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다시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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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다시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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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다시 말해 봐.
2023.05.04.
제단이 고대신을 위한 것이라면 실종된 사람들도 그 빌어먹을 신을 위한 것이겠지.
원하지도 않는데 제단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할 터.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서류만 보고 사건의 배후와 목적을 특정했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리가 없다.
이미 조사단이 파견되었고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에서 주시하고 있어서 실종 자체는 멈췄다.
하지만 사라진 이들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그 사람들이 무슨 짓을 당할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되도록 험한 일을 당하기 전에 찾아내고 싶었다.
“실종자 중 일부의 꼬리를 잡은 이들이 있더구나.”
“네. 거기서부터 살펴 볼게요.”
“그래. 이만 물러가거라.”
담백한 축객령에 서류에 시선을 둔 채 돌아서려던 올리비아가 우뚝 멈췄다.
“폐하.”
“음?”
곧바로 돌아갈 줄 알았던 그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자 황제가 집어 들었던 서류를 치웠다.
“이런 사건까지 직접 보시는 거예요?”
기실 회귀 전에는 이런 일들이 황제의 앞까지 올 일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실종이나 죽음이 하찮다는 말이 아니다.
대륙 유일의 제국의 머리 꼭대기에서 군림하고 지배하는 황제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쥐락펴락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상한 사고가 터지더라도 국가적인 재난 상황, 그러니까 타국과의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터지지 않는 이상 ‘사건’이 황제의 책상까지 올라올 일은 없을 터.
그런데 왜 지난번 광신도의 발광에 이어 이번에도 황제가 직접?
황제는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꾹 누른 후 올리비아보다 조금 더 어두운 푸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당부하지 않았느냐.”
이제 와 새삼스러운 것을 묻는다는 듯 가벼운 답이었다.
“당부요?”
의아하게 되묻는 올리비아를 향해 황제가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선뜻 눈앞에 다가선 딸을 향해 아비는 한숨처럼 웃음을 흘리며 완전히 시커멓게 물든 눈 밑을 문질렀다.
“세계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타국을 견제하고 긴장감을 해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평화’를 깨뜨릴 법한 일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너무나도 간단하고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그 말에 올리비아는 목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녀, 내 딸아. 네가 원한다고 해도 달을 따다 줄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줄 거란다. 네 뒤에 아비가 있고, 볼셰이크가 있음을 명심하거라.”
제국의 가장 꼭대기에서 가장 아래까지 떠받치는 피로에 찌든 황제는 딸 가진 아버지의 얼굴을 하면서 웃었다.
“태양이나 별을 따 줄 수는 없지만, 그 대신 너를 위해 전쟁을 억제하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해줄 수 있겠구나.”
황제는 대륙에서 전쟁은 없다고 분명하게 공언했다.
제국이 전쟁을 억제하는 이상 타국은 섣부른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리라.
그렇기에 올리비아는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진실로 전쟁이나, 그에 따르는 치명적이지만 갑작스러운 외부 변동 요인을 생각할 필요도, 고려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까.
크라이어가 제 곁에 있기에 회귀 전처럼 노르덴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했던 건 사실이다.
지난 회귀를 반추했을 때, 크라이어가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몇몇 국가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흉흉한 소식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결국 전쟁 자체는 항상 노르덴국, 정확히 말하자면 크라이어의 검 끝에서 흐르는 피로 시작되긴 했지만.
그간 고대신과 그 추종자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편 노르덴국과 타국의 불온한 움직임까지 살피느라 눈알이 빠질 것 같은 두통을 달고 살았다.
황궁에 들어앉아 모든 대륙의 정세를 볼 수 있다고는 해도 세상에 완벽이란 없는 법.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변수를 생각할 때마다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초조와 불안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는데…….
목 안쪽을 꽉 채우며 따끈하게 넘실거리는 감정으로 삼킨 올리비아가 조금 잠긴 목소리를 냈다.
“역시 그때 같이 서 있을 걸 그랬어요.”
“전에도 그랬지.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만. 같이 선다는 건 아비 옆에 선다는 의미인 게냐.”
“네. 끝까지 그럴 걸 그랬어요.”
아버지는 저와 똑같이 거뭇한 눈 밑을 문지르며 어딘가 서러운 듯 웃는 딸에게 속삭였다.
“너는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이기 이전에 내 딸이다.”
“알아요.”
“그래. 그러니 아비의 등이 부끄럽지 않도록, 널 지킬 수 있게 아비의 뒤에 있어 다오.”
이미 홀로 선 딸이건만, 아버지는 언제나 바랐다.
언제까지고, 이 몸이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도 부디 딸을 지킬 수 있기를.
그 마음을 알기에 올리비아는 간질거리는 가슴 어름을 쓱쓱 문지른 후, 짐짓 힘들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뒤에 있으라는 그 말씀에 충실히 응하는 의미로 제가 볼 서류의 반쯤은 바로 올려보내도 될까요.”
