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실종자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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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실종자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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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실종자 말씀입니까?
2023.05.01.
눈가가 발갛게 물든 채 울상이 된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는 웃었다.
그는 뜨끈해진 손바닥에 아까와는 달리 깊게 입을 맞추며, 말하지 않고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노라 고했다.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첫인상은 엉망진창에 가까웠다.
크라이어에게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상대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쏟아냈던 올리비아가 그랬고.
올리비아에게는 핏물을 뒤집어쓴 채 저를 몇 번이나 죽이고 대륙 전체를 불태운 크라이어가 그랬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고 시간이 지났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게 되어 함께 있는 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는 순간부터.
켜켜이 쌓인 기억이 머릿속이 덜그럭거리고 혀가 아릴 만큼 달아서.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향해 미쳤다고 하면서 속절없이 크라이어에게 물들었고, 크라이어는 올리비아 없이는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다 끝나고서 하자고 했잖아.”
“그래.”
“그러니까 그런 말이나, 이런 짓은 좀 참을 수 없어?”
“최대한 참고 있다.”
그 뻔뻔스러운 답에 올리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뭘 참고 있다는 거야.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고 있으면서.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크라이어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낮아졌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면 기쁘게 그리할 수도 있다만.”
등허리를 타고 스륵 미끄러지는 손길에 올리비아의 목뒤 솜털이 바짝 섰다.
그녀는 손등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줘 그의 셔츠를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허리 께를 배회하던 손을 순순히 거둔 크라이어가 재차 속삭였다.
“참고 있다고.”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올리비아는 그가 제게서 조금 떨어진 후에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아이작도 있는데 이 남자는 무슨 짓을 한 거…….
크라이어 탓에 아이작을 아예 잊고 있던 올리비아가 한참이나 늦게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녀가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아이작이라면 떠났다.”
“언제? 아냐, 답 하지 마.”
올리비아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한숨을 삼켰다.
그러게 왜 한 번 더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질문을 했냐고.
몇 분 전 과거의 자신의 멱살을 잡아 흔든 올리비아는 진이 빠져 그의 품에 다시 축 늘어졌다.
그런 그녀를 바투 끌어당겨 동그란 정수리에 턱을 괸 크라이어의 만족감 어린 그르렁거림이 짧게 진동했다.
한동안 느른하게 흐르던 침묵이 툭 터진 올리비아의 말에 사그라들었다.
“낙인 보여줘.”
그녀는 지금도 아프냐고 묻지 않았다.
돌아올 답을 알고 있으니까. 대신 낙인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슈가의 것이 그랬다는 것처럼 모서리가 중앙 부분보다 희미해진 건지 긴가민가했다.
쇄골에 닿는 올리비아의 숨결에 크라이어의 등에 힘이 바짝 들어갔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참으라고 하지 않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리비아는 곧 낙인에 박고 있던 얼굴을 들며 고개를 기울였다.
“흐릿해진 건가? 확연한 차이는 없는 거 같아.”
“글쎄. 그쪽은 제물의 낙인이고 이쪽은 노예의 낙인이니 좀 다를지도.”
“그럴 리는 없어.”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의 낙인이다.
저 까마득히 높은 곳인지, 가늠할 수 없는 낮은 곳인지에 처박혀 있는 고대신이 인간 하나하나를 용도별로 구분해서 낙인을 찍는다고?
“그런 섬세함이 있었다면 대륙 전체를 통째로 불태운다는 무식한 소리를 계시라고 내리진 않았겠지.”
신랄한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다면 조금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낙인이 지우기 힘든 거겠지.”
“그럴까.”
“그래.”
눈을 가늘게 뜨고 낙인을 노려보던 올리비아가 통보했다.
“앞으로 매일 보겠어. 흐릿해지는지 확인해야지.”
“원한다면.”
그녀가 하도 진지해서 크라이어는 낙인이 처음과 비교하면 희미해졌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기실 그가 아니라면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흐릿해지기도 했으니 딱히 일부러 숨기는 것도 아닐 터.
젖혔던 옷을 토닥거리며 정돈한 올리비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냬.”
정말로 어떻게든 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다섯 번째 삶.
그를 만나 생존이 아닌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렸다.
처음으로 상대해야 할 적을 알게 되었고, 그 적의 터무니없는 강대함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런데도 포기지 않았다.
허허벌판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끝도 없이 헤매기만 하는 기분이었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견딜 만했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을 겪고, 상상도 못 했던 사건을 지났으며, 예상치 못한 인물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렇게 묵묵히 걸어 나갔지만, 좀처럼 맞는 이정표를 찾을 수 없어 앞으로 제대로 나아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계속 함께 걸었다.
그리고 지금, 낙인을 지워버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비록 크라이어의 쇄골에 박힌 낙인은 슈가의 것과는 달리 흐려졌다고 말하기 힘들었지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낙인이 지워지면 고대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하나, 그렇지 못한대도 괜찮았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서 마침내 또 다른 길을 찾을 테니까.
이젠 든든한 아군까지 생기지 않았나.
‘알려주십시오.’
‘쓰게 해주세요!’
‘도움이 되고 싶어요.’
