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 저게……뭐야? (120/146)


#120. 저게……뭐야?
2023.05.18.



“이제 곧 노르덴국과 인접한 국경이다.”

크라이어의 말에 한적한 마을의 어귀의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우중충한 제 기분과는 다르게 어찌나 맑은지 괜한 짜증이 솟구쳤지만, 비가 와서 이동이 지체되는 것보다는 백번 나으리라.


“국경까지 가는 경로에 있는 마지막 마을이 이곳이었지?”

“그래. 실종자는 촌장의 아들. 큰 마을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처음 그가 사라졌을 때 마을 사람들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큰 마을에서 오는 상인들이 방문한 후 그 청년을 본 적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 후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다스리는 관리인에게 찾아갔고, 그 사건이 흘러흘러 황궁까지 올라온 것이다.

실종자의 집에 여전히 촌장 부부가 살고 있었기에 둘은 집 근처에서 흔적을 뒤졌고, 아예 작정하고 찾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해진 단서를 쫓았다.


“그만 쉬고 숲으로 들어가야겠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툭툭 두드린 올리비아의 말을 끝으로 둘은 나무가 엉성하게 우거진 숲으로 향했다.

숲은 초반부와는 조금 안으로 들어가자 금세 빽빽한 나무가 들어차 어둑했다.

간간이 들리는 벌레 우는 소리와 새가 푸드덕거리는 날개짓만 울릴 뿐.

크라이어가 흔적을 찾고 올리비아가 그 뒤를 최선을 다해 따라가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바스락. 투둑.

그가 손을 뻗어 바닥에 굴러다니던 올리비아의 몸만 한 나무통을 가볍게 들어 옆으로 던졌다.

나무에 가려졌던 바닥이 드러나자 크라이어는 말없이 눈짓으로 아직 젖어 있는 땅을 가리켰다.


“마차…… 바퀴 자국 맞지?”

“그래. 무게가 꽤 나가는 것을 싣고 지나치게 빠르게 달린 모양이군.”

“이제까지 이걸 따라왔던 거야?”

처음에는 사람이 다니는 좁은 길이 전부였지만, 숲의 어느 지점부터 훨씬 널찍한 길이 나왔다.


“이렇게 깊게 난 바퀴 자국을 지우기는 힘들다. 그리고 아무리 길이 꽤 넓더라도 곳곳에 인위적인 상처가 있는 나무도 많고.”

“마차가 긁고 지나간 거구나.”

“위장한답시고 계속 저 나무로 막아둔 거겠지.”

그가 가볍게 치워버린 나무는 장정 셋은 달라붙어야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둘은 곧 사람 수십이 빽빽하게 서면, 설 수 있을 법한 숲속 깊은 곳의 공터에 다다랐다.


“여기에 전부 모였던 모양이군.”

길을 가리고 있던 나무를 치운 후에는 흔적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오는 길 내내 봤던 어지러운 발자국과 사람이 쓰다가 버린 쓰레기들이 공터 곳곳에 널려 있었다.


“무리가 두 방향으로 갈라졌군. 다수는 서쪽으로, 소수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리 말하는 크라이어가 서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만 걸으면 노르덴국으로 넘어갈 수 있어.”

진하게 파인 땅을 향해 손을 뻗은 올리비아가 축축한 흙을 콱 움켜쥐었다.


“드디어 찾았다.”

 

***

아이작은 노르덴국의 왕궁에서 어둠을 틈타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옆을 지나치는 대도 왕궁을 지키는 기사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왕궁의 중앙에 다다랐다.

달빛이 어스름하기는 했지만, 역시 그림자 밖으로 나가서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건 무리라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나무 그림자를 타고 거대한 신전의 입구로 향했다.

이곳에 잠입했을 무렵에는 뼈대와 몇몇 벽만 서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완성되었던 거군.

벽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려 탈출했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던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앙브흐를 함께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하인데르 가문의 뒤를 판다고 아주 신나 하던데. 무모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도대체가 그런 일을 겪고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납치 살해 위협을 당했던 앙브흐는 그 후로도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슈가 녀석도 세상 물정 모르긴 마찬가지고…….

딴생각하면서도 부지런히 걸음을 놀린 아이작은 어느새 신전 내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곳곳에서 불빛이 일렁거려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추웠다.


“으. 저게 뭐람.”

아이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 학살의 장면을 지나쳤다.

본래도 조각이나 그림 같은 예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저건 관심이 있어도 오래 두고 볼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뭔가 서늘한데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신전 내부로 계속 걸음을 옮기던 아이작이 멈칫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사람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쪽으로 귀를 세운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 이동하던 아이작은 곧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했음을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설마 저게 제단인가?”

그는 몰려오는 구토감에 입을 막으면서도 ‘제단’으로 보이는 것을 향해 걸었다.


“이게 정말. 윽.”

아이작은 제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이윽고 제단에서 고작 세 걸음 떨어진 거리까지 다다랐을 때.

-푹!


“크윽.”