“그건 안될 말이지.”
대단히 엄숙한 얼굴로 즉답한 아버지는 그녀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며 덧붙였다.
“크흠. 서류는 함께 하자꾸나…….”
능청스럽게 말을 바꾸는 아버지의 귓가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고, 딸은 경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타렌저에 궁의를 이끌고 갔던 올리비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돌아왔다.
“상태는?”
“열이 내려서 정신을 차리려고 하기에 그냥 푹 재웠어. 하루 정도는 안 먹여도 자는 편이 낫다고 해서.”
어쨌건 얼굴을 보고 와서 한결 안심한 올리비아가 그제야 서둘러 궁을 떠나기 전의 일을 꺼냈다.
그녀는 제가 던지다시피 두고 간 서류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아직 확인 안 했어?”
“네 허락이 없었으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미 다 허락했잖아.”
크라이어가 본격적으로 올리비아를 도와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한 후, 고작 이틀 만에 그녀는 감탄과 감동을 동시에 터뜨리며 그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당신 정말 빠르네. 그리고 정확해.’
그때만큼은 크라이어가 아니라 올리비아의 눈이 사냥꾼의 그것이 되었다.
그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맑은 눈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에 물러나려고 했지만,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하얀 손을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서류 작업에 투입된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의 전폭적인 신뢰와 함께 긴급이라고 선명하게 빨간 도장이 찍힌 서류까지 다루게 되었다.
올리비아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크라이어를 지그시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것까지 봐서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았거든.”
그는 더 길게 말하지 않고, 이미 처리한 서류와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로 시선을 던졌다.
크라이어가 서류에 손도 대지 않은 이유를 한 번에 납득함과 동시에 숙연해진 올리비아가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으응. 그래도 이건 꼭 봐야 해.”
그녀는 서류를 건네며 황제의 집무실에서 오갔던 이야기와 자신의 추론을 차근히 되짚었다.
“그래서 일단 실종자의 흔적이 남은 곳을 들러보고 최종적으로는 노르덴국으로 가야 할 거 같아.”
“미리 아이작을 보내두도록 하지.”
“응. 그리고 하인데르 후작의 동태는 앙브흐에게 맡길까 해.”
타렌이 작정하고 눈에 불을 켠다면 하인데르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터.
앞으로 할 일을 착착 정리하여 휘갈긴 올리비아가 황녀의 인정을 쾅쾅 찍는 사이.
“제국이 전쟁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그 불씨를 완전히 끄기 힘들 거다.”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국 차원에서 조율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전쟁이다.
예컨대 욕심나는 타국의 땅을 삼키고 싶다던가, 왕국이 아니라 제국의 이름을 달고 싶다던가, 아예 대륙 정벌을 하고 싶다던가, 하는 탐욕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그랬다.
“맞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잠깐 말을 끊은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한참이나 보다가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여기 있으니 전쟁을 일으키진 못할 거야.”
몇 번의 회귀 동안 크라이어가 대륙 전쟁의 선봉에 서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아니라면 단신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종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겠지.
결국 그가 제국, 올리비아의 곁에 있는 한 회귀 전과 같이 대륙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다만 걸리는 점은 낙인을 지닌 또 다른 존재.
만약 그레타가 들인 호위가 크라이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면…….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얼마나 강한 거야? 지금 말고, 과거의 힘을 완전히 되찾으면.”
“이미 확인했으면서 묻는 건가.”
그야 확인을 하긴 했다. 그가 휘두른 한 번의 칼질로 황궁 벽이 통째로 날아가는 걸 몇 번이고 봤으니까.
“알지…… 아는데, 그 호위가 걸려서. 어때?”
앞뒤 맥락 없는 질문이었지만, 크라이어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케슬란의 말을 전해 들은 이후 크라이어는 직접 티슨을 확인하고 왔다.
위험요인을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케슬란의 말대로 자신과 완전히 같은 검붉은 눈인지 알 수 없었고, 슈가처럼 낙인이 있는 자를 한 번에 알 수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크라이어는 딱 한 가지는 확신했다.
그레타가 데려온 티슨은 그보다 약하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만,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만약 그자도 당신처럼 힘을 회복하고 있다면…….”
“그자를 본 기억은 없나.”
“없어. 내 기억에 남은 검붉은 눈은 당신뿐이거든.”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올리비아의 ‘유일’함이 자신이라는 말에 크라이어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니라고 답을 하면서도 연신 기억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시 없어. 전쟁 중에 그런 놈 본적은 한 번도 없…….”
올리비아가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크라이어가 코끝이 스칠 만큼 제게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가까워.”
“다시 말해 봐.”
“뭐? 그런 놈 본 적 없다니까.”
“그 부분 말고.”
뜬금없는 그의 말에도 올리비아는 조금 전 그가 머뭇거리지 않았던 것처럼 곧바로 소리를 바락 질렀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야!”
그녀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