.

공놀이 기간쯤, 크라이어와 마주했을 때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의문.

그저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깊은 곳에 숨죽이고 머리를 들이밀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보니타의 고개는 돌아가면 안 될 방향을 향해 있었고, 마지막까지 흘리던 웃음도 멎었다.

보니타 하인데르의 기구한 과거와 삐뚤어지다 못해 세계 자체에서 탈선해버린 그 후의 행적을 미루어 보았을 때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잃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세상을 저주하여, 그녀의 속에 불을 지른 사람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부를 저처럼 불타오르게 하려던 사람의 최후로는 딱 적당했다.

같은 꿈을 꾸는 자들의 손에서 이루어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끝.


“아, 아직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땅바닥에 형편없이 널브러지는 보니타의 시체를 향해 그레타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쓸모가 많던 도구에 흠집을 좀 내려다 아예 망가뜨려서 조금 아쉬움을 느끼지만, 결국 돌아서면 잊어버릴 도구일 뿐.


“뒤처리해.”

“네.”

티슨을 남겨두고 떠나는 그레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휘적거렸다.

그런 그레타의 그림자를 보니타의 시체가 길게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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