그는 제 허벅지에 단검을 꽂은 후에야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근육이나 뼈가 다치지 않게 찔렀음에도 고통은 생생해서 아이작은 그 고통에 일부러 집중하며 제단을 휙 살폈다.

그건 마치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벌린 무언가 같았다.

제단을 발견한 순간부터 구겨졌던 아이작의 얼굴이 더더욱 구깃 해졌다.

젠장. 기분 더럽네.

신전 안으로 들어올 때 뒤통수를 쓰다듬던 꺼림칙한 느낌이 오히려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더더욱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꺼림칙하기는커녕 저 무언가의 아가리 같은 곳에 몸을 던지면 편안해질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으니까.


“아, 으아아.”

그래서였을까.

오만상을 찌푸린 아이작과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묶여서 짐승처럼 신음만 흘리는 사람들은 바닥을 박박 긁으며 홀린 듯 검은 구덩이로 향하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가 들었던 사람 소리의 정체가 밝혀졌고, 아마도 실종자일 사람의 생사도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아이작은 조금의 성취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 제단으로 뛰어들려는 욕망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죽을힘을 다해 뛰고 또 뛰면서 아이작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마법사만 조심하면 된다면서요!

아이작은 서러움과 위기감을 동시에 삼키며 자꾸만 뒤로 돌아가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정말 아주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어어? 하는 사이에 스스로 저 아가리 같은 제단에 발을 밀어 넣을 것 같았으니까.

그는 피가 줄줄 흐르는 허벅지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달렸다.

모순적이게도 그토록 싫고, 이런 걸 대체 왜 하고 있느냐고 할 때마다 투덜거렸던 크라이어와의 훈련이 빛을 발했다.

크라이어는 아이작의 목을 당장이라도 물어뜯겠다는 살의를 뿜으며 쫓고는 했다.

그런 그를 피해 온 황궁을 헤집으며 달렸던 것이 몸에 밴덕에 지금도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무너지지 않고 달릴 수 있었으니까.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아니라 제단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신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은 아이작은 이제 분노를 느꼈다.

신이라더니. 정말로 고약하지 않은가.

고대신인지 나발인지 대륙을 전부 불태운다고 했을 때부터, 그건 좀……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예 신은 없다고 믿을 때가 나았어!

그때 그냥 모든 걸 알려달라고 하지 말걸! 주인님이 도망칠 곳이 더는 없다고 했을 때, 늦었더라도 튀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었는데!

머릿속으로 과거 자신의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신전 밖으로 쏘아진 화살처럼 튀어 나간 아이작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제단에서 더 멀어지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신전에서 멀어진 아이작은 왕궁으로 들어가서도 계속 달렸다.

그러면서도 주변의 기척을 구태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크라이어의 혹독한 굴림 아래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 모든 환경에서 자신을 숨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왕궁을 헤매던 아이작은 간신히 누구의 눈에도 들지 않을 법한 작은 방을 찾아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그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바닥에 양손을 짚고 털썩 주저앉았다.


“으, 허억. 허억허억허억.”

이제껏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아이작은 그제야 컥컥거리며 날숨을 토해냈다.


 
한동안 밭은 숨을 내쉬던 아이작은 힘이 풀린 듯 대자로 바닥에 드러누워 눈물을 삼켰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황녀 전하.”

지금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며 기어코 보고하리라.

아이작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미동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힘없이 늘어진 채 ‘제단’과 ‘실종자’를 떠올려야만 했다.

***

아이작이 호되게 경을 친 제단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노르덴 왕궁 내에서 실종자들의 행방을 들쑤신 후 얼마간의 시일이 지났다.


“많이…… 상했네. 얼굴이.”

만나지 못한 지 몇 년은커녕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아이작과 마주한 올리비아는 아연했다.


“황녀 전하를…….”

“아, 됐어. 고개 숙이지 마.”

예를 표하려다가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아이작을 향해 손을 휘저은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녀의 눈짓에 그는 기꺼이 허리를 숙여 도톰한 입술에 귀를 붙였다.


“괜찮을 거라며?”

“괜찮지 않나.”

“어디가 괜찮아 보이는 건데?”

“팔다리 멀쩡히 달려 있고, 오감 어디 상한 곳도 없군. 피 냄새도 안 나는 걸 보니 작은 상처도 없다.”

그렇지. 그런 부분은 멀……쩡하네. 그의 말을 들으니 아무 이상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다시 아이작을 위아래로 살핀 올리비아는 가자미눈을 떴다.

일단 팔다리가 멀쩡히 붙어 있긴 했지만, 허벅지를 둘둘 감은 붕대를 보니 확연히 부상도 입었다.

피 냄새가 안 난다는 거 거짓말 아냐?

의심의 눈초리로 크라이어를 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적절하게 처지가 되어서 덧날 일 없을 거다. 애초에 잘 찔렀으니까 회복도 빠를 테고. 그러니까 괜찮지.”

“그게 안 괜찮아 보인다고. 상처는 그렇다 치고 며칠 사이에 몰골이 저게 뭐…….”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작이 비실비실 팔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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