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당신 얼굴에 곧 커다란 구멍이 뚫릴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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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당신 얼굴에 곧 커다란 구멍이 뚫릴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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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당신 얼굴에 곧 커다란 구멍이 뚫릴 거 같아.
2023.05.11.
자신과 같이 신의 문양을 받았지만, 자신과는 달리 신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첫 번째.
얼마나 강한 걸까. 그레타가 말하기를 그는 홀로 대륙을 불살라 정화해 버릴 수 있다고 했다.
혼자. 홀로. 오로지 크라이어만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나.
쓰레기들을 모조리 치워버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을 텐데.
그 힘만 있다면 나도 대륙을 정화할 수 있다고…….
순식간에 다다른 의식의 흐름 뒤에 티슨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지만, 아주 찰나였을 뿐.
그조차 자신의 속을 눈 깜박할 사이에 휩쓸고 간 동요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순한 바람이 불어오는 야외에 마련된 자리는 평온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온갖 군상들의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챙.
이윽고 빈 유리잔을 가볍게 두드린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과 함께 좋은 날에 차 한잔하자고 불렀어.”
비스듬한 미소를 띤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궁의 사용인들이 움직였다.
외교관들의 앞에 각자 즐기는 각기 다른 차가 놓였고, 찻물이 줄어가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치열한 눈치 게임 끝에 더는 참지 못한 외교관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 이리 차를 나누기 위해 저희를 부르신…….”
“그건 아니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손을 휙 저으며 말을 이었다.
“여길 한번 둘러봐. 이번에 새로 조성한 잔디밭이거든.”
그녀의 손끝을 따라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오갔다.
올리비아는 그런 그들을 향해 대단히 가볍게 선언했다.
“이곳에서 그대들과 함께 즐거운 놀이를 할 생각이야.”
그 말을 끝으로 올리비아는 일어나서 떠나버렸고, 남은 외교관들은 또 난리가 났다.
하지만 황녀의 의중을 손톱만큼이라도 헤아린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아. 오늘은 아무 일도 없다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는 어느 외교관의 허탈한 중얼거림만이 실바람에 실려 흩어지고 있었다.
***
“후우.”
슈가는 의식적으로 숨을 제대로 쉬도록 애를 쓰고 있었다.
긴장하면 숨을 멈추는 버릇이 있다며, 건강에 좋지 않으니 고치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낙인에 관한 이야기와 제 속을 털어놓은 날 이후 끙끙 앓았고, 이 습관이 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슴을 부풀리는 슈가의 복장은 완벽한 황궁 시녀들의 것이었다.
오늘 슈가는 그들 사이에 섞여 눈에 띄지 않아야 하니까.
지나치게 나이가 어린 것도 그리 튀는 점은 아니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을 착실히 실천한 올리비아가 슈가를 위해 오늘은 특별히 연배가 어린 시녀들을 골라 배치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용인인 시녀나 시종을 눈여겨보는 이들도 거의 없기는 했다.
“확인, 확인만 하자. 할 수 있어. 잘할 수 있을 거야.”
슈가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계속해서 되뇌었다.
손끝이 잘게 떨릴 만큼 긴장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아니, 자신이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을 성공하지 못 할까 봐 무섭긴 했지만.
“슈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슈가는 말아 쥔 손에 닿는 온기에 화들짝 놀라 어깨가 크게 튀었다.
동그랗게 뜬 눈에 비친 올리비아는 아이와는 달리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저보다 훨씬 작은 아이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네가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위험한 일을 만들지도 않을 거고, 일어나지도 않게 할 거니까. 기억하렴. 절대 무리하지 마.”
“네. 네에.”
슈가는 정신없이 답하면서도 잡힌 손을 꼬물거리기 바빴다.
타렌 저택에서 앙브흐가 슈가를 시도 때도 없이 안거나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잡아준 덕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낯선 타인의 온기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이렇게 망설임 없이 닿는 온기는 어색하고 부끄럽다.
더군다나 황녀 전하가 아닌가.
올리비아는 제 손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의 기척이 느껴지자 잡은 손을 부드럽게 풀어 내리며 토닥거렸다.
“지금도 잘하고 있어. 하지만 혹시 힘들다면 당장 멈출 수 있으니까, 꼭 말해.”
온전히 자신을 눈에 담고 염려와 배려를 전하는 올리비아를 마주한 슈가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잠시 숨을 멈췄다.
이건 낙인에서 기인하는 통증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슈가는 올리비아와 맞잡지 않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구겨 쥐었다.
아픔보다 속 안에서 차오르는 벅참과 간질거리는 기쁨이 더 커서 아이의 볼이 따끈해졌다.
‘아픈데 기쁘다고?’
‘기뻐서 아픈 거예요.’
‘그런 버릇은 들면 안 되지!’
심하게 앓은 후 깨어났을 때 저를 맞이한 앙브흐와의 대화를 떠올린 슈가는 자꾸만 풀어지는 입가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흐릿해지는 낙인이 아예 없어지고 나면 아픔은 사라지고 오직 기쁨만이 남겠지.
좁디좁은 집에만 갇혀 있던 아이가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미래를 그리며 오늘을 살고 있었다.
“저, 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슈가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결의를 다졌다.
그런 아이의 상태를 확인한 크라이어가 올리비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고, 그녀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심판에게 눈짓했다.
