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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통했군요! (124/146)


#124. 통했군요!
2023.06.01.


크라이어는 그제야 그레타와 눈을 마주했다.

자신을 담고도 유리알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검붉은 눈동자에 그레타는 홀로 전율했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고 광대가 치솟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데도 크라이어는 여전히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 제단을 뒤로한 채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을 때 마주했던 무언가에게 느꼈던 거부감이나, 올리비아가 그것을 힘차게 후려쳤을 때의 통쾌함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레타는 크라이어가 변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만약의 만약, 그가 신의 의지에 반하거나 자신을 배신했다면, 저 눈에 감정의 부스러기라도 담기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레타는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제 아버지였던 염소 수염 마법사에게 수도 없이 ‘인간의 하찮음’과 ‘인간의 해악’, ‘인간을 정화해야만 하는 이유’를 듣고 자랐다.

그런 그녀는 스스로를 ‘인간’과 분리했지만, 신의 힘을 얻고서도 여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개 개인에 불과한 그레타는 크라이어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일자로 다물려 있던 크라이어의 입술이 갈라졌다.


“그 일은 실패했다.”

사실을 전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건 마치 선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기실 그레타에게 크라이어의 말은 그 어떤 것이 건 선언과 다름없기도 했다.

그가 하고자 하면 한다. 그가 원하면 한다. 그가 말하면 한다.

그레타는 얼치기로 고대신을 숭배했던 놈이나 한없이 고통스러운 경험 후 세상을 불태울 결정을 한 보니타,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타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니 정화해야 한다는 티슨과 달랐다.

그녀는 진정으로 크라이어와 두 사람의 낙원만을 위해 대륙을 정화하려고 했다.

겸사겸사 신께서 바라시는 정화도 하고, 인간들도 싹 다 치워버리려고 했을 뿐.

그레타에게 가장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은 유감스럽게도 고대신의 의지를 받드는 것보다 크라이어였다.


“그, 그런가요? 실패했군요…….”

그래서 그가 어떻게 비밀리에 진행한 일의 성공과 실패를 알았는지 그레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 뿐.

그가 원한다면 어떤 것이든지 알 수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었으니까.


“일에 차질이 생겼군.”

몇 초 전에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말했건만, 대번에 얼굴에 먹칠을 당한 그레타가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크라이어는 여전히 무감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올리비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세운 계획을 실행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이를 테면 일 전체를 진행하고 감독한 자라던가.”

굳이 보니타의 이름을 직접 꺼낼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레타가 기쁨으로 눈을 번뜩이며 외쳤기 때문이다.


“통했군요! 저도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맞아요! 실패에는 책임이 따르죠! 게다가 어차피 경고도 하려고 했으니까요!”

둘 사이를 벌리려고 작은 걸음을 내디딘 올리비아나 크라이어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이미 그레타와 보니타 사이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짓과 거짓이 쌓아 올린 원대한 계획은 아래부터 위까지 가리지 않고 구멍이 나 흔들리고 있었고, 둘의 관계는 그보다 더 심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겉으로만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동료, 아니, 동료라기보다 그레타가 보니타를 억지로 누르고 깔보며 비웃으면, 보니타는 그레타를 적당히 무시하며 참아내는 관계였다.

준비하던 일이 잘 굴러가면 모를까, 함께하던 대업을 위한 준비가 어그러지자 둘 사이가 파탄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경고라고?”

“네! 건방지게 입을 놀리고, 제멋대로 구는 도구는 두드려서 고쳐야 하지 않겠어요.”

그레타는 크라이어가 제게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그가 묻지도 않은 보니타의 일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크라이어는 적당히 그녀가 입을 놀리는 시간을 보내다가 말했다.


“경고 건, 책임을 지우 건 알아서 해.”

“네! 제게 맡겨주세요!”

그레타는 상기된 얼굴로 크라이어의 팔에 엉겨 붙어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미 있던 균열을 한껏 파버린 크라이어의 몇 마디로 보니타와 그레타의 파국은 초읽기로 들어갔다.

***



“흐읍.”

손톱달이 뜬 밤. 낮게 나는 새의 날갯짓에서 축축한 공기가 느껴지는 날의 끝에 보니타는 입이 막힌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갈을 물린 납치범이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달리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하인데르저는 늘 그렇듯이 무덤같은 침묵에 짓눌려 있었고, 보니타는 제단에 필요한 피와 고통을 수급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짜는 중이었다.

제국민이 어렵다면 노르덴국의 사람들을 이용해야하나.

하지만 역시 노르덴국에서는 하인데르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왕이 그레타의 꼭두각시 이긴 했지만, 그 아래의 귀족 전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니,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분’이 아닌가.

