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 네 생각을 할 때마다. (114/146)


#114. 네 생각을 할 때마다.
2023.04.27.



 


“내 기분이 더러워서 그래.”

낙인이라니. 이미 폐지된 지 오래되어 역사 속 뒤안길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노예를 쇠사슬 대신 구속하는 용도에나 쓰인 것이지 않나.

대륙을 정화한답시고 사람을 전부 죽여 없애야 한다는 취향을 가진 빌어먹을 고대신 다운 악취미였다.


“아무튼 그 호위라는 놈도 몸에 낙인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 슈가에게 입궁하라고 언질은 줬어.”

입을 다문 올리비아의 표정이 전보다 한결 밝았다.

머릿속에서만 날카로운 자갈처럼 굴러다니던 것들을 입 밖으로 나열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까보다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가 재잘거렸다.


“결국 그 여자가 제국으로 와서 부릴 만한 사람까지 끌어들였다는 말은 노르덴국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는 말이네.”

잠시 말을 멈춘 올리비아는 장난꾸러기처럼 입매를 말아 올렸다.


“물론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보고 싶은 나머지 냉큼 쫓아왔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농을 치고 나니 농담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레타는 대륙 전체를 불태운 뒤 크라이어와 오직 단둘이서 남아 있기 위해 제 아비까지 죽인 인간이다.


“계……획이랄 게 없이 움직이는 여자지만, 설마 정말로 다짜고짜 제국으로 온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크라이어는 딱히 아니라는 부정의 답을 주지 않았다.

그에 올리비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이작을 보내야겠어. 전에 들었던 그 지하의 제단인지 뭔지가 완성됐는지, 완성됐으면 뭘 위한 것인지 알아봐야지.”

기실 굳이 샅샅이 조사하지 않아도 ‘신을 위한 제단’이라면 으레 뭘 할지 충분히 예측할 수는 있다.

심지어 그 고대신을 위한 것이라면, 보나 마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짓을 벌일 테지.

그럴 리 없을 텐데, 전쟁터에서 너무나도 많이 흘러 익숙해져 버린 피 냄새가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제가 기대고 있는 존재가 그 전쟁의 시작이자 끝, 정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혀 위에서 굴러다니던 피비린내가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는 제 심장박동과 똑같은 리듬으로 쿵쿵거리는 크라이어의 고동이 차지했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그 소리에 집중하던 올리비아가 짧게 웃었다.

미친 사람의 생각을 정상인 사람이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고 싶지도 않고.

상대가 평범하게 타국의 왕실 혹은 기어오르려는 귀족이었다면 어떻게든 상대의 수를 읽으려고 머리를 짜냈으리라.

무슨 짓을 할지 알아야 대책을 세우거나 수습 계획을 짤 수 있으니까.

하지만 크라이어의 말이나 이제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그레타에게 구체적인 계획 따윈 없어 보였다.

하긴…… 고대신에게 받은 건지 뭔지 모를 기기묘묘한 마법이나 크라이어라는 패를 쥐고 있으면 계획이 딱히 필요하진 않았겠지.

그레타보다는 오히려 하인데르 후작, 보니타 하인데르를 주시하는 편이 낫다.

그쪽은 그나마 생각이라는 걸 하고 움직일 테니.

그나마도 보니타가 고대신에 붙었다는 사실을 꼭꼭 숨겼다면, 계속 의심하고 확인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겠지만.


‘…… 올바른 신을…….’

자기 입으로 고대신을 떠받들고 있다며 대놓고 밝혔으니 그 과정도 자동으로 생략할 수 있었다.


“생각난 김에 아이작을 좀 봐야겠어. 지금 어디 있을까?”

“타렌 저택에 간다고 했으니 곧 돌아올 거다. 지금쯤이겠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라이어의 눈썹이 하늘로 비죽 솟았다.


“왔다.”

“뭐?”

올리비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림과 동시에 집무실 한쪽을 이루는 서류의 산 뒤쪽에서 여우 눈이 불쑥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올리비아는 ‘불쑥’ 나타났다고 느꼈지만, 크라이어는 아이작의 기척을 알아챈 지 오래였다.


“아이작? 언제 온 거야?”

그가 정상적으로 문을 노크해서 들어오기는커녕 창문도 이용하는 법 없이 그림자에서 별안간 솟아나는 일 자체는 익숙했지만, 이런 식으로 부르기도 전에 제 발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이작은 거창한 인사 없이 허리만 꾸벅 숙였고, 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올리비아의 눈에 제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는 두꺼운 팔이 들어왔다.

그랬다. 올리비아는 여전히 크라이어와 그야말로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녀는 당황했다.

둘만 있을 때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이 아니잖아? 발을 다쳤을 때 어딘가로 이동하려고 필요해서 안긴 것도 아니고 그냥 그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심지어 침실도 아니고 집무실에서…….

올리비아는 아이작에게 두고 있던 시선을 크라이어에게로 옮겼지만, 그는 평온하기만 했다.

왜 편한 거야? 왜 당혹스러움의 ‘당’ 자도 안 보여?