이제껏 잔디밭 곳곳에서 몸을 풀던 이들이 말에 올라탄 후 순식간에 중앙으로 모여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판이 말했다.
“전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파란 잔디가 곱게 정돈된 넓은 공터에 흰색과 검은색으로 복장을 구분한 이들이 도열한 채 올리비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일어나 한 손을 들자 웅성거리던 사위에 서서히 적막이 내렸다.
모든 이의 눈이 그녀를 향해 고정되었을 때.
“근래 날이 좋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네. 공을 차기 딱 좋은 시기가 아닌가.”
당연히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외교관들은 눈알을 굴리며 제국의 의중을 알아보려 애썼지만, 애초에 그들과 황녀가 앉은 위치 자체가 경기장을 마주한 모양새다.
말을 붙일 수도 없으니 결국 눈으로 살필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거대한 그늘막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때문에 힘들어 보였다.
모든 건 올리비아가 노린 그대로였다.
외교관들을 불러 모은 목적은 단 하나, 그레타의 호위가 낙인이 찍힌 자인지 확인하는 것뿐.
“놀이를 시작해. 승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내리도록 하겠어.”
올리비아의 손짓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외교관들을 모아 개최한 ‘공놀이’는 말을 탄 채 스틱으로 상대편 진영으로 공을 모는 경기였다.
규칙이 그리 빡빡하지 않고, 흐름이 빨라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두기 좋아 일부러 고른 것이었다.
“공을 어디로 날리는 건가!”
“아아, 위험하네요.”
예상대로 경기 시작 전에는 슬슬 올리비아의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제각기 계산을 돌리던 외교관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큰소리를 내거나 혀를 차며 공놀이에 빠져들었다.
“어때?”
“이쪽으로 시선을 두진 않는다.”
미리 상의해뒀던 대로 크라이어가 그레타와 티슨을 먼저 살폈다.
“둘 다?”
“호위만.”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의 눈매가 살포시 구겨졌다.
슬그머니 눈을 굴려 그레타를 흘깃 살핀 올리비아는 헛웃음을 삼켰다.
“당신 얼굴에 곧 커다란 구멍이 뚫릴 거 같아.”
올리비아는 그 말을 하면서 크라이어의 소맷자락을 당겨 그를 그늘막이 만든 그림자로 밀어 넣었다.
이런다고 그레타의 번들거리는 눈이 그에게서 떨어지지는 않을 테지만, 기분이 나쁘니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었으니까.
크라이어는 제 쪽을 보지도 않으면서 저를 숨기려 꾹꾹 미는 올리비아의 불퉁한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레타의 시선 따위 그에게는 문젯거리도 아니다.
아예 인지조차 하지 않으니 기분 나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지나치는 나무가 시선을 준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없지 않나.
그런데 올리비아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질투를 하는 모습을 보니 못된 심보와 포만감이 동시에 끓었다.
지금은 안 되지. 조금만 더 인내하면서 이 일이 끝나기만 하면 황궁 밖으로 나갈 터.
아니, 그 전에 황녀 궁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그는 불쑥 치솟는 제 욕심을 꾹 누르며 그녀가 미는 대로 순순히 그림자에 몸을 묻었다.
당겨서 빈틈없이 품에 끌어안고 온통 입맞춤을 해주고 싶다.
딱 맞춰지는 보드라운 곡선과 코를 박으면 뼛속까지 스미는 은은한 장미향까지.
그는 제 잇몸 뿌리를 혀로 훑으며 느른한 시선을 흘렸다.
어쩐지 목덜미 솜털이 오소소 일어나는 기분에 올리비아의 등허리가 움찔거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녀의 그런 작은 움직임까지 훤히 본 크라이어는 기꺼운 웃음을 아껴둔 채 슈가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티슨이 눈치채지 못한 걸 보니 나름대로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크라이어의 커다란 손이 아이의 등을 툭 두드렸다.
그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손짓이 어찌나 안심되는지.
슈가는 이제는 익숙해진 통증을 넘기며 올리비아가 알려준 방향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던졌다.
검붉은 눈동자 색이 보이지 않게 그늘진 곳에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곳이 더 잘 보였다.
타국의 외교관들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있었고, 외교관의 바로 뒤쪽이나 지근에 호위인 기사들이 버티고 서있었다.
‘네가 봐야 할 사람은 노르덴국 외교관의 호위야. 굳이 눈을 마주치거나 자세히 살필 필요 없어. 오래 시선을 둘 필요도 없고.’
위장을 위해 시녀복을 챙겨입고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슈가의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낙인이 있는 자만 특정하면 돼. 전에 크라이어와 했던 실험 기억하지?’
‘네.’
‘그때랑 똑같아.’
긴장을 풀어주듯 뺨을 매만지다 차가워진 작은 손을 잡아준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낙인을 가진 자가 너를 알아챌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 전에 반드시 크라이어가 너를 보호할 거야.’
맞아. 난 혼자가 아니야. 황녀 전하께서, 기사님이 계시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할 일을 똑바로 해낼 거야.
바로 곁에 있는 기사님께 느껴지는 친근함과 이질감이 뒤섞인 사람이 있는지만 확인하면 돼.
숨을 깊게 들이켠 슈가는 눈을 꾹 감고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