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 흐려졌어. (123/146)


#123. 흐려졌어.
2023.05.29.


잠겨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짠 올리비아가 간신히 손을 올려 그의 쇄골을 더듬었다.


“흐려졌어.”

그 한마디를 끝으로 올리비아는 수마에 몸을 맡겼고, 크라이어는 한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제 쇄골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번졌다.


‘그게 입 같은 거라면 오히려 다행이지. 당장 찢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제 곁에서 고롱고롱 잠든 여자는 정말로 그녀 스스로가 한 말을 전부 이뤄내고 있었으니까.

제단이 과연 신의 아가리였는지 아니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낙인이 단숨에 이토록 흐릿해졌으니 고대신의 면상을 한번 후려 갈겨준 셈이다.

흐릿해진 만큼 더더욱 포악하게 날뛰는 낙인의 아픔을 느끼면서 크라이어는 제 팔을 베고 잠든 올리비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고대신의 앞마당에서 두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 깊지만, 짧은 잠이 들었다.

***

-콰직.

보니타의 손아귀에서 몇 줄 되지도 않는 보고서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그녀의 얼굴도 일그러지고 있었다.


“확실한 건가?”

“네.”

보고를 위해 그녀 앞에 선 여자는 오늘을 끝으로 이 고객님과의 관계에서도 손을 떼야겠다고 결심했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확인하라 시킨 일들이 계속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고객님은 돈도 시기에 맞춰 잘 주고, 별다른 불평을 쏟아내지도 않는 우량고객이었지만…….


“그 많은 사람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감시하던 인원이 전부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정말이지 헛소리를 늘어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실로 그랬다.

노르덴 왕궁에 잡혀 있던 실종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졌다.

심지어 기절했다 깨어난 감시인들이 허겁지겁 그들을 찾았을 때,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따뜻하게 데운 차와 한입 베어 문 딱딱한 빵도 그대로였다고 했다.

그게 뭔데……. 진짜 뭐야. 엄청 무섭잖아.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할 법한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여자는 그 말을 들을 때처럼 썩어들어가려는 표정을 재빠르게 수습했다.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할 당시, 늘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의뢰인에게 목적을 묻지 않았다.

시키는 만큼 탈 없이 돈만 받을 수 있으면 상관없었으니까.

그러니 뭘 위해서 제국민을 대중없이 잡아들이는 건지.

왜 굳이 그들을 타국의 ‘왕궁’에 머무르게 한 건지 모른다.

다만 그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여자는 이 일에서 단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든 건 귀신보다 더 지독한 놈인 게 확실했다.

여자도 말라비틀어진 빵도 못 먹는 시절을 거쳐 지금은 뒷골목을 주름잡으며, 이런 높으신 나리의 뒤를 닦는 위치까지 기어 올라온 능력 있는 악바리다.

그런 그녀가 부리는 이들, 그러니까 노르덴 왕궁까지 가서 잡아 온 사람들을 관리하던 놈들 또한 그리 만만한 자들은 아니었건만,

누군지 몰라도 적대하면 골로 간다. 라는 위험 경보가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더해서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솥에 삶아진다는 말이 있다.

애초에 이 고객님께 묶인 사냥개는 아니었지만, 역시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나르는 편이 낫겠지.

여자는 전의 뒷골목에서 신이니 뭐니 떠들어대던 놈을 제 손으로 처리하기 찜찜해 아랫놈에게 맡겼다가, 감쪽같이 놓친 적도 있다.

다행히 그 얼간이 놈이 어디서 비명횡사라도 했는지,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지만. 그런 요행을 또 바랄 수는 없는 법.

잘 넘어가긴 했지만, 걸리는 일도 있으니 오늘부로 일단 잠적해야겠네.


“저 오늘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 말에 보니타는 말없이 턱짓으로만 축객령을 내렸다.

여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르기로 저택을 빠져나갔지만, 정작 보니타는 멀어지는 여자의 존재를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제껏 했던 ‘실패’를 하나씩 짚어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고대신을 모시기로 했던 때부터 시작한 ‘정화’를 위한 밑작업.

전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규모인데다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라 아주 긴 시간을 들여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준비기간은 길고 힘들지만, 일단 일이 시작되면 불이 번지는 것이 그러하듯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휘몰아칠 테지.

그렇기에 비록 오랫동안 참고 참으며 온갖 더럽고 추한 짓으로 손에 오물을 묻혀야 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세상은 정화되어야 했으니까. 이런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불태울 수만 있다면 손 좀 더러워지는 것이 대수일까.

그렇게 어느 시점까지 정화를 위한 준비는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대회의.”

보니타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이제껏 품어왔던 의구심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황녀가 대회의에서 노르덴국의 이름 모를 기사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본격적으로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건 그보다 조금 더 후지만, 그 기사…….

그레타의 ‘그분’께서 황녀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긋날 조짐을 보였으리라.

그럴 수 밖에 없겠지.

대륙의 정화라는 이 거대하고 위대한, 반드시 필요한 의식의 핵심이 바로 그분이었으니까.