만나자는 자신의 요청을 무시하는 그레타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분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제거할 수도 없었기에 더더욱 골치가 아팠다.

보니타가 홀로 고민하고 고뇌하면서 점점 밤이 깊어져 갈 무렵.

납치는 그녀가 어렴풋이 해결책의 끄트머리를 떠올릴까 말까, 하는 순간에 일어났다.

대단히 불편한 자세와 갑작스러운 납치에도 불구하고 보니타는 공포에 질려 발버둥을 치거나 소리를 지르려 막힌 입을 억지로 벌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입이 막히기 직전 마주한 납치범은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으니까.

그레타 곁을 지키는 죽은 지 오래되어 반쯤 썩어버린 생선의 눈을 한 낙인자.

그가 이렇게 자신을 데리고 간다는 건 그레타가 볼 일이 있다는 뜻이리라.

만나자고 할 때는 답조차 하지 않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침 잘 되었다.

이번 일의 전말과 그분을 향한 의구심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게 기묘한 침묵을 휘감은 티슨과 보니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다다랐다.

황궁과 하인데르 저택 중간쯤에 위치한 연식이 좀 오래되고 규모가 작은 저택이었다.

그레타가 제국으로 올 당시 보니타가 황궁에서 나올 일이 생기면 편히 쓰시라고 비밀리에 매입해둔 곳이었지만, 뒷골목처럼 어둑하고 비밀스러운 장소는 아니었다.

말을 타면 금방이고, 걸어가도 조금만 지나면 다른 저택이 즐비하게 위치한 약간 한적한 구역이었을 뿐.

보니타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티슨이 정문을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는 답하지 않고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저택의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구태여 돌아보지 않아도 낙인자가 자신의 뒤에 따라붙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제게 낙인도 없다며 깔보는 것치고는 낙인을 가진 저 남자도 그리 좋은 대접을 받는 거 같지 않은데.

보니타는 티슨의 낙인을 신이 아니라 그레타가 찍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크라이어와 티슨의 존재가 얼마나 다른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레타를 향한 좋지 않은 보니타의 감정은 그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더 곪아가고 있었다.

저택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선 그녀는 곧 문이 활짝 열린 방으로 들어섰다.

커튼도 전부 내린 상태라 달빛이 들지 못해 온통 어두컴컴한 저택과는 달리 그 방에는 작은 불 몇 개가 빛을 밝히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로 사위가 확 밝아지지는 않아 그레타의 신형과 그림자가 짙게 내린 얼굴이 간간이 보였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요.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여주실 마음이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메마른 보니타의 인사에 박힌 힐난에 그레타는 핏줄이 불룩 솟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답했다.


“지금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닐 텐데?”

어쩐지 평소보다 더 날 서 보이는 그레타였지만, 보니타 역시 잇따른 실패와 의심으로 충분히 날카로운 상태였다.

두 사람은 한치도 물러나지 않고 서로를 쏘아보았다.

온몸에 치미는 고통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마치 그럴 거라 예상이라도 하듯이 통증은 나날이 조금씩 더 강도를 더해갔다.

올리비아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역시 그 빌어먹을 고대신이야. 악취미가 확실하잖아? 라고 했을 터.

하지만 그레타는 감히 신에게 그런 마음조차 가지지 못한 채 그저 눈앞에 있는 보니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제단이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면, 지금쯤 이 아픔에서 해방되고 더 많은 힘을 얻었을 것이다.

한데, 실패라니.


“황녀 궁에 사용인을 들여보낸다고 했으면서 그 일도 진척이 없잖아.”

기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황녀의 모가지를 딴 순간을 조금의 지체도 없이 즐기고 싶어서 만들 도구였으니까.

하지만 그레타는 늘 그랬듯이 보니타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설명 따윈 하지 않았다.


“뭔가 할 말 있어?”

눈으로 살을 발라낼 듯한 그레타를 향해 보니타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실패를 질책하는 그레타를 향해 대륙 정화라는 대업과 그를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사람. 바로, 크라이어에 관한 의구심을 토해냈다.

그간 몇 번이나 지난 일을 되짚어보고 무수한 밤낮 동안 깊게 생각한 결과였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빼놓고 말했다.

크라이어가 올리비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그가 황가의 핏줄부터 몰살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그녀 곁에 남았다기 보다는 진실로 원해서 함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레타를 일부러 자극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보니타는 그레타를 윗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그레타는 크라이어 못지않게 대륙 정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다.


“그러니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얼마 전에 만났다고 하셨지요? 제가 방금 말한 것을 서류로 정리해 드릴 테니 그것만이라도 전해주시지요.”

그레타가 크라이어를 열렬히 사랑한다는 걸 아는 보니타는 의심에 가까운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가 꺼내기 힘들까 봐 다른 방법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그레타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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