차례로 지나는 얼굴에 작게 미소 짓던 올리비아는 한 사람을 더 떠올렸다.
자신을 고뇌로 밀어 넣은 이야기의 당사자인 케슬란.
‘더 이상한 점은 없냐고 물으신다면, 그…… 제 기억에 공백이 생깁니다. 노르덴국의 외교관과 만난 후에만.’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데도 오로지 자기 감과 충심으로 그레타에게서 느낀 끔찍한 위화감을 보고하러 왔었다.
그러고 보니 그레타에게 붙일 감시 겸 호위라 꽤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기사였지.
‘곧 부단장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눈썰미가 좋은 녀석이고요.’
그를 추천했던 단장의 말은 백번 옳았다.
케슬란을 일부러 불렀던 자리에서 크라이어는 딱 잘라 쓸모없다고 평했었지만.
티슨이라는 꼬리를 잡아낸 것으로 미루어보아 과연 관찰력이 좋고, 황녀에게 직통으로 그 사실을 보고하러 올만큼 의지가 있는 기사다.
그가 겪는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모르긴 몰라도 그레타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중일 터.
낙인이 주는 고통과 희미해지는 이유. 또 다른 낙인자의 등장. 노르덴국의 제단. 그레타가 한 일이라고 예상되는 기억의 공백까지.
허공에서 부유하는 온갖 정보들을 응시하던 올리비아가 입술을 뗐다.
“공놀이를 해야겠어.”
***
얼마간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지만, 올리비아는 결코 평화롭다고 말 할 수 없었다.
마치 태풍의 핵처럼 조용한 중심에서 주변에서 몰아치는 것이 언제 대륙을 멸망시킬지 가늠하며 골머리를 썩히는 기분이었을 뿐.
심지어 오늘 보려고 했던 슈가도 입궁하지 못했다.
‘열이 펄펄 끓고 정신을 차리지를 못해서……. 가문의 주치의는 긴장이 확 풀려서 그렇다고 했어요.’
울상이 된 앙브흐가 훌쩍거리며 전한 말에 그녀와 함께 타렌저로 가려 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부름에 올리비아는 일단 비틀거리는 앙브흐에 아이작을 붙이고, 자신의 궁의까지 딸려 보낸 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혼자 끙끙거리던 낙인에 대한 것을 전부 풀어버린 탓이고, 원래 앓던 지병도 없으니 위험할 일은 없을 터.
“크라이어도 보낼 걸 그랬나.”
지금쯤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늘 넘겨야 할 서류를 대신 처리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던 올리비아가 위압감 넘치는 거대한 문 앞에 멈췄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겠어.
이윽고 황녀의 집무실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서류의 양은 1.5배쯤 되는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결심만큼 빠르게 돌아가지 못했다.
“실종자 말씀입니까?”
“그래.”
황제는 피로한 눈가를 누르며 두툼한 서류 뭉치를 건넸다.
두께만큼 무거운 서류 뭉치를 받은 올리비아가 빠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훑은 후 헛웃음을 뱉었다.
“전의 실종자들과는 양상이 전혀 다르군요.”
“그래 그때는 망둥이 같은 놈이 하나 설치는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어지간히 큰 마을 규모의 사람이 소리 소문도 없이 증발했죠. 조사 결과도 신통치 않네요.”
미간을 좁힌 올리비아는 실종자들의 행적과 그 이후의 추적이 기록된 서류를 재차 살폈다.
한 가족 전체가 야반도주라도 한 듯이 사라진 예도 있었고, 일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가장, 친구끼리 어울려 산을 타고 놀던 아이들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
“추적하기 힘들만 하네요. 연관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실종되다니.”
수도를 중심으로 가까운 영지 여러 곳에서 일어난 실종이다.
여느 때였다면 자주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아주 드물지도 않은, 그냥 그런 사건으로 취급되어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만약 황궁이 이런 사건에 직접 촉각을 세우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황제의 엄명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인 몇몇 가문 덕에 수상한 점을 빨리 눈치챘기에 망정이지.
제국 내에서 이 정도 되는 인원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다.
이 정도 규모의 헛짓거리를 벌이려면 어지간히 큰 힘이 필요하겠지.
단순히 물리적인 힘뿐만이 아니라 그 힘을 부릴 수 있는 재력, 일을 무마하고 추적할 수 없게 흔적을 지울 수 있는 권력, 사람들의 입을 통제 할 수 있는 장악력까지.
현재 제국에서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서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이라면.
굳이 머리를 쥐어 짜내거나 목록을 뽑아 조건에 맞게 지워야 할 필요도 없었다.
보니타 하인데르 후작.
올리비아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지난번 보니타와 마주 앉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고대신의 추종자라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올바른 신을 찾았다고 했던가.
아마도 올리비아가 알아듣지 못 하리라 예상하고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보니타의 예측은 과거에는 맞았지만, 현재는 틀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귀 전에는 보니타가 올리비아의 코앞에서 고함을 지르며 신을 찾는다 해도 그 신이 빌어먹을 고대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올리비아는 곧 보니타와 노르덴국의 제단, 대규모 실종을 바르게 엮어내며 거친 욕을 씹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