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불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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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불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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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불쾌하군.
2023.05.15.
나는 평범한 시녀야.
나는 우연히 저곳으로 시선을 던진 거야.
잠깐이면 돼. 단 몇 초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면 되니까.
그리고 몇 분 후, 공놀이가 점점 더 격해지는 가운데 슈가가 크라이어의 소매를 당겼다.
아이를 향해 허리를 굽히지는 않았지만, 슈가 역시 귓속말하려고 소매를 당긴 건 아니었다.
낙인을 지닌 자 특유의 느낌이 든다면 소매를 한 번, 그렇지 않으면 두 번 당기라고 미리 당부해뒀기 때문이다.
크라이어는 제 소매 끝이 딱 한 번 당겨지자 무표정한 그대로 슈가의 등을 다시 툭 두드렸다.
“숨 제대로 쉬어라.”
그리고 그제야 슈가는 제가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짧게 숨을 끊어 들이켜는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심지어 슈가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이 아이를 그림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렇게 완벽하게 슈가를 숨긴 크라이어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호위들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으래 그러하듯 고개를 숙여 올리비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슈가가 확인했다. 소매를 한 번 당기더군.”
그와 동시에 백팀이 흑팀을 누르고 공을 상대 진영에 꽂아 넣자, 올리비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손뼉쳤다.
그날의 공놀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
공놀이에서 승리한 백팀 소속 기사들이 휴가와 포상을 받아 황궁을 떠나는 이들이 평소보다 많아진 날.
적당한 오후의 햇살이 거리를 간질이는 시각.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황궁을 떠나고 있었다.
“아이작…… 슬퍼 보이더라.”
발걸음을 재촉하다 문득 생각난 듯 던진 올리비아가 노르덴국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제단 말씀이십니까?’
‘응. 그 제단. 전에 확인했을 때는 완공이 안 됐었다며. 그때 건설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좀 찾아보고. 제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최선일 거야.’
‘그게 정말 최…… 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여우눈을 한 얼굴은 똑같았지만, 멀어지는 아이작의 등이 무척 슬퍼 보였다.
“제단을 확인하라는 건 역시 좀 무리한 거였나?”
“할 수 있을 거다.”
무덤덤한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이유를 굳이 묻지 않고 수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작이 황녀 궁을 제 발로 찾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크라이어가 그를 죽도록 굴려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다 죽어가는 몰골의 아이작을 본 올리비아가 그만 좀 하라고 말리지 않았겠나.
“으음. 이왕이면 우리가 가기 전에 실종자들의 위치는 파악해줬으면 하는데.”
“제단이 있는 지하 신전에 없다면 노르덴 왕궁 어딘가에 있을 거다. 다만 실종자라고 확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하긴, 초상화가 없으니. 지금 어떤 처지일 지도 모르고.”
실종자들이 그간 갖은 고생을 하거나 고문이라도 당했다면 오히려 알아볼 수 있겠지만, 노르덴 왕궁의 사용인이나 잡부로 위장되어 있다면 평범한 이들과 구별하기 힘들 터.
“실종자라는 걸 알아보기 힘들어도 되니까 평범하게 잘 있었으면 좋겠지만.”
올리비아의 혼잣말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수도의 어둑한 골목에 다다랐다.
크라이어가 양팔을 벌리자 올리비아는 덥석 안기는 대신 괜히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거 맞아?”
“없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훌쩍 안아 들었고, 가는 팔이 제 목을 감는 순간.
-콰드득.
크라이어가 딛고 있던 땅이 움푹 파이고 주변에 있던 자갈이 부스러지면서 둘의 신형이 순신간에 사라졌다.
귀가 먹먹할 만큼 강한 바람이 뺨을 할퀴자 올리비아는 그의 품에 고개를 깊이 묻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샌가 멈춰 선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서류에서 확인된 실종자의 흔적이 가장 확실하게 남은 영지다.”
그제야 그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든 올리비아가 후하,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국의 수도 근처긴 했지만, 수도에서 벗어난 영지까지 오는데, 체감상 몇 십 분 걸리지도 않다니.
날카롭고 단단한 턱선으로 시선을 올린 그녀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더 빨라진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야?”
“아니. 더 빠르게 달리긴 했다.”
“무겁거나, 힘들지는…….”
“전혀. 더 많이 먹는 편이 좋겠군. 애초에 넌 입이 너무 짧다.”
올리비아를 땅에 내려준 후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귀 뒤로 넘겨준 크라이어의 말을 그녀는 대번에 반박했다.
“서류 처리하면서 대충 입에 쑤셔 넣을 수 있는 것만 먹어서 그렇지, 편식하진 않아.”
“그런 쪽이 아니라 먹는 양이 적다고.”
“종일 앉아서 서류처리만 하는데 배가 고플 일이 뭐가 있겠어.”
운동 삼아 돌아다니던 것도 발을 다친 이후로 자제하게 되어서 근래에는 정말로 책상물림만 하고 있었다.
찌뿌둥한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그녀는 고양이처럼 팔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켰다.
“좋아. 서류에 나왔던 곳부터 가보자. 거기서부터 더듬어 가면 되겠지.”
두 사람이 살핀다고 조사단이 했던 일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조사단은 이 일의 배후와 배경을 짐작조차 하지 못해서 근처에 널려 있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들을 모조리 살피고 헤맸다면.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살펴볼 범위가 좁았고, 찾아야만 할 흔적도 비교적 확실했다.