신의 첫 번째 전사. 가장 먼저 낙인을 받은 자.

신이 직접 선택된 자.

그레타가 그를 지칭하던 말이다.

그런 자가 대계를 소홀히 하고 있으니.

아니, 손을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방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직접 확인하지도, 어떤 정황증거도 없지만 그녀가 계획했던 일이 이토록 쉽게 잘못되는 이유가 그분의 배신이라면 전부 설명된다.

배신, 배신이라니. 하. 신이 직접 선택한 놈이라도 결국 그 정도인가.

보니타는 크라이어의 위로 제게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을 겹쳐보았다.


“사랑에 눈이 멀었나.”

하지만 그녀의 연인은 끝내 도망쳐 버렸다.

비열하고 불쌍한 나의 사랑. 당신도 온 대륙이 불탈 때 어딘가에서 한 줌의 재가 될 테지.

눈을 감을 때는 같이 가지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게 되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보니타는 뒤틀린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번들거리는 그녀의 눈에는 과거처럼 회한이나, 슬픔, 절망 따위의 편린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안에 남은 건 자신을 바쳐서라도 모든 것을 불태우고 말리라는 심하게 어긋난 광기뿐.

잠시 후, 스스로를 추스른 보니타는 크라이어를 중심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었다.

정확히 말하면 크라이어가 곁을 지키고 있는 올리비아가 중심이었지만, 보니타는 황녀가 고대신이나 크라이어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고 결코 생각지 못했다.

아무리 그분이 신의 의지에 반할 만큼 사랑에 눈멀었다고 해도,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진짜 역할을 밝힐 수는 없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재로 만들 남자를 어느 여자가 마음 놓고 사랑할까.

심지어 그 ‘여자’는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자 차기 황제다.

보니타가 비록 제국에 애착은커녕 증오만 가득하다 해도 볼셰이크 황가를 폄하하지는 못했다.

제국의 위해 헌신하는 그들의 의지와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책임감은 변하지 않는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황녀에게 그분이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고? 그럴 리가. 숨기면 숨기려 했겠지. 그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보니타의 생각은 그리 길게 뻗어나가지 않고 열매를 맺었다.

크라이어는 황녀 곁에 붙어 있으니, 결국 그녀와 자주 왕래하는 인물을 골라내면 됐으니까.

그 철딱서니 없는 여자.

보니타는 대번에 앙브흐를 떠올렸다.

신을 숭배한답시고 얼치기 짓을 했던 광신도와 얽힌 사건 이후 황녀를 졸졸 따라다니는 타렌의 후계자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단에 바칠 제물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황실의 개입이 너무 빨랐다.

그래서 잠시 몸을 숙이며 계획을 다시 점검하는 사이 타렌저의 그 망아지같은 여자가 후작가를 이리저리 들쑤셨다지.

후작가 외에 몇몇 가문도 찔러보는 걸 보아하니 뭔가를 알고서 그렇게 행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거슬린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보니타의 차가운 낯이 더더욱 굳었다.

결국 신의 의지를 행하는 대계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그분’이다.

이번 실패로 그 대업은 또 얼마나 늦춰질 것인가.

이대로는 안 돼. 이제부터라도 전쟁을 준비해야 하나? 하지만 전쟁을 하려면 그레타가 장악한 노르덴국을 이용해야만 한다.

황녀가 대회의에서 무려 세계평화를 주제로 들고 나왔기에 제국이 눈을 부릅뜨고 전쟁의 불씨를 찾아다니고 있으니.

하지만 노르덴국의 왕을 설득한다고 해서 그 허수아비, 아니, 그레타의 인형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은 없을 터.

돌고 돌아 결국 그분인가.

보니타의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

크라이어를 향한 보니타의 의심과 배제가 깊어지다 못해 숙성될 무렵.

그는 그레타와 마주하고 있었다.


“제가 쓸 힘을 조금 보충도 할 겸, 신께 대가, 그러니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려고요. 의식이 끝나면 신의 의지를 이루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가 무생물처럼 서있는 티슨을 향해 시선을 던지자 크라이어는 저 뜬구름 잡는 ‘도움’이라는 것이 티슨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니 모든 건 순조롭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곧 황궁부터 시작해서 대륙 전체가 아름다운 불로 뒤덮일 테죠.”

그리 말하며 뱀 같은 번들거리는 눈을 그에게서 떼지 않는 그레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제단에 쓸 ‘제물’인 실종자를 올리비아가 모조리 구출했다는 사실을.


“그 제물은 누가 모은 거지?”

“보니타요.”

이미 예상하던 이름이 나오자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균열을 만들 거야. 힘이 넘쳐나서 머리는 전혀 쓰지 않는 놈 중에서 그나마 제대로 뭔가 하려는 하인데르 후작을 도려내는 거지.’

이런 한 번의 충동질로 보니타를 없앨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타와 보니타 사이에 아주 작은 흠이라도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성공이리라.

그렇다면 알려줘야지. 그 일은 실패했고 보니타 하인데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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