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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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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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2023.05.25.
“크라이어, 어때? 아이작이 말했던 유혹이라던가 그런 게 느껴져?”
얼굴이 좀 하얗게 질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전에 왔던 아이작에 비하면 한없이 멀쩡한 낯이었다.
그나마도 그처럼 욕구를 참는다거나 그에 구역감이나 두려움을 느꼈다기보다는 그저 고대신과 관련된 것을 향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에 창백해진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답이 돌아오는 대신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신음만 간헐적으로 울렸을 뿐.
“크라이…….”
의아한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다시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제단에 시선을 고정한 크라이어의 낯이 밀랍처럼 회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바로 제단에서 몸을 돌려 그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크라이어? 크라이어?”
억양을 달리해 부르며 그의 팔을 당겼지만, 그는 그야말로 석상이라도 된 듯 미동도 하지 못한 채 굳어있었다.
“크라이어!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으앗!”
다음 순간, 그가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맙소사.”
올리비아는 필사적으로 그의 신형을 제 온몸으로 지탱하면서 당겨 안았다.
그녀가 견딜 수 있는 무게를 한참이나 초과한 탓에 그의 아래에 깔리듯 볼품없이 주저앉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를 제대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하. 하아, 하아.”
올리비아는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거세게 뛰는 호흡을 정돈하려 애를 썼다.
예상외였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시커먼 구덩이의 코앞에서 살랑살랑 걸어 다닌 올리비아는 멀쩡했건만, 그 뒤에 바위처럼 서 있기만 하던 크라이어가 무너지다니.
올리비아는 황망함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제단에서 멀어져야만 해.
크라이어가 사나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진 이유를 올리비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제 어깨로 받친 채 질질 끌고 제단에서 멀어졌다.
평소라면 크라이어를 옮길 수 있을 리 없었건만, 위기에서 인간은 인간을 뛰어넘는다고 했던가.
올리비아는 어떻게든 그를 수습해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으……으아아.”
제단 근처에서 들리던 갈망하여 우는 소리가 사라진 지 한참.
더는 짜낼 힘이 없는 올리비아가 부축하고 있던 그를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어 앉힌 후, 저도 털썩 주저앉았다.
아주 잠깐 숨을 돌린 올리비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전히 미동도 없는 크라이어를 살피려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그의 양 뺨을 잡아 들어 올린 그녀는 마주한 검붉은 눈을 보고 입술을 꾹 물었다.
색이 빠져버린 듯 흐릿해진 초점,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자신을 담지 않는다.
올리비아는 더 생각하지 않고 그를 당겨 안았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크라이어의 머리를 끌어안고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속삭였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라고.
과거의 어느 밤. 잠들지 못하고 회귀 전의 기억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품에 안은 크라이어가 끊임없이 속삭였을 때처럼.
‘괜찮다. 다 괜찮아질 거다. 누구도 너를 해할 수 없어. 내가 곁에 있다.’
회귀 전 그녀를 몇 번이나 죽이고, 제국을 멸망시킨 남자는 신조차 너에게 손댈 수 없을 거라 속삭였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 지난 상처가 깊숙이 자리 잡고 괴물이 되어 올리비아를 갉아 먹을 때마다 크라이어가 그에 맞섰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위해 형체 없는 괴물과 맞설 차례다.
올리비아는 말 그대로 온몸으로 그를 안고 제 온기를 전했다.
차라리 저처럼 호흡이 불안정한 편이 나을 텐데, 그는 숨을 아예 쉬지 않는 듯했다.
올리비아는 그의 뺨을 잡아 입을 맞췄다.
입술을 비벼 틈을 만든 그녀가 제 숨을 그에게 불어넣었다.
그렇게 외부에서 그녀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을 때.
크라이어는 침잠하고 있었다.
그는 신전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는 어딘가 붕 뜨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땅을 제대로 밟는지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세상과 유리된 위화감.
그러다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나의 것. 나의 첫 번째. 나의 전사. 나의 노예. 나의 종복. 나의 충성스러운 불. 나의 검. 나의…….
목소리는 그를 자신의 것이라 빼놓지 않고 지칭하며 즐거운 듯이, 우울한 듯이, 화가 난 듯이 속삭였다.
평소라면 아무리 그딴 소리를 귀가 아닌 뇌에 직접 때려박는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한데, 신전에 발을 들인 후부터는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평소처럼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몸 전체에 족쇄가 하나씩 더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쇄골의 낙인부터 시작해 그의 발목을 휘감고 마침내 목을 움켜쥔 족쇄에 물린 채 도착한 제단.
그 시커먼 것을 본 순간, 크라이어는 현실이 아닌 아득한 저편으로 확 끌려 들어갔다.
자의가 아니었다. 타의라 해도 감히 그 누가 그를 그렇게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을까.
그는 제 목줄을 올리비아가 아닌 손에 맡길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크라이어는 그를 구속하는 족쇄에 갇힌 채 속절없이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다.