“앙브흐의 말에 따르면 하인데르 후작 가문에서 요 몇 달간 큰돈을 썼다고 했었지.”
“그래. 후작가의 가신들도 힘 좀 쓰는 덩치들을 마구잡이로 고용했고.”
돈과 인력을 어마어마하게 투입할 수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을 찾는 게 더 힘든 세상 아닌가.
심지어 하인데르 후작가는 제국 귀족 중에서도 어중이떠중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가문이다.
“배후는 거의 확실해졌으니까, 노르덴국으로 빠지는 경로로?”
“여기서부터 따라가다가 보면 국경 근처에서 확실해지겠지.”
“가는 길에 있는 다른 실종자들의 영지에 들러서 남은 단서를 조합하면 될 거 같아.”
“그래. 목적지가 노르덴 왕궁이고 최단 시간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면, 겹치는 경로가 존재할 테니까.”
척하면 척이라고, 둘은 막힘없이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은 영지는 일가족 전체가 증발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가족이 밤중에 그렇게 도망칠 이유가 전혀 없는 이들이라 이웃 주민들의 수군거림에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가 혹시나? 하고 황실에 보고한 곳이었다.
-끼이익.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집은 금방 삭아버리는 통에 가족 전체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문의 경첩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집 안이나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둘은 집 안 구석구석을 살핀 후, 정문과 쪽문을 세심하게 살폈다.
“뭔가 보여?”
“끌려 나간 흔적은 지워졌지만, 여기 흠집이 있다.”
문틀 기둥의 낮은 곳을 가리키는 크라이어의 손끝에 코를 박듯이 얼굴을 내린 올리비아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이 위치에 이런 자국이면 아이가 저항하면서 낸 손톱자국 아니야?”
“아마도. 정문 쪽에는 거의 지워지긴 했지만, 핏자국도 희미하게 보이더군.”
부모는 정문으로 아이들은 쪽문으로 끌려나간 모양이었다.
“가자.”
이를 악문 올리비아가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빈집을 뒤로하고 움직이자, 크라이어는 그녀의 꼿꼿한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곁에 서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
둘은 올리비아의 체력이 견디는 한계까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쉴 때도 귀족이 이용하는 고급 호텔이 아닌 빨리빨리 먹고 잘 수 있는 근처 여관에 머물렀다.
서류처리 할 때와는 다른 피곤에 절은 올리비아가 기절하듯 침대에 털썩 누우며 베개에 얼굴을 묻으려다 멈칫했다.
“냄새……. 다른 건 다 상관없지만, 베개는 진짜 못 참겠어.”
크라이어가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잘 관리된 여관을 쏙쏙 잘 골랐기에 침구도 보기에는 얼룩도 없고 깨끗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황녀다. 대륙 전체를 뒤져서 최상급의 물품들로만 주변을 채우는 것이 당연한 위치.
다만, 그녀는 딱 베개만 싫다고 밀어두고 다른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견뎠다.
‘아무 여관이라도 상관없다고?’
‘응. 여관이 아니라 동굴이라도 괜찮아. 이건 시간 싸움이야. 실종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만 해.’
황궁을 나설 당시 올리비아는 그리 단언했고, 그 말대로 그녀는 잠자리나 먹을 것을 가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전쟁, 그것도 소소한 전투가 아니라 대륙 전체를 불태우는 거대한 전쟁을 뚫고 살아남으려고 발악하던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다.
올리비아가 밀어버린 베개를 아예 바닥으로 내려버린 크라이어가 익숙하게 그녀의 옆자리에 누웠다.
“지금 좀 너무 가까운 데.”
“침대가 작으니 어쩔 수 없지. 더 가까워지는 편이 낫겠다.”
그는 태연하게 그녀의 허리를 쭉 당겼다.
그 덕분에 올리비아는 기어코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게 되었다.
올리비아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그런데도 맡을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길 반복하게 만드는 향에 기가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래야만 되는 거야? 확실해?”
“이게 제일 안전하니까.”
“추적자나 수상한 자는 없었다며.”
“한밤을 틈타 돌아다니는 강도나 도둑은 있으니까.”
어쩐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돌아오는 답은 몇 번의 공방에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든 올리비아를 품에 안은 크라이어도 눈을 감았다.
제 품에 꼭 맞춘 듯 들어맞는 그녀를 안고 비좁은 곳에서 딱 달라붙어 있는 건 대단히 만족스러웠지만.
달무리가 지는 오늘 밤뿐만이 아니라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꼴로 창문이나 방문을 비집어 여는 불청객은 반갑지 않았다.
강행군으로 몰골은 엉망이었고 변장도 했지만, 타고난 귀티는 전부 감추기 힘든 법.
제국 수도를 돌아다닐 때야 좀 잘난 평민인가 싶은 시선을 받았지만, 수도를 벗어난 후부터는 온갖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 놈들에게 당할 리는 없었지만,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건.
“불쾌하군.”
크라이어는 침대에 누운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살기를 쏘아 보내는 것만으로 밤손님을 쫓았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굳이 불필요한 피를 볼 필요도 없었지만, 저것들을 처리하느라 그녀를 품에서 떼어 놓기 싫다는 것이 조금 더 큰 이유였다.
비명은커녕 신음도 내지 못하고 시퍼렇게 질린 채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놈들의 뒤통수를 보던 크라이어도 이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