당신이 그런 얼굴이면 이러고 있는 게 일상 같아 보이잖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밀어 넣은 올리비아가 다시 아이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라이어를 모시겠다고 맹세해서 그런 건지 아이작도 그 못지않게 덤덤하기만 했다.

올리비아는 이제 혼란스러워졌다.

아이작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을 텐데? 아니, 있었나?

아니지, 아니지. 있거나 없거나 지금 이 상태로 보고를 받는 건 아니지!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에게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그에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크라이어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크라이어의 발치부터 공기가 술렁대자 아이작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는 나타났을 때와 변함없이 아무것도 못 봤다는, 보면서도 안 보인다는 표정으로 빠르게 본론부터 던졌다.


“슈가의 낙인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올리비아가 버둥거리던 걸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슈가의 낙인이라면 크라이어의 것과 같은 고대신의 문양이 아닌가.

그런 낙인이 희미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드린 말씀 그대롭니다. 낙인의 모서리가 중앙 부분보다 확연히 희미해졌습니다.”

아이작은 타렌저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과장이나 축소하지 않고 전했다.


“가족과 행복이라…… 슈가답다고 해야 할지.”

말을 하면서도 부지불식간에 크라이어에게 눈길을 준 올리비아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낙인이 아프다고 했잖아.”

“그래.”

“희미해진 거 같아?”

“글쎄.”

생각이 앞서 그의 옷을 쇄골 부근까지 끌어내리려던 올리비아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만약 그녀가 다짜고짜 크라이어의 낙인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아이작은 모르쇠로 일관했을 것이다.

아니, 다음에 튀어나온 그녀의 질문을 들은 아이작은 차라리 어색하게 거두어진 올리비아의 손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를 바랐다.


“그러면 당신은 언제 아픈 거야? 끊임없이 아픈 건 아니라고 했잖아?”

올리비아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질문이었으리라.

슈가의 이야기에 포함된, 낙인이 희미해지는 아주 중요한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시기가 적절치 않다. 아니, 듣는 사람이 적절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뭔가 결정적인 말을 강제로 듣는 처지가 된 아이작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그런 건 제발 둘만 계실 때 물으시면 안 되는 겁니까.

결코 그 말을 토해내지 못하는 아이작은 이 자리를 당장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크라이어의 칼날 같은 시선이 아이작을 훑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봐도 뭔가! 아주! 둘만의! 둘만에 의한! 둘만을 위한! 이야기가 오갈 분위기지 않은가.

보고해야 할 건 다 했고, 필요하면 부르실 테니 이 자리에 자신이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빠른 결정을 더 빠르게 행동으로 옮긴 그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충분히 멀어진 아이작의 기척을 가늠한 크라이어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 늘 불에 지지는 아픔이 느껴지진 않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의 눈에 크라이어를 향한 걱정과 고대신을 향한 분노가 뒤섞여 아른거렸다.

푸른 눈동자에서 여느 불보다 뜨거운 불꽃이 피어나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서, 크라이어는 쇄골의 낙인에서 격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했다.

어쩌면 슈가보다 그가 먼저 고통의 원인을 알아차렸으리라.

낙인이 마치 발작하듯 독처럼 온몸에 고통을 퍼뜨릴 때마다 아픔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지만, 그 연원은 멈추지 않고 찾았으니까.

그리고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불로 지져대는 낙인의 통증이 올리비아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얽히지 않았다면, 크라이어는 낙인이 발악을 하건 말건 관심 부스러기도 주지 않았을 터.

아니, 애초에 올리비아가 아니었다면 낙인의 고통 따위가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크라이어에게 올리비아는 유일했으니까.

아이작의 입을 통한 슈가의 말을 떠올린 크라이어는 비소를 머금었다.


‘행복이나 기쁨을 느끼면 안 된다는 것처럼. 그럴 때만 낙인이 아파요…….’

추측치고는 아주 정확하지 않은가.

그 빌어먹을 고대신이라면 충분히 그런 장난질을 쳐 놓을 만하지.

그의 애매한 답에 올리비아는 애가 탔다.

그래서 아프다는 거야 아니라는…….

조금 전 아이작이 있으니 크라이어의 옷을 함부로 젖힐 수 없다고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도 올리비아가 손을 움찔거리는 순간.

나지막한 진심이 툭 떨어졌다.


“하지만 아파도 상관없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 불구덩이에 처박혀도, 피바다에서 기어 다녀야 한대도 기꺼이 그리할 테니까.”

올리비아의 머리끝을 잡아 입을 맞춘 크라이어가 비스듬히 웃었다.


 


“내가 언제 아프냐고 물었지.”

붉은 머리카락을 꼬던 손이 그녀의 턱선을 느긋하게 타고 올라와 동그란 귓불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네 생각을 할 때마다.”

올리비아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노골적인 단어는 단 한마디도 없는 그의 답이 지독하게 노골적이었으니까.


“그…….”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올리비아의 숨을 가볍게 훔친 크라이어가 입술을 맞댄 그대로 덧붙였다.


“눈에 담을 때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향을 쫓을 때마다, 나를 부를 때마다 그리고 입을 맞출…….”

“그, 그만! 알았어. 충분히 알았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목을 뒤로 크게 빼며 양손으로 크라이어의 입을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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