아래로, 그보다 더 아래로. 아니, 그보다 더더욱 아래로.
떨어지는 것인지 혹은 위로 당겨지는 것인지 방향감각마저 사라지고 있을 때, 어딘가 익숙한 검붉은 어둠이 그의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그 안에서 누군가 웃으며 손짓하고 있었다.
누구?
크라이어는 그 순간, 아니 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뇌의 한쪽에 낙인처럼 새겨진 이름.
올리비아.
그리고 다음 순간 검붉은 어둠이 크게 꿀렁거리며 폭급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를 옥죄던 족쇄와 그게 시작된 낙인에서 인세에서는 겪을 수 없을 만큼 극심하고 악랄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검붉은 어둠을 휘장처럼 두른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분노를 토해내자 크라이어는 다시 어딘가로 휙 밀려났다.
그렇게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던 크라이어는 어느 순간 조금 빠르게 뛰는 진동을 느꼈다.
쿵, 다시 쿵 쿵쿵하고 우는 심장 고동이 그의 귀를 타고 울렸다.
그 진동이 강해질수록 족쇄는 더더욱 강해지고 낙인은 숫제 불타올랐지만, 어느새 크라이어는 멈춰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검붉은 불과 물결만이 넘실 되는 곳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크라이어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족쇄를 비집고 제 심장에 손을 얹은 그는 곧 자신의 박동이 몸을 울리는 고동과 맞춰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퍽, 퍼벅.
족쇄가 폭발하며 터져나갔고, 낙인은 무언가에 막힌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올리비아는 괴물을 물리치고, 매몰되던 크라이어의 정신을 두드려 깨웠다.
온몸을 물고 있는 족쇄를 모조리 걷어낸 크라이어는 어떻게든 저를 향해 다가오려고 꿈질거리는 검붉은 것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나는 네 것이 아니다.
그는 자각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
올리비아. 올리비아. 올리비아.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마저 스산하던 그의 가슴속에 작은 온기가 하나둘 피어났다.
보드라운 꽃송이가 하나, 둘. 뻥 뚫린 구덩이에 쌓여 희미한 빛이 이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해졌다.
그때와 같았다.
첫 만남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에 처박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자신을 그 구덩이에서 끌어올렸던 하얀 손을 잡았던 순간.
그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나의 구원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너의 의미를 담기 한참이나 모자랐다.
네가 없으면 내가 살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녀의 품속에서 지독하게 낮게 갈라져 쇳소리가 섞인 그르렁거림이 울렸다.
“곁에 있어.”
그건 울음을 닮은 것 같기도 했고, 웃음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건 올리비아는 정해진 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곁에 있을게.”
그에 크라이어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코끝부터 시작해 심장 어름까지 단숨에 번지는 장미 향을 들이마시며 크라이어는 처음으로 고통에 찬 신음을 삼켰다.
쇄골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아니, 바스러지면서 날카로운 뼛조각이 그 주변 전체를 긁고 할퀴어 찢어발기는 듯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낙인이 말 그대로 날뛰고 있다는걸.
그렇기에 크라이어는 온몸을 휘도는 피가 부글부글 끓고 오장육부가 뒤틀려 조각나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웃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낙인이 단숨에 흐릿해질 거라고.
아아, 정말로 그 빌어먹을 고대신의 아가리를 찢어버린 것과 다름없지 않나.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허리를 바투 당겼다.
서로의 몸이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바짝 맞붙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의 숨결이 뒤섞였다.
그저 숨을 불어 넣어 살리기 위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크라이어는 간간이 흘러나오는 올리비아의 작은 숨 하나까지도 모조리 집어삼켰다.
자꾸만 뒤로 넘어가는 그녀의 뒷머리를 받친 그가 느른하게 반쯤 눈을 떴다.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 발갛게 상기되어 흔들리는 올리비아를 온전히 담은 검붉은 눈동자가 언뜻 보랏빛으로 빛났지만, 거짓말처럼 곧 사라졌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숨이 찬 올리비아도 감았던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자신을 본 그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기 무섭게 다시 그의 입술이 맞붙었다.
둘의 그림자가 엉키고 한참.
올리비아는 날개뼈를 들썩이며 제 목덜미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는 크라이어의 머리를 낑낑대며 밀어냈다.
그만 좀 하라고!
이미 그를 혼자 힘으로 옮기느라 늘어졌던 몸은 하도 괴롭혀진 탓에 밀어내는 팔이 바들바들 떨릴 만큼 지쳐버렸다.
이제야 순순히 그녀의 손에 맞춰 밀려난 크라이어가 이내 가는 허리를 잡아 올리비아를 제 쪽으로 돌렸다.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를 마주 보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올리비아는 안심했다.
“이제 잠깐 눈 좀 붙여라.”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귓바퀴를 타고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진동하다 사라지는 게 얄미워서 올리비아는 불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다가 목이 너무 아파 포기한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잠이 들기 직전, 가물거리는 시야로 불현듯 그의 낙인이 뛰어 들어왔다.
